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있는 집

 


  감나무 있는 집에서는 감을 먹을 수 있다. 봄에는 새로 돋는 푸르게 빛나는 잎사귀를 보고, 여름으로 넘어서기 앞서 노르스름 해맑은 꽃망울을 보며, 가을로 접어들 무렵 알차게 여무는 감알이 푸른빛에서 누런빛으로 바뀌다가는 살살 발그스름한 물이 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감알이 불그스름 물들면서 감잎도 나란히 불그스름 물든다.


  감은 톡 따서 먹어도 맛있고, 감은 물끄러미 바라보아도 즐겁다. 감나무는 줄기를 살살 쓰다듬어도 예쁘고, 감잎을 살며시 보듬어도 예쁘다. 마당에 감나무 한 그루 자라는 집이란 얼마나 즐거울까. 밭뙈기 한켠에 감나무를 보살피는 집이란 얼마나 예쁠까.


  서울사람은 왜 더 넓은 집이나 교통 더 나은 집이나 일터랑 학교하고 가까운 집만 찾으려 할까. 서울사람은 왜 감나무 한 그루 심을 흙땅 있는 보금자리를 안 찾을까. 서울사람은 왜 이녁 보금자리에 감나무이고 능금나무이고 포도나무이고 심을 생각을 못 할까.


  나무가 자라는 집이란, 숨결이 푸른 집이다. 나무가 있는 집이란, 사랑씨앗이 드리우는 집이다. 나무가 노래하는 집이란, 멧새와 풀벌레를 불러 고즈넉히 무지개잔치를 벌이는 집이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흙마당 있는 집을 바랐다. 나는 매우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 나무가 자랄 뿐 아니라, 씨앗 한 알로 나무를 심어 돌볼 수 있기를 바랐다. 지난 2011년 가을에 비로소 흙마당 있는 집을 얻어 언제나 나무를 누리며 살아간다. 이제 나무 있는 집 한 해를 보낸다. 서른여덟 해 삶 가운데 딱 한 해가 흙마당 살림집이다. 큰아이는 다섯 해 삶 가운데 한 해요, 작은아이는 두 해 삶 가운데 한 해이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나무 있는 마당 예쁜 집 살림살이를 오래오래 즐거이 누릴 수 있겠지. 인천 골목동네 마실을 하다가 ‘겨울날 빨간 열매 가득한 감나무 골목집’을 만나고는, 이렇게 예쁜 집이 살붙이들을 얼마나 예쁘게 보살피는가 하고 새삼스레 깨닫는다. 4345.12.1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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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깊은 밤 우는 아이를 배에 올려놓고 재우거나 무릎에 누여 재우고 보면 가슴이 눌려 답답하거나 무릎이 눌려 저리곤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달게 잠들고 싶어 어버이 품을 찾는다. 혼자서도 씩씩하게 사르르 잠들어 깊디깊은 밤을 달콤하게 보낼 수 있기까지 어버이 배와 무릎은 아이들 것이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이윽고 사십 분쯤 되면 찡 하면서 몸을 못 가누곤 한다. 옆자리에 눕히고 싶으나, 눕히기 무섭게 깨곤 한다. 이때에는 달리 어쩔 수 없다. 네가 깨건 말건 나도 곯아떨어져서 네가 울거나 말거나 서로 나란히 꿈나라로 갈밖에 없다.


  보드라이 부르는 자장노래를 들으렴. 겨울날 고요한 밤바람 소리를 들으렴. 달이 천천히 흐르고 별이 가만히 반짝이는 빛결을 느끼렴. 깜깜한 밤을 아이들 안고 어르며 보낸다. 4345.12.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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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날이 맑아
눈부신 날에는
안경 없이
잘 보인다.

 

날이 흐려
뿌연 날에는
안경 없이는
어지럽고 골이 아프다.

 


4345.11.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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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악이는 흉내쟁이 말문 틔기 그림책 1
사토 와키코 글, 후다마타 에이고로 그림 / 사계절 / 1997년 11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23

 


곱게 흐르는 사랑으로 살아간다
― 삐악이는 흉내쟁이
 후다마타 에이고로 그림,사토 와키코 글,편집부 옮김
 사계절 펴냄,1997.11.10./9800원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을 새근새근 자고 깨고 놀고 듣고 하던 아기가 환한 바깥으로 태어난 뒤, 어머니한테서 젖을 받아서 먹습니다. 젖을 받아서 먹으며, 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들려주는 말을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갓난쟁이는 어버이와 이웃과 형제 자매 말마디를 하나하나 마음으로 아로새깁니다. 입술 달싹여 말문 터뜨리기까지는 좀 멀지만, 수많은 말을 마음에 담습니다.


