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미터 산업도로와 재개발을 반대하며
 - 인천 배다리와 금곡동과 송림동을 지키고자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꾸린 뒤 자전거를 탑니다. 때때로 자전거를 놓고 전철을 탑니다. 자전거를 탈 때면 홀가분하게 차가운 새벽 바람을 느끼며 등판을 흥건히 적시는 땀을 느낍니다. 자전거를 놓고 걸어서 전철역까지 갈 때에는 제가 디디는 땅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느끼며 좀더 더디게 제 둘레 삶터와 사람들을 살피게 됩니다. 전철을 타고 움직이는 동안 책 한 권 펼칩니다. 아직 제가 모르거나 미처 헤아리지 못한 이웃들 이야기와 생각을 책을 읽으며 느낍니다.

 일곱 시에서 일곱 시 반 사이에 인천 동구 금곡동에 자리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닿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까지 이곳 헌책방거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곳에 조그마한 자리를 하나 얻어 ‘개인 도서관(중심 주제는 사진책)’을 열 생각이라서, 헌책방거리 일꾼과 함께 책꽂이를 짜고 있습니다. 인천이라는 곳에도 도서관이 제법 여러 곳 있기는 하나, 이곳들은 중고등학교 아이들 입시공부를 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또한 인천에서 살아가는 적잖은 젊은 넋들은 교과서와 참고서와 문제집과 수험서에 매여, 정작 자기를 돌아보고 자신이 걸을 길을 찬찬히 생각하거나 찾아볼 ‘책’ 하나 만나는 즐거움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제가 지난 열 몇 해에 걸쳐서 모아 놓은 갖가지 책들이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모르나,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닌’ 책 하나를 느긋한 마음으로 살피면서,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책이 있구나’, ‘이렇게 온갖 책들이 많이 있는데 나는 여태껏 무엇을 보아 왔나’ 하고 찬찬히 곱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곳 헌책방거리에 문을 열 도서관이 얼마나 오래 살림을 이을 수 있을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앞으로 세 해쯤은 버티겠지만, 그 뒤는 모르는 일이거든요. 배다리 헌책방거리와 이웃한, 또는 배다리 헌책방거리로 찾아가는 길 가운데 하나인 ‘쇠뿔거리(우각로)’라는 길을 가로지르는 50미터짜리 산업도로가 놓일 판이기 때문입니다.

 인천시와 개발업자는 50미터짜리 산업도로를 놓으려고 1998년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했습니다. 길 닦을 자리는 길그림을 보며 ‘곧은 금’을 그었고, 그 곧은 금에 놓인 사람들 집터와 가게터는 ‘한 평에 얼마씩 보상해 주겠다’고 말에 한 집 두 집 쫓겨났습니다. 새길이 닦인다는 말에 마을사람들은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어찌하겠느냐’며 돈 몇 푼 받고 살림을 옮겼습니다. 자기들 삶터에 왜 길이 놓여야 하나 묻지도 못한 채, 아니 처음부터 물어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참말로 왜 새길이 놓여야 하고, 새길은 왜 가난한 사람들 집터나 가게터를 싸그리 밀어내며 뚫려야 할까요. 인천은 서울보다 자동차가 적고 대구나 부산보다도 적지만, 길은 제법 많이 뚫려 있습니다. 지난날 일제강점기에 앞서부터 ‘항구를 억지로 열’면서, 인천을 거쳐서 조선땅 수많은 자원이 배에 실려 일본으로 빼앗겨야 했으며, 일본 문물이 인천을 거쳐서 서울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온갖 길을 놓아야 했고, 이때에도 지붕 낮은 집에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살림터는 남김없이 밀려나고 무너졌습니다. 이 역사가 2007년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셈이랄까요.

 돌이켜보면, 쇠뿔거리(우각로)는 이 나라 얼과 넋이 짓밟히고 무너지면서 이 나라가 일본한테 식민지로 살며 괴롭힘에다가 시달림으로 골머리를 앓게 한 ‘첫 번째 길’입니다. 나라님께서는 이런 슬픈 역사를 간직한 쇠뿔거리는 ‘싹뚝 잘라내어’ 산업도로를 뚫고 나라살림을 북돋워야 인천 살림이 살고 나라한테도 좋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어요. 더욱이, 산업도로를 다 뚫은 뒤에는 길 둘레에 자리잡고 있는 송림동과 금곡동을 세 해 안에 모두 철거하고 ‘문화와 쇼핑과 패션이 넘치는 복합상가와 산업단지’를 유치해서 사람들한테 돈벌이를 시켜 주겠다고 내세웁니다. 그런 뒤, 헌책방거리와 공예거리를 쫓아내어 아파트를 올리고, ‘지붕 낮은 집’들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외국사람들한테 볼꼴사나우니까(인천시는 2014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보기 좋은 새 시멘트 집’들을 높이높이 올리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송림동과 금곡동에서 살아가며 조용히 살림을 꾸리던 분들이 모인 오래된 저잣거리까지 한꺼번에 자취를 감추겠지요.

 한 평에 사백만 원이라던가, 집있는 사람들한테 내어준다는 보상금이. 이 마을 분들 집은 열 평이 채 못 되곤 하니까, 열 평이라 치면 사천만 원. 서른 해, 쉰 해, 일흔 해 동안 허리가 구부정하도록 살아온 이들이 어렵사리 장만하고 알콩달콩 가꾸어 온 살가운 마을살림과 집터 보상금이 사천만 원. 웬만한 대졸 취업자 연봉만큼도 안 되는 돈. 이 돈을 받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자기들 살림을 다시 마련할 수 있을까요. 전세집이나마 얻을 수 있을까요. 집을 옮겨야 한다면, 그동안 해 온 일은 어떻게 다시 이을 수 있을까요. 생판 낯선 곳에서 무슨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요.

 손바닥 만한 집에 살며 손바닥 만한 텃밭을 돌보는 재미를 누렸고, 얼마 안 되는 적은 돈이라지만, 그 적은 돈으로도 한삶을 조촐하게 꾸리며 모자랄 것도 넘칠 것도 없는 알맞춤한 삶을 꾸렸습니다. 남한테 해코지할 일도 없으나, 해코지할 까닭 또한 없이 오순도순 낮은 지붕이 다닥다닥 달라붙고 이어붙으며 언제나 웃음꽃과 눈물바람을 함께 나누며 살았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분한테는 우리들 삶과 삶터는 ‘문화가 아니’며 ‘한낱 가난뱅이 구질구질’일 뿐이라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돈과 이름과 힘이 있는 분들은 ‘자가용 하나도 몰지 못하는 주제에 얼른 집과 가게 빼고 떠나 주길’ 바라겠지요. 하지만 우리들 집터와 가게터는 ‘인천 개항 역사와 발맞추어 함께 해 온 문화’요, ‘인천 개항 앞서부터 조용하면서 살뜰하게 이어오던 삶’입니다. 우리들 지역문화와 어깨동무 삶은 돈 몇 푼으로 보상받을 수 없지만, 이런 보상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동안 닦은 반듯하고 널찍한 수많은 길로도 넉넉한 인천이며, 자동차 세상보다는 사람들이 아늑하고 포근하게 살아갈 삶터가 인천이라는 곳을 한결 아름다이 보듬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돈으로 빚는 문화나 삶터가 아니라, 사람들 따순 마음으로 가꾸는 문화나 삶터를 고이 지키고 즐기며, 앞으로도 웃고 울며 다 함께 살고 싶습니다. (4340.3.2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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