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기계
노순택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71

 


내 사진을 가슴에 담아
― 망각기계
 노순택 사진
 청어람미디어 펴냄, 2012.5.3.

 


  사진기가 있어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으로 찍기에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조금은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편으로는 권력자들이 ‘얼마나 거룩한 전쟁을 하며 적군을 물리치는가’ 하고 떠벌이는 자리에 사진을 씁니다.


  연필과 종이가 있어 글을 씁니다. 글을 쓰기에 사람들이 살아온 발자취가 남아 ‘역사’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먼 뒷날 사람들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은 글을 읽으며 지난날 사람들 삶을 돌아봅니다. 그런데, 연필과 종이를 쥔 사람은 모든 사람들 모든 삶을 적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이야기를 글로 적는 사람이 드뭅니다. 신문을 보고 책을 살피면 쉬 깨달을 수 있어요. 거의 모두 도시 언저리 이야기요, 정치꾼 이야기입니다. 먼 옛날 조선이나 고려나 고구려 적 이야기도 이와 같아요. 권력자 둘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만 ‘역사’인 듯 남습니다.


.. 기록이란 여전히 강력한 것이지만, 기록되었다고 그것이 기억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 때로는 기록이 어떤 중요한 기억을 왜곡하거나 망각하게 할 수 있다는 회의마저 들었습니다 … 다만 오늘의 한국사회라는 시공간에서 오월 광주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 기억과 망각이 어떤 풍경으로 펼쳐지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  (203, 204쪽)


  사진으로 안 찍힌 모습은 무엇일까요. 사진으로 안 찍혔으니 믿을 만하지 않을까요. 사진으로 못 찍어 사람들한테 못 보여주면 ‘없는 이야기’가 될까요.


  글로 남긴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글로 안 남겼으니 읽을 만하지 않거나 들을 만하지 않을까요. 글로 안 남겨서 사람들한테 못 읽히면 ‘없는 삶’이 될까요.


  기록은 무엇이고 역사는 무엇일까요. 누구한테 도움이 되는 기록이고, 누구한테 이바지하는 역사일까요.


  경상도 밀양에서 싸우는 사람들 삶을 사진과 글로 담는 사람이 있고, 제주도 강정에서 싸우는 사람들 삶을 사진과 글로 담는 사람이 있어요. 경기도 평택에서 싸우던 사람들 삶을 사진과 글로 담은 사람이 있고, 새만금과 시화못에서 사진과 글로 이야기를 담은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사진과 글로 담은 곳에만 이야기가 있을까요. 사진과 글로 담지 않거나 담지 못한 곳에는 이야기가 없을까요.

 

 

 


.. 투쟁의 주체는 참 평범한 사람들, 묵묵히 자신의 삶을 일구어 가던 노동자와 학생들이었지요. 그들은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이들이었습니다 … 저마다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정사진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훼손되는 그 풍경은, 학생 시절 숨죽이며 보았던 학살의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했어요. 계엄군의 총칼에 짓이겨진,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고 다짐하게 했던 그 얼굴들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 물론 그들이 말을 걸었다 해서, 제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다만 이런 생각은 했습니다. 일그러지고 녹아내리는 것은 저 사진들만이 아니라, 산 자들의 삶 자체다 ..  (205, 211, 212쪽)


  나는 1988∼1993년 사이에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언제나 학교길에서 폐수처리장 곁을 걸어서 지나가야 했습니다. 또는 화학공장 옆을 걸어서 지나가야 했습니다. 1982∼1987년 사이에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는 식품공장 옆 폐수가 흐르는 도랑길을 걸어서 지나가야 했습니다. 이러면서 연탄공장 울타리 옆으로 지나가며 탄가루를 들이마셔야 했고, 인천부두에서 짐을 실어나르는 커다란 짐차가 내뿜는 배기가스를 고스란히 먹어야 했습니다. 내 동무는 유리공장 옆에서 유리가루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제철소 옆에서 쇳가루를 먹으며 놀던 동무도 있어요. 기찻길 옆에서 하루 내내 시끄러운 소리에 시달리면서 탄가루를 그득그득 마신 동무도 있고요.