  늘 누워서 지내다가 뒹굴뒹굴 뒤집습니다. 뒤집고 나서 배밀이를 하고, 배로 밀다가는 엉금엉금 깁니다. 무릎걸음을 하고는 어설피 두 다리로 섭니다. 기우뚱기우뚱 이것저것 붙잡으며 걷는데, 이윽고 활갯짓 하면서 뜀박질을 하고, 마당에서 달리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천천히 자랍니다. 굳이 빨리 자라야 하지 않습니다. 어느 아이는 네 살이나 여섯 살에 말문을 틉니다. 애써 일찍 말해야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초등학교에 들 무렵 아닌 어린이집부터 한글을 배우기도 하지만, 두서너 살에 벌써 집에서 한글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나는 여덟 살에 비로소 한글을 배웠지 싶습니다. 어쩌면 일곱 살에 배웠나?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로서는 일곱 살 적까지 ‘내 할 일’은 그예 놀이 하나였다고 느껴요. 일곱 살이 되고 여덟 살이 되면서 심부름을 맡을 수 있고, 이것저것 가벼운 물건을 갖다 줄 수 있습니다. 아홉 살이 되고 열 살이 되며, 쌀을 헹군다든지 가스불을 켠다든지 성냥을 켠다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양파를 벗기거나 숟가락으로 감자껍질 긁기를 할 수 있어요. 이제 만두를 함께 빚고 송편도 함께 빚습니다. 나물을 함께 다듬고, 꽤 무거운 짐을 들고 옮깁니다.


  어느새 말문을 조롱조롱 틉니다. 조잘조잘 떠듭니다. 산들산들 노래를 부르고, 동무들이랑 요 말 조 말 섞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무렵, 짝꿍을 만나 살림을 새롭게 꾸미면서 아이를 낳고, 아이를 낳으며 내 어버이가 나한테 했듯이, 나도 사랑을 담아 아이들과 살아가는 나날을 누립니다.


.. “찍찍아 찍찍아, 우리 목소리 바꿔 볼래?” “그것 참 재밌겠다!” ..  (7쪽)

 

 

 

 


  큰아이는 작은아이 말을 흉내내곤 합니다. 작은아이도 큰아이 말을 흉내내곤 합니다. 큰아이나 작은아이는 제 어버이 말을 흉내내곤 합니다. 두 아이는 천천히 말을 익힙니다. 두 아이는 저희 깜냥껏 스스로 저희 말을 가다듬습니다. 어버이 말을 흉내내고, 누나 말 동생 말 재미 삼아 흉내내다가는 ‘어느 누구 말’도 아닌 ‘바로 내 말’을 시나브로 빚어요.


  어버이가 손길 따사로이 내밀어 큰아이를 안으면, 큰아이도 손길 따뜻하게 내밀어 동생을 안습니다. 동생 또한 손길 따숩게 내밀어 어버이를 안습니다. 사랑이 천천히 흐릅니다. 굳이 빨리 흘러야 하지 않습니다. 애써 이리로 흐르거나 저리로 흘러야 하지 않아요. 사랑은 가장 따사로운 흐름에 따라 서로서로 주고받으며 흐릅니다.


  고운 목소리 되어 노래로 태어납니다. 맑은 눈빛 되어 이야기로 태어납니다. 살가운 밥내음 되어 즐거운 먹을거리로 거듭납니다.


  곱게 흐르는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아이도 어른도 곱게 흐르는 사랑이 몸밥 되고 마음밥 됩니다. 곱게 헤아리는 눈길이 모여 사랑이 됩니다. 곱게 보듬는 손길이 얼크러져 살림이 됩니다.


  후다마타 에이고로 님 그림과 사토 와키코 님 글이 어우러진 그림책 《삐악이는 흉내쟁이》(사계절,1997)를 읽습니다. 병아리인 ‘삐악이’는 흙 일구는 어버이 곁에서 놀다가, ‘바깥마실’을 하고 오겠다 말합니다. 병아리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러마 하고 얘기합니다. 병아리는 온 마을 골고루 돌면서 숱한 동무를 만납니다. 병아리하고 만나는 동무들은 저마다 어버이 일손을 거들며 일도 하지만, 신나게 놀이를 즐깁니다. 쥐도 돼지도 개구리도 개도 모두 ‘마을숲’을 돌보느라 부산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들(온갖 짐승 새끼들)은 텔레비전을 보지 않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놀잇감이 따로 없고, 학교를 따로 다니지 않으며, 자동차를 타지 않습니다. 들에서 놀고, 냇가에서 놀며, 숲에서 놉니다. 햇살을 먹고, 바람을 마시며, 시냇물을 만집니다.


