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내 마음의 산골마을
박희병 지음 / 그물코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41 ― 돈 아닌 ‘사람’이 가꾸는 고향마을
 : 박희병, 《거기, 내 마음의 산골마을》을 읽으며


- 책이름 : 거기, 내 마음의 산골마을
- 글쓴이 : 박희병
- 펴낸곳 : 그물코(2007.7.25.)
- 책값 : 8000원



 (1) 천막농성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 깃든 동네 한복판을 쑤석거리려는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뜻으로 펼쳐 놓은 천막농성터에 나와 있습니다. 어느덧 열아흐레째(3월 17일). 인천시는 자기들이 밀어붙이려는 산업도로가 주민들 반대에 막히어 공사 삽날이 멈추게 되자, 살그머니 말을 돌려서 여론을 바꾸려고 애를 씁니다. 동네 한복판에 놓으려고 하는 길은 ‘산업도로’가 아닌 ‘6차선 간선도로’라 말하고, 방음벽 세우면 걱정거리가 없다고 하면서.

 처음부터 ‘6차선 간선도로’를 내야 하는 곳이 아니었음에도 ‘산업도로에서 간선도로로 목적을 바꾸었으니, 이런 길은 내야 하지 않느냐?’고 주민들 앞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 길이 나야 공해가 줄어든다니까요?” 하는 말과 “이 동네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길이라니까요?” 하는 말에는 그만 질려 버립니다. 찻길이 나야 공해가 줄어든다니, 찻길이 나야 동네가 발전한다니 …….

 천막농성터를 찾아온 인천 동구 구청장님은 말합니다. “어차피 이 동네는 재개발과 재생사업을 할 텐데, 그런 간선도로 놓아 보았자 중복투자가 되니 쓸모가 없다”고. 구청장님은 “나한테는 권한이 없어요. 그리고 시에다가도 이런 길은 내지 말아야 한다고 요청하는 공문도 보냈습니다.” 하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여쭈어 봅니다. 몇 해 앞서 보낸 공문 말고, 요즘에도 그런 요청을 공문으로 시에 올린 적이 있느냐고. 구청장님은 “요사이에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해 줍니다.

 구청장님은 ‘일개 구청장한테는 아무런 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하다면, ‘일개 주민’은 어떤 힘이 있는가요. 위에서 내려보내는 명령과 지시가 있으면, 힘이 없는 ‘일개 구청장’은 곧이곧대로 따라야 하고, ‘일개 주민’은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들여야 하나요.


.. 벼가 익으면 이른 아침부터 벼를 베었다. 낫으로 한 동씩 한 동씩 정성껏 베었다. 한 손으로 벼포기를 잡고 벼 밑동을 싹둑싹둑 베었다. 벤 벼는 논바닥에 눕혀 놓았다. 벼 베는 일은 허리가 아프고 힘든 일이지만 일 년의 보람이 여기에 있었다 ..  (벼 베기/152쪽)


 구청장님 말이 아니더라도 가난한 동네 사람들 몇몇 힘으로 나라힘(공권력)을 뒤집기는 어렵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옳지 않은 일을 앞에 두고서 힘이 딸린다고, 힘이 모자란다고, 힘이 없다고 하여 물러설 마음은 없습니다. 우리들 삶터가 포크레인 삽날에 찢기고 갈리게 되는 모습을 마냥 불구경 하듯 손 놓고 바라볼 수 없습니다.

 내 모든 이야기와 발자국이 남아 있는 고향인데, 이 고향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모습을 뒷짐 지고 구경할 수 없습니다. 시멘트로 떡바른 아파트가 성냥갑처럼 촘촘히 올라서며 햇볕을 막아 버리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습니다. 우리 뒷사람들이 ‘당신(앞사람)들이 말하는 옛날 자취와 역사와 문화란 무엇이냐?’고 따질 때, ‘우리(뒷사람)들한테 시멘트 아파트만 달랑 남겨 놓고서 우리보고 무엇을 보고 느끼고 꿈꾸며 자라라고 하는 셈이냐?’ 하고 따질 때, 미안합니다 한 마디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흐흐흐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앞사람)는 여기에서 태어나서 이와 같은 집에서 살았고 이러한 골목길에서 뛰놀았으며 이런 역사가 깃든 학교에서 공부했단다’ 하고 들려주고 싶습니다. 공장 굴뚝보다는, 도시락 싸들고 나들이를 올 수 있는 나무그늘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자동차 배기가스보다는 걱정없이 자전거를 타고다닐 수 있는 사람길을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돈으로 이룩한 지엔피 숫자보다는, 땀방울과 웃음울음으로 쌓아올린 책 하나를 남겨 주고 싶습니다.


.. 추수를 끝낸 논에 가 보면 너무도 허전하였다. 그 많던 개구리며 물방개며 소금쟁이며 미꾸라지는 싹 종적을 감추고, 벼 밑동만이 논바닥 까만 흙 위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추수가 끝난 논을 혼자 밟으며 노는 일은 너무나 유쾌한 일이었다. 그 속에는 개구리, 물방개, 소금쟁이의 기억들이 서랍 속의 물건들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었따 ..  (추수한 뒤의 논/35쪽)


 (2) 내 고향 네 고향


 일곱 살 앞서는 거의 떠오르지 않지만, 일곱 살 때부터는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그 무렵 살던 다섯 층짜리 아파트는 연탄으로 때던 곳이었고, 1층 집으로 들어가려면 계단 다섯을 밟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2층부터는 일곱 계단이었다고 생각하는데, 한 칸씩 밟고 올라가기보다는 멀리서 달음질을 해 오며 폴짝 뛰어오르기를 좋아했습니다. 처음에는 네 칸 뜀뛰기가 되었고 드물게 다섯 칸 뜀뛰기가 됩니다. 제자리뛰기를 하면 거의 세 칸 뜀뛰기가 되고, 네 칸을 밟을락 말락 하다가 뒤로 자빠질 뻔하기도 하고 앞으로 콩 넘어지며 무릎이 깨지기 일쑤입니다. 4층에 있는 우리 집으로 갈 때면 형하고 잡기놀이 하듯 신나게 뛰어올라갑니다. 이때부터는 셋셋하나, 또는 셋둘둘, 또는 셋넷, 또는 둘셋둘.

