책으로 보는 눈 153 : 사람을 쓰는 책


 아이들하고 책을 읽습니다. 집에서는 어린 딸아이하고 책을 읽고, 집 바깥으로 나오면 멧골학교 아이들하고 책을 읽습니다. 우리 살림집 위쪽으로 멧길을 따라 올라가면 멧기슭에 이오덕학교가 있고, 이곳에서 어린이랑 푸름이하고 책을 읽습니다.

 아이들하고 읽는 책은 어른인 제가 고릅니다. 어른인 제가 아이들하고 읽는 책을 고른다고는 하지만, 저 스스로 읽으며 참으로 좋다고 느낀 책이기에 아이들하고 함께 읽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저부터 찬찬히 읽으면서 마음이 넉넉해지거나 따스해진다고 느끼는 책을 아이들하고 함께 읽습니다.

 아이들 나이를 헤아리니, 아이들은 저보다 서른 살쯤 어립니다. 나이가 조금 많은 푸름이는 저보다 스물세 살쯤 어립니다. 스물세 해 앞서나 서른 해 앞서를 돌아봅니다. 그무렵 나한테 책을 읽어 준 어른이 있었나 궁금합니다. 아주 없지는 않으나 아주 드물었습니다. 어린 나한테 책을 읽어 주려는 여느 어른이나 학교 교사는 몹시 드물었습니다. 아니, 나한테뿐 아니라 내 동무한테도 책을 읽어 주는 어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어른들이 우리한테 하는 일이라고는 교과서와 참고서와 자습서와 문제집을 던지는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교과서부터 문제집까지 우리 머리에 쑤셔박습니다. 때때로 처넣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서울에 있으며 손꼽힌다는 대학교에 우리들을 더 몰아넣어야 학교이름이 한결 빛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몽둥이를 옆에 끼든 주먹이나 손바닥이나 군화발로 우리를 꾸욱꾸욱 누르든 하면서 시험성적 잘 나오는 시험기계로 우리들을 길들였습니다. 이러니, 책 읽어 주는 어른은 없었어요.

 그런데, 멧골학교 아이들한테 《얘들아 내 얘기를》(새벗,1986)이라는 이원수 님 수필책을 한 꼭지씩 읽히다 보니, 이 책에 실린 이야기를 내 국민학생 때 곧잘 들었다고 떠오릅니다. 어느 분인지 떠오르지 않으나, 공부 때에 우리가 졸립다 하거나 힘들어 하면 으레 이 책에 실린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무렵에는 《얘들아 내 얘기를》에 실린 이야기인 줄 몰랐고,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글을 어린이를 가르치는 어른이 맑으면서 힘찬 목소리로 들려줄 때에 졸음이 싹 가셨습니다. 그래서 멧골학교 어린이한테 이원수 님 동화도 함께 읽힙니다. 요사이에는 《골목대장》(한겨레아이들,2002)을 조금씩 읽힙니다. 어제 함께 읽은 동화에는 “아! 자유를 좋아할 줄 알고 독립을 좋아할 줄 아는 우리 앵문조는 훌륭한 새가 아닙니까? 갇힌 몸으로 아무리 잘 먹고 지낸들 그게 행복한 생활은 아니겠지요(96쪽)!”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1961년에 일제강점기를 되새기며 쓴 동화를 2011년을 살아가는 어린이가 깊이 받아들이리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어린이들이 마음밭에 ‘착한 꿈을 키우고픈 어른이 뿌린 사랑씨’ 하나를 심을 수 있으면, 차츰차츰 자라며 나중에 알차며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으리라 믿어요. 책은 한 사람이 참말 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북돋우고자 한 사람이 기쁘게(또는 슬프게) 살아온 땀방울을 담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4344.3.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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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하고 책읽기


 아침마다 밥을 해서 차리고, 밥을 먹인 뒤 치우며, 밥그릇을 설거지한 다음, 비로소 한숨을 돌리면 어느덧 한낮입니다. 하루란 참 빨리도 흐르는군요. 이렇게 흐르는 나날이 쌓이거나 모이면서 아이하고 함께 살아온 지 세 해가 꽉 차는 올해입니다. 올해에는 첫째 아이에 이어 둘째 아이가 태어납니다. 둘째가 태어나 두 아이와 한 어른한테 밥을 먹이는 살림을 꾸리자면, 아마 겨우 기지개를 켤 만큼 숨돌릴 때란 한낮이 아닌 저녁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기지개를 켤 말미란 한 차례도 없을는지 몰라요.

