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일기 59] 제비들과 노래해
― 어미 제비는 한결 가까이


  새끼 제비가 스스로 날갯짓하기까지 얼마 안 남습니다. 이제 어미 제비는 새끼한테 거의 마지막이라 할 먹이를 물어 나릅니다. 어미 제비는 새끼 제비가 스스로 날면서 스스로 먹이를 찾도록 이끌면서 어떤 마음이 될까요. 어미 제비는 새끼 제비한테 마지막 먹이를 물어다 주면서 어떤 마음이 샘솟을까요.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먹이를 물어 나른 어미 제비는 이제 빨랫줄에도 살그마니 내려앉습니다. 새끼 제비가 이제나 저제나 둥지를 스스로 박차고 날아오를까 하고 생각하며 기다립니다. 우리 집 큰아이는 빨랫줄에 앉은 제비를 보고는 폴짝폴짝 뛰면서 인사합니다. 아이들이 폴짝거리면서 손을 흔드니 어미 제비는 포르르 날아서 헛간 위쪽 전깃줄로 옮겨 앉습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노래하는 제비들 목소리는 사뭇 다릅니다. 새끼 티를 벗고 어른 티가 나려는 듯합니다. 며칠 앞서까지 가느다랗거나 가녀린 목소리였다면, 오늘 아침에는 제법 굵고 씩씩한 목소리입니다.

  우리 집 두 아이도 나날이 새로운 목소리로 거듭납니다. 큰아이는 큰아이답게 더 말을 잘 할 뿐 아니라 노래도 잘 부릅니다. 작은아이는 작은아이답게 말씨마다 또렷한 기운이 드리우고, 누나가 하는 말이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든 곧잘 따라합니다. 손놀림도 늘어 혼자서 장난감 조각을 잘 떼고 붙이면서 놀아요. 두 아이는 모두 호미를 쥐어 땅을 쫄 수 있으며, 자전거 마실을 하다가 비파 열매를 둘 따서 건네니, 비파 열매를 둘이서 마당 한쪽에 호미로 땅을 콕콕 쪼더니 심습니다.

  유월에서 칠월로 넘어가는 길목에 새끼 제비는 이곳저곳에서 날갯짓을 익힙니다. 우리 집 어린 제비는 이웃집 어린 제비를 만나서 신나게 어울릴 테고, 우리 마을 제비는 이웃 여러 마을 제비를 만나서 즐겁게 어우러지리라 봅니다.

  훨훨 날며 하늘을 가로지릅니다. 훨훨 날며 하늘빛으로 깃털을 물들입니다. 훨훨 날며 하늘숨을 마시고, 하늘노래를 부릅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제비 곁에서 제비춤을 추면서 제비와 노래를 부릅니다. 가벼운 몸짓으로 뛰고, 가붓한 얼굴로 까르르 웃습니다. 4347.6.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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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 중국집에서



  긴 바깥마실을 마치고 아이들과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큰아이가 시외버스를 몹시 고단하게 여기기에 이번에 인천에서 고흥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기차를 탄다. 그런데 영등포에서 탄 무궁화 기차는 고속기차를 먼저 보내야 한다면서 자그마치 이십 분이 늦는다. 순천 기차역에서 순천 버스역으로 걸어가고, 순천 버스역에서 시외버스로 갈아타서 고흥에 닿으니 저녁 일곱 시 반. 이번에는 큰아이가 멀미를 하지 않아 고마운데, 두 아이 모두 배가 고프겠다. 읍내에서 바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갈는지, 밥을 먹고 군내버스 막차를 타고 집으로 갈는지 생각하다가, 밥을 먹기로 한다. 졸음을 털지 못한 아이들을 안고 얼른 뒤 중국집으로 간다. 밥과 국이 있는 곳으로 갈까 싶기도 했지만, 중국집에서 가락국수하고 달걀밥을 시켜도 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식구가 으레 가던 중국집은 문을 닫고 순대국집으로 바뀌었다. 버스역 건너편 중국집에 갔더니 주방장 아저씨가 병문안 가셔야 한다며 밥은 못 시키고 짜장면만 두 그릇 시킨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생각한다. ‘그래, 다 괜찮아. 아이들이 짜장면 먹은 지 제법 되었지? 모처럼 짜장면만 먹으면 되지.’ 중국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미안하다면서 밥 한 그릇을 덤으로 준다. 짜장면 양념에 밥을 비벼서 큰아이와 작은아이를 먹인다. 차를 오래 탄 탓인지 아이들이 얼마 못 먹는다. 나도 얼마 못 먹는다. 웬만해서는 밥을 안 남기고 다 먹는데, 아니 밥을 남기는 일이 없는데, 차마 다 비우지 못한다.