  삐악이가 흉내내는 쥐 목소리는 햇살입니다. 삐악이가 흉내내는 거북이 목소리는 바람입니다. 삐악이가 흉내내는 개구리 목소리는 빗물입니다. 모두들 예쁜 삶을 누리며 예쁜 이웃입니다. 모두들 예쁜 하루를 누리며 예쁜 숨결입니다. 숲속 아이들(그림책에 나오는 짐승 새끼들)은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저희 목소리를 가다듬습니다. 그림책 아닌 이 땅에서 살아가는 아이들도 ‘고속도로나 공장이나 텔레비전이나 학교나 발전소나 놀이공원이나 도서관’에서 들리는 소리 아닌, 숲과 들과 바다에서 들리는 소리를 곱게 들으며 가슴에 사랑을 담뿍 안을 수 있기를 빕니다. 4345.12.1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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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매무새’와 ‘언어현실’
[말사랑·글꽃·삶빛 40] 바르게 쓸 한국말이 없다

 


  국어사전을 틈틈이 새로 장만합니다. 내가 ‘한국말 사랑스레 살려서 쓰는 길’을 찾으며 살아가니까 국어사전을 새로 장만한달 수 있지만, 내가 꼭 이 일을 안 했더라도 국어사전을 틈틈이 새로 장만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람을 이웃으로 두며 한국말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거든요.


  학자이기에 국어사전을 들추지 않습니다. 교사나 작가이기에 국어사전을 읽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쓰는 여느 한국사람이기에 국어사전을 살핍니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까닭은 ‘내가 남달리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우리 아이들을 낳은 어버이로 살아가니 우리 아이들을 아끼거나 사랑합니다. 이웃 어버이도 나와 같아요. 이웃 어버이가 ‘남달리 훌륭한 사람’이라서 이녁이 이녁 아이들을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아요. 그저 수수한 여느 어버이입니다만, 바로 이처럼 그저 수수한 여느 어버이인 터라 아이들을 아끼거나 사랑합니다.


  옆지기 남동생은 이제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됩니다. 손전화로 얘기하는 모습을 어느 날 지켜보는데 “아버지 오고 계셔요” 하고 말하기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마디 들려줍니다. “‘아버지 오고 계셔요’ 하는 말은 잘못 하는 말이에요. ‘아버지 오셔요’ 하고 말해야 알맞아요. ‘오고 계셔요’가 아니라 ‘오셔요’이거든요. 높임말은 ‘오다’에 붙여야 하는데, 요즈음 사람들 가운데 이런 말투를 옳게 짚는 분이 드물어 ‘오고 계셔요’나 ‘오시고 있어요’라 말해도 다 알아듣지만, 이런 말투에 길들면 뜻은 짚을 수 있어도 말이 엉터리가 될 수 있어요.”


  고등학교 아이들뿐 아니라 중학교 아이들도, 또 초등학교 아이들도 영어를 배웁니다.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은 문법이건 말투이건 낱말이건 ‘하나도 안 틀리도록’ 배워요. ‘잘못 쓰는 영어 말투’를 가르치는 일도 없고 배우는 일도 없습니다.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사람들이 잘못 쓴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알아들으니 안 고쳐도 된다’ 하고 말하지 않아요. 생각해 보셔요. 교사나 강사가 ‘익숙한 버릇대로 어떠한 말투를 잘못된 모습 그대로 안 고치며 쓴다’고 한다면 어찌 될까요. 아마, 학원에서라면 쫓겨날 테고, 학교에서라면 아이들한테서 비웃음을 사겠지요. 이와 달리, 한국말을 잘못 쓰거나 엉뚱하게 쓰는 교사나 강사라면? 안타깝다 해야 할는지 어쩔 수 없다 해야 할는지 아리송합니다만, 국어교사라 하더라도 ‘옳고 바르며 알맞게 쓰는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다 보니, 국어교사조차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마저 잘못 말하기 일쑤예요.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잘 다스리느냐 하는 대목을 넘어, 말투와 낱말을 슬기롭게 다스릴 줄 아는 분이 너무 적어요. 대학입시 시험공부는 잘 시킬는지 모르지만,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사람답게 한국말 슬기롭게 쓰는 길을 밝히는 국어교사가 몹시 적습니다. 그래서, 옆지기 남동생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도록 잘못 쓰는 말투를 둘레에서 어느 누구도 건드려 주지 못하거나 바로잡아 주지 않습니다.


