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해서 살다가 헤어지기로 한 뒤, 서울에서 살던 집을 아내한테 넘겨주면서 이 전세집을 얻느라 다른 사람한테 꾼 돈은 갚아야 하니, 그 빚만 갚게 해 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헤어진 아내는 그러마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전세집 소유권을 넘긴 다음에는 말을 바꾸어 빚갚이 할 때 들어가야 할 돈을 안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빚갚이 할 돈은 받지 못했고, 앞으로 그만한 돈을 다시 벌 수 없도록 살아가는 저인 만큼, 다른 사람들한테 손을 벌리며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향땅 인천으로 돌아가 도서관을 열 준비를 하는 요즈음, 돈 나갈 일이 없도록 몸을 움직이기는 하지만, 짐차를 부르는 일부터 해서 새로 들여야 할 책꽂이와 책걸상, 이밖에 자질구레하게 들어갈 여러 곳에 쓰일 돈을 생각하면, 아내와 헤어질 때 받기로 했던 그 빚갚이 돈이 새삼 떠오릅니다. 사람이 없이 살다 보니, 자꾸 어느 한쪽에 아쉬움이 남겠지요. 하지만, 빚갚이를 못하고 둘레사람들한테도 손 벌리지 못하는 형편이 되노라니, 주는 고마움과 받는 고마움을 새삼스레 돌이켜보게 됩니다. 또한 제 삶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이나 앞으로도 그랬듯이 제 두 주먹으로 헤쳐 나가야지, 어설피 옛생각에 매여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빚갚이를 했다면 어깨짐은 가벼워졌겠지만, 좀더 다부지게 세상과 맞설 수 없었으리라 느낍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털털이로 새로운 일감을 찾으려 하지 못했을 테지요. 무언가 가지고 있다면, 그처럼 가지고 있는 재산(또는 물건 또는 힘)으로 그동안 생각했던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 두 손에 아무것도 안 가지고 있다면, 모든 것을 새로 찾아야 하고 새로 생각하고 새로 몸을 놀려야 하고 새로 부대끼고 뛰어야 합니다. 저라고 하는 사람이 낡은 자리에 머물지 말고, 언제나 새로운 곳에서 움직이되, 고이지 않고 흐르는 물이 되라는 뜻에서 빚갚이를 못하게 운명이 지어졌겠구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4340.4.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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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05 10:14   좋아요 0 | URL
빚이라는 게 한번 사람 덜미를 잡기 시작하면, 어디가서 뭘해도 주눅이 들어서
사람 사는 모양새가 영 안나오더군요. 저도 한때 큰돈이라면 큰돈일수 있는 금액의 빚으로 한참을 고생했는데, 지나고 보니 어찌살았나 싶습니다.;;
지금 고생스러우신거 십분 이해한다면 오버가 되겠지만, 적으신 글가운데는 저와는 전혀다른 희망을 갖고 계신 분인듯 합니다. 모쪼록 조만간에 염려없이, 그 빚들이 잘 해결되길 소망해 봅니다. 좋은 봄날 맞으시길요. 생각하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 체셔고양2 드림.

숲노래 2007-04-06 13:36   좋아요 0 | URL
빚을 지며 고달파 본 사람들은, 서로를 더 잘 헤아려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
오버라니요~
채셔고양2님도 좋은 희망으로 즐겁게 살아가실 수 있기를 빕니다~
 
사람과 자연
김준호 지음 / 따님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사람과 자연
- 글쓴이 : 김준호
- 펴낸곳 : 따님(2001.5.20.)
- 책값 : 6800원


 익산에 사는 할머님 한 분이 보내준 된장과 간장으로 밥을 해먹습니다. 요 된장을 풀어서 끓이면 어떤 찌개든 맛깔스럽다고 느낍니다. 다른 간은 안 합니다. 된장만 반 숟가락 풀어서 국수를 삶거나 버섯찌개를 합니다. 김치나 감자나 빨간무나 호박 들을 두루 넣어 섞어찌개를 할 때도 있고요. 익산 할머님이 보내준 된장은 당신이 콩씨까지 하나하나 가려서 심고 풀약이나 비료를 하나도 안 쓰고 길러서 거둔 뒤, 손수 삶은 다음 메주를 띄워서 빚어내었습니다. 손수 띄워서 빚은 된장을 나날이 먹는 밥으로 먹어 보기는 스무 해 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열서너 살 나이 때까지는 집에서 어머니가 손수 된장과 간장과 고추장을 담그셨거든요. 문득, 그때는 그 된장과 간장과 고추장만으로도 밥 한 그릇 맛있게 먹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  우리는 국토 면적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기 때문에 자연을 개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지만, 국토 면적이 좁을수록, 또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더 자연보존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보존되어 온 자연마저 개발한다면 장차 이 땅에는 손바닥 만하게 보존된 자연마저도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 들어 자연보호와 자연보존을 혼동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자연보호만이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개발만 하려는 생각이 판을 치게 되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  〈145쪽〉


 오랜 술동무 하나가 힘겹게 몸앓이한 끝에 아들아이 하나를 낳았습니다. 저저번달에 돌잔치를 했고, 저번달에 그네가 사는 동네로 찾아가서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 집에서 손님 대접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라 그네 식구가 자주 찾는다는 오리고기집에 갔는데, 오리고기집은 서울 강서구 방화동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논 한복판에 있습니다. 오리고기를 얻어먹으며, ‘어떻게 논 한복판에 오리고기집을 차릴 생각을 다했을까?’ 싶었습니다. 김포공항 둘레에는 아직 논밭이 조금 남아 있는데, 이 논밭은 머지않아 모두 갈아엎고 높은 아파트를 올린다고 합니다.

 농사짓는 분들로서는 곡식 거두어 보았자 돈이 안 되고 빚만 되니까, 그 땅이나마 좋은(?) 값에 팔아 딴 데로 떠나거나 고기집 장사를 하는 편이 살림살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까요. 재개발업자는 공사 한 건 얻을 테니 돈방석에 앉을 테고, 시나 구에서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둘 수 있으니 공사업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힘껏 재개발에 나설 테지요. 논밭 둘레 높직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도, 자기네 아파트 옆에 논밭보다 높직한 아파트가 나란히 서 있어야 집값이 올라 돈을 번다고 생각하겠지요.