 두 아이를 보듬는 동안 글조각을 만질 틈이란 하나도 없을는지 모릅니다. 아마, 글조각은커녕 책줄 하나 읽지 못할 수 있겠지요.

 예부터 어르신들은 젊은이한테 말씀했습니다. ‘젊은이들아(또는 아이들아), 눈이 밝을 때에 책을 읽어라.’

 나는 생각합니다. ‘아아아, 아이가 잠들었을 때에 두 눈 부릅뜨고 한 줄이라도 읽어라. 아이가 아직 하나일 때에 두 줄쯤은 읽어라. 아이가 아직 없으면 석 줄은 읽어라. 짝꿍하고 살아가는 살림집이 아니라면 넉 줄은 읽어라. 홀로 바지런히 배우는 나날이라면 백만 줄은 읽어라.’ (4344.3.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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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 친일 작품 2 



 덴마크에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님이 있습니다. 스웨덴에는 아스트리드 안나 에밀리아 린드그렌 님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이원수 님이 있습니다. 이원수 님은 1911년 11월 17일에 태어나서 1981년 1월 24일에 숨을 거둡니다. 숨을 거두기로는 1981년이지만 1970년대 끝무렵부터 몸져누워 손을 쓸 수 없었고, 손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더는 동화이든 동시이든 쓰지 못했습니다. 곁에서 보살펴 주는 당신 딸아이한테 겨우겨우 더듬더듬 하는 말소리를 귀를 대고 읊으면서 몇 자락 옮겨 적도록 해 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입으로 쓴’ 마지막 시(동시)가 〈겨울 물오리〉입니다. 아마, 어른 가운데에는 동시나 동화이기 때문에 이원수 님 문학을 가까이하지 않는 터라 〈겨울 물오리〉이든 〈염소〉이든 욀 줄 아는 분이 없겠지요.


.. 엄매애 / 엄매애 / 염소가 웁니다. // 울 밖을 내다보고 / 염소가 웁니다. // “이 문 좀 열어 줘. / 이 문 좀 열어 줘.” // 발돋움질해 봐도 아니 되어 / 뿔로 탁탁 받아 봐도 아니 되어 / 울 안에서 염소는 / 파래진 언덕 보고 / 매애 웁니다. / 잔디밭에 가고 싶어 매애 웁니다. // 민들레도 피었네. / 오랑캐꽃도 피었네. / 보리밭 언덕 너머엔 / 살구꽃도 피었네. // 염소는 애가 타서 / 발돋움질 또 하네. // “염소야, / 염소야. / 봄이 와도 너는 / 놀러도 못 가니?” ..  (1940년, 염소)

.. 얼음 어는 강물이 / 춥지도 않니? / 동동동 떠다니는 / 물오리들아 / 얼음장 위에서도 / 맨발로 노는 / 아장아장 물오리 / 귀여운 새야 / 나도 이젠 찬바람 / 무섭지 않다 / 오리들아, 이 강에서 / 같이 살자 ..  (1980년, 겨울 물오리)



 안데르센 님이나 린드그렌 님이나 이원수 님이나 문학하는 마음은 처음과 끝이 같습니다. 처음과 끝이 다른 문학을 했다면 이분들이 사랑받을 까닭이 없습니다. 처음과 끝이 한결같도록 어린이사랑과 사람사랑과 삶사랑을 이었기에, 이분들은 두루 사랑받을 만합니다.