  밥을 남긴 아이가 ‘칸쵸’ 과자를 찾는다. 시외버스를 내린 뒤 버스역 가게에서 이 과자를 보고는 먹고 싶단 말을 했는데, 밥을 남기고서 다시 과자를 얘기한다. 그래, 네 마음에서는 밥보다는 그 과자가 떠오르고, 밥은 넘어가지 않아도 과자는 넘어간다는 소리로구나. 아무튼 과자를 장만한다. 버스표를 끊고 저녁 여덟 시 막차를 타고 집으로 간다. 집에 닿아 아이들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니 아이들도 몸과 마음이 많이 풀리면서 졸음이 확 쏟아졌지 싶다. 토닥토닥 재운다. 곧 잠든 아이들은 과자를 사 놓았어도 ‘과자 먹을 생각’을 못 한다. 이튿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과자 생각을 다시 해낸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아이들과 집까지 씩씩하게 돌아가는 일만 헤아리느라 힘을 아끼면서 사진을 한 장도 안 찍었다. 읍내 중국집에 닿아서야 비로소 ‘아이들과 움직이는 삶’을 두 장 사진으로 담았다. 집에 닿아서도, 이튿날이 되어서도 사진기를 손에 쥘 생각을 한참 못 했다. 4347.6.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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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이와 철



  나는 어릴 적부터 ‘나이 많은 사람이 두렵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어렵다’고 느낀 적도 없습니다. 그저 그럴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늘 ‘나이·돈·이름·힘’이 많거나 높거나 큰 사람이 앞에 있으면 고개를 숙이라고 했어요.


  국민학교 낮은학년 때였지 싶은데, 조선 무렵 역사를 이야기하던 교사는 예전에 임금 같은 사람이 지나갈 적에 모두 고개를 숙이거나 엎드려야 한다고 했어요. 이때에 고개를 안 숙이거나 안 엎드리면 목아지를 치거나 죽이기까지 했다고 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 우리 사회는 신분과 계급이 없이 평등하다’고 했는데, 내 마음으로는 예나 이제나 똑같이 안 평등하다고 느꼈어요. 왜냐하면, 예전에는 권력으로 누가 누구를 죽이거나 괴롭혔다면, 오늘날에는 나이나 돈이나 이름이나 힘 따위로 누가 누구를 죽이거나 괴롭히거든요.


  어릴 적인데, 언젠가 ‘철’이라는 낱말을 동네 어느 할아버지가 알려주었어요. 철이 들지 않으면 어른이 아니라고 했어요. 철이 들 때까지는 모두가 아이라고 했어요.


  이 말을 듣고 할아버지한테 여쭈었지요. 내 나이가 마흔이 되어도 철이라는 것이 들지 않으면 어른이 아니냐고. 할아버지는 그렇다고 했어요. 다시 여쭈었어요. 내가 할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어도 철이 들지 않으면 어른이 아니냐고. 할아버지는 또 그렇다고 했어요.


  우리는 현대 물질문명 사회가 되면서 제대로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합니다. 아니, 제대로 가르치던 틀이 사라졌고, 제대로 배우던 삶이 사라졌어요.


  오늘날 사회에서는 ‘어린이’라는 낱말이 새로 태어났고, ‘청소년(또는 푸름이)’이라는 낱말도 새로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새 낱말은 학교에서 씁니다. 그래서, 학교와 사회에서는 ‘아이·학생·어른(성인)’으로 사람을 가릅니다. 무척 오랫동안 ‘학생 표’와 ‘어른 표’로 나누던 사회였어요. 요즘에는 ‘청소년 표’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시골에서는 아직도 ‘초등학생 표’와 ‘중학생 표’와 ‘고등학생 표’를 가르곤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나이로 보거나 이름이나 돈이나 힘 따위로 보는 틀에 익숙하거나 길듭니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사회는 한 가지 재미있어요. 때때로 ‘나이’를 넘어서거나 ‘힘’이나 ‘이름’이나 ‘돈’을 넘어서곤 해요. ‘족보에 따라 몇 대 손’인가를 따질 때에 그래요. 나이는 어려도 항렬이 높으면 ‘어르신’으로 모시면서 높임말을 쓰지요.