.. 큰 도시가 생기고 생활환경이 열악해짐에 따라 식물은 일방적으로 수난을 당하게 되고, 사람의 마음은 자꾸 황폐해지고 있다. 무엇이 사람과 식물을 이간질하는지 모르는 사이에 둘 사이가 멀어지기만 하는 것 같다. 옛날에는 숲이 바로 안식처였고 생활 터전이었다. 사람은 메마른 마음을 살찌우려고 정원을 만들고 공원을 꾸민다. 정원은 각 민족의 오랜 정서를 모은 자연의 축소판이다 ..  〈67쪽〉


 도시개발 하는 모습을 보면, 여태까지 고이 이어오던 산을 깎고 들을 뒤집어엎어 시멘트로 바른 뒤 아파트를 세웁니다. 그리고 나서 흙을 퍼 오고 나무를 사 오고 꽃을 심고 하며 ‘근린공원(‘근린공원’이란 “가까이 있는 공원”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아파트 재개발을 한 곳에 가까이 마련한 공원이란 소리입지요)’을 조그맣게 만듭니다. 처음부터 재개발을 할 때 숲과 산과 들판을 고이 지키면서 ‘사람 살 집’만 알맞춤하게 지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 때려부수거나 갈아엎은 뒤 돈으로 바릅니다. 그리하여, 뒷날 ‘이번에 새로 지은 아파트’가 낡았다고 여겨지는 스무 해나 서른 해쯤 뒤에는 아파트뿐 아니라 아파트 옆에 있던 근린공원마저도 똑같이 허물고 부수고 새 아파트를 올린 뒤 새 근린공원을 만듭니다.

 있는 것을 지키거나 가꾸기보다, 있는 것을 부수고 새로 만들어야 돈이 된다고 하는 요즘 세상이라서 이렇게 돌아갈까요. 그러면 그 돈이란 어디에서 나오고, 이 돈은 어디에 쓰일까요. 이 돈은 밑도 끝도 없이 샘솟기만 할까요. 돈은 샘솟아도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숨을 쉴 수 있는 곳, 물을 마실 수 있는 곳, 아늑하게 깃들 수 있는 곳이 다 파헤쳐지거나 무너진 뒤에는 어찌 될까요. 오늘은 4월 5일, 박정희 독재자가 세운 ‘나무심는날’입니다. (4340.4.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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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미터 산업도로와 재개발을 반대하며
 - 인천 배다리와 금곡동과 송림동을 지키고자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꾸린 뒤 자전거를 탑니다. 때때로 자전거를 놓고 전철을 탑니다. 자전거를 탈 때면 홀가분하게 차가운 새벽 바람을 느끼며 등판을 흥건히 적시는 땀을 느낍니다. 자전거를 놓고 걸어서 전철역까지 갈 때에는 제가 디디는 땅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느끼며 좀더 더디게 제 둘레 삶터와 사람들을 살피게 됩니다. 전철을 타고 움직이는 동안 책 한 권 펼칩니다. 아직 제가 모르거나 미처 헤아리지 못한 이웃들 이야기와 생각을 책을 읽으며 느낍니다.

 일곱 시에서 일곱 시 반 사이에 인천 동구 금곡동에 자리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닿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까지 이곳 헌책방거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곳에 조그마한 자리를 하나 얻어 ‘개인 도서관(중심 주제는 사진책)’을 열 생각이라서, 헌책방거리 일꾼과 함께 책꽂이를 짜고 있습니다. 인천이라는 곳에도 도서관이 제법 여러 곳 있기는 하나, 이곳들은 중고등학교 아이들 입시공부를 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또한 인천에서 살아가는 적잖은 젊은 넋들은 교과서와 참고서와 문제집과 수험서에 매여, 정작 자기를 돌아보고 자신이 걸을 길을 찬찬히 생각하거나 찾아볼 ‘책’ 하나 만나는 즐거움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제가 지난 열 몇 해에 걸쳐서 모아 놓은 갖가지 책들이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모르나,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닌’ 책 하나를 느긋한 마음으로 살피면서,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책이 있구나’, ‘이렇게 온갖 책들이 많이 있는데 나는 여태껏 무엇을 보아 왔나’ 하고 찬찬히 곱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곳 헌책방거리에 문을 열 도서관이 얼마나 오래 살림을 이을 수 있을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앞으로 세 해쯤은 버티겠지만, 그 뒤는 모르는 일이거든요. 배다리 헌책방거리와 이웃한, 또는 배다리 헌책방거리로 찾아가는 길 가운데 하나인 ‘쇠뿔거리(우각로)’라는 길을 가로지르는 50미터짜리 산업도로가 놓일 판이기 때문입니다.

 인천시와 개발업자는 50미터짜리 산업도로를 놓으려고 1998년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했습니다. 길 닦을 자리는 길그림을 보며 ‘곧은 금’을 그었고, 그 곧은 금에 놓인 사람들 집터와 가게터는 ‘한 평에 얼마씩 보상해 주겠다’고 말에 한 집 두 집 쫓겨났습니다. 새길이 닦인다는 말에 마을사람들은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어찌하겠느냐’며 돈 몇 푼 받고 살림을 옮겼습니다. 자기들 삶터에 왜 길이 놓여야 하나 묻지도 못한 채, 아니 처음부터 물어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참말로 왜 새길이 놓여야 하고, 새길은 왜 가난한 사람들 집터나 가게터를 싸그리 밀어내며 뚫려야 할까요. 인천은 서울보다 자동차가 적고 대구나 부산보다도 적지만, 길은 제법 많이 뚫려 있습니다. 지난날 일제강점기에 앞서부터 ‘항구를 억지로 열’면서, 인천을 거쳐서 조선땅 수많은 자원이 배에 실려 일본으로 빼앗겨야 했으며, 일본 문물이 인천을 거쳐서 서울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온갖 길을 놓아야 했고, 이때에도 지붕 낮은 집에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살림터는 남김없이 밀려나고 무너졌습니다. 이 역사가 2007년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셈이랄까요.

 돌이켜보면, 쇠뿔거리(우각로)는 이 나라 얼과 넋이 짓밟히고 무너지면서 이 나라가 일본한테 식민지로 살며 괴롭힘에다가 시달림으로 골머리를 앓게 한 ‘첫 번째 길’입니다. 나라님께서는 이런 슬픈 역사를 간직한 쇠뿔거리는 ‘싹뚝 잘라내어’ 산업도로를 뚫고 나라살림을 북돋워야 인천 살림이 살고 나라한테도 좋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어요. 더욱이, 산업도로를 다 뚫은 뒤에는 길 둘레에 자리잡고 있는 송림동과 금곡동을 세 해 안에 모두 철거하고 ‘문화와 쇼핑과 패션이 넘치는 복합상가와 산업단지’를 유치해서 사람들한테 돈벌이를 시켜 주겠다고 내세웁니다. 그런 뒤, 헌책방거리와 공예거리를 쫓아내어 아파트를 올리고, ‘지붕 낮은 집’들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외국사람들한테 볼꼴사나우니까(인천시는 2014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보기 좋은 새 시멘트 집’들을 높이높이 올리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송림동과 금곡동에서 살아가며 조용히 살림을 꾸리던 분들이 모인 오래된 저잣거리까지 한꺼번에 자취를 감추겠지요.