 거꾸로 4층집에서 내려갈 때에는 한꺼번에 일곱 칸 뛰기를 해 보는데 이럴 때면 무릎이 아프기도 하여 셋넷 나누어 뛰기로 내려오곤 합니다. 때때로 나무로 된 손잡이를 잡고는 계단밟기를 않고 아래쪽 손잡이를 밟고 다시 아래쪽 손잡이를 잡은 뒤 그 아래쪽 손잡이를 밟고 하기를 되풀이. 손잡이에 한쪽 엉덩이를 깔고 미끄러져 내려오기도 합니다.

 어머니 일을 도와서 신문돌리기를 할 때에도 뜀뛰기 놀이 하듯 쉬지 않고 달립니다. 겨드랑이에 끼고 달리는 신문이 무거워 1층 난간 손잡이에 신문을 올려놓고는 한두 부만 집어서 후다닥 올라가 우유주머니에 넣거나 문틈에 끼우거나 문 아래로 밀어넣습니다. 신문 보는 집마다 ‘넣어 달라고 하는 방법’이 달라서, 작은 쪽지에 이런저런 방법을 적어 놓고는 그때그때 보면서 넣습니다. 5층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신문이 한 부씩 사라질 때가 있어서 나중에는 무거워도 통째로 들고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도 합니다. 신문돌림꾼이 지나가는 때를 알고는 슬쩍 한 부 훔쳐가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 흙이 있는 데는 어디든지 땅강아지가 있었다. 마당에도 있고 담부랑 밑에도 있고 집 뒤에도 있고 집 앞에도 있고 밭에도 있고 길에도 있고 강변에도 있고 묵은땅에도 있고 논두렁에도 있고 숲에도 있었다 ..  (땅강아지/138쪽)


 열다섯 동으로 이루어진 다섯 층짜리 아파트에는 큰 놀이터가 둘 있었습니다. 한쪽은 모래밭으로만 제법 길게 이어져 있어서, 이곳에서는 공차기도 하고 공치기도 합니다. 먼저 와서 찜 하는 아이들이 차지하고 놀곤 해서(어차피 같이 놀게 되기는 하지만), 학교 마치고 집으로 올 때면 집에 책가방 던져놓기 앞서 먼저 찜해 놓는 아이가 있기 마련. 넓은 모래밭을 차지하지 못하면, 바로 건너편에 있는 조금 좁은 모래밭을 차지. 이곳도 차지하지 못하면, 1동부터 8동 사이로 퍽 널찍하게 나 있는 찻길이 놀이터. 여기도 차지하지 못하면, 차가 가장 적게 서 있는 동과 동 사이가 놀이터.

 중학교에 들어선 1988년까지도 집에 차를 모는 사람이 드문 우리 동네라서, 우리들 놀이터는 언제나 넓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차도 많지 않은 아파트마을에 웬 빈터를 그리 넓게 마련했는가 모를 일인데, 인천 시내에 있는 다른 5층짜리 아파트도 동과 동 사이 빈터는 모두 넓었어요.


.. 아무리 추워도 사흘만 견디면 다시 따뜻한 날이 온다는 희망 때문에 긴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나흘이 따뜻하면 사흘이 아무리 추워도 견딜 만하였다. 견뎌내기만 하면 다시 따뜻한 날이 온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행복하였다 ..  (삼한사온/127쪽)


 이렇게 모래밭 놀이터를 차지하면서 공차기를 할 때는, 발이 푹푹 빠지니 제대로 달릴 수 없지만, 그래도 좋다며 신이 나서 달리고 찹니다. 야구놀이를 할 때에는 뜬공 잡기 힘들고 튄공 잡기 버겁지만 좋다고들 뛰고 치고 북적댑니다.

 하드볼이 아닌 테니스공으로 했으니 유리창 깰 일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요즈음 아파트처럼 툇마루 통유리를 한 집이 몇 군데 없었기에 파울을 치면 툇마루 안쪽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이때는 공을 친 아이가 그 집을 찾아가서 딩동딩동 단추를 눌러서 공 꺼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허구헌날 여러 차례 공 꺼내기 해 주어야 하는 아주머니나 할머니는 우리들 개구쟁이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공을 안 꺼내 주겠다고 하면서 욕설이나 큰소리가 나왔고, 공 들어간 집이 1층이나 2층이면 몰래 담벼락을 타고 들어가서 꺼내오곤 하는데, 그러다가 수위 아저씨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죽도록 얻어맞거나 안 붙잡히도록 내빼기.

 동과 동 사이에서 야구를 할 때는 포수가 없이 벽을 포수 삼고 분필로 스트라이크존을 그립니다. 여기에 들어가면 스트라이크. 안 들어가면 볼. 그런데 벽치기 야구를 할 때에도 걸림돌이 있습니다. 벽치기 대상이 되는 1층 집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창문을 열고 “딴 데 가서 놀아!” 하고 빽 소리를 지르니까요.

 벽치기 야구를 할 때에는 으레 2층이나 3층 또는 4층이나 5층까지도 공이 들어갑니다. 어쩌다가 옥상에 공이 올라가면 이때에도 수위 아저씨가 있나 없나 두리번두리번 살핀 뒤 살짝 옥상문 열고 들어가서 공을 주워 옵니다. 위험하다고 해서 옥상에는 못 올라가게 하지만, 이 옥상에 올라가서 공을 주울 때면 우리 아파트마을 오른편에 있는 경인고속도로 들머리가 내려다보이고, 왼편에 있는 제2부두가 내려다보입니다. 공을 줍고 나서 한참 동안 큰 짐차와 컨테이너차를 구경합니다. 타워크레인으로 컨테이너를 집어서 큰 짐배에 싣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다가 저 멀리 수위 아저씨가 저를 보고 꽤액 하고 소리를 치면, 부리나케 옥상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어디엔가 숨습니다. 이윽고 다른 동무들이 ‘아저씨 갔다’는 신호가 나오면 조용히 나와서 다시 벽치기 야구놀이를 하고.


