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싣는 책 (도서관일기 2013.1.4.)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글을 쓸 때에는 이야기를 쓴다. 글솜씨나 글재주를 부리려고 글을 쓰지 않는다. 이야기가 있을 때에 글이 된다. 이야기가 있으면 그림도 되고 만화도 되며, 춤과 노래도 된다. 이야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된다. 곧, 이야기를 찍을 때에 사진이요, 이야기를 찍는 사진을 그러모을 때에 사진책이 된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서는 이야기를 찍는 사진이 드물다.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모습을 찍으려는 사진이 너무 많다. 멋스럽게 찍은 사진에 억지로 이름을 붙이려 하기 일쑤요, 보기 예쁘장하게 찍은 사진에 이래저래 토를 달곤 한다. 이야기를 찍지 못하니까, 어떤 사진장비를 쓰더라도 ‘사진 읽을 맛’이 안 난다. 이야기를 찍지 못하기에, 제아무리 이름값 있거나 사진경력 길다 하더라도 ‘사진 나누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이야기는 삶에서 비롯한다.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이 스스로 사진으로 담는 이야기가 된다. 스스로 살아가는 하루가 스스로 글로 적는 이야기가 되고, 스스로 빚으며 나누는 삶이 스스로 그리는 그림이나 부르는 노래가 된다.


  그러니까, 사진을 좋아해서 사진을 찍고 싶다면, 먼저 ‘내 삶에서 나 스스로 즐길 이야기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이야기를 내 삶에서 찾으면 내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사진은 ‘남이 안 찍는 모습’을 찍는 사진이 아니다. 사진은 ‘내가 찍고 싶은 모습’을 찍는 사진이다. 그러나, 적잖은 이론가나 전문가나 교수나 비평가는 자꾸 ‘자르기’와 ‘빼기’를 말한다. 사진틀에 ‘모든 모습 다 넣으려 하지 말고, 무엇을 빼겠는가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왜 ‘내 이야기를 사진에 담으셔요’ 하고는 말을 못하고, 사진틀에 그럴듯한 모습 집어넣거나 빼는 데에 휘둘리도록 내몰까?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틀린대서 글이 엉터리이지 않다. 노래하는 사람이 가락이나 박자를 놓친들 노래가 엉터리이지 않다. 우리는 기계를 바라지 않는다. 맞춤법 기계가 된대서 글이 읽을 만하지 않으며 문학이 되지 않는다. 가락과 박자 잘 맞추는 기계가 된대서 노래가 들을 만하지 않으며 예술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담아서 쓰는 글이 되어야 읽을 만하다. 이야기를 실어 부르는 노래가 되어야 들을 만하다. 곧, 이야기를 살포시 싣는 사진이 되어야 사진이요, 이야기 있는 사진을 그러모을 때에 ‘사진책’이라 말할 만하다.


  추운 한겨울, 두 아이 데리고 서재도서관에 들른다. 작은아이가 몹시 졸려 하기에, 새로 장만한 책들을 서재도서관에 내려놓은 다음, 곧장 우체국으로 자전거를 달린다. 서재도서관에 갖다 놓은 책은 다음에 다시 와서 갈무리하면 되지. 그러고 보니, 겨울이 되어 춥다는 핑계로 요새 비질도 거의 안 하며 살았다. 다음에 들르면 비질부터 하고 책 갈무리를 해야겠다. (ㅎㄲㅅㄱ)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 보태 주셔요 *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1.341.7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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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꾀꼬리와 춤추는 소나무 옛이야기 그림책 5
강소희 글.그림 / 사계절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33

 


한솥밥 살붙이
― 말하는 꾀꼬리와 춤추는 소나무
 강소희 글·그림
 사계절 펴냄,2008.8.28./9800원

 


  작은 보금자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살붙이는 한솥밥을 먹습니다. 솥 하나에서 지은 밥을 밥상 하나에 올려 나란히 둘러앉아 함께 먹습니다. 작은 마을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논밥’을 먹습니다. 마을을 둘러싼 논뙈기에서 저마다 일군 나락을 거두어 먹고살지요. 작은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숲바람’을 마십니다. 늘 싱그럽게 푸른 숲에서 맑게 나누어 주는 바람을 서로서로 즐겁게 마시며 살아갑니다.