 한 평에 사백만 원이라던가, 집있는 사람들한테 내어준다는 보상금이. 이 마을 분들 집은 열 평이 채 못 되곤 하니까, 열 평이라 치면 사천만 원. 서른 해, 쉰 해, 일흔 해 동안 허리가 구부정하도록 살아온 이들이 어렵사리 장만하고 알콩달콩 가꾸어 온 살가운 마을살림과 집터 보상금이 사천만 원. 웬만한 대졸 취업자 연봉만큼도 안 되는 돈. 이 돈을 받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자기들 살림을 다시 마련할 수 있을까요. 전세집이나마 얻을 수 있을까요. 집을 옮겨야 한다면, 그동안 해 온 일은 어떻게 다시 이을 수 있을까요. 생판 낯선 곳에서 무슨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요.

 손바닥 만한 집에 살며 손바닥 만한 텃밭을 돌보는 재미를 누렸고, 얼마 안 되는 적은 돈이라지만, 그 적은 돈으로도 한삶을 조촐하게 꾸리며 모자랄 것도 넘칠 것도 없는 알맞춤한 삶을 꾸렸습니다. 남한테 해코지할 일도 없으나, 해코지할 까닭 또한 없이 오순도순 낮은 지붕이 다닥다닥 달라붙고 이어붙으며 언제나 웃음꽃과 눈물바람을 함께 나누며 살았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분한테는 우리들 삶과 삶터는 ‘문화가 아니’며 ‘한낱 가난뱅이 구질구질’일 뿐이라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돈과 이름과 힘이 있는 분들은 ‘자가용 하나도 몰지 못하는 주제에 얼른 집과 가게 빼고 떠나 주길’ 바라겠지요. 하지만 우리들 집터와 가게터는 ‘인천 개항 역사와 발맞추어 함께 해 온 문화’요, ‘인천 개항 앞서부터 조용하면서 살뜰하게 이어오던 삶’입니다. 우리들 지역문화와 어깨동무 삶은 돈 몇 푼으로 보상받을 수 없지만, 이런 보상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동안 닦은 반듯하고 널찍한 수많은 길로도 넉넉한 인천이며, 자동차 세상보다는 사람들이 아늑하고 포근하게 살아갈 삶터가 인천이라는 곳을 한결 아름다이 보듬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돈으로 빚는 문화나 삶터가 아니라, 사람들 따순 마음으로 가꾸는 문화나 삶터를 고이 지키고 즐기며, 앞으로도 웃고 울며 다 함께 살고 싶습니다. (4340.3.2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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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일이란 자유


 〈파이미디어〉 편집장을 맡고 있는 분한테 편지를 받았습니다. ‘소폭 개편’이라고는 하지만, 쉽게 말하면 ‘미운 놈 잘라내기’일 테지요. 마음에 내키지 않는 사람이 쓰는 글이니, 이런 글을 받아서 〈북데일리〉 기사로 달기 퍽 껄끄러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도 제가 쓴 글이 ‘엉뚱한 제목이 달려(우리 말 운동을 하는 사람이 쓴 글답지 않은 잘못되거나 얄궂은 말투가 쓰인 글이름 들)’ 기사가 되고, ‘보기에도 나쁜 편집상태로 실린’ 모습을 보며 마음이 씁쓸하고 답답했습니다. 지금 어느 인터넷매체를 보더라도, 또 어느 인터넷모임이나 블로그 들을 보더라도,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기사 편집을 하는 곳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동안 이런 문제를 거의 말하지 않고 한 주에 두어 차례씩 글을 보내 왔습니다. 제가 걷는 길, 또 제가 글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알맹이, 또 제가 쓴 글로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며 함께하기를 바라는가 하는 마음은, 〈북데일리〉라는 매체에 실리는 글과 견주면 아주 다릅니다. 아마, 제가 늘 비판해 마지않는 대목을 거의 빠짐없이 〈북데일리〉가 갖추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북데일리〉라는 매체가 있는 줄 몰랐고, 김민영 님이 저를 취재한 뒤로 이곳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책마을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 ‘네가 왜 거기에 글을 쓰냐? 네 성격하고 안 맞을 텐데?’ 하고들 말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러게요. 제가 가는 길하고 아주 다른 곳인데, 왜 글을 쓸까요?’ 하고.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책이 있고, 좋아하는 길이 있으며,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소리와 얼굴이 다르며, 즐기는 먹을거리와 옷이 다릅니다. 살고 싶은 집이나 나들이하고 싶은 여행지도 다르겠지요. 하지만 어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보다 더 낫거나 훌륭할 수 없습니다. 가는 길은 달라도, 저마다 소중한 자기 자신을 찾고 있다면, 또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온힘을 다하고 있다면 모두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다만, 자기 혼자만 잘났다고 생각하거나 믿으면, 이기주의나 개인주의로 빠집니다.

 우파라고 해서 나쁘고 좌파라고 해서 좋을 수 없습니다. 극좌와 극우가 나쁠 뿐이며, 자기 빛깔을 밝히지 않고 좌와 우 사이에 왔다갔다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나쁩니다.

 김민영 님이 쓴 글을 보며, 이이는 어떤 책을 즐기나 가만히 살피노라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같이 최종규라는 사람이 〈함께살기〉 게시판이나 지난날 〈오마이뉴스〉나 요즈음 〈시민의신문〉 들에 쓰레기와 다를 바 없는 책’이라고 비판한 책입니다. 아니, 저는 처세나 경영이나 자기계발을 다룬 책은 ‘책이 아니다’고 생각합니다. 책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장사지요. 처세와 경영을 빌미로 말장난을 하고 지식덩어리만 머리에 쑤셔넣는 일이지요. 우리가 참다이 처세를 하자면, 《논어》를 읽고 《목민심서》를 읽고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나 《시와 혁명》 같은 책을 읽어야지 싶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제 생각이고, 제가 가는 길입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제가 걷는 이 길대로 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가는 길도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어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사서 읽고 있는데, 줄거리는 ‘나쁘지 않지만’, 정작 ‘세계 절반이 굶주리는 기막힌 까닭과 밑바탕’은 다루지 않더군요. 미국이 왜 소말리아에 군대를 보냈고 이라크에 군대를 보냈으며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냈을까요? 미국과 쿠바는 왜 이리 사이가 나쁠까요? 왜 이탈리아와 영국은 1960년대까지 소말리아를 식민지로 삼았으며, 유럽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남미에 그토록 많은 식민지를 꾸렸을까요. 이런 식민지는 왜 아직도 버젓이 남아 있을까요. 아프리카와 중남미 내전은 왜 일어날까요? 이런 속내를 밝히지 않는다면, 적어도 ‘카길’이란 미국계 다국적 재벌이 무슨 꿍꿍이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지 못한다면, 세계 절반 넘게 굶주리는 까닭을 느낄 수 없습니다. 또한, 정작 본질을 못 느낀 채 이런 책만 읽는다면, 지식만으로 세상을 읽을 뿐, 자기 자신을 올바르거나 깨끗하거나 아름답게 가꿀 수 없다고 느낍니다. 자기 자신을 올바르거나 깨끗하거나 아름답게 가꿀 수 없는 사람이 자기 삶을 즐길 수 있을까요? 자기 삶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돈 많이 벌어서 이웃한테 몇 푼 나누어 주는 일이 봉사나 자선행위일는지요.