 이원수 님을 놓고 지난 2002년 즈음부터 ‘친일시 발굴’이라고 하면서 퍽 떠들썩하게 이야기할 뿐 아니라, 이원수 님이 태어난 지 100돌을 맞이한 올해에도 이원수 님을 기리는 잔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합니다. 관청에서는 이원수 님이 훌륭한 길을 걸었든 가난한 길을 걸었든 여태제껏 제대로 돕거나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이제 와서 관청(창원시)에서 어설피 이원수 님을 기리려 하는 일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기리려 했으면 1981년에 숨을 거둘 때부터, 아니 숨을 거두기 앞서부터 기려야 했겠지요. 서른 해나 지나고서야 기린다고 법석을 떤다면 조금도 좋은 모양새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원수 님이 멍에처럼 짊어지며 살았던 생채기와 아픔이 무엇인가를 살피지 않으면서 기리기만 할 때에는 몹시 슬픕니다. 그리고, 이원수 님 이름 앞에 ‘친일 아동문학가’라는 딱지를 함부로 붙이는 사람들도 참 안타깝습니다. 이원수 님은 어린이문학을 한 사람이지 ‘친일 아동문학가’가 아닙니다. 이원수 어린이문학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사랑받았는가를 느끼거나 헤아리지 못하니까 그저 이런 딱지붙이기를 하고 마는구나 싶습니다.


.. 깎아지른 돌산 / 삐죽삐죽 내민 바윗돌 모서리 / 반이나 떨어져 나가 / 허연 뼈 살이 바람에 시린 // ― 돌산. / 그 위에 / 오밀조밀 판자집 동네. / 동네 아이들 노는 곳에 / 바로 낭떠러지, / 아, 무서운 벼랑. // 아래에선 오늘도 / 우르릉 광…… / 우르릉 우르릉 …… / 다이너마이트가 산을 깬다. // 화려한 동네를 눈 아래 두고 /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는 / 돌산 동네의 아이들은 // 폭음을 배 속에 들이마시며 / 벼랑 위에 자라는 독수리들이다. / 날개가 어려서 아직은 / 부리로 논다 ..  (1967년, 산동네 아이들)

.. 해가 지면 성둑에 / 부르는 소리. / 놀러 나간 아이들 / 부르는 소리. // 해가 지면 들판에 / 부르는 소리. // 들에 나간 송아지 / 부르는 소리. // 박꽃 핀 돌담 밑에 / 아기를 업고 / 고향 생각, 집 생각 / 어머니 생각―. // 부르는 소리마다 / 그립습니다. / 귀에 재앵 들리는 / 어머니 소리 ..  (1946년, 부르는 소리)



 이원수 님이 1961년에 쓴 동화 〈앵문조〉를 읽으면, “어머니, 자유는 귀중한 거라고 우리 선생님도 그러셨는데, 식민지에서 남의 나라 지배만 받고 사는 민족은 참 불쌍하지 않아요? 왜 그런 지배를 받고 견디는지 모르겠어요.” 하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원수 님도 친일시를 썼습니다. 기록으로 남았고, 2002년에 앞서 벌써 알려진 일입니다. 그러나 2002년 앞서에는 이원수 님이 쓴 친일시를 놓고 죽은 이 무덤을 파헤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원수 님이 이룬 어린이문학이란 ‘바로 이 친일시 때문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일제강점기에 친일시를 쓴 뒤로 해방 뒤부터 독재정권을 거쳐 민주운동 불길이 치솟을 때까지도 권력 그늘에서 맴돌았습니다. 아니, 친일시를 쓴 이들치고 해방을 거쳐 독재정권을 지나 민주운동을 하는 흐름에 걸쳐 참다운 독립과 자주와 평화와 민주를 바라는 일을 한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원수 님은 친일시를 썼으나, 일제강점기에 펼친 어린이문학을 비롯해 해방 뒤부터 독재정권으로 어둡던 때까지 늘 옳고 바르며 착하고 참다운 어린이랑 가난한 사람 자리에 서서 살아왔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이원수 님이 스스로 ‘내가 잘못했다’고 뉘우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고. 스스로 이렇게 말한 적이 없으니 이원수 님은 그야말로 잘못했다고.