  요즈음 같으면 초등학교 옆에 연탄공장 못 짓겠지요. 초등학교 바로 옆에 식품공장을 지어 폐수를 하루 내내 들이부을 수 있을까요. 중학교나 고등학교 바로 앞에 폐수처리장이나 화학공장 있어도 될까요. 다만, 내가 다닌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화학공장이 먼저 들어선 뒤 그 옆에다 학교를 지었습니다. 폐수처리장도 학교보다 먼저 있었어요. 그러니까, 문교부와 시 교육청에서는 공장과 폐수처리장으로 둘러싸인 한복판에 학교 허가를 내준 셈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다닌 중·고등학교에 앞서 그곳에는 여중과 국민학교가 나란히 있었어요. 두 학교가 버젓이 있었어도 화학공장과 폐수처리장이 그곳에 들어선 셈이랄까요.


  그러면 유리공장과 제철소와 연탄공장하고 담벼락 맞붙은 자리에서 살던 내 동무들 살림집은 무엇일까요. 공장에서 일하는 어버이를 두었으니 이런 자리에 집을 짓도록 했을까요. 공장에서 온갖 가루를 먹고 집에서도 갖은 가루를 마시는 삶은 어떤 삶이라 할 만할까요. 동무네 집에 놀러가서, 또 동무네 집과 가까운 자리에서 나란히 이 가루 저 가루 그 배기가스 마시는 삶이란 새삼스레 무엇이라 할 만할까요.


  이제 와 돌아보면, 그무렵 학교와 집 둘레에 그득그득 넘치던 공장을 놓고 옳거니 그르거니 따진 어른은 못 보았습니다. 그무렵에는 ‘공해’를 이야기하지 않았고, ‘인권’이라는 말도 학교에서 가르친 적 없습니다. 그무렵 학교는 주먹과 몽둥이로 국민학교 아이들조차 두들겨팼고 어마어마하게 거친 말로 아이들을 윽박지르기 일쑤였습니다. 다만, 이런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사람이 없으며, 이런 이야기를 글로 쓴 사람이 없어요. 신문에 이런 이야기 실린 적 없고, 책에서 이런 삶을 역사로 다룬 적 없어요.


..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빈번해진 대북삐라 살포현장에는 ‘광주폭동의 진상을 밝힌다’, ‘5·18의 화려한 사기극을 고발한다’ 따위의 자극적인 유인물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한미우호증진협의회라는 단체는 유네스코가 광주항쟁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걸 막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본부에 청원서를 보내기도 했는데,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600명의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됐고, 그 간첩들이 무기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고 합니다. 이는 ‘전두환을 사랑하는 모임’의 온라인 카페에도 상세하게 게시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 우리는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 모두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겁니다 ..  (208, 214쪽)

 


  서울사람은 인천 앞바다가 똥바다라 말하지만, 바로 서울로 올려보내는 가공식품 만드는 공장이 인천 앞바다에 버젓이 있으면서 날마다 쓰레기물(폐수)을 엄청나게 갯벌로 퍼부으니 인천 앞바다가 똥바다 되어요. 서울사람이 눈 똥오줌을 하수처리장 거쳐 인천 앞바다로 버리니 인천 앞바다는 더 지저분한 똥바다 됩니다. 이런 모습 저런 일을 겪으며 어린 나날 생각했어요. 국민학교 여섯 해 다니는 동안 날마다 식품공장 폐수도랑 곁을 지나며 생각했어요. ‘이렇게 쓰레기물 버리는 저 식품공장 이름이 붙은 회사 가공식품을 어떻게 먹을까?’ ‘집 옆에 식품공장이 없어, 식품공장에서 쓰레기물과 매연을 얼마나 만이 내버리는 줄 모르니 아무렇지 않게 가공식품 사다 먹을까?’


