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4.7.29.

 : 농약과 제비



- 어제 면소재지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는 길에 농약을 뿌리는 이웃마을 할매와 할배를 곳곳에서 만났다.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 달리다가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 어쩜 이리도 농약을 억척스레 뿌려대는지. 참말 오늘날 여느 시골에서는 여느 할매와 할배가 뿌려대는 농약 때문에 고단하다. 숨이 막힐 뿐 아니라, 웬만한 물은 함부로 마실 수 없다. 시골 할매와 할배도 알기에, 이녁 스스로 냇물이나 우물물이나 땅밑물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 두멧자락까지 댐에서 수도관을 이어서 수도물을 마시고 싶다고들 한다. 그렇게 농약을 뿌려대어 땅밑으로 농약이 스며드니, 어느 시골에서 ‘여느 흐르는 물’을 그대로 마시고 싶어 하겠는가. 우리 식구가 살아가는 마을에서 ‘여느 흐르는 물’을 그대로 마시는 집은 드물다고 느낀다. 거의 모든 집이 수도물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끓여서 보리차’로만 마시지 싶다.


- 어제 자전거를 달릴 적에 농약에 죽은 제비 한 마리를 길 한복판에서 보았다. 그러나 이 제비를 건사해서 논둑이나 풀밭으로 옮기지 못했다. 이곳저곳에서 뿌려대는 농약물결에 숨을 쉴 수 없었기에 재빨리 지나가야 했다.


- 하루가 지난 오늘, 다시 제비 주검 옆을 지나간다. 제비는 하루 사이에 여러 자동차한테 짓밟혀 마른오징어처럼 납작쿵이 되었다. 아, 아파라. 자전거를 옆으로 달리며 지나간다. 그러나, 그냥 갈 수 없다. 마음이 아파서 걸린다. 자전거를 돌린다. 샛자전거에 앉은 큰아이가 묻는다. “아버지 어디 가요?”


- 자전거수레에 놓은 빨래집게를 써서 길바닥에 찰싹 들러붙고 만 제비 주검을 떼어낸다. 주검을 풀밭으로 옮긴다. “제비 죽었는데 괜찮아요?” “괜찮아. 앞으로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답게 다시 태어나서 살아갈 테니까.”


- 그 많던 제비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 식구가 처음 고흥에 들어올 적에는 어디를 가든 제비를 수백 마리씩 보았는데, 요새는 몇 마리 보기조차 힘들다. 곧 팔월이 되니 제비가 태평양을 가로질러 중국 강남으로 돌아갈 때가 될 텐데, 몇 마리나 돌아갈 수 있을까. 이듬해에 제비는 다시 한국으로 찾아올 수 있을까.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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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글 읽기

2014.7.28. 큰아이―연필놀이



  그림엽서에 쪽글을 적어서 건넨다. 사름벼리는 쪽글에 적힌 글을 야무지게 읽으면서 곱게 깍두기공책에 옮겨적는다. 천천히 꾹꾹 눌러서 글씨를 옮겨적던 아이가 비로소 다 옮겨적은 뒤 아버지를 부른다. “다, 했어요!” 그러고는 마룻바닥에서 연필을 갖고 논다. 아이들은 다 연필을 이렇게 갖고 놀까? 나도 아이였을 적에 글씨쓰기를 하다가 곧잘 연필을 거꾸로 세워서 바닥에 콩콩 튀기며 놀았다고 떠오른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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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파워문화블로그


  싸이월드가 한창 뜰 적에 미니홈피라는 것을 굳이 만들거나 챙기지 않았다. 네이버나 다음에 블로그가 생길 때에 블로그를 애써 만들거나 챙기지 않았다. 나는 ‘모임’을 좋아하기에, 모임을 인터넷에 열어 게시판을 차곡차곡 나누어 바지런히 글을 올리기를 좋아했다. 도메인을 사서 홈페이지를 따로 만들면 훨씬 수월할 텐데, 인터넷 도구 만지기에 마음을 쓰지 않겠노라 여기며 프리챌과 싸이월드와 네이버 카페 기능에 홈페이지를 빌어서 썼다. 2006년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네이버 블로그하고 알라딘 서재를 썼다. 사람들이 흔히 드나드는 곳에 방을 마련하는 일이 괜찮겠다 여겼다. 오마이뉴스에 3000건이 넘는 기사를 썼지만, 정치와 경제로 돈벌이를 하는 매체에 글을 주는 일은 아무래도 아름답지 못하다고 여겨 그만두기로 했다. 이때가 2010년 겨울이다. 그런데 알라딘 서재도 서재를 지키는 사람들 마음을 알라딘 관리자가 알뜰히 헤아리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인터넷책방 가운데 한 곳에만 글을 써서는 안 되겠다고 느꼈다. 2012년 여름이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예스24 블로그에도 글을 함께 쓰기로 했다.