 그래요, 이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이원수 님은 당신 입을 빌어 ‘나는 일제강점기에 친일시를 썼습니다. 이 일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뉘우칩니다.’ 하고 밝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 밝힌 적이 없기 때문에 이원수 님이 잘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글로 밝혀야 한달 수 있겠지요. 그런데,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글로 밝히는 뉘우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원수 님은 사상가나 이론가나 혁명가나 철학가나 교육가나 기자나 지식인이 아닙니다. 이원수 님은 어린이문학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원수 님은 어린이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린이한테 언제나 뉘우쳤습니다. 당신이 몹시 가난하고 힘들게 어렵사리 살림을 꾸리던 일제강점기 막바지에 당신 집식구를 먹여살리면서 친일시를 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친일시를 쓴다 해서 당신 살림이 나아졌다거나 당신 이름이 드높아졌다거나 한 적이 없습니다. 친일시를 쓰라고 떠밀려서 친일시를 썼지만, 막상 밥그릇이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부끄럽게 쓴 시가 더 부끄러워질 노릇이지요. 당신 몸을 팔아 쌀자루나마 얻으려 했는데, 몸만 팔고 쌀자루는 얻지 못했으니까요. 몸 팔린 채 버려지고 말았으니까요.

 아마 이원수 님이 병으로 1981년에 숨을 거두지 않고 조금 더 오래 살아남아 1990년대를 살거나 2000년대까지 살 수 있었다면 ‘사람들이 바라는 뉘우침글’이 나왔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도 해방 뒤에도 늘 빠듯한 살림으로 살아가며 어린이문학을 하던 사람한테 ‘다른 글’을 바랄 수 없습니다. 아니, 다른 글을 바라기 앞서 이원수 님이 쓴 글이 어떤 글인가를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어린이들한테 씩씩하고 꿋꿋하며 참답고 착하게 살아가라고 북돋우는 글을 어떻게 썼는지 읽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아무리 가난하거나 힘들거나 슬프더라도 기운을 잃지 말라며 쓴 문학에 어떠한 눈물이 깃들었는지 읽어야 합니다.

 가난한 나머지, 굶는 아이들을 소리없이 울면서 바라보아야 하는 나머지, 집안을 이끌 아버지로서 어찌할 바 모르며 헤매던 나머지, 글을 팔고야 마는데, 글을 팔고 난 뒤에도 똑같이 힘겨운 살림이었기에 생채기와 아픔을 더 속으로 파묻을 수밖에 없이 외로이 살면서 어느 권력하고도 가까이하지 않고, 어느 명예하고도 사귀지 않으면서 견딘 가녀린 목숨줄을 읽어야 합니다.

 이원수 님은 숨을 거두기 앞서 비로소 “나도 이젠 찬바람 무섭지 않다” 하고 노래했습니다. 찬바람이 무섭지 않다고 겨우 한 마디를 뱉고 나서는 더는 아무런 말마디를 뱉을 수 없었습니다. 뱉고 싶어도 몸이 따라 주지 못했으니까요.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고 한 마디를 겨우 이었습니다. “얼음 어는 강물”에서 “춥지도 않”은지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을 떠올리면서,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를 생각하면서, 아 그렇구나 그래 참 그렇지, 나는 밥굶기가 무서워 친일시를 쓰고 말았지만 내 삶에 이렇게 슬픈 얼룩이 지고 말았지만, 나처럼 또는 나보다 더 굶주리던 사람들은 이 춥고 매서운 날에도 얼음과 찬바람에 지지 않고 씩씩하면서 예쁘게 살았구나 하고 느끼며 “귀여운 새야” 하고 노래했습니다.

 어떤 이는 ‘참회록’을 쓰겠지요. 어떤 이는 ‘반성문’을 쓰겠지요. 그리고 이원수 님은 어린이문학을 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겨울 물오리’를 노래했습니다. 다른 사상가나 철학가나 교육가나 혁명가나 운동가나 기자나 지식인들은 ‘참회록’이나 ‘반성문’ 같은 틀(형식)을 바라겠으나, 이원수 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늘 어린이 자리에서 어린이 꿈과 삶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어린이 목소리와 노래 결에 따라 ‘겨울 물오리’를 노래했습니다. 어린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깨끗한 말글로 가장 쉬우면서 맑은 동시와 동화와 수필을 써서 아이들한테 남겼습니다.