  연탄공장 옆을 지나며 언제나 손으로 입과 코를 막습니다. 입과 코를 막고 연탄공장 옆을 지나가도 재채기가 그치지 않습니다. 추우니 연탄으로 불을 때야 할 텐데, 연탄공장이 없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골에서라면 나무를 땐다는데, 도시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헤아려 보았습니다. 연탄을 찍을 적부터 이렇게 탄가루 날려 숨이 막히는데, 연탄을 태우며 연탄내음 때문에 자칫 숨이 막힐 수 있다는데, 왜 깨끗하며 좋은 에너지 만드는 일에는 정부와 기업이 힘을 안 쓰는지 알쏭달쏭했어요. 왜 어른들은 그저 돈 버는 일만 하는지 아리송했어요.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다니는 동안 폐수처리장 옆을 날마다 지나다닐 적에도 자꾸 생각했어요. ‘화학공장 폐수처리장을 저렇게 넓게 두어야 한다면, 화학공장에서는 무엇을 만들까. 저 폐수처리장에 가둔 쓰레기물을 한동안 두다가 바다로 흘려보내는데, 이렇게 되면 인천 앞바다뿐 아니라, 저 쓰레기물이 거쳐 지나갈 서해 바닷가는 모조리 더러워지지 않을까.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조개와 바지락과 게를 아무렇지 않게 먹나. 인천 앞바다에서 멀리 떨어지면 다 괜찮나. 저 쓰레기덩이는 인천 앞바다뿐 아니라 남해에도 태평양에도 온 지구에도 그대로 돌고 돌며 모두 망가뜨리지 않나.’


  중국에서 끝없이 새로 짓는 공장마다 바다에 쓰레기를 버린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버린 쓰레기는 우리 서해 바닷가로 닿는다고 해요. 한국에서 버린 쓰레기는 동해를 거쳐 일본 서쪽 바닷가로 닿는다고 해요. 쓰레기는 사라지지 않아요. 자리를 바꿀 뿐이에요.


  러시아에서 터진 체르노빌 핵발전소 방사능은 러시아뿐 아니라 핀란드와 스웨덴과 아이슬란드까지 퍼졌다고 해요. 아마 영국에도, 아르헨티나에도 미국과 캐나다에도 브라질에도 퍼졌겠지요. 일본 후쿠시마에서 터진 핵발전소도 그렇지요. 바닷물과 하늘을 거쳐 온 지구별에 골고루 퍼졌으리라 느껴요.


  서울에서 달리는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가스도 이와 같아요. 서울에서만 맴돌지 않아요. 춘천으로 대전으로 퍼지고, 양구로 평양으로 퍼져요. 온 지구별에 서울 자동차 배기가스가 감돌아요.


.. 5·18재단의 일을 종료하고 나니, 제겐 광주 작업을 더 해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언제 일단락지어야 할 지 알 수 없었지만, 오월 광주를 좀더 오래 바라보고 좀더 오래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조급함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매해 시간이 허락될 때, 막연히 광주에 들르곤 했습니다 ..  (209쪽)

 

 


  노순택 님 사진책 《망각기계》(청어람미디어,2012)를 읽으면서 온갖 생각이 갈마듭니다. 노순택 님은 1980년 전라도 광주 이야기와 삶을 사진으로 되새기는 일을 했는데, 나는 뜻밖에도 전라도 광주 아닌, 내가 태어나고 자라며 본 인천 바닷가 공장들 이야기와 삶이 떠오릅니다.


  사람들은 잊어버리는 기계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아이들을 ‘잊어버리는 기계’로 만들어요. 오직 대입시험 문제풀이만 머릿속에 가득 집어넣고는, 이웃과 삶과 사랑은 송두리째 잊는 기계로 내몹니다. 이 나라 학교교육은 대학교바라기로 아이들을 몰아붙이면서, 꿈과 빛과 지구별을 몽땅 잊는 노예로 만듭니다.


.. 타인의 고통 앞에서, 사진가는 카메라 뒤에 숨은 채 비겁하게 셔터를 누르고, 사악하게 조형성을 추구합니다. 이 ‘비겁하고’, ‘사악한’ 과정은 대단한 윤리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진이 생산되는 지극히 기계적인 과정일 뿐입니다. 사진을 찍지 않는다면 모를까, 찍기로 판단했다면 그 물리적이고 조형적인 과정을 피할 수 없지요 ..  (217쪽)


  내 사진을 가슴에 담습니다. 내가 살아온 나날을 마음속에 담습니다. 어느 누구도 내 어린 날 삶을 사진으로 찍어 준 적 없고 글로 써 준 적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가슴에는 내 어린 날 삶이 바로 코앞에서 펼쳐지는 영화처럼 눈에 선하게 나타납니다. 어느 공장에서 어떤 쓰레기를 내다버렸는지, 어느 폐수처리장에서 어떤 냄새가 코를 찔렀는지, 어느 학교에서 어느 교사가 우리들한테 거친 말 퍼붓고 주먹으로 얼굴을 갈겼으며 야구방망이와 골프채가 부러지도록 허벅지와 엉덩이를 두들겨팼는지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사진기를 쓰지 않았어도 내 마음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글을 쓰지 않았어도 내 가슴은 글을 썼습니다.