.. 웬만한 마을 바위는 모두 이름이 있었다.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들은 대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자식은 부모에게서 듣고 부모는 그 부모에게서 듣고 부모의 부모는 또 그 부모에게서 듣고 부모의 부모는 또 그 부모에게서 듣고 이런 식으로 들어 알기도 했을 테지만, 어릴 때부터 마을사람들한테 들어 알기도 했을 것이다 ..  (바위/101쪽)


 모래밭에서 동 대항 야구놀이를 하던 어느 날, 우리 형이 타자로 나온 모습을 보고는 뒤에서 응원한다고 촐싹거리다가 야구방망이에 귀가 맞아서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기도 했습니다. 이날 형은 집에서 구두주걱이 부러지도록 얻어맞고, 야구놀이는 파장이 되고, 저는 너덜거리며 아픈 귀를 잡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고 엉엉 울기만 하고.

 열흘쯤 앞서 오랜만에 형과 형 옛동무를 만나서 신포시장에서 순대 한 접시 시켜 놓고 소주를 마시다가 옛날 제 귀 떨어진 이야기를 했습니다. 형은 “야, 너 때문에 내가 집에서 얼마나 맞은 줄 알아?” 하고 웃으며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때 아버지한테 얼마나 모질게 혼이 났을까요. 참 미안한 옛일입니다.


.. 한쪽 다리로 나무를 밟고 큰 도끼를 어깨 너머까지 힘차게 들었다가 휙 내리치면 나무가 딱 벌어지며 쪼개지는 것이었다. 한 번에 쪼개지지 않는 나무도 있었는데, 그런 나무에는 반드시 옹이가 있었다. 옹이는 나무의 상처였다. 아버지는 “상처가 있는 나무는 단단하단다”라고 하셨다 ..  (장작/40쪽)


 그런데 이런저런 이야기가 깃든 5층짜리 아파트는 헐려서 없어지고 22층인가 23층짜리 새 아파트가 이 자리에 우람하게 올라섰습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끔 이 앞을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 있던 기름집도 함께 사라지고 기름집 자리에는 맥도널드가 2층짜리 건물로 들어섰습니다. 예전 집자리 건너편 정석빌딩은 지금도 그대로. 예전 집자리 왼편에 있던 한국은행 인천지점은 지금도 그대로. 새로 올라선 높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옛 이웃은 지금도 몇 집 있으나, 우리 집을 비롯한 거의 모든 이웃은 다른 데로 살림을 옮겼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인천을 떠난 사람도 있을 테고, 우리 나라를 떠난 사람도 있을 테지요. 멀리멀리 떠나간 사람들이 자기 어린 나날을 보낸 집자리로 돌아와 볼 일이 있을까 모릅니다만, 예전 집자리로 돌아와 본다 한들, 어린 날을 돌이킬 수 있는 ‘무엇인가’는 거의 한 가지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신흥 남여 중학교로 가는 울타리도 없고, 울타리에 자라던 까마중도 없으며, 제일제당에서 인천 앞바다로 흘려보내는 쓰레기물 흐르는 개천은 뚜껑이 덮이어 뚜껑 밑으로 쓰레기물이 흐르는지 민물이 흐르는지 똥물이 흐르는지 아무도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때나 이제나 이곳 하늘을 날고 있는 갈매기를 만납니다. 공장과 자동차에서 뿜어내는 매캐한 연기와 먼지밖에 없는 곳임에도, 갈매기는 이곳, 바닷가 마을을 잊지 않고 찾아와 줍니다. 몸에 좋을 턱이 없는 새우깡이나마 던져 주는 이 없고, 지친 날개 쉬며 느긋이 앉을 너럭바위 어디에도 없이 모텔만 줄줄줄 늘어선 이곳이지만, 갈매기는 한결같이 찾아와 줍니다.

 바다를 앞에 끼고 살아가는 인천사람이지만 갈매기 바라보는 사람이 없는데.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인천으로 찾아오는 바깥사람들도 갈매기를 바라보지 않는데.


 (3) 《거기, 내 마음의 산골마을》을 책꽂이에 꽂으며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천막 둘레로 지나갑니다. 먼저 초등학생들이 지나갑니다. 재잘재잘 쫑알쫑알. 곧 중학생들이 지나갑니다. 천막 둘레에 걸어 놓은 걸개천 글씨를 읽으며 지나갑니다. 이제 어둠이 깔리면 고등학생들도 지나갈 테지요.


― 나무를 보고 있으면, 말이 없는 것이라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갈참나무/136쪽)
― 두릅을 먹으면 두릅나무에 왜 가시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두릅/133쪽)
― 나무를 모르면 그 눈꽃이 그 눈꽃이지만, 나무를 알면 눈꽃이 저마다 달랐다.  (눈꽃/96쪽)
― 같은 밥을 늘 같이 먹으니 누렁이는 얼굴이며 성품이 우리와 같았다.  (누렁이/83쪽)
― 산골마을에는 교회나 절 같은 건 없어도 밤하늘의 별들 때문에 평화로웠다.  (별/47쪽)



 산골마을에서 어린 날을 보냈던 박희병 님은 당신 어린 날을 돌아보면서 책 하나를 적어내려 갑니다. ‘오늘날 박희병’을 이루어낸 뿌리가 무엇인가를 되짚으면서 책 하나 끄적여 내놓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면서 우리 옛문학 이야기를 틈틈이 책으로 써 내다가, 뜬금없이 당신 옛 고향 발자취를 더듬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어쩌면 뜬금없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까뭉개며 없애려고 하지만, 없어져서는 안 될, 아니 찬찬히 되살아나야 좋을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엮어내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고향마을이 될 터전을 자꾸자꾸 짓뭉개거나 밟아 없애려고 하기에, 이러다가는 우리 모두 죽음길로 갈밖에 없다는 걱정이 커지면서 내놓았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거의 모두 도시에 지어진 높고 우람한 아파트에서 살며 부모나 학원 차를 타고 집과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지냅니다. 흙 밟을 일이 없지만 아스팔트와 시멘트 바닥 밟을 일도 드뭅니다. 이런 가운데 자라고 있는 아이들은 앞으로 스무 해쯤, 또는 서른 해나 마흔 해쯤 뒤, 자기가 자랐던 어린 날 고향을 떠올리면서 어떤 이야기를 남길 수 있을까요. 자연과 담을 쌓는다기보다 아예 ‘자연이라고 하는 국물도 건더기도’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돌아보면서 끄적일 이야기는 누구한테 얼마나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요.