 《나무소녀》라는 책이 있습니다. 《빈자의 미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람이 뭔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들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니, 그다지 놀라울 일이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다 알지만, 실천을 안 할 뿐인 이야기’, ‘우리들이 다 알 만하지만, 굳이 알려고 않는 이야기’, ‘우리들이 어렴풋이 듣기는 했지만, 중요하게 느끼지 않아 스치고 지나갔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해야 옳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책들만이 중요한 책이라고 느끼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이런 책을 다 찾아서 읽어야 한다고도 느끼지 않습니다. 훌륭하다고 손꼽히는 책을 1000권 읽는다고 해서, 그 책을 다 읽은 사람이 훌륭하게 살까요? 한 달에 책 300권을 읽어서 독서왕이 된다 한들, 그 독서왕이 올바르게 세상을 꿰뚫어보는 만큼 실천을 하면서 살까요. 인도사람 아룬다티 로이는, ‘실천할 수 있는 이야기만 글로 쓴다. 그리고 글로 쓴 이야기를 실천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저 또한 제가 몸소 하는 일을 글로 쓰고, 제가 쓴 글을 어김없이 몸으로 옮깁니다. 나무젓가락을 씻어서 말린 뒤 다시 쓰고, 대중교통조차 안 타고 걷거나 자전거를 즐기며, 밥집이나 술집에서 먹고 남은 먹을거리는 어김없이 빈통에 담아서 집으로 가져가서 먹습니다. 옷을 사입는 일이란 없고, 헌옷을 얻어서 입거나, 예전부터 입던 옷을 10년이고 20년이고 손바느질로 깁고 손질해서 꾸준히 입습니다. 옷 한 벌을 10년이나 20년 입자면, 살이 찌면 안 되는데, 대중교통조차 쓰지 않으니 살이 붙을 일이, 비계가 붙을 일이 없겠지요. 그러면 옷 한 벌로 스무 해뿐 아니라 쉰 해도 입습니다. 돌아가신 이오덕 님, 살아 계신 권정생 님은 온삶을 이렇게 살아가셨고, 지금도 꿋꿋하게 사십니다. 당신들한테 옷 한 벌이면 넉넉하다고 말하며, 그 말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이분들, 이오덕 님이나 권정생 님은 파벌로 나누자면 우파에 들어가리라 봅니다. 하지만 이분들 사상이나 파벌이 어떠하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이분들은 자기 사상은 사상대로 가꾸되, 언제나 올바른 편에 서려고 했고, 한결같이 올바른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자기 삶을 추슬렀습니다. 남들 눈치를 안 보고 곧은소리를 했고, 때때로 타협(죄지은 이 허물도 감싸기)을 하며 살아가셔요. 그래서 이런 분들은 많은 분들이 섬기고 모십니다. 리영희 선생은 좌파 쪽 사람이라 하지만, 우파 사람들도 모시거나 우러릅니다. 리영희 님 당신이 살아가는 모습, 글쓰는 기자로서 보여주는 매무새는 누가 보더라도 훌륭하거든요. 글 한 줄 쓰고자 책 다섯 권만큼 살피고 자료를 찾고 발로 뛰는 이런 매무새는 리영희 당신이 훌륭하거나 뛰어나서가 아니라, ‘글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기자라면 더더구나’ 지킬 기본이거든요. 적어도 한국기자가 아닌 나라밖 기자들은 이런 매무새가 기본입니다.

 저는 기독교를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불교도 꽤나 싫어합니다. 천주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교는 본바탕이 비뚤어지게 퍼지기에 안타깝게 여깁니다. 부두교는 종교 바탕이 좋은 데에 자리하고 있기에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또한 ‘종교’가 되며 비틀어지는 대목이 많습니다. 그 어떤 믿음이든 ‘종교’가 되면 돈벌이로 탈바꿈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종교를 간직하는 사람들을 싫어할 마음이 없고, 딱히 거스르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자기가 좋아하는 종교라면 자기 혼자 좋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종교를 빌미 삼아 세금 돌려먹으며 우람한 집짓기에만 골똘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종교 없이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자꾸 종교를 억지로 간직하라고 붙잡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제 마지막 글로 등록이 되었을 텐데, 제가 소개한 《성모의 곡예사》라는 만화책에서는 ‘캉탈베르’란 이름은 하나도 안 중요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하느님을 모시려고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를 돌아보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 붙인 이름을 엉뚱하게 바꾸는 바람에, 글 줄거리가 잘못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북데일리〉라는 인터넷매체가 ‘최초의 책 이야기 전문 신문’이라는 구호를 내걸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썼습니다. ‘맨 처음’ 했다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요. 두 번째는 중요도가 떨어지나요? 세 번째면 어떻고 꼴찌면 어떨까요. ‘맨 처음’으로 치자면, 저는 대한민국에서 맨 처음으로 “헌책방 모임”을 만들었고 “헌책방 이야기책”을 펴냈으며 “헌책방 전문 사진”을 맨 처음으로 찍었습니다. “헌책방 사진 전시회”도 맨 처음으로 했고, “우리 말 운동가” 명함도 가장 어린 나이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맨 처음’이 뭐가 중요할까요. 일찍 했든 늦게 했든, 얼마나 올바르고 알뜰하고 재미나고 보람차고 신나고 조촐하게 자기 길을 걸어가느냐가 중요하지 않을는지요.

‘맨 처음’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책 이야기를 어떻게 누구와 함께 언제 어디에서’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책이란 ‘다양성’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눈길로 바라보며 생각한 이야기를 다 다르게 담아서 다 다른 자리에서 사고팔기에 다 다른 때에 다 다른 까닭으로 만나서 다 다르게 받아들이며 읽고 다 다른 자기 삶에 받아들이거나 곰삭이도록 이끌어 주는 매체라고 느낍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 ‘다 다름’ 가운데 한 가지 목소리를 내고자 했습니다. 예전부터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이렇게 제 목소리를 내며 살 생각입니다. 그러면 지금 〈북데일리〉가 보여주는 목소리는 어떠한가요. 얼마나 ‘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다 다른 삶’을 ‘다 다른 책’을 보여주고 있는가요.