  1980년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그날 그곳 이웃과 살붙이와 동무, 그리고 누구보다 이녁 스스로 누린 삶과 이야기를 또렷하게 마음으로 담았겠지요. 언제까지나 떠오르는 빛으로 가슴에 아로새겼겠지요.


  추모공원 짓는대서 추모가 되지 않아요. 영정사진을 무덤 앞에 붙인대서 떠난 넋을 기리지 못해요. 왜냐하면, 마음으로 담지 않으면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로 추모공원 짓는들 어떠한 추모도 되지 못합니다. 가슴으로 아로새기지 않으면 훈장을 달거나 보상금을 쥐어 준대서 떠난 넋을 기리지 못합니다.


  ‘망각기계’를 만드는 한국 사회 얼거리요, ‘망각기계’를 낳는 한국 교육 틀거리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이런 나라에서, 이런 학교에서,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거나 가르칠까요. 이 나라 어른들은 어떤 꿈을 키우면서 어떤 사랑을 아이들한테 물려주려 하나요. 이 나라에는 참말 꿈이나 사랑이 있기나 있는가요. 이 나라에서는 참말 빛이나 그림을 그릴 수 있기나 있는가요. 4346.12.1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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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3-12-14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기를 쓰지 않았어도 내 마음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글을 쓰지 않았어도 내 가슴은 글을 썼습니다... 짧은 글이 더 큰 생각을 불러 왔군요. 잘 읽고 갑니다.

숲노래 2013-12-14 09:03   좋아요 0 | URL
사진기를 써도 다 사진이 아니듯,
사진기를 안 써도 사진이 되어요.
마음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잠 안 오는 아이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어제 못 마친 일을 한다. 서울시에서 마련한 공문서 1100건을 놓고 이 글에 쓴 잘못되거나 아쉽거나 바로잡을 말을 손질하는 일을 두 사람이서 맡아 하는데, 어제는 아이들과 복닥이며 제대로 못했다. 아침에 어제 몫 보내야 하기에 바지런히 책상맡에 앉는데 다섯 시 즈음 큰아이가 잠에서 깨어 아버지 곁에 붙는다. 아무래도 안 좋은 꿈을 꾼 듯하다. 하는 수 없이 셈틀을 끄고 큰아이를 잠자리에 누인 뒤 옆에 나란히 눕는다. 큰아이를 달래면서 등허리를 펴다가 나도 깜빡 잠든다. 살살 동이 틀 무렵 조용히 일어난다. 다시 셈틀을 켜고 일을 하려니, 이제는 작은아이가 잠을 실컷 자고 일어난다. 작은아이 쉬를 누인다. 작은아이는 잠을 달게 자고 일어난 만큼 아버지 곁에 달라붙지 않는다. 일손을 마저 놀린다. 어제 몫은 곧 끝내고 보낸다. 이제 오늘 몫 해야 하겠지. 조금 뒤 큰아이 깨면 둘 다 배고프다 할 테니, 조금 더 일을 한 뒤 아침을 차려야겠다. 하나를 재우면 다른 하나 깨고, 다른 하나 놀려서 재우면 또 다른 하나가 깨고, 이러기를 세 해째 되풀이하니 늘 잠이 모자란데, 작은아이가 몇 살 더 자라면, 이런 일도 앞으로는 누리지 못할 즐거움이 될까. 4346.12.1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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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레놀이 1

 


  곁님 뜨개실을 집에서 서재도서관으로 옮긴다. 집을 넓게 쓰려고 뜨개질 담은 상자를 여러 차례 나른다. 아이들은 서재도서관에 뜨개실 상자를 내리고 빈 수레가 되면 척척 올라탄다. 처음에는 저희가 수레를 끌겠다며 용을 쓰지만 꼼짝조차 안 한다. 힘을 더 길러야지. 그런 힘으로 어떻게 끌겠니. 그저 수레 뒷자리에 잘 타면서 놀아라. 4346.12.1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놀이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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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놀이 1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며 놀다가, 발가락에도 색연필 끼우면 어떨까 하고 생각을 해 보나. 그럴 테지. 나도 어릴 적에 발가락에 연필을 끼우고 그림놀이를 했으니. 아이라면 참말 손가락 못지않게 발가락을 써서 꼼지락꼼지락 무언가 하고 싶으리라 본다. 재미있으니까. 4346.12.1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놀이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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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755) 침묵의 1 : 침묵의 추수