  지구별 사람들은 ‘한별숨’을 쉰다고 할 만할까요. 넓디넓은 우주를 헤아리고 보면, 지구별 사람들은 ‘이 작은 별을 이루는 흙과 바람과 햇살’을 서로 나누면서 살아가요. 한국에서 미국으로 흐르는 바다요, 한국에서 덴마크로 흐르는 바람입니다. 일본에서 뉴질랜드로 흐르는 바다요, 일본에서 마다가스카르로 흐르는 바람이에요.


  살아가는 터전은 다 다르다지만, 지구별 테두리에서는 하나예요. 먹는 밥이나 마시는 물은 다 다르다지만, 지구별 테두리에서는 하나예요.


.. 그날 밤, 막내가 아버지 술상을 차렸어. 술안주로 오이소박이를 만들었는데 소 대신에 모래를 채워 상에 올렸지. “출출한데 마침 잘 됐구나.” 아버지가 술 한 잔을 단숨에 비우고 오이소박이를 와삭 베어 물었거든. “에퉤퉤! 오이소박이에 웬 모래가 들었냐?” 막내가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에게 말했어. “오이 속은 아시면서 사람 속은 왜 모르세요?” ..  (10쪽)

 


  서울사람은 서울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지 못합니다. 서울에서 흐르는 냇물을 마실 수 없어요. 너무 지저분한걸요. 서울사람은 서울을 떠도는 바람을 마시지 못합니다. 서울에만 고인 바람을 마시다가는 모두 숨이 막혀 죽는걸요. 서울사람은 서울 땅뙈기에서 거두는 밥을 먹지 못합니다. 서울에는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뿐, 곱고 기름지며 정갈한 흙이란 없는걸요.


  제아무리 힘센 정치꾼 있다 하더라도, 정치로 사람을 먹여살리지 못합니다. 풀과 나무와 숲이 사람을 먹여살립니다. 제아무리 으르렁거리는 재벌 우두머리가 있다 하더라도, 경제성장율로 사람을 먹여살리지 못합니다. 냇물과 샘물과 골짝물과 우물물이 사람을 먹여살려요. 이런 복지 저런 정책이 있다 한들, 사람을 먹여살리지 못하지요. 햇살이 드리우고 숲에서 비롯하는 푸른 바람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을 먹여살려요.


  거꾸로, 시골사람은 서울에서 흘러나오는 매캐한 바람을 나누어 받습니다. 서울에서 흘러나오는 지저분한 쓰레기를 시골에서 받아들입니다. 서울에서 버리는 쓰레기를 시골마을 흙과 숲과 바다와 냇물이 천천히 거르고 씻습니다. 서울에서 더럽힌 바람을 시골마을 흙과 숲과 바다와 냇물이 천천히 가다듬고 다독입니다.


.. 막내는 옷 솜을 뜯어 귀를 꽉 틀어막고, 눈을 꼭 감고 냅다 앞으로 달려갔어 ..  (24쪽)

 

 


  대통령 아무개가 있대서 나라를 살찌우지 못해요. 고운 햇살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따사롭게 내리쬐야 나라를 살찌웁니다. 하루라도 해가 뜨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하루라도 햇살이 지나치게 내리쬐면 어찌 되나요. 지구별은 햇볕과 햇살과 햇빛에 따라 삶자락이 크게 달라집니다.


  수출과 수입으로 돈을 벌거나 물질문명 받아들인대서 사회를 북돋우지 못해요. 이 나라 이 땅을 흐르는 물이 맑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골프장을 지어야 할 우리들이 아니라, 물을 정갈히 지켜야 할 우리들입니다. 공장이나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나 공항을 자꾸 늘리는 우리들이 아니라, 냇물이 냇물답게 흐르도록 건사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도시를 자꾸 늘리며 아파트 끝없이 짓는 우리들이 아니라, 골골샅샅 어디에서나 샘물을 맛나고 시원하게 마실 수 있어야 할 우리들입니다.