  똑같은 글을 네 군데에 올리기란 만만하지 않다. 그렇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이녁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 아니라면 굳이 찾아가지 않는다. 내가 내 홈페이지를 따로 만들지 않은 탓에, 내 글을 읽는 분한테 익숙하다 싶은 곳에 스스로 찾아가서 글을 올리는 틀이 되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카톡이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하지 않는다. 아이들과 시골에서 지내며 살림을 도맡는 터라, 그런 곳을 들여다볼 틈이 1초조차 없기도 하지만,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그런 곳까지 건사할 수 없다고 느낀다. 아무튼, 인터넷책방 알라딘과 예스24 두 군데에 글을 나란히 올리면서 여러모로 재미있는 모습을 보곤 한다. 이 가운데 하나는, 예스24에서 2014년 8월부터 나를 ‘파워문화블로그’로 뽑아 주었다. 나는 ‘문화’를 그리 달가이 여기지는 않으나, ‘문화블로그’라는 이름은 어쩐지 예쁘다고 느낀다. 앞에 붙은 ‘파워’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창피하지.

  글을 쓰고 싶으니 글을 쓸 뿐이다. 네이버이든 알라딘이든 예스24이든 대수로울 것이란 하나도 없다. 자리를 마련해 주는 데가 있으니, 나로서는 멍석을 들고 내 자리를 살펴서 차곡차곡 글을 여미어 내놓는다.

  그나저나 예스24에서 파워문화블로그로 있으려면 ‘페이스북 글보내기’도 해야 한다고 하네. 얼결에 페이스북 계정을 꾸린다. 다만, 계정을 만들어도 ‘글보내기’만 할 뿐, 그곳을 들어갈 일은 없겠지. 더운 칠월이 저문다. 4347.7.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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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끈



  아이들과 읍내로 마실을 가는 길이다. 군내버스를 타고 가는데, 포두면에서 초등학교 가시내가 넷 탄다. 아침 일찍 부산을 떨며 나왔기에 머리를 감은 뒤 미처 말리지 못한 채 길을 나섰다. 읍내에 닿기 앞서, 아직 덜 말랐지만 내 긴 머리카락을 머리끈으로 묶는다. 군내버스 맨 뒤에 앉은 포두면 초등학교 가시내들이 문득 “빨간 색.”이라 말한다. 응? 아, 내 머리끈이 빨간 빛깔이라는 소리로구나. 그런데 빨간 빛깔이 뭐 어때서?

  얘들아, 너희들 아니? 한겨레뿐 아니라 지구별 어느 나라에서든 다들 머리카락을 길게 둔 채 살았어. 머리를 깎지 않았단다. 오늘날처럼 ‘사내는 짧은머리’요 ‘가시내는 긴머리’라고 하는 틀에 박힌 생각을 하지 않았어.

  시골에서 아저씨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릴 뿐 아니라, 긴머리를 빨간 빛깔 머리끈으로 묶으니 ‘볼 만할’까. 아니면 ‘안 볼 만할’까. 일곱 살 큰아이 긴머리는 흙빛 머리끈으로 묶어 준다. 4347.7.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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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알라딘 - 만화가 이우일의 폴라로이드 사진집
이우일 사진.글 / 호미 / 2007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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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83


사진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니
― 굿바이 알라딘
 이우일 사진
 호미 펴냄, 2007.12.31.


  2014년에 일곱 살을 누리는 우리 집 큰아이는 갓 태어난 뒤부터 아버지 곁에서 사진에 찍힙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날마다 함께 지내면서 날마다 사진을 찍으니, 나는 이 아이들을 맨 처음 사진으로 찍던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 모습도 잊히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아이들을 놓고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떠올릴 수 있습니다.

  큰아이가 갓난쟁이였을 무렵, 이 아이는 날마다 저를 빤히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여섯 달쯤 될 무렵인데, 볼볼 기어서 아버지 사진기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입을 맞춘다기보다 입에 넣어 맛을 보고팠구나 싶지만, 사진기는 아기 입보다 훨씬 크니 아기한테 잡아먹히지 않았습니다. 큰아이는 아버지 손전화를 쪽쪽 빨아서 먹느라 하나를 날려 보냈지만, 사진기는 날려 보내지 못했습니다. 돌을 앞두고 두 다리로 설 수 있던 큰아이는 아버지 사진기를 영차 하고 들어 목에 걸어서 놀기도 했습니다. 사진기 몸통과 렌즈 무게가 이 킬로그램 가까이 되었으니, 갓난쟁이로서는 대단히 무거운 것을 들고 목에 걸어서 논 셈입니다.

  나는 큰아이한테 ‘사진찍기’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디지털사진기를 쓰면서 디지털사진기에 찍힌 모습을 화면으로 어떻게 보는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큰아이는 저 혼자 오물조물 만지더니 아버지 사진기로 사진을 찍습니다. 두 돌이 되기 앞서 ‘사진읽기’를 합니다.

  2014년에 네 살인 작은아이는 누나와 달리 아버지 사진기에 그리 눈길을 안 둡니다. 네 살에 이른 요즈음에 가끔 아버지 사진기를 슬쩍 집어들어 갑자기 수십 장을 촤라락 찍어대고는 얌전히 내려놓습니다.