 

침묵의 추수였다 … 그들이 든 낫이 햇빛이 반짝였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무도 노래하지 않았다
《민퐁 호/최재경 옮김-아버지의 쌀알》(달리,2009) 17쪽

 

  ‘추수(秋收)’는 ‘가을걷이’로 고쳐씁니다. 한자말 ‘추수’는 그예 토박이말 ‘가을걷이’를 한자로 옮긴 낱말일 뿐입니다. 토박이말 ‘한가위’를 한자로 옮겨 ‘중추절(仲秋節)’이나 ‘추석(秋夕)’으로 적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한자말 ‘침묵(沈默)’은 “(1) 아무 말도 없이 잠잠히 있음 (2) 정적(靜寂)이 흐름 (3) 어떤 일에 대하여 그 내용을 밝히지 아니하거나 비밀을 지킴 (4) 일의 진행 상태나 기계 따위가 멈춤”, 이렇게 네 가지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째 뜻풀이에 나오는 ‘정적(靜寂)’은 한국말로 ‘고요’를 뜻해요. 셋째 뜻풀이는 “입을 다물다”를 가리키고, 넷째 뜻풀이는 “잠”이나 “멈춤”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말이 없다”와 “고요하다”와 “입을 다물다”와 “잠자다/멈추다”라 말할 대목에 한자말 ‘침묵’이 끼어든 셈입니다.

 

 침묵의 추수였다
→ 말없는 가을걷이였다
→ 아무도 말하지 않는 가을걷이였다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을걷이였다
 …

 

  한자말 ‘침묵’ 둘째 풀이에 나오는 ‘정적(靜寂)’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고요하여 괴괴함”을 뜻한다고 나옵니다. ‘괴괴하다’를 다시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쓸쓸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고요하다”를 뜻한다고 나와요. 그러니까, “고요하여 괴괴함”처럼 뜻풀이를 적는다면 같은 소리를 되풀이 적은 셈입니다. “고요하거나 괴괴함”처럼은 적어야 올바릅니다.


  그런데 ‘조용’과 ‘고요’가 어떻게 다른가 싶어 거듭 한국말사전을 뒤적이니, ‘조용’을 풀이하면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함”을 가리킨다고 나오고, ‘고요’를 풀이하면서 “조용하고 잠잠한 상태”를 나타낸다고 나옵니다.


  한자말 뜻풀이나 토박이말 뜻풀이 모두 엉망진창이라고 할까요. 한자말이건 토박이말이건 엉터리로 뜻을 달아 놓는달까요.

 

 모두 조용한 가을걷이였다
 조용한 가을걷이였다
 고요한 가을걷이였다
 소리가 사라진 가을걷이였다
 …

 

  우리 한국말사전이 언제부터 이처럼 돌림풀이에 갇혔을까 궁금합니다.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다 보면, 어느 결엔가 느낌이 잡힌다고 생각해서 이처럼 얼렁뚱땅 붙였는지 궁금합니다. 뜻이나 느낌이 퍽 비슷하다 하더라도 똑같은 낱말이 아닌 ‘조용’과 ‘고요’인데, 이렇게 뜻을 달면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우리 말을 어찌 되새기거나 헤아릴 수 있는가 알쏭달쏭합니다.


  낱말 한 마디라 하더라도 더 애쓰고 돌아보면서 다루어야 하지 않는가 싶어 서글픕니다. 비슷한 낱말이라 한다면 더더욱 힘쓰고 살피면서 다루어야 하지 않느냐 싶어 안타깝습니다.