.. 똥물을 주면 채소는 몸이 실해져 벌레가 잘 달라붙지 않고 잎에서는 당장 윤기가 났다. 사람은 자기가 먹은 것을 똥으로 누고 똥은 다시 먹을 것이 되고 먹은 것은 또다시 똥으로 되고 똥은 또다시 먹을 것이 되니 결국은 제한테서 나와 제한테로 돌아가는 듯 싶었다. 마을 어딜 가도 늘 똥냄새가 났으나, 그래서 그 냄새는 싫지 않았다 ..  (똥바가지/118쪽)


 천막농성 열아홉 날이 저물고 스무 날이 다가옵니다. 지난 3월 3일 낮, 인천시 종합건설본부장은 천막농성 터로 한 번 찾아왔습니다. 그날 그분은 우리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거 강제로 포크레인 가지고 때려부수면 그만이라니까!”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태껏 동네사람들하고 ‘막공사 산업도로’ 문제로 열린 토론마당을 한 번도 마련하지 않고 ‘시에서 2020년까지 내다보면서 마련한 계획이니 이대로 해야 한다’는 방침만 통보하고 있는 마당에, 종합건설본부장이라는 자리에 앉은 분 말로는, 더욱이 천막농성터에 찾아온 분이 꺼낼 말로는, 그다지 알맞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뜨거운 무엇이 머리끝까지 솟구쳐올랐고, 헛웃음을 웃으며 돌아가는 종건본부장 겉옷자락 꽁무니를 볼 때에는 소름이 돋았으며, 주민과 만나서 이야기를 할 마음이 없다는 뜻을 다시금 알게 된 뒤에는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일구어 가는 우리 고향이요 우리 문화요 우리 사회요 우리 세상이 아니라, 돈(경제) 논리 하나만으로 삽날을 앞세워 파헤치고 무너뜨린 다음에 다른 돈보따리를 들고 와서 새로운 집을 지으면 된다고 하는 마음씀은 그지없이 불쌍하고 못난 지식쪼가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높은 대학교까지 다니면서 얻은 지식이, 그동안 나라밖 여러 곳을 다니며 듣고 보았다는 경험이, 여태 정부 부처 여러 자리에서 나라일을 주물러 왔다는 움직임이 고작 이만큼밖에 안 되느냐 싶으니 눈물이 다 날 노릇이었습니다.

 길은 돈으로 내고 아파트도 돈으로 짓는다지만, 길은 누가 다니고 아파트에는 누가 살지요? 두 다리가 아닌 자동차로만 움직이는 사람은 얼마나 사람다운 사람이며, 온 몸뚱이가 아닌 돈으로 사들여 잠만 자고 떠나는 아파트는 얼마나 사람 깃들일 만한 집입니까? (4341.3.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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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방고의 숲속학교
트래버스 외 지음, 홍한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40 ― 아이들한테 ‘공해’를 물려주기 싫다
 : 네 아이가 함께 쓴, 《오카방고의 숲속학교》


- 책이름 : 오카방고의 숲속학교
- 글 : 트래버스, 앵것, 메이지, 오클리
- 옮긴이 : 홍한별
- 펴낸곳 : 갈라파고스(2005.1.7.)
- 책값 : 15000원


 (1) 봄과 학교


 서른네 번째 맞이하는 봄입니다. 서른세 번째 겨울을 지났고 서른세 번째 가을도 지났습니다. 앞으로는 서른네 번째가 되는 여름과 가을입니다. 그런데 서른네 번째 여름이 두렵습니다. 지난여름을 가까스로 넘겼는데 올여름은 얼마나 무더울지 두렵습니다. 다가올 가을도 두렵습니다. 더위가 가라앉으며 울긋불긋 높아가는 가을내를 맡고 싶은데 지난가을에도 가을내를 못 맡았습니다. 돌아올 겨울이 두렵습니다. 겨울답지 않게 푸근하다가 내처 한두 달 동안 꽁꽁 얼어붙은 채 풀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리하여 2008년에 태어날 새 목숨붙이한테 봄을 봄대로, 여름을 여름대로, 가을을 가을대로, 겨울을 겨울대로 느끼도 받아들이도록 해 주지 못할까 싶어서, 무엇보다도 두렵습니다.


.. 사자들은 무자비한 자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 자연에는 옳고 그른 것이 없다. 단지 야생의 삶은 힘들 뿐이다 … 사자들은 공간과 자유만 주어지면 자기들의 문제를 영리하게 창의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 그렇지만 사자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단 한 가지 있다. 총이다 … 누가 우선되어야 할까? 사람 아니면 사자? 지구의 일부를 따로 떼어놓아 야생동물이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야생동물에게 삶의 터전을 돌려주어야 할까, 아니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생존조차 힘든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어야 할까? 물론 내 생각은 확고하다 ..  (208∼210쪽)


 초중고등학교마다 새 학년 새 학기가 열렸습니다. 벌써부터 2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가 되어 3월은 아주 따뜻하다 못해 때로는 살짝 덥습니다. 종알종알 재잘재잘 하면서 집과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을 봅니다. 서울 나들이를 하며 서울 시내와 골목길을 차 옆으로 아슬아슬 걸어가는 아이들을 봅니다. 인천에서 살며 인천 시내와 골목길을 차방귀 맡으며 걸어가는 아이들을 봅니다.