  아이들은 교과서 굴레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푸르며 싱그러운 나이에 대학입시 때문에 목이 매여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풀을 만지고 흙을 밟으며 숲을 껴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숲이 없어 모랫바람만 분다면, 숲이 없어 매캐한 배기가스와 매연만 마셔야 한다면, 숲이 없어 나뭇잎을 어루만질 수 없다면, 아이들은 모두 숨이 막혀 죽겠지요.


  가만히 돌아보면, 독도는 한국땅도 일본땅도 아닙니다. 독도는 지구별 섬입니다. 소유권이나 영유권을 외치며 군사무기 늘려 서로 아웅다웅 다툴 일이 아닙니다. 평화를 들먹이며 비무장지대에 엄청난 무기를 쏟아붓고는 젊은 사내한테 총을 갖다 안길 일이 아닙니다. 평화를 바라고 문화를 바라며 통일을 바란다면, 전쟁무기는 죄 내려놓아야 마땅합니다. 독도를 둘러싼 바다를 지키고 싶으면, 이 나라를 지키고 싶으면,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으면, 모든 군대를 없애고, 젊은이를 시골로 보내어 흙을 일구도록 북돋울 노릇입니다.


  한국도 일본도 중국도 미국도 러시아도 모두, 젊은이한테 군인옷을 입히지 말아야 해요. 모두모두 낫과 쟁기와 삽을 들릴 노릇이에요. 젊은이들이 제 겨레 제 나라 시골마을 논밭을 일구면서 숲을 지킬 수 있는 슬기를 갖추도록 이끌 노릇이에요. 엄청난 돈을 새 무기 만드느라 쓰지 말고, 어마어마한 돈을 해마다 미사일·잠수함·전투기·탱크 따위 만드는데 쓰지 말며, 세금 없고 전쟁 없으며 경제개발 없는 아름답고 조용한 누리를 이루도록 힘쓸 노릇입니다.


  어른이 아이한테 가르칠 한 가지는 사랑입니다. 아이가 어른한테서 물려받을 한 가지는 사랑입니다. 어른이 땀흘리며 애쓸 한 가지는 사랑입니다. 아이가 맑게 웃으며 동무들과 오순도순 나눌 한 가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지은 밥을 먹으며 사랑을 누립니다. 사랑으로 지은 옷을 입으며 사랑을 즐깁니다. 사랑으로 지은 집에서 지내며 사랑을 빛내요.


  사랑이 있을 때에 햇살이 따사롭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숲이 푸릅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물이 맑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서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마을마다 두레와 품앗이로 홀가분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임금도 신하도 지식인도 전문가도 없을 만합니다. 임금도 신하도 지식인도 전문가도 모두 제 땅을 일구어 제 밥·옷·집을 건사하면 돼요.

 


.. 막내는 가져온 소나무를 마당에 심었어. 소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날마다 춤을 추고, 꾀꼬리는 소나무 가지 끝에 앉아 날마다 재미난 얘기를 들려주었대 ..  (33쪽)


  김소희 님이 빚은 그림책 《말하는 꾀꼬리와 춤추는 소나무》(사계절,2008)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깊은 두멧시골에서 세 아이를 낳아 건사하는 아버지한테 없는 하나는 바로 사랑입니다. 깊은 두멧시골 작은 집으로 들어온 새어머니한테 없는 하나는 바로 사랑이에요. 깊은 두멧시골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한테도 아직 사랑이 싹트지 못합니다. 그러나, 셋째 아이한테 바로 사랑이 있어요. 셋째 아이는 저희 오빠 둘이 미처 사랑을 싹트지 못하고 스러진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봅니다. 셋째 아이는 제 아버지가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슬프게 바라봅니다. 셋째 아이는 새어머니를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새어머니한테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니 서운합니다. 그래서, 셋째 아이는 이녁 삶을 살찌울 오직 한 가지인 사랑을 찾아 씩씩하게 길을 나서요. 삶을 살찌우며 북돋울 사랑을 가로막거나 흔들려는 어두운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기운을 내요. 숨결을 푸르게 건사하도록 이끄는 사랑을 지키고 싶어 두 다리에 더욱 힘을 주어요.