 나는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을 읽을 때마다 가슴으로뿐 아니라 볼따구니를 타고도 눈물이 흐릅니다. 이원수 님이 쓴 모든 글마다 당신 지난날을 가슴아프게 뉘우치는 말마디가 깊디깊이 아로새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이렇게 꾸준하게, 이렇게 거듭거듭 뉘우치면서 슬퍼한 사람은 이 나라 한국에 아무도 없습니다. 1911년부터 1945년까지 서른다섯 해, 1946년부터 1981년까지 서른여섯 해를 산 이원수 님은, 당신 앞삶 반토막을 되씹으며 당신 뒷삶 반토막을 한길로 걸었습니다.

 이원수 님은 기념관이라든지 문학관 따위에 당신 글과 넋과 꿈이 깃들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글과 넋과 꿈은 오로지 어린이 가슴에 살포시 깃들 수 있으면 고맙겠다고 여겼습니다. 막상 이원수 님이 바라거나 꿈꾸지도 않은 기념관을 놓고 툭탁툭탁 싸우는 어른들이 슬픕니다. ‘친일 아동문학가’라는 딱지붙이기하고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이라는 허울좋은 껍데기를 집어치우고,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읽으며 어린이마음을 예쁘게 보살피면 좋겠습니다. 둘 다 틀렸습니다. (4344.3.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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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s (Hardcover)
Steve McCurry / Phaidon Inc Ltd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사진은 따로 없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1] 스티브 맥커리(Steve McCurry), 《Portrait》(Phaidon,1999)



 사진을 잘 찍는다 할 만한 사진쟁이는 따로 없습니다. 사진을 못 찍는다 할 만한 사진쟁이 또한 따로 없습니다. 사진쟁이는 저마다 다 다르게 사진을 찍기 때문에, 누가 더 잘 찍거나 누가 더 못 찍는다 이야기하거나 가르지 못합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대로 찍는 사진이기 때문에 ‘이 사진이 참 좋다’고 한다면, 나로서는 ‘이 사진쟁이가 살아가는 결이 참 좋다’고 느낀 셈입니다. ‘이 사진은 그닥 좋지 않다’고 느끼면, 나로서는 ‘이 사진쟁이가 나아가는 삶이 그닥 좋지 않다’고 느낀 셈이에요.

 사진쟁이는 누구나 사진쟁이 나름대로 선 자리에 알맞게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즐김이는 누구나 사진즐김이 나름대로 선 자리에 걸맞게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사진을 읽는 사람이든, 서로서로 선 자리에 따라 사진을 마주합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제 삶자리를 고이 맞아들이면서 사진을 껴안습니다.

 책을 읽든 일을 하든 말을 하든 글을 쓰든 똑같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만큼 책을 읽거나 일을 하거나 말을 하거나 글을 씁니다. 아는 만큼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사는 만큼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아는 만큼 일을 하지 않고, 내가 살아가는 만큼 일을 해요. 아는 만큼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 않아요. 이제껏 살아온 만큼 말을 하거나 글을 씁니다.

 살아가는 눈이 사진하는 눈입니다. 살아가는 손길이 사진하는 손길입니다. 온누리를 따숩게 껴안고픈 꿈으로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온누리를 따숩게 껴안고픈 꿈이 사진으로 녹아듭니다. 다만, 사진길을 걸은 지 아직 얼마 안 된 이라면, 온누리를 따숩게 껴안고픈 꿈이 사진으로 깊이 녹아들지는 못합니다. 조금 어리숙하겠지요. 어느 모로 보면 좀 지나치거나 넘칠 수 있고, 때로는 모자라거나 엇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삶길에 따라 내 사진길인 만큼, 사진으로 담는 솜씨가 모자라더라도 사진을 이루는 넋은 처음이나 끝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살아가는 매무새 그대로 사진을 합니다. 살아가며 사람을 사귀는 매무새 그대로 사진을 하면서 사람을 만납니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뭇목숨이든 사진으로 예쁘게 담으려는 꿈을 품으면, 언제나 예쁘게 담습니다. 다만, 이때에도 처음에는 손재주는 좀 어설프겠지요. 차근차근 손재주를 가다듬으면서 내 사진을 빛냅니다.