 아이들 얼굴은 더없이 싱그럽고 살결은 뽀얗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폭신폭신한 운동신이나 딱딱한 구두를 신고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된 길만 밟습니다. 흙도 풀도 밟을 일이 없습니다. 때로는 아스팔트길조차 못 밟습니다. 자동차 시트만 밟습니다.


.. 무엇보다도 ‘마운’에서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하지 않고 함께 놀고 어른들과도 잘 어울린다 ..  (28쪽)


 골목길 한켠에 자라는 나무에는 참새라도 머뭅니다. 까치나 비둘기는 머물지 못합니다. 그래서 골목길에서 귀기울이고 걷거나 가만히 서거나 앉으면, 새소리를 듣습니다. 도심지에 심긴 나무에는 참새조차 살지 못합니다. 나무는 죽지 않고 어떻게든 버티며 줄기를 올리지만, 이놈 줄기마저도 봄을 앞두고 싹둑싹둑 잘립니다. 나무는 나무다울 수 없습니다. 나무다울 수 없는 나무에는 새가 보금자리를 틀지 못합니다. 새가 보금자리를 틀지 못하는 나무 둘레에는 그늘이 없고 자연이 없으며, 동네 아이와 어른도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메말라가는 나무 옆으로 맥도널드 가게가 있고 피자헛 가게가 있습니다. 과일주스와 커피를  파는 가게가 있고 이름난 신발과 옷을 파는 가게가 대낮에도 전기불을 환히 밝혀 놓고 있습니다. 햇볕은 못 들어오게 막아 놓으면서.

 목이 마른 아이들은 곳곳에 있는 자판기를 찾아내어 동전 몇 알 집어넣고 탄산이 톡 쏘는 마실거리 깡통을 쪽쪽 빱니다. 또는 편의점이나 구멍가게에 들러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어 종이돈 한 장 내밀고는 쭉쭉 빱니다.


.. 숲에서 피터 아저씨와 함께 살기 전까지는 사자는 그냥 사자였다.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그놈이 그놈 같았고, 우리가 사자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은 엄마가 사 준 여행 안내서에서 주워모은 지식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자를 너무나 잘 안다. 한 마리 한 마리를 잘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자 없는 삶은 이제 상상할 수 없다 ..  (83쪽)


 학교에서는 틀림없이 ‘환경 문제’를 이야기하거나 가르칩니다. 그러면 아이들 집에서는 얼마나 ‘환경 문제’를 이야기하는가요. 학교에서 ‘환경 문제’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없는가를 떠나서, 우리네 집에서는, 아이 아버지나 어머니는, 또 언니와 누나들은 얼마나 ‘환경 문제’를 이야기하고 몸소 보여주는가요.

 아이가 변기에 누고 내리는 똥과 오줌이 정화조를 거쳐서 하수도로 들어가고, 이 하수도로 들어간 물이 돌고 돌아서 수도물로 나오며, 정수기를 거쳐서 우리 물잔에 담기는 줄 배우는지요. 아이를 집과 학교와 학원으로 태워 주는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가스가 하늘로 꾸역꾸역 모여서 산성비가 되어 땅으로 돌아온 뒤 땅속으로 스며들어서, 아이들이 사마시는 탄산음료 물이 되는 줄 느끼는지요. 아이 방을 채우고 있는 갖가지 장난감을 만드느라 공장에서 써 버리는 쓰레기물(폐수)이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가서 물고기를 병들게 하고, 우리는 이렇게 병든 물고기를 잡아서 저녁밥상에 올려놓고 있음을 헤아리는지요.





.. 지난 3년 간 우리는 아주 많이 성장했다. 우리는 이제 동물에 대한 이해가 자연을 보존하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사자를 직접 관찰하고 매일 사자의 일상을 쫓다 보니,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얻은 정보가 실제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읽거나 본 것을 모두 맹목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접 고생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  (97쪽)


 제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는, 옛 도심지에 있던 학교들이 일찌감치 ‘새 도심지가 될 곳’에 땅을 사서 학교 건물 새로 지어서 옮겼습니다. 새로 지은 학교마다 체육관이며 실습관이며 시설이며 …… ‘현대식’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들어섭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다니는 ‘새로 지은’ 학교에서 쓸 수 있는 ‘도서관 책 장만하는 돈’은 한 해에 200만 원을 겨우 넘을 뿐입니다. 다른 학교도 엇비슷합니다만, 그나마 이 이백만 원도 ‘책 사는 데에 제대로 쓰이는지’ 아닌지 알 길이 없습니다. 더욱이, 이 돈 이백만 원으로 ‘어떤 책을 사고 있는지’를 알 턱조차 없어요.

 새 학교 짓는 데에 수십 억을 쏟아붓지만, 또 학교도서관을 꾸민다고 수 억이나 수천만 원을 들이지만, 정작 이 도서관에 갖출 책을 장만할 돈은 없습니다. 국공립도서관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출판사에 공문을 띄워서 ‘책 기부를 해 달라’고 할 뿐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부천에 있는, 또 성남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 교장이었을 때 찾아갔던 일을 떠올려봅니다. 당신 일하는 학교에서도 도서관 꾸미는 데에 정부 뒷배로 수천만 원을 받아서 깔끔하고 멋들어지게 꾸며 놓았지만, 정작 책을 사들여서 갖추어 놓는 데에는 ‘국고예산으로 한 해에 떨어지는 이백만 원’에만 기댈 뿐이었습니다.