  ‘오고 있다’라는 말투는 현재진행형이요, 한국말에는 현재진행형이 없으며, ‘오는 中이다’라든지 ‘오고 있는 中이다’ 같은 말투가 한국 말투에 얄궂게 스며든 일본 말투인 줄 깨닫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이러한 말투는 신문과 방송과 잡지와 인터넷과 교과서와 숱한 책과 문제집과 참고서에까지 속속들이 파고듭니다. 교사도 학생도, 어른도 아이도, 이러한 말투에서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1920∼30년대에 윤동주 님이 쓴 시를 요사이 다시 읽다가 새삼스레 느낍니다. 시인 윤동주 님이 1920∼30년대에 쓴 글에 ‘오고 있다’처럼 ‘한국 말투에 없는 현재진행형’ 글투는 거의 안 나타납니다. 시골 어르신들 말투에서도 이런 모습을 비슷하게 느껴요. 이른바 ‘구비문학’이라 일컫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 이분들 말씨에 ‘오고 있다’라든지 ‘하고 있다’라든지 ‘보고 있다’ 같은 말투는 거의 안 나타나요. 아예 없다고까지 할 수 있어요. 아니, 나타날 수 없겠지요.


  국립국어원에서 내놓은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이기’라는 씨끝을 놓고 ‘-기’라는 올림말로만 싣는데, 막상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기’ 올림말 자리에서 보기글을 살피면, 모두 ‘-이기’ 꼴로 다뤄요. 이를테면, “혼자이기는 해도”, “화가이기도 하다”처럼요. 국립국어원에서는 언제나 ‘-이기’ 꼴로만 씁니다. 그렇지만 막상 씨끝 ‘-이기’는 올림말로 다루지 않아요.


  우리 둘레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화가기도 하다”나 “혼자기는 해도”처럼 쓰곤 합니다. “나이기는 하지만” 아닌 “나기는 하지만”처럼 쓰는 사람이 제법 많아요. 국립국어원에서는 ‘-이기’를 ‘-기’로 쓰는 일도 받아들일 만하다고 밝히는데, 표준어규정이나 맞춤법해설 같은 자리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적바림하지 않아요. 이 같은 대목을 이야기하는 국어학자나 지식인이나 전문가도 따로 없어요.


  한국말을 다루는 전문가조차 스스로 한국말을 올바로 들려주지 못하고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여느 자리 여느 한국사람은 여느 한국말을 아무렇게나 쓸밖에 없어요. 더 생각해 보면, 학자나 전문가가 한국말을 슬기롭게 다루지 못하더라도, 우리들 여느 사람이 슬기롭게 쓰면 돼요. 신문이나 방송에 엉뚱한 말씨가 실려도, 우리들 여느 사람이 아름답게 쓰면 돼요. 교과서나 책에 얄궂다 싶은 말투가 나타나도, 우리들 여느 사람이 올바르게 쓰면 돼요.


  누군가 “땡큐!” 하고 말한대서 나까지 이 말을 따라서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나는 “고맙구나!” 하고 말하면 됩니다. 누군가 “익사이팅!” 하고 말한대서 나마저 이 말을 따라서 할 일이 없어요. 나는 “즐거워!”나 “짜릿해!”나 “좋아!”나 “신난다!”나 “두근두근!”처럼 느낌과 뜻을 살리는 말을 쓰면 돼요.


  생각을 바르게 가다듬으며 삶을 바르게 가다듬습니다. 삶을 바르게 가다듬으면서 말을 바르게 가다듬습니다.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을 따사롭고 환하게 가다듬습니다. ‘언어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나는 내 ‘말매무새’를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우며 넉넉하게 가다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영어를 자랑하듯 쓴다 하더라도 나는 내 말씨를 스스로 가장 고우며 맑게 가다듬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린대서 나까지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릴 수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함부로 꺾는대서 나까지 나뭇가지를 함부로 꺾을 수 없어요. 나는 숲이 푸르게 빛나도록 보살피고 싶습니다. 나는 풀과 꽃과 나무를 살포시 쓰다듬으며 아끼고 싶습니다. 내 삶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매무새를 가다듬습니다. 내 삶결을 북돋우면서 내 말결을 북돋웁니다. 내 삶자락을 돌보면서 내 말자락을 돌봅니다. 오늘날 이곳저곳 둘러보노라면 바르게 쓸 한국말이 없구나 싶지만, 내 마음속에서 조그맣게라도 바르며 착한 한국말이 샘솟을 수 있도록 힘을 쓰려 합니다. 4345.12.1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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