  어릴 적부터 이 두 가지 사회 얼거리를 보면서 늘 궁금했어요. 우리 사회 한쪽에서는 사람을 껍데기(겉)로 갈라요. 이러면서 우리 사회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을 알맹이(속)로 갈라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목숨이고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가 스스로 사람을 갈라야 한다면, 나이라든지 항렬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갈라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철’이라는 것으로 갈라야, 아니, ‘철’로 사람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철은 우리 넋을 가리키는 낱말이면서 날씨를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가리키는 철인 한편, 우리 마음바탕이 어떠한가를 살피는 철입니다. 마음바탕을 살피는 철일 때에는, 마음에 어떤 빛이 있는가를 헤아립니다. 겉(몸)을 살피는 철일 때에는, 우리 몸이 발을 디디며 살아가는 터전인 지구별을 헤아립니다.


  철을 아는 사람은 날씨를 알고, 날씨를 안다고 할 적에는 지구별 흐름을 알고 온누리(우주)를 압니다. 철이 든 사람은 마음을 다스릴 줄 압니다. 마음을 다스릴 줄 알 때에는 스스로 하루를 새롭게 지을(창조) 수 있습니다. 날마다 스스로 하루를 새롭게 짓는 사람은 ‘하루가 이어진 하루’를 늘 한결같이 누리고, 하루와 하루와 하루(어제와 오늘과 모레,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언제나 하나인 채 살아요.


  그래서, 나는 어릴 적부터 꿈을 한 가지 품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예요. 곧, 나는 철이 들어야겠지요. 철을 바라볼 줄 알아야겠고, 철을 느끼면서, 철을 몸과 마음으로 고루 받아들여서 삶을 지어야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나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꽤 되었어요. 나이를 생각하지 않은지. 나이를 생각하지 않으니, 생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생일도, 우리 집 아이들 생일도, 내 어버이 생일도, 내 동무들 생일도 생각하지 않아요. 너무 마땅히, 내 둘레 사람들 나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책을 읽을 적에도, ‘책을 쓴 사람(작가)’이 나이가 몇 살인가를 따지지 않아요. 노래를 들을 적에도 노래를 짓거나 부른 사람이 몇 살인가를 따질 일이 없습니다. 4347.6.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빛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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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눈과 못 보는 눈


  바깥마실을 하느라 여러 날 집을 비울 적에는 온 집안을 치우려고 한다. 남은 밥이나 국이 있는지 살피기도 한다. 밥상에 아무것도 없도록 한다. 그런데, 집일을 도맡다 보니 나는 내가 건드린 것만 볼 뿐, 한식구가 건드린 것은 미처 못 보기 일쑤이다. 어젯밤에 쌀을 씻어서 불릴 때까지 못 알아채다가, 아침에 다시마를 불리려고 국냄비를 열다가, 아차, 곁님이 끓인 누룽지가 곰팡이꽃으로 가득한 모습을 본다.

  어째 못 봤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내가 누룽지국을 끓이지 않았고 먹지 않았으니 이 냄비를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고 느낀다. 내가 누룽지국을 끓이지 않았으니, 가스불판에 올려놓은 냄비가 다 비었으리라 여기기만 했지, 그래도 다시금 뚜껑을 열어서 살피려 하지 않았구나 싶다.

  나흘 동안 바깥잠을 자고 돌아온 첫 아침이다. 큰아이는 여덟 시 반 즈음 일어난다. 작은아이는 아홉 시가 넘도록 잔다. 오늘 하루는 천천히 가자. 4347.6.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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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혼자 쉬하기


  일곱 살 사름벼리는 오늘 기차에서 처음으로 혼자 쉬를 누고 온다. 동생은 까무룩 잠들어 아버지 무릎에 누웠다. 아버지가 뒷간까지 함께 가서 문을 열어 줄 수 없다. 벼리야, 저기에 혼자 다녀올 수 있겠니, 응, 그래 다녀와 보렴. 참말 혼자 뒷간으로 가고 무거운 문을 힘껏 민다. 잘했어. 너는 앞으로 아주 많은 일을 혼자 하겠구나. 4347.6.2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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