  만화를 그리는 이우일 님이 내놓은 사진책 《굿바이 알라딘》(호미,2007)이 있습니다. 2007년에 나온 책이니 일곱 해만에 이 사진책을 알아보았습니다. 고맙게 아직 판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진책 《굿바이 알라딘》을 보면 이우일 님 딸아이가 나오는데, 이때까지는 아주 어린 아이였다면, 이때부터 일곱 해가 흐른 요즈음은 이우일 님 딸아이는 훌쩍 컸겠지요. 아가씨가 다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폴라로이드 sx-70랜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는 것, 그것으로 단 한 장의 사진을 얻는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으니 공들여 단 한 장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머리말).” 하고 흐르는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사진도 하나요 이야기도 하나입니다. 그리고, 아이도 하나요 어버이도 하나입니다. 우리 집에는 두 아이가 있습니다만, 큰아이는 큰아이대로 오직 하나뿐인 오롯한 숨결이고, 작은아이는 작은아이대로 오직 하나인 옹근 숨결입니다. 아이들한테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직 하나인 어머니요 아버지입니다.

  이우일 님은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쓰셨는데, 폴라로이드 사진기가 아니더라도, 사진은 언제나 하나만 얻습니다. 디지털사진기이든 여느 필름사진기이든 이와 같습니다. 원본파일과 원본필름이 있으면 언제든지 ‘복제’를 한다지만, 복제해서 다시 만드는 사진은 처음 만든 사진하고 빛과 느낌과 이야기가 달라요.

  다시 말하자면, 어떤 사진기를 쓰든, 우리는 오직 ‘사진을 한 장 얻’습니다. 오직 한 장만 얻는 사진찍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자꾸 새롭게 사진을 찍습니다. 한 번 찍은 사람을 다시 찍습니다. 한 번 찍은 나무와 꽃을 다시 찍습니다. 한 번 찍은 백두산과 지리산을 다시 찍습니다. 한 번 찍은 헌책방과 골목길을 다시 찾아가서 한참 거닐거나 누린 뒤 다시 찍습니다.

  사진은 스스로 찍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사진은 스스로 만날 때마다 새롭습니다.

  이우일 님은 이녁이 쓴 사진기와 필름을 놓고 “그게 ‘타임 제로’ 필름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온도가 적당하면 포근하고 아련한 느낌의 사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머리말).” 하고도 이야기합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저는 디지털사진기 가운데 ‘캐논350D’를 무척 오랫동안 썼습니다. 사진기 부속이 모두 낡고 닳아 두 번 갈았는데, 더는 고쳐서 쓸 수 없다고 느껴, 이제는 ‘캐논100D’를 씁니다. 예전에 한 가지 사진기로만 오래 쓴 까닭은 그 사진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빛결이 있기 때문이에요. 다른 사진기로는 도무지 그 빛결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성능이나 화소가 훨씬 높은 다른 사진기로 찍어 보아도, 참으로 그 빛결이 나오지 않더군요.

  필름사진기도 기계마다 빛결이 다릅니다. 사진기 만든 회사마다 빛결이 살짝 다르고, 같은 회사 사진기라도 기종마다 빛결이 달라요.

  생각해 보면 누구나 알리라 느껴요. 똑같은 빛결이 나올 사진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 다른 사진기를 저마다 제 사진감에 맞추어서 씁니다.

  같은 곳에 서서 같은 것을 바라볼 적에도, 스스로 어떤 마음이고 눈길인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 다른 이야기를 짓습니다. 같은 곳에 서서 같은 것을 사진으로 찍을 적에도, 스스로 어떤 생각이고 눈빛인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이야기가 깃든 사진이 태어납니다.

  이우일 님은 “사진을 찍을 때 무엇으로 어떻게 찍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사람이 찍는 것이니 찍는 이의 마음과 시선이 가장 중요하다고(머리말).” 하고 말합니다. 그림을 그릴 적에도 늘 이와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그림결로 그림을 그리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연필로 그림을 그리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든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든 벽에 그림을 그리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대목을 담을 때에 ‘그림’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어떤 사랑인가 하는 대목을 실을 때에 ‘글’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어떤 꿈인가 하는 대목을 얹을 때에 ‘사진’입니다.

  사진책 《굿바이 알라딘》을 천천히 읽은 뒤 덮습니다. 이우일 님은 이녁 사진에 더러 말을 몇 마디 붙입니다. 애써 말을 안 붙여도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알 만합니다. 굳이 말을 붙였기에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한결 잘 알 수 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반짝거리는 물건에 초점을 맞추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58쪽).”와 같이 적은 글월에 밑줄을 긋습니다.

  즐겁고 싶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노래하고 싶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시나요? 참말 재미있어서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읽으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시나요? 참으로 재미있어서 사진을 읽습니다. 하루하루 재미있으니 새롭게 동이 트며 아침이 찾아옵니다. 하루하루 재미가 넘치니 아침이 지나 낮이 되고 저녁이 찾아와 밤이 깜깜하며 별빛이 흐릅니다. 사진은 삶빛입니다. 4347.7.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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