 

 침묵이 흐르다 → 말이 없다 / 조용하다
 침묵을 깨뜨리다 → 고요를 깨뜨리다
 침묵에 빠지다 → 고요에 빠지다 / 입을 못 열다
 침묵으로 일관하고 → 입막음을 지키고 / 입을 다물고
 오랜 침묵을 깨고 → 오랜 잠을 깨고 / 오랜만에 기지개를 켜고

 

  낱말풀이가 올바를 때라야 말씀씀이 또한 올바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낱말풀이를 제대로 가누고 슬기롭게 엮어야 글씀씀이 또한 슬기로울 수 있다고 느낍니다. 말과 글을 옳고 바르게 세울 때, 이러한 말과 글에 담을 생각 또한 옳고 바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옳고 바르게 세우지 않는 말과 글이라 한다면, 우리 넋과 얼은 나날이 비틀리거나 기울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다만, 한자말 ‘침묵’을 쓰고 싶다면 써야 할 테지요. 쓰고 싶으면 쓰더라도 말투와 말씨와 말틀에 어그러지지 않게끔 가다듬어야지요. 낱말을 알뜰살뜰 가려쓰지 못한다 하더라도, 낱말을 엮는 매무새는 알뜰살뜰 추스를 수 있어야지요.

 

 침묵의 봄
→ 고요한 봄 / 조용한 봄
→ 소리없는 봄 / 소리가 사라진 봄
→ 죽은 봄 / 깨어나지 않는 봄
 …

 

  그러고 보면, 낱말 하나하나 제대로 못 살피는 매무새이기 때문에, 말투든 말씨든 말틀이든 뒤죽박죽이 되는지 모릅니다. 낱말 하나하나 곰곰이 돌아보는 매무새가 될 때에, 말투며 말씨며 말틀이며 아름다이 다스리고 살갑게 다독일 수 있구나 싶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침묵의 봄”을 이야기하고 말았습니다. 레이첼 카슨 님이 쓴 책, “silent spring”을 낱말뜻 그대로 “조용한 + 봄”으로 풀어내지 못하고 “침묵의 봄”으로 풀어내고 말았습니다. 뛰어나거나 훌륭하다는 번역가들이 “고요한 봄”이든 “소리없는 봄”이든 “죽은 봄”이든 “깨어나지 못하는 봄”이든 생각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잠든 봄 / 잠들어 버린 봄
 잠에 빠진 봄 / 잠에서 허덕이는 봄
 잠을 깨지 못하는 봄
 어두운 봄 / 슬픈 봄
 …

 

  우리 말과 글에서 생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 말과 글에서 사랑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우리 말과 글에서 빛줄기가 스러져 버렸습니다. 우리 말과 글에서 믿음이 동댕이쳐졌습니다. 우리 말과 글에서 슬기가 빛바래고 말았습니다. 우리 말과 글에서 맑음과 고움과 부드러움이 잠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말은 아직 우리 말다움을 찾지 못합니다. 잠든 채 깨어나지 못합니다. 잠에서 허덕이면서 어두운 나날을 보냅니다. 소리도 느낌도 냄새도 맛도 없어지고 만 우리 말은, 끝끝내 슬픈 나날에 빠져 울먹입니다. 4342.5.8.쇠/4346.12.1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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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가을걷이였다 … 그들이 든 낫이 햇빛이 반짝였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무도 노래하지 않았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113) 침묵의 2 : 침묵의 순간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전한 침묵의 순간은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리 폴슨/김민석 옮김-손도끼》(사계절,2001) 52쪽

 

  ‘지금(只今)까지’는 ‘이제까지’나 ‘여태까지’로 다듬고, ‘완전(完全)한’은 ‘오롯이’나 ‘아주’로 다듬습니다. “-의 순간(瞬間)”은 “-한 때”나 “-한 적”으로 손보고, ‘경험(經驗)해’는 ‘겪어’로 손보며, “없다는 사실(事實)을 깨달았다”는 “없는 줄 깨달았다”나 “없다고 깨달았다”나 “없었네 하고 깨달았다”로 손봅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전한 침묵의 순간은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때는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때는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죽은 듯이 고요한 적은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적은
 …

 

  보기글을 보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대목만 살리면 넉넉합니다. 글 뒤쪽에 더 힘주어 말하고 싶다면 “소리가 모두 사라진 때”라든지 “죽은 듯이 고요한 때”처럼 적을 만합니다.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는 때가 어떤 모습인가를 가만히 마음속으로 그리면서 이야기를 풀면 됩니다. 4346.12.1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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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살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죽은 듯이 고요한 때는 겪은 적이 없다고 깨달았다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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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3 05: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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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3 07: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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