 먼저 어떻게 살아가려 하는가 하고 내 삶을 단단히 뿌리내리지 않고서는 사진을 하지 못합니다. 먼저 내 삶을 어떻게 일구려 하는가 하고 내 다짐을 굳세게 다스리지 않고서는 사진뿐 아니라 자전거라든지 달리기라든지 살림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배움이라든지, 어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좋은 사진이 따로 없듯이 좋은 삶은 따로 없습니다. 좋은 사진이 따로 없는 만큼 좋은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좋은 사진을 생각할 수 없듯이 좋은 사랑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 돋보이는 사람을 찍었기 때문에 사진이 더 돋보일 까닭이 없습니다. 더 이름난 사람을 찍었으니까 사진이 더 이름날 까닭이 없습니다. 더 예쁘장한 사람을 찍었다 해서 더 예쁘장한 사진이 되지 않아요.

 사진은 그예 사진이고, 사람은 그예 사람이며, 사랑은 그예 사랑입니다.

 있는 그대로 사진을 맞아들이지 않는다면, 나한테든 남한테든 사진이란 사진이 아니라 껍데기이거나 겉치레에 그칩니다. 있는 그대로 사진을 가슴으로 삭여 내 삶 한 자락으로 살포시 녹일 때에 바야흐로 나한테든 남한테든 살가이 사진으로 젖어듭니다.

 스티브 맥커리(Steve McCurry) 님이 일군 사진책 《Portrait》(Phaidon,1999)를 들여다봅니다. 사진책 《Portrait》에 담긴 사람들 가운데 돋보인다거나 이름났다거나 한 사람도 틀림없이 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진책으로 담긴 사람들 바로 옆에 있었을 다른 사람을 사진으로 담았어도 《Portrait》는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누구를 찍었기에 《Portrait》가 되거나 누구를 못 찍거나 안 찍었대서 《Portrait》가 안 되지 않습니다.

 영어사전에서 ‘Portrait’를 찾아보면 ‘초상화’나 ‘인물 사진’이라고 풀이합니다. 아마 그림만 있던 지난날에는 ‘얼굴그림’을 ‘Portrait’라 했겠지요. 우리는 말뜻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 말이나 함부로 쓰며 살아가는데, ‘肖像畵’란 “초상 그림”이고, “초상 그림”에서 ‘肖像’이란 “얼굴을 그리는 일”입니다. 아득히 먼 옛날 이 나라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쉽거나 바른 한국말을 하기보다는 중국사람을 섬기며 중국말을 하거나 중국글을 쓰기를 즐겼습니다. 이러다 보니, 여느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肖像’ 같은 한자말을 중국에서 받아들였으며, 이 중국말은 아직까지 이 땅에서 버젓이 살아숨쉽니다. 이제 우리 한국사람은 중국사람 중국말이 아닌 한국사람 한국말을 해야 할 테니, ‘초상화’가 아닌 ‘얼굴그림’이라 말해야 하며, ‘인물 사진’ 또한 아닌 ‘얼굴사진’이라 일컬어야 제대로 쓰는 말이 됩니다.

 곧, 《Portrait》는 ‘얼굴사진’이란 소리입니다. 그러나, 사진책을 내놓을 때에 《얼굴사진》처럼 쓰는 사람은 없으니, 그냥 《얼굴》이라 하겠지요. 또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티브 맥커리 님은 영어로 ‘human’이라 하지 않고 ‘portrait’라 했습니다. ‘사람’이라 할 때에는 사람 모습이나 얼굴 모습뿐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나 ‘사람이 살아가는 터’까지 두루 담는 사진이요, ‘얼굴’이라 할 때에는 얼굴 모습이나 얼굴이 드러나는 사람 모습을 담는 사진이지,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이나 보금자리까지 넓게 살피는’ 사진이 아닙니다. 애써 ‘사람’으로 하지 않고 ‘얼굴’로 하더라도 ‘사람삶’을 담을 수 있다는 뜻으로 《Portrait》이고, 이에 걸맞게 온누리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사진을 책 하나로 도톰하게 엮습니다.