.. 우리가 상처를 돌보았다면 오히려 살아남을 가능성이 낮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무척 힘들었다. 사자가 사람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렸거나 사람 때문에 다쳤다면 도와줘야 하겠지만, 자연 상태에서 다치거나 병에 걸렸을 때에는 스스로 이겨내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  (108쪽)


 이제는 학교마다 급식실이 생겨서 도시락 싸들고 갈 일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급식비 내는 새로운 짐이 생깁니다. 또한, 아이마다 몸이 다르고 밥버릇이 다른데, 학교 급식은 얼마나 아이 하나하나에 맞출 수 있을까요. 집에서 도시락을 싸들고 오면 남기거나 버려지는 밥과 반찬이 거의 없을 텐데, 학교 급식실에서는 음식물쓰레기를 어떻게 간수하지요. 몸에 더 낫다고 하는 유기농 곡식을 학교 급식실에서 영양사가 사들여서 지지고 볶고 하기보다는, 학교 텃밭을 마련해서 아이와 교사가 손수 푸성귀를 길러서 먹도록 하면 한결 낫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괜한 걱정에 쓸데없는 마음씀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하나, 동네 아이들을 보면서, 또 우리 집에서 태어나 자라날 아이를 생각하면서, 이런 데에 눈길과 마음길이 쏠립니다. 부모 된 우리 어른들부터 ‘도시락 싸는 마음’을 잃고 ‘돈으로 때우는 마음’을 키우면서, 아이들한테 마음이 아닌 돈을 가르치고 있구나 싶어요. ‘더 많이 배웠으니 더 많이 나누자’ 하는 뜻을 가꾸기보다는, ‘더 많이 배웠으니 더 많은 돈을 나 혼자 벌자’는 뜻만 북돋우고 있구나 싶어요.





 (2) 아이들과 삶아갈 곳


.. 나는 지금 열여섯 살이고 운전을 한 지는 올해로 5년째다. 운전은 엄마한테 배웠다 … 이 사자를 아주 어릴 때부터 죽 봐 와서 이 녀석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녀석을 무척 좋아한다 ..  (16쪽)


 학교 앞에서 차에 치여 죽은 아이 소식을 들으며, 국민학교 적 일을 생각해 냅니다. 저 다니던 국민학교에서도 한 차례인가 두 차례인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워낙 수출입 물동량이 많은 인천이고, 제가 다니는 국민학교 앞으로는 그때나 이제나 그 수출입 물동량 큰 짐차(컨테이너차나 자동차를 두 겹으로 싣고 다니는 짐차 따위)가 뻔질나게 다닙니다. 건널목이 있어도 건널목 푸른불에 제때 멈추는 차보다는 휙 하고 지나가는 차가 더 많습니다. 푸른불에 멈추지 않고 씽씽 달리는 차 때문에 건널목 푸른불이 다 바뀌도록 건너지 못한 적도 잦았습니다. 이럴 때에는 누군가 어른이 건널목에서 기다리다가 건너 주어야 겨우 마음을 놓고 후다닥 뜀박질을 하며 함께 건넜습니다. 건널목을 건너며 동무한테 ‘잘 가’ 하고 손인사를 하다가 귀옆을 쌔애액 하며 지나가는 큰 짐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몸뚱이가 후들후들 떨리리며 간이 콩알만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다니던 국민학교 앞길부터 해서 일곱 군데나 되는 초중고등학교 앞을 지나가는 또다른 산업도로를 내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 몹쓸 일을 지켜보던 동네사람들이 ‘생존권을 또 짓밟으려 하느냐’ 하면서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 일을 꾀하는 인천시 공무원들은 우리들 주민한테 한결같은 목소리로, “여기에 이런 찻길이 놓이면 오히려 공해가 줄고 동네가 살기 좋아지는데, 왜 반대를 합니까?” 하고 대꾸를 합니다. 올해에도,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 처음에는 숲을 돌아다녀도 아무것도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몇 차례 가다 보니 눈이 밝아지고 주변 환경에 더 민감해졌다 … 숲에 다닌 지 여러 달이 되었지만 사자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한테 사자를 볼 수 있는 예리한 눈이 없었기 때문이다 ..  (52,58쪽)


 동네 주민들이 인천시 도로과 공무원한테 따집니다. “당신들 집 앞에 이런 길을 낸다고 하면 거기서 살겠느냐”고. 도로과 공무원은 대꾸합니다. “나라면 내 집 앞에 이런 길을 내는 것을 찬성하겠다”고.

 허허, 허허. 주민들은 말문이 막힙니다. 속이 울컥하면서, ‘당신 아이가 초등학생이고, 그 아이가 집에서 학교로 걸어가는 길에 그렇게 널따란 찻길이 새로 뚫리면서 그 길을 건너다녀야 하는 판이라면 마음놓고 학교에 보낼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지만 묻지 않습니다. 이렇게 물었다가는, ‘부모가 뭐 하는 사람입니까, 그럴 때는 자가용에 아이를 태워서 학교를 다니게 하면 되잖습니까?’ 하는 대꾸가 돌아올 테니까. ‘차없는 사람은 어떡하라고?’ 따져 보았자, ‘차 한 대 장만하시면 되지요. 요새 차값이 얼마나 싼데, 그거 하나 못 사요. 그리고 요새 차 없는 집이 어디 있어요?’ 하는 대꾸만 돌아올 테고.


.. 우리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우리 삶을 이상화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비가 오는 날이면 눅눅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거나, 변소가 가득 차면 새로 파야 한다거나, 한밤중에 토했는데 물도 나오지 않고 전기도 나갔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  (122쪽)





 자동차 이름 줄줄 외는 아이들, 게임 아이템 달달 외우는 아이들, 연예인 이름뿐 아니라 개인 삶까지 속속들이 꿰는 아이들. 아이들을 둘러싼 삶터가 이러하다면, 아이들한테는 한갓지고 조촐한 골목길이나 놀이터보다는, 플레이스테이션이나 오토바이가 훨씬 반갑고 고마운 선물일 수 있겠어요.

 좀더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와 탁 트인 하늘과 따순 햇살과 싱그러운 무지개와 하이얀 구름과 파란 바다를 물려주고 싶은 제 마음이지만, 좀더 조용하며 이웃끼리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는 동네 삶터를 이어주고 싶은 제 마음이지만, 이런 제 마음은 한낱 헛꿈이나 개꿈일 수 있겠어요. 아이한테는 사랑보다는 돈을, 믿음보다는 큰 아파트를, 나눔보다는 빠른 차를 물려주어야 하는가 봐요.