 책 한 권을 살 때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만 가야 할까요. 동네책방에 가면 안 될까요. 헌책방에 가면 안 될까요. 또한, 우리 나라에서는 빛 한 번 못 보고 사라지는 책이 너무 많아서, 도서관에 없는 책이 숱합니다. 이런 책들은 마지막으로 헌책방에 남아서, ‘헌책방을 기꺼이 찾아오는 책 좋아하는 이들’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참말로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헌책방을 가기 마련입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헌책방을 안 가면 ‘잊혀지거나 사라지는 책’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기 일쑤니까요. 출판사마저 문닫고 사라지면, 이곳에서 펴낸 책을 어디서 찾을까요? 도서관에서? 도서관이 책을 제대로 사들여서 갖추던 곳이던가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틀림없이 〈북데일리〉는 이런 대목을 못 짚습니다. 어쩌면 안 짚는지 모릅니다. 독서광들 ‘장서 숫자’를 이야기하고, 한 달에 몇 권, 한 해에 몇 권 읽었다 하는 이야기, 무슨 책이 몇 만 권 팔렸다 하는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 책 하나가 내 삶을 어떻게 흔들었다’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책 이야기는 있지만, ‘사랑 이야기’라는 것도 너무 좁은 테두리에 갇혀 있을 뿐 아니라, 자연과 겨레와 나라와 인류와 숱한 목숨붙이와 문화 들을 사랑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잘 팔릴 만한 대중 인문서 이야기는 있어도, 속깊고 알뜰하나 기자들하고 가깝지 않아서 언론소개 한 번 못 받고 사라지는 인문한 책들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책들은 ‘누가 찾아서 읽어’ 주고, ‘누가 이런 책 소개를 써’ 주며, ‘누가 이런 책들을 동네책방이나 헌책방에 마지막으로 꽂혀 있을’ 때 알아보도록 해 주면 좋을까요.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나 글을 쓸 때 글자수를 똑같이 할 수 없습니다. 글자수 똑같이 해서 글을 쓰면 ‘글 뽑는 기계’이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터넷은, 우리들이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 자기 생각과 뜻을 홀가분하고 스스럼없이 펼칠 수 있도록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터넷을 한낱 ‘길이만 놓고 따진다’면, 그 어찌 자유롭고 싱싱한 숨결이 살아숨쉬는 풋풋한 글이 샘솟을 수 있을까요.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만드는 책은 사람들 삶이 담깁니다. 그래서 모든 책은 쪽수가 다르고 두께가 다르고 짜임새가 다릅니다. 50쪽짜리 책이 있고 300쪽짜리 책이 있으며 1000쪽짜리 책이 있습니다. 300쪽짜리 낱권이 10권이 모이는 장편소설이 있고, 250쪽짜리 낱권 50권이 모이는 장편만화가 있습니다. 자, 50권짜리 장편만화를 소개하는 글을 쓸 때 어떻게 쓰면 좋을까요? 50권을 하나씩 따로따로 소개하는 글을 50차례에 걸쳐서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장편만화 50권이라면 적어도 15∼20년이란 세월을 쏟아부어야 가까스로 이룹니다. 이런 큰 작품을 몇 줄로 간추릴 수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 감동을 쏟아내어 조금 길다고 느낄 만하게 쓸 수도 있겠지요. 왜 인터넷기사는 전문평론으로, 논문에 버금가는 글로 쓸 수 없을까요? 한편, 50쪽짜리 책을 읽고도 50쪽에 이르는 느낌글을 쓸 수 있습니다.

 책을 엮은 우리들 사람이며, 책을 읽는 우리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 다른 사람이기에 다 다르게 펴내고 다 다르게 읽어냅니다. 이 다 다름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 사는 세상은 얼마나 팍팍할까요.

 자전거를 탈 때, 모든 이가 평속 35km로 달려야 할까요. 어떤 이는 대단히 잘 달리지만 일부러 5km로 달릴 수 있어요. 어떤 이는 그럭저럭 15km를 지킬 수 있어요. 어떤 이는 달리는 틈틈이 쉴 수 있어요. 우리가 쓰는 글도 자전거 타기와 마찬가지가 아닐는지요. 우리 사는 세상도 자전거 타기와 마찬가지가 아닐는지요.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만나는 사람,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 우리가 부대끼는 모든 것은 자전거 타기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일은 자유입니다. 언제나 손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궁금합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서 어디에 쓰나요.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니 즐거우신지요.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든 김민영 님께서는 자신이 바보 아닌 사람이라고 느끼시는지요.

 〈북데일리〉에 첫 글을 보내고 나서, 이곳에 실린 글을 죽 살피며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저는 저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 삶도 하늘처럼 섬겨야 하며, 내가 모르거나 못 느끼는 대목도 짚기 때문에, 고개숙여 배워야 한다고 느끼며, 그 뒤로도 꾸준하게 글을 보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렇게 고쳐먹은 마지막 보람이 이렇게 되는군요. 생각해 보면, 첫 글을 보내고 나서 ‘쓰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갑작스런 통보를 받으며 한편으로는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갑작스런 통보는 사람한테 하는 예의가 아닙니다. 한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 이런 짓을 하면 안 되지요. 벌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면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법이니, 앞으로 다른 분들한테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말기 바랍니다.

 제가 몇 차례에 보낸 건의(또는 비판이든)에 아무런 대꾸가 없다고, 얼마 앞서 보낸 글은 아예 기사로 싣지도 않고, 이렇게 ‘강제추방’을 한 것은 뚜렷한 명예훼손이며 인격모독이고 계약위반입니다. 대한민국 책마을은 워낙 뒤떨어지고 형편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니, 뭐 이런 일이 있더라도 ‘언론사 편집부 책상에서 힘을 쥔 이’ 앞에서 ‘글 쓰는 사람’은 깨갱일 수밖에 없습니다. 칼을 쥔 분이 칼을 휘둘렀으니, 칼자루조차 없는 사람은 그 칼에 맞아야지 어쩌겠습니까. 김민영 님도 글을 쓰는 사람인데, ‘글 쓰는 사람’ 처지를 거의 헤아리지 않는 이런 모습은, 저으기 안타깝고 슬프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현실이니까요. 이 현실을 거스를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제가 아무리 힘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할 말은 해야 하’며, 이런 말할 권리조차 없거나 가로막힌다면, 도무지 한국땅에서 글쟁이들은 어떻게 제 목소리를 다 다른 느낌과 마음과 뜻으로 펼치면서 다 다른 삶을 글이나 책으로 펼쳐낼 수 있을까요.