 《Portrait》에 담긴 얼굴사진을 살피면, 어린이 얼굴사진이 어른 얼굴사진보다 조금 많고, 계집아이 얼굴사진이 사내아이 얼굴사진보다 살짝 많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와 버마 사진이 거의 모두를 차지합니다. 사이사이 티벳과 미국 사진이 깃듭니다. 니제르나 말리나 인도네시아나 유고슬라비아나 네팔 사진도 드문드문 섞입니다.

 사진을 찍는 스티브 맥커리 님을 가만히 바라보는 눈빛이든, 사진쟁이가 사진을 찍는 줄 모르는 사이 찍힌 사람들 눈빛이든, 이 나라 사람들 눈빛이든 저 나라 사람들 눈빛이든, 《Portrait》에 얼굴이 실린 사람들 눈빛은 무척 말갛습니다. 미국사람이라서 게슴츠레하지 않습니다. 배고픈 어린이라서 뿌옇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서 슬프지 않습니다. 돈있는 사람이라서 기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삶 그대로 보여주는 눈빛입니다.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두 손을 곱게 모아 무슨 이야기를 소곤소곤 들려줍니다. 사진으로 찍히면서 이렇게 두 손을 곱게 모을 수 있구나 하고 새삼 깨닫습니다. 사진쟁이가 사진을 잘 찍었으니 이와 같은 모습을 얻기도 할 테지만,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 마음을 한껏 열어 ‘아무쪼록 사랑과 기쁨이 찾아드소서’ 하는 비손이 담기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여러 나라 여러 겨레 사람들을 이처럼 한 자리에 모아서 두루 돌아보면서 생각합니다. 몸피와 얼굴과 살결이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같은 겨레 사람일지라도 옷차림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이 물레를 잣고 베틀을 밟아 바느질을 하여 얻은 옷일지라도 두 사람이 입으면 두 가지 옷이 다릅니다. 얼핏 보면 똑같다 생각하겠으나, 다른 두 사람이 입은 옷인 만큼 다른 두 가지 옷입니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이지만, 두 사람 몸에 흐르는 기운과 넋이란 한동아리로 아름답습니다. 두 사람 모두 따순 피가 흐르며 따순 사랑이 감돕니다.

 흙땅을 맨발로 뒹굴든, 아스팔트바닥을 구두를 신으며 자가용을 모느라 밟을 일조차 없든, 두 사람 모두 몸에는 따순 피가 흐릅니다. 차가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더 거룩해 보이는 얼굴을 찾으려고 티벳이나 인도나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갈 까닭이 없습니다. 더 슬퍼 보이거나 가녀리다 싶은 얼굴을 찾으려고 미국이나 프랑스를 떠돌 까닭이 없습니다. 저마다 선 자리에서 돌보는 삶을 느끼면서 손을 잡을 수 있으면 됩니다. 누구나 제 나라 제 겨레 터전에 걸맞게 살아가는 결을 사랑할 수 있으면 됩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이기 때문에 글이나 그림이 이루지 못하는 이야기를 빚습니다. 글이나 그림으로는 온누리 여러 나라와 겨레 삶자락을 두루 찾아다니며 마주하는 동안 이렇게 숱한 빛깔 숱한 얼굴 이야기를 낳지 못합니다.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 다 다른 얼굴빛과 ‘얼굴에 서린 이야기’를 두루 느끼도록 돕습니다.

 좋은 사진은 따로 없습니다. 좋은 삶이라고 느끼며 즐거이 꾸리는 사람이 있다면, 좋은 사람으로서 좋은 삶이요, 이 좋은 사람 좋은 삶을 어깨동무하는 사진쟁이는 전문작가이든 다큐작가이든 풋내기이든 새내기이든 아무것 아닌 사람이라 하든, 사진기를 들 때에 누구나 다 다르게 좋은 사진을 얻습니다. (4344.3.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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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2.27. 

발을 들면서 "발 찍어 주세요." 한다. 흠... 

 

어린이가 잔뜩 나온 '타누마 타케요시' 사진책을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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