.. 아기 때는 모래밭에서 기면서 곤충들을 보았고, 어린아이 때는 나무에 올라가 새를 보았고, 좀더 자라서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가 동물들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웠다 … 차 뒷좌석에 앉아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아주 작은 것들이다. 숲을 보려는 사람들은 이렇게 자연을 이루는 구성원들을 먼저 보아야 한다. 아프리카에 오는 사람들이 그저 ‘다섯 거물(사자, 버펄로, 코끼리, 표범, 코뿔소)’만 보려고 하는 걸 보면 안타깝다. 조그만 생물들의 세계를 완전히 놓치고 마는 것이다. 왜 그런지 사람들은 이런 작은 동물들을 무서워한다. 인체에 무해한 벽거미를 텐트에서 눈에 뜨이는 족족 잡아 죽인다. 이 거미들이 자기들이 가져온 살충제만큼이나 모기를 죽이는 데 유용하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  (170쪽)


 그나마 우리 집에 갖추고 있는 책들로 아이 마음밥을 넉넉히 살찌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집에서 마음밥을 아무리 넉넉히 받아먹는다고 해도, 이 삶터가 온통 자동차 소리와 배기가스로 어지럽고 시끄럽다면 어쩌지요. 아이 몸뚱이가 맑은 바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아이 눈이 싱그러운 하늘을 올려다볼 수 없다면, 아이 발이 풋풋한 흙내음을 밟을 수 없다면, 아이 얼굴을 타고 땀방울이 흐를 만큼 뛰어놀 골목이 없다면.


 (3) 《오카방고의 숲속학교》를 다시 한 번 덮으면서


 영국 도심지에서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아프리카 벌판으로 옮겨가서 어린 나날을 보내게 된 네 아이 삶과 생각이 담긴 책 《오카방고의 숲속학교》를 읽어냅니다. 한 번 읽고 덮은 뒤 한 해쯤 묵히다가 다시 펼쳐서 읽고 덮습니다. 처음에는 부러운 녀석들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유럽놈들이니까 우리 나라와 같은 걱정이 없어서 이렇게도 살 수 있지 하는 짜증이 살짝 있었습니다. 세계 온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괴롭힌 녀석들인데 하는 짜증.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이런 마음은 말끔히 가시지 않습니다.

 다만, 영국이나 유럽이나 미국이 세계 온나라를 식민지로 삼거나 괴롭히는 짓은 이 아이들 탓이 아니지 않느냐고, 또 이 아이네 부모는 그런 제 고향나라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 않느냐고 하는 생각.


.. 젖 떼는 시기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어미가 얼마나 잘 참아 주느냐, 다른 먹이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8개월이 되면 고기를 주로 먹는다. 우리의 관찰에 따르면 오래 젖을 빤 새끼가 더 건강한 것 같다 ..  (216쪽)







 가만히 보면, 우리 나라가 일본한테 식민지살이를 겪었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 나라는 제3세계 나라에서 찾아오는 사람들, ‘이주노동자’를 모질게 괴롭히고 들볶고 등처먹고 푸대접하고 깔봅니다. 우리 나라는 미국한테 경제 식민지처럼 매여 있으나, 우리 나라가 울궈먹고 못살게 구는 가난한 나라가 퍽 많습니다. 말과 물이 선 나라뿐 아니라, 중국 조선족을 괴롭히고 따돌리는 우리 나라입니다. 일본 조선인을 깎아내리며 콧방귀도 안 뀌는 우리 나라입니다. 러시아 한인은 어떻고요.


.. 숲속 생활의 가장 큰 매력은 예측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숲에서 사는 생활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환상적이라고 말하면 거짓이겠지만, 많은 부분은 다른 어떤 삶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 ..  (92쪽)


 덮었던 책을 다시 펼치며 사진을 죽 훑고,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은 대목을 또 한 번 읽습니다. 마음속 깊은 데까지 건드려 준 좋은 이야기를 맛보았으면서 왜 이렇게 심통을 부리나 싶군요. 아무래도 마음그릇이 좁기 때문에, 마음닦기가 덜 되었기 때문에 이러나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나라에서 마음짐 내려놓고 ‘개발 삽날’ 걱정 없이 해맑은 바람과 시원한 물을 즐기는 가운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함께 살아갈 터전이 그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는 생각 때문에 슬퍼서 이러는구나 싶어요.

 시골은 시골대로, 도시는 도시대로 제 모습 제 꿈 제 빛깔을 고이 간직하면서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더 많은 돈을 뽑아내는 개발이 아니라, 더 즐겁고 밝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 가꾸기로 눈길을 맞출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더 널리 함께하는 슬기로움이면 좋을 텐데. 더 많은 자격증이나 더 높은 졸업장이 아니라 더 따숩고 살가운 배움과 가르침으로 오순도순 어울릴 수 있는 이야기라면 좋을 텐데. 산업도로든 간선도로든 다른 무슨 길이든, 자동차만 다니는 길 닦는 데에만 수천 수만 수억 수조를 쏟아붓지 말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과 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길을 있는 그대로 살려 놓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서 들짐승들과 날짐승이 살아갈 길을 지켜 주고. (4341.3.1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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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학의 논리 창비신서 44
최원식 / 창비 / 1988년 3월
평점 :
절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책은, 알라딘에는 안 뜹니다. 헐...

 



 - 책이름 : 황해에 부는 바람
 - 글쓴이 : 최원식
 - 펴낸곳 : 다인아트(2000.8.30.)
 - 책값 : 9000원


 이 책 하나 39 ― ‘눈감고 꼼짝않으면’ 어르신이 아닙지요
 : 최원식, 《황해에 부는 바람》을 덮고 나서


 (1) 어느 한 곳에서 태어나서 산다는 일이란


 국민학교 다닐 적부터 고등학교 다닐 적까지, 지역 사회나 역사를 배울 때면 속이 쓰렸습니다. 갑갑했습니다. 지역 자연 삶터를 배울 때에도 까마득했습니다. 도무지 제 고향 인천이라는 데에서 다른 곳과 견주어 내놓거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어 보여서 그러했습니다. 인천에서 나고자란 훌륭한 어른이라든지 빛나는 분들 또한 보이지 않았습니다.