 저는 제 글이 〈북데일리〉에 갑작스레 못 실리는 일이 안타깝지 않습니다. ‘최종규이든 다른 사람’이든, ‘다 다른 생각과 목소리로 살아가는 사람’ 이야기가, 칼을 쥔 사람 힘 앞에 난데없이 목아지가 달아날 수 있다는 이런 어마어마한 폭력이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 놀라울 뿐입니다. 총자루나 칼자루보다 붓자루가 무섭습니다. 붓자루가 사람 마음을 더 난도질합니다. 붓자루가 사람을 더 크게 아프게 하며 더 괴롭게 죽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붓자루로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거나 죽이는 일을 저지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어쩌다가 잘못해서 또다시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거나 죽이더라도 부디 그 다음에는 잘못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세상사람이 60억이면, 60억 가지 책이 있고 60억 가지 이야기가 있으며 60억 가지 느낌글이 있습니다. 김민영 님이나 최종규란 사람이나 그 60억 가지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꿋꿋하게 자기 글을 쓰려고 애쓰는 김민영 님임을 느꼈기 때문에, ‘제 기나긴 시간’을 일부러 들여서 ‘이처럼 긴 글’을 써서 보냅니다. 부디, 복 많이 받으소서. (4340.3.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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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pe@hani.co.kr 한겨레 박주희 기자 앞으로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 당신한테


 ㄱ: 헌책방이 얼마나 만만하면 막말을 할까
 ㄴ: 〈한겨레〉 박주희 기자가 쓴 헌책방 기사를 읽고
 ㄷ: 다시는 이런 폭력이 일어나지 않기를 애타게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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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이란 참 만만한 곳입니다. 만만하기 때문에 헌책 값을 터무니없이 에누리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헌책 값어치는 하찮은 고물 따위로 여기곤 합니다. 더구나 헌책방에서 일하는 일꾼을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아요. “세상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말은 그저 성경이나 불경에 나오는 말일 뿐, 헌책방 임자를 보면서 이런 글귀를 가슴에 새기며 고개숙여 헌책방 일꾼 앞에 서려는 분들을 만나보기 어렵습니다.

 아마, 전여옥이나 이명박 이야기를 기사로 쓴다고 할 때, 제대로 조사도 해 보지 않고 글을 쓰는 기자는 없을 거예요. 제대로 조사를 안 하고 쓴다면, 곧바로 명예훼손이나 유언비어다 허위날조 기사다 하는 쓴소리가 줄줄이 들어오거나 법정 소송까지 이루어질 테니까요. 하지만 헌책방을 말하는 기사들은 하나같이 ‘참이 아닌 거짓을, 그것도 나쁜뜻 가득한 편견과 선입관과 고정관념으로 비틀고 있’는데, 이런 막말이 끊이지 않습니다. 헌책방 임자들이 이런 엉터리 기사를 보고도 ‘이건 명예훼손이다!’ 하면서 시비를 걸거나 법정소송을 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명예훼손 소송을 거는 사람 앞에서는 그지없이 움츠러들고, 명예훼손이니 뭐니 하는 말이 없이 조용히 있는 헌책방 일꾼 앞에서는 더없이 날고 기며 막나가도 되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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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윤리나 기자의식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윤리나 의식이 있었다면, 당신이 쓴 기사를 읽으며 즐거움과 기쁨을 듬뿍 느꼈을 테니까요. 당신이 쓴 글 하나로 헌책방이 얼마나 비틀려 보이게 되었는지, 또 헌책방 일꾼이 얼마나 바보처럼 여기지게 되었는지, 또 헌책방을 즐기는 사람들을 멍청한 사람이 되도록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 같은 사람이 쓰는 글 때문에 허물어질 헌책방 문화가 아니며, 당신 같은 사람이 쏟아내는 글로 더럽혀질 헌책방 일꾼이 아니며, 당신 같은 사람이 찾아가지 않아도 헌책방 즐김이는 언제나 자기 마음을 살찌우는 좋은 책을 만나고 있습니다.

 어설픈 눈길이나 겉핥기 생각보다는, 차라리 아무런 눈길이나 생각을 안 건네는 편이 낫다고 느낍니다. 세상 어느 공부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으며, 세상 어느 글이 하루아침에 나올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을 안다는 일이, 한 문화를 안다는 일이, 한 역사를 안다는 일이 얼핏 한 번 스쳐 지나가는 눈길로 얼마나 마음 깊이 다가설 수 있을까요.

 당신께서는 취재거리로 헌책방을 슬쩍 한 번 다녀간 뒤, 이런 느낌으로 기사를 쓰겠지요. 그래서 어느 헌책방 한 곳이 마흔 해 동안 살림을 꾸려 왔다면, 그동안 이곳 일꾼이 만진 책이 몇 권이며, 이이가 만져서 빛을 본 책이 몇 권이며, 이이 손을 거쳐 책즐김이 마음을 살찌운 크기가 얼마나 되며, 이이 손길 하나로 우리네 삶이 얼마나 한쪽 구석에서 빛이 나고 있었는지에는 처음부터 눈길을 안 두었겠지요. 당신한테는 취재거리 하나이지만, 마흔 해 동안, 또는 스무 해 동안, 또는 서너 해 동안 헌책방 살림을 꾸려 온 이한테는 ‘모든 것을 바친 삶’입니다. 다른 사람이 모든 것을 바쳐 꾸려 온 삶을 한낱 ‘고정관념-편견-선입관’으로 물들여도 좋을까요. 그렇다면, 저도 이렇게 하겠습니다. “기자라면 으레 이렇다. 취재를 나가지 않고 책상 앞에서 인터넷 살피고 전화 몇 통 건 뒤 스윽 글을 뽑아내는 기계다. 이런 이들한테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가 샘솟아 나리라 믿으면 바보다.” 하고 생각하며 기자 한 사람을 만나겠습니다.

 정치꾼을 만나더라도 고정관념-선입관-편견을 걷어내야 합니다. 한나라당 정치꾼이든 민주노동당 정치꾼이든 열린우리당 정치꾼이든,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나려고 할 뿐입니다. 그이가 어느 곳에 몸을 담았다고 해도 그이는 ‘고유한 사람 하나’입니다. 〈한겨레〉에서 일하는 기자가 모두 똑같은 기자입니까. 모두 똑같은 생각으로 똑같이 움직이는 기자입니까. 한나라당 정치꾼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생각으로 똑같은 말을 쏟아내는 정치꾼입니까. 군인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군인입니까. 피우진 대령을 강제전역시킨 사람과, 피우진 대령이 똑같은 군인입니까.

 당신은 기사이름부터 헌책방을 깎아내립니다. 


― 연봉 1억 잘나가는 직장 때려치고 헌책방 차린 김종건씨


 그렇군요. “헌책방은 잘나가는 직장이 아니”군요. 헌책방을 하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쓰레기겠네요. 요새 유행하는 코메디언 최국 씨 말마따나 “헌책방은 모두 쓰레기”겠네요. 아무 재주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꾀죄죄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 헌책방 꾸리기겠네요.

 이 말에 이어 ‘기자’인 당신은 남김없는 편견으로 우리 마음을 송곳으로 부지런히 들쑤십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서너평 남짓한 가게 입구에는 과월호 잡지들이 쌓여 있다. 문 앞에서부터 빽빽히 들어찬 책들로 가게 안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책꽂이에 꽂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사람 키높이 만큼 쌓아올린 책더미는 허리를 숙여서, 책을 한 권씩 살펴봐야 한다. 30분이고, 1시간이고 책방 안을 서성거려도 주인은 말 한마디 걸어오는 법이 없다. 머리가 히끗히끗한 주인은 물어보지 않아도 헌책방만 20년 혹은 30년을 해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헌책방’하면 떠오르는 풍경이다.” 하고요.