  사랑이 있는 사람만 꾀꼬리를 만납니다. 사랑을 찾는 사람만 소나무를 마주합니다. 사랑을 꿈꾸는 사람만 활짝 웃습니다. 사랑을 꽃피우려는 사람만 숲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욕심이나 꿍꿍이로는 사람을 살리지 못해요. 어떤 셈속이나 뒷구멍으로는 내 숨결을 다스리지 못해요. 사랑을 들여 지은 곡식으로 삶을 짓습니다. 사랑을 들여 보살피는 집살림으로 한솥밥 먹는 살붙이를 아낍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한솥밥 이웃입니다. 4346.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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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커놀이 1

 


  이웃한테서 선물받은 스티커책을 아이한테 안 보여주려고 했으나, 큰아이가 용케 찾아낸다. 그러고는 스터커를 하나하나 떼어 어머니와 아버지 손등에 붙이고, 아버지 사진기에 붙이며, 동생 손등에도 붙인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스티커를 벽에다 하나하나 붙인다. 붙일 적에는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고 비빈다. 그래도 뭐, 우리 집이니까. 우리 집이니 네가 그렇게 꾸미렴. 벽종이에 네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스티커도 붙이렴. 나중에 ‘벽이 좀 달리 보이’거든, 그때에는 네가 이 벽에 종이를 새로 붙이고 그림을 그리든 스티커를 더 붙이든 네 마음대로 하렴. 4346.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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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기놀이 1

 


  줄줄이 이어서 쌓는 놀이는 어디에서 어떻게 배웠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래저래 조각을 갖고 놀다 보면 으레 이처럼 이을 만하리라 느낀다. 큰아이는 더 어릴 적에도 이 비슷하게 죽 늘어놓으며 놀기도 했으니까. 다만, 작은아이가 태어나 이렇게 쌓은 ‘무언가’를 와르르 무너뜨리곤 하니, 이처럼 길게 잇는 쌓기놀이는 어쩌다 한 번 한다. 4346.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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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57

 


다큐사진이란 무엇인가
― Kazakstan nuclear tragedy
 유리 이와노비치 꾸이진(Yuri Kuidin)
 Юрий Иванович Куйдин
 반핵 생물학 협회 폰드,1997

 


  카자흐스탄이 카자흐스탄 아닌 ‘소련땅’이었을 때에 숱하게 벌어진 핵실험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담은 사진책 《Kazakstan nuclear tragedy》(반핵 생물학 협회 폰드,1997)는 유리 이와노비치 꾸이진(Yuri Kuidin/Юрий Иванович Куйдин) 님이 엮습니다. 1924년에 태어난 유리 꾸이진 님은 세미빨라찐스크(SEMIPALATINSK)에 있는 핵사격장을 없애는 일에 함께하면서 이 책을 선보였어요. 손수 ‘반핵 생물학 협회 폰드’를 열고, 손수 사진을 찍으며, 손수 글을 써요. 몸으로 부딪히는 삶을 고스란히 책 하나에 갈무리합니다.


  나는 러시아 핵실험이나 카자흐스탄 핵실험을 모릅니다. ‘카자흐스탄 핵실험’이라지만, 지난날 ‘소련’과 오늘날 ‘러시아’가 군대와 정치권력으로 밀어붙이는 전쟁놀이라고 해야 올바른 이름이 될 텐데요, 가만히 보면, 나는 한국에 핵무기가 몇 가지나 있는지 잘 모르고, 아직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가까이에서 만난 적조차 없어요. 한국 사회와 정치는 한국에 있는 핵무기를 밝히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와 정치는 일제강점기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돕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와 정치는 핵발전소를 없애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와 정치는 ‘핵발전소 쓰레기’를 앞으로 어떻게 할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외려, 낚시 좋아하는 이들은 핵발전소 둘레에서 흐르는 ‘열폐수(온배수)’ 때문에 낚시하기 좋다는 이야기를 하기까지 합니다.