 철없던 그때, 지역 어르신으로 누가 있는 줄 어찌 알았으랴만, 우리들 철부지들이 알아볼 수 있는 자료나 책은 얼마 없었기에 더욱 어려움이 컸습니다. 문교부에서 만든 〈자연〉 국정교과서로 배우던 국민학교 여섯 해 내내, 가장 어렵고 싫고 짜증나고 괴롭던 숙제 가운데 하나는, “우리 지역 천연기념물로 무엇이 있을까요?”라는 녀석. 허허 참, 그때나 이제나 인천에 어떤 천연기념물이 있는가요. 이제는 ‘직할시’에서 ‘광역시’가 되어 옹진군이 인천에 들어왔으니 백령도 물범을 슬쩍 끼워넣어도 되나요?


.. 초기에 개혁이 비교적 순조로왔을 때 호남은 그 어떤 지역보다도 (김영삼) 문민정부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는 얘기를 최근에 흥미롭게 들었다. 정부 정책의 보수 회귀는 스스로 국민 통합의 절호의 기회를 반납함으로써 오늘날의 기이한 지방할거주의의 틈입을 불러온 꼴이다. 역설적이지만 중앙정부가 국민 통합의 실질적 상징이고자 노력할 대 진정한 지방자치도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28쪽/1995)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제가 치를 대입시험이 수학능력시험과 본고사 두 가지로 바뀌었습니다. 이리하여 제가 받는 학교교육은 제 앞선 형이나 누나와는 사뭇 달라집니다. 그러면서 ‘교과서 아닌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주문이 떨어집니다. 교과서는 여러모로 답답하다고 느껴 왔기에 속으로 참 잘 되었구나 생각했는데, 다른 동무들은 ‘공부할 건수만 더 늘어나’ 괴롭다고 했습니다. 중3 때부터 그랬지만, 이때부터 제 가방은 교과서 아닌 책이 절반이나 1/3쯤 차지합니다. 지루한 수업 때에는 교과서 아닌 책을 교과서 밑에 숨겨 놓고 읽고, 자율학습 때에는 대놓고 읽습니다.


.. 일본의 어느 도시를 가도 도서관과 박물관은 그 지역 시민의 자존심의 상징으로 도시의 중심에 뚜렷하다고 하지 않는가? ..  (86쪽/1990)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부터 헌책방 나들이를 합니다. 이때, 인천에서 나고자란 몇몇 문학가 또는 문학평론가를 알게 됩니다. 첫 번째로는 이가림 시인, 다음으로는 최원식 교수.

 가뭄에 단비 내리듯한 이런 분들 책을 하나둘 새로 알게 되고 즐겨읽으면서, ‘왜 이런 분들 글은 우리가 인천에서 배우는 교과서에는 못 실리’는지 궁금해집니다. 또한 ‘이런 분들 책은 왜 우리가 사는 인천에서 널리 알려지며 읽히지 못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이 궁금함은 아직 못 풀고 있습니다. 다만, 지역 어르신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형편, 지역 문화를 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노릇, 지역 역사를 서민 눈높이에서 헤아리며 살아가는 틀거리가 없음은, 인천뿐 아니라 우리 나라 다른 곳도 비슷비슷하다고 느낍니다.


.. 내가 머카서(맥아더)의 공적을 격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익을 수호했던 미국의 장군이었다. 아무리 탁월한 무훈을 세웠어도 외국 장군의 동상을 시의 중심에 모셔놓고 경배하는 도시는 아마도 세계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다 … 어찌하여 외국 장군의 동상은 이처럼 정성들여 멀쩡하게 잘 만들면서, 여타의 인천 기념조각들은 그처럼 조잡할 수 있을까? ..  (90쪽,92쪽/1995)


 인천 아닌 데에 사는 또래 동무나 선후배들이 듣거나 아는 인천은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인천은 바닷가에 있다. 공장이 많아 공기가 더럽다. 서울과 가깝다. 서울과 가까운데 가 보면 볼 게 없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뜬다더라. 인천은 술값이 싸더라. 당구값도 싼데 인천 다마는 세더라. 요새 여기에 하나 덧붙이면, 월미도 바이킹은 사람 죽이도록 재미있더라. 아저씨가 내키면 끝없이 돌리고 또 돌려 주더라.


.. 우리의 학식은 과연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던가? ..  (202쪽/1990)


 국민학교 적 〈사회〉 숙제로 ‘우리 동네 사회와 경제가 어떠한가’ 하는 숙제로 적어낸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집 앞에 경인고속도로 들머리가 있고, 제2부두가 있어서 쉴새없이 자재와 수출입 물건을 실어나른다. 우리 집 앞에는 제일제당 공장이 있고, 학교 가는 길에는 연탄공장이 있어서, 이곳에서 만든 연탄은 기차에 실려 서울로 간다, 개항 100주년 기념탑이 있고(이 끔찍한 탑은 몇 해 앞서 드디어 철거되었습니다), 자유공원에는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한미수교가 아닌 함포외교에 따른 강제개항이었는데 ‘수교’라는 말로 눈속임을 하는. 이 탑은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이 있다는둥 ……. 지금 돌아보면 하나같이 부끄러운 모습이 ‘내 고향 인천 자랑거리’였고, 저뿐 아니라 다른 동무들도 비슷비슷한 줄거리로 숙제를 내놓았습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이런 이야기를 가르쳤습니다.





 (2) 서울


 돈 많이 벌며 잘사는 작은아버지 두 분은 서울에 살았습니다(한 분은 인천서 살다가 서울로 갔다가 목포로 옮기시고). 때때로 우리 집 네 식구가 인천에서 서울 강남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갈 때면, 하인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한참 동안 달려 서울역까지 갑니다. 그런 뒤 택시를 타고 가는데 길은 얼마나 멀고 택시미터기 돈은 얼마나 빨리 올라가든지. 나중에 2호선이 뚫리고 나서 택시삯은 덜 들었지만, 구역마다 촘촘히 선 신호등에 막힐 때면 제가 짜증이 다 났습니다. 생각해 보니, 인천에 신호