 묻고 싶습니다. 헌책방에 가 보셨습니까? 헌책방에 가서 책을 구경해 보셨습니까? 헌책방에 가서 책을 사거나 팔아 보셨습니까? 언제 가 보셨지요? 무슨 책을 구경하고 무슨 책을 사거나 파셨지요? 어느 곳에 있는 헌책방에 가 보셨지요? 지금 우리 나라에 헌책방이 몇 곳이 있는지 아시나요?

 이 다음에 당신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를 적으셨습니다. “그나마 이런 헌책방들도 서울 청계천 주변에 몇 군데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 하고 덧붙이더군요. 그래요. 청계천 둘레에 헌책방이 몇 군데 있던가요? 숫자를 헤아려 보셨나요. ‘몇 군데’라는 말은 숫자가 10이 안 될 때, 으레 4∼6이 될 때, 또는 2∼3일 때 쓰는 말입니다. 청계천에는 헌책방이 몇 가부터 몇 가까지 걸쳐서 있는 줄 아시는지요?

 리영희 선생 말을 빌고 싶지 않습니다만, 한 마디 적겠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글 한 줄을 쓸 때 책 다섯 권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적는 글 한 줄이 얼마나 빈틈없이 제대로 되어 있는가를 살피려고 그만큼 발로 뛰었고, 그만큼 공부했고, 그만큼 사람들과 만나 알아보았다는 소리입니다. 당신께서는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말할 때에는 몸소 이곳에 찾아가서 몇 군데 헌책방이나 있는지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아니면 인터넷 찾아보기라도 해서 숫자를 세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통계청에라도 전화해 봐야지요(하지만 통계청에는 헌책방 통계가 없습니다).

 부산에는 가 보셨는지요? 인천이나 대구는, 대전이나 청주는 가 보셨는지요? 진주나 광주는, 수원이나 마산은 가 보셨습니까? 이런 곳에 헌책방이 몇 군데 있는지 아시는지요? 지난해까지 부산 보수동 헌책방거리에는 모두 51군데 헌책방이 있었으나 한 분이 돌아가시고 한 곳이 문을 닫아 49군데가 되었습니다. 올해 두어 곳쯤 더 문을 닫을지 모릅니다. 한 분은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서, 두 곳쯤은 장사가 어려워 문을 닫겠구나 싶습니다. 부산에 출장이나 취재 갈 일이 있다면, 부디 자갈치시장 옆, 국제시장 옆에 있는 보수동 헌책방거리에도 가 보시기 바랍니다. 이곳 부산 보수동사람들이 나라나 정부 힘을 빌지 않고 오로지 자기들 힘으로만 여기 이 골목에 ‘헌책방 박물관’을 열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돈을 모으고 힘을 모으고 있는 움직임을 터럭만큼이나마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당신이 쓴 다음 글을 읽어 보겠습니다. “새 학기가 되면 중고생들로 북적이고, 인문학 책을 사려고 대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지던 풍경은 ‘추억’이 된 지 오래다.” 하고 말씀하시는군요. 헌책방은 참고서나 사는 곳이로군요. 그리고 대학생들 발길이 뜸해진 풍경은 그저 추억이라 하시는데, 대학생들이 헌책방을 안 찾아간다면 왜 안 찾아갈까요. 이런 흐름이 헌책방 탓일까요. 헌책방에 볼 만한 책이 없어서 대학생들이 안 찾아가나요? 지난날과 오늘날 헌책방이 갖춘 책이 어떠했기에 대학생들이 안 찾는지요? 학생들은 왜 헌책방에서 참고서붙이를 찾을까요. 그리고 왜 참고서붙이를 이토록 사게 만드는가요? 참고서붙이는 값이 어떻게 매겨지고, 이런 참고서붙이를 사는 학생들은 ‘어느 출판사 어느 참고서’를 사서 쓰게 되어 있을까요.

 이런저런 물음에 제가 손수 대답을 달고 싶지 않습니다. 달 힘도 없고, 달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당신이 쓴 다음 대목을 읽지요. “우선 ‘헌책방’과는 어울리지 않게 자동문이 스르르 열린다. 60평 규모의 매장은 꽤 규모가 있는 서점처럼 분야별로 책을 갖추고 있다. 손때 묻은 책들이지만 보기 좋게 분류가 돼 있고, 군데군데 편히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책상도 마련돼 있다.” 하고 말씀하네요. 글쎄, ‘헌책방다운’ 것이란 무엇인가요. 헌책방에는 자동문이 있으면 안 되나요? 헌책방에는 정수기가 있으면 안 될까요? 헌책방 일꾼은 컴퓨터를 쓰거나 인터넷을 하면 안 될까요?

 문득, 헌책방은 “분야별 책을 갖추고 있지 않거나 보기 좋게 분류가 안 되어 있거나, 편히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자리도 없”는 곳이 아니냐 싶은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 쓴 글을 보니 그래요. 참말 그렇습니까?

 그리고 “은은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소리를 따라가보면 한 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빛바랜 엘피 음반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만권 되는 책에다, 엘피판도 줄잡아 2천장은 된다고 한다.” 하는 말을 붙이셨군요. 헌책방마다 책을 몇 권쯤 갖추고 있는지 아시는가요? 조그마한 헌책방 한 곳에 책이 몇 권쯤 꽂혀 있을 듯합니까? 책 1000권이면 책꽂이 몇 곳에 꽂히는지 아시는지요? 헌책방 한 곳에 책꽂이가 몇 개쯤 있을 것 같습니까? 레코드판 2천 장은 얼마만한 부피가 되는지 아시는지요?

 이런 말 뒤에 당신이 붙인 말씀, “김씨는 이 헌책방을 차리느라 억대의 넘는 돈을 들였다. 누가 봐도 큰 돈벌이가 될 것 같지 않은 헌책방에 그가 목돈을 투자한 이유는 뚜렷하다. 김씨는 “헌책 사업이 돈이 된다”고 믿는다.”를 보니, 헌책방 일꾼은 돈을 벌 수 없구나 싶은 생각이 가슴속 깊은 곳까지 스며듭니다. 글쎄, 그렇다면 ‘큰 돈벌이’란 무엇일까요? ‘큰 돈벌이’가 중요한가요? ‘큰 돈벌이’를 하지 못할 듯해 보이는 헌책방은 우리들이 할 만한 일이 아닌가요?

 이즈음 해서 여쭙고 싶네요. 〈한겨레〉 기자로 몸담는 일은 ‘큰 돈벌이’가 됩니까? ‘큰 돈벌이’를 하고 싶어 〈한겨레〉 기자로 몸담으셨는지요?


 - 2 -

 뒤에 이어지는 당신 글에는 더 토를 달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궁금한 여러 가지를 더 묻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숨을 쉴 생각은 없고, 욕을 내뱉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라는 기자는 참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자꾸자꾸 들지만, 안타깝거나 불쌍히 여기지 않으렵니다. 당신은 당신대로 자기 삶을 알뜰히 꾸려 왔을 테며, 당신이라는 기자 나름대로 세상을 보며 글을 쓰셨을 테니까요.