  한국에서 다큐사진을 한다면서, 카자흐스탄 같은 나라로 찾아가서 ‘핵실험 피해’를 취재하거나 살피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쓸 만한 이가 얼마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다큐영화를 찍거나 다큐연속극을 찍겠다면서, 애써 ‘원폭피해 이야기’를 파헤치거나 다루려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두멧시골을 찾아간다든지, 어떤 분쟁지역을 찾아가는 사람은 제법 있지만, 한국에 있는 핵발전소 언저리에서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는 사람은 있을까요. 핵발전소뿐 아니라, 화력발전소 언저리에서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는 사람은 있는가요. 송전탑 언저리에서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비무장지대를 다니며 사진을 찍는 이는 제법 있습니다. 그런데, 비무장지대를 찍으면서도 ‘군대’와 ‘전쟁’과 ‘무기’를 슬기롭게 돌아보는 이는 퍽 드문 듯합니다. 비무장지대를 넘어, 젊은 사내를 바보로 만드는 군대를 톺아볼 줄 안다거나, 나라와 정치와 사회를 전쟁으로 내모는 흐름을 꿰뚫을 줄 안다거나, 무기산업이 경제와 문화에 어떻게 스며드는가를 깨달을 줄 아는 이는 몹시 드문 듯해요.

 

 

 


  내가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또 세미빨라찐스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면, 나로서는 아주 마땅히 ‘러시아 핵실험’을 둘러싼 아픔과 슬픔을 늘 바라보고 부대꼈을 테니까, 이 이야기를 글로도 쓰고 사진으로 찍으며, 연극이나 춤이나 노래로도 빚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카자흐스탄이라는 곳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에요. 북녘과 남녘과 일본에서도 이 같은 일은 엇비슷하게 일어나요. 입으로는 평화를 들먹이지만, 몸과 마음으로는 전쟁무기를 끔찍하게 만들고, 전쟁무기 끔찍하게 만드느라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은 갈가리 찢기거나 조각조각 부서져요. 그러니까, 카자흐스탄 아닌 미국이나 영국에서 태어났어도 이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으로 지낼 만하겠지요.


  다큐사진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이 다큐멘터리를 이룰까요. 다큐작가란 누구인가요. 어떤 삶과 넋으로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쓰거나 아로새기는가요.


  사회나 정치나 권력이나 전쟁을 다루어야 ‘다큐’이지 않습니다. 사회나 정치나 권력이나 전쟁을 다루려 한다면, 이에 앞서 사회를 읽고 정치를 읽으며 권력이나 전쟁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를 읽으려면 마을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를 읽으려면 내 작은 보금자리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권력이나 전쟁을 알아채려면 제도권 울타리와 톱니바퀴를 슬기로이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눈으로만 읽는 삶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하루일 수 있어야지요. 지식을 머리에 갖추는 사람이 아니라, 온마음 쏟아 살아내는 사람이어야지요.


  아이 낳아 돌보는 어버이 마음을 읽지 못하거나 몸으로 부대끼지 못한다면, ‘핵실험 방사능 때문에 갓난쟁이가 아프게 태어나 괴롭게 죽는 일’을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요. 숲바람 푸른 물결을 누리지 못하거나 마음 깊이 좋아하지 못한다면, ‘핵실험 방사능 먼지바람 때문에 시골마을 삶터가 깡그리 망가지는 일’을 뼛속으로 받아안지 못해요.

 

 

 


  지식을 갖추거나 자료를 챙긴대서 다큐 일을 하지는 못합니다. 지식이 없거나 자료가 없어도 다큐작가로 지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있어야 해요. 사랑이 있어야 해요. 따사로운 마음으로 내 이웃을 아낄 수 있어야 해요. 너그러운 사랑으로 내 동무와 어깨동무할 수 있어야 해요. 다큐사진은 고발사진이 아니거든요. 다큐사진은 선전사진이 아니에요. 다큐사진은 소리 높이 외치는 사진이 아닙니다. 다큐사진은 기록사진 또한 아니에요. 다큐사진은 내 이웃이 살아가는 하루를 보여주면서 삶빛을 밝히는 사진입니다. 다큐사진은 내 동무가 짓는 웃음과 눈물을 수수하게 나누면서 사랑씨앗을 심는 사진입니다.


  사진책 《Kazakstan nuclear tragedy》에는 아프고 슬픈 사람들이 나옵니다. 사진책 《Kazakstan nuclear tragedy》에는 수수하고 투박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모두, 유리 꾸이진 님한테 이웃이요 동무인 사람들입니다. 유리 꾸이진 님은 이들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지냅니다. 한솥밥 먹는 살붙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고 보면, ‘다큐’라고 하는 갈래로 사진을 나눕니다만, 정작 ‘다큐’라는 이름이 붙는 사진을 찍는 이들은 스스로 ‘다큐’라 생각하지 않고 ‘다큐’라 느끼지 않아요. 그저 함께 살아갑니다. 그예 한 마을 이웃으로 지냅니다. 이를테면 평택 이야기를 다루려 하는 이들은 평택 시골마을 이웃으로 터를 잡고 지내요. 강정마을 이야기를 다루려 하는 이라면 으레 강정마을 시골집 이웃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삶을 마주하겠지요. 김영갑 님은 오름하고 벗삼으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김기찬 님은 골목동네에서 이야기꽃 나누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최민식 님은 저잣거리에서 길밥 먹으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모두들 사진찍기 한길을 걷지만, 사진찍기에 앞서, 삶을 함께 누리는 길벗으로 지냈어요.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넘어가지 않아요. 이 사진감에서 저 사진감으로 옮기지 않아요. 그렇거든요. 다큐사진을 찍는 이들은 스스로 ‘다큐’라고 느끼지 않고 ‘다큐’라는 허울을 굳이 뒤집어쓰지 않아요. 함께 살아가는 사진이에요. 언제까지나 이웃하는 사진이고, 한결같이 동무하는 사진이에요. 곧, 다큐가 아닌 다큐이면서, 사진이 아닌 사진이에요. 사진쟁이인 만큼 손에는 사진기를 쥐지만, 몸과 마음이 하나되는 이웃입니다. 살림꾼 손에 부엌칼이랑 걸레가 있듯, 사진쟁이 손에 사진기 있어요. 골목 할아버지가 빗자루 들어 골목을 쓸듯, 골목 사진쟁이가 사진기 들어 골목을 찍어요. 시골 할머니가 호미 쥐어 밭을 일구듯, 시골 사진쟁이가 사진기 쥐어 밭을 찍어요.


  다큐사진이란 삶사진입니다. 다큐란 삶이니까요. 사진이란 또 삶이니, 다큐사진이란 ‘삶 + 삶’이라 할 만합니다. 따사로이 살아가고 넉넉하게 살아가면 다큐가 되고 사진이 됩니다. 사랑스레 살아가고 어여쁘게 살아가면 다큐가 되면서 사진이 돼요. 이주민이라든지 아동노동착취를 담았다고 하는 사진을 떠올려 보셔요. 빼어난 눈매로 현장을 찾아다녔기에 찍을 수 있던 사진이 아니에요. 어떤 공공기관에서 맡긴 일이기에 찍을 수 있던 사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유리 꾸이진 님도 카자흐스탄에서 살아가기에 카자흐스탄 핵실험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고 글로 쓰면서 책을 내지 않아요. 삶을 느끼고 삶을 누리며 삶을 사랑하는 이웃이요 벗이며 한식구로 지내는 넋이기에, 비로소 다큐사진 한 자리를 이룹니다. 4346.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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