 그러나 한 가지는 꼭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당신이 저지른 폭력을, 당신이 저지른 글 폭력을, 당신이 저지른 글 난도질을.

 당신은 헌책방을 굳이 사랑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당신은 헌책방을 굳이 찾아다니며 책을 구경해야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헌책방 장사를 굳이 할 의무 또한 없습니다. 헌책방에서 알바생으로 일해 보아야 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당신이 사랑하지 않거나, 당신이 찾아가지 않거나, 당신이 헌책방 장사가 되는 현장인이 되지 않더라도, ‘당신이 태어나기 앞서부터 있어 온 헌책방’이며, ‘당신이 몰랐어도 언제나 꾸준하게 흘러흘러 움직이고 돌아가던 헌책방’이며, ‘당신이 알아주지 않아도 꿋꿋하게 제 길을 걸어가는 헌책방’입니다. 당신이 농사꾼들 땀방울을 몰라도 밥 한 그릇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농사꾼들이 풀베느라 손이 베고 몸이 다치는 줄 몰라도, 푸성귀 한 접시 맛나게 먹을 수 있습니다. 밥 한 그릇과 푸성귀 한 접시를 먹으면서 반드시 농사꾼을 걱정하고 사랑하고 아껴야 하지 않아요. 당신이 버스공장 노동자를 모르더라도, 버스회사 정비사를 모르더라도 시내버스를 못 탈 까닭이 없습니다. 차바퀴 만드는 공장 노동자를 몰라도, 차유리 만드는 공장 노동자를 몰라도, 버스 타고 볼일 보는 데에 아무런 말썽이 없습니다. 당신이 교통표지판 만드는 공장 사람을 몰라도, 신호등을 만들던 노동자 손길을 몰라도, 당신이 쓰는 컴퓨터 부품 하나를 만든 노동자가 하루에 몇 시간을 일하는지 몰라도,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을 재봉틀로 만든 청계천 피복노동자 이름이 무엇인지 몰라도, 당신 가방을 채운 온갖 물건이 어느 나라 산과 들과 강과 바다를 깎고 파헤치고 더럽히며 캐낸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어느 제3세계 나라 노동자가 낮은품삯으로 죽을 동 살 동 일해서 만들어서 그 가방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 몰라도, 이 나라에서 진보를 걱정하고 사회를 생각하고 평화를 아끼며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한편 좋은 님 하나 만나 알콩달콩 살림을 꾸릴 수 있습니다.

 헌책방 문화 하나를 모른다고 해도 환경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헌책방 노동자를 모른다고 해도 노동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헌책방 헌책 한 권을 모르더라도 책 유통구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헌책방 즐김이를 모르더라도 사람들 살림살이와 사람들 생각을 철학과 사상으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헌책방 현실을 모르더라도 우리 세상 현실을 알 수 있어요. 그뿐입니다. 이제, 이런 글은 맺겠습니다. 저도 힘들어 죽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애써 헌책방 이야기를 기사로 써 주셨는데 선물 하나 드려야겠네요. 저를 비롯해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땀방울과 다리품과 손품을 들여서 만들어 낸 ‘전국 헌책방 목록’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이 ‘전국 헌책방 목록’은 제가 펴낸 《헌책방에서 보낸 1년》이라고 하는 891쪽짜리 책에 권말부록으로 붙였습니다. 891쪽짜리 책은 값이 29000원인데, 헌책방 이야기를 펼치는 이 책을 사는 데에 29000원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한다면, 인터넷에서 ‘전국 헌책방 목록’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http://club.cyworld.nate.com/50154471111/68509456 이 주소로 들어가면 아래한글97 파일로 만든 목록을 내려받기 할 수 있습니다. 덤으로 ‘서울 헌책방 전화번호부’를 드립지요. http://club.cyworld.nate.com/50154471166/51292666 이 주소로 들어가셔요. 다만, ‘서울 헌책방 전화번호부’에는 청계천 헌책방은 따로 넣지 않았습니다. 청계천은 거리를 이루어 죽 모여 있으니, 굳이 전화번호가 없어도 찾아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거든요. ‘헌책방 전화번호부’는, 찾아가는 길을 모르는 분들한테 도움이 되고자, 또 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아보려는 이들한테 보탬이 되고자 만들었습니다. ‘무슨무슨 책 있어요?’ 하는 이야기를 물어 보라고 만든 목록이 아닙니다. ‘무슨무슨 책 있어요?’ 하는 이야기로 헌책방에 전화를 걸면, 세 곳 가운데 두 곳은 귀찮아 하거나 퉁명스레 받을 겁니다. 그렇게 전화로 묻는 사람치고 자기가 묻는 책을 사러 오는 사람 없고, 헌책방에 가득가득 쌓여 있는 ‘자기가 찾는 책 말고 다른 수많은 책’을 구경할 줄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4340.3.1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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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7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07-03-18 01:33   좋아요 0 | URL
저는 제가 쓴 글만 올립니다 ^^;;;;;;;;
제가 쓴 글은 싸이월드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에 올리는데, 이 가운데 몇 가지만 추려서 이곳에 걸쳐 두고 있습니다 ^^;;; 에구구구../..

2007-03-18 1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07-03-19 12:34   좋아요 0 | URL
좋은 헌책방은, 굳이 신문에서 소개해 주지 않아도, 입소문으로 다 알려지고 알게 되곤 합니다. 아무개가 소개했다고 해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아요. 그리고 신문 보고 오는 사람이 처음에는 있지만, 그 사람들이 그 뒤로 그곳 단골이 되지는 않고요. 스스로 찾아가는 분들이야말로 오랜 단골이 되지요. 잠깐 반짝 하듯 도움이 되는 듯 생각할 수 있어도, 실질로는 `헌책방 참모습'이 엉뚱하게 뿌리내리는 큰 단점이 되고 맙니다. 흠....... 무엇보다도, 기자들이 기자윤리를 지켜 주면 좋겠어요. 말씀 고맙습니다~

2007-03-19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07-03-19 23:29   좋아요 0 | URL
글이 괜찮다 싶으시면 옮겨 가셔도 돼요.
음, 제가 헌책방 기사가 제대로 안 되어 있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왜냐하면, 잘못 적은 헌책방 기사는 `역사처럼 자료로 남아', 실제로 그 헌책방이 그 모습이 아닌데, 몇 해 지난 뒤에는 그 헌책방을 그 신문기사로 잘못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잘못된 기사들 쓰는 신문들을 무척 달갑지 않게 생각합니다. 적어도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퍼지지 않도록 마음을 쓰고 있으며, 헌책방 주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꼬박꼬박 적어 놓고, 다른 책손과 다른 헌책방 주인과 샛장수 이야기를 고루 들어서, 되도록 정확성 있는 자료를 적어 놓으려고 합니다... 흐흠...

2007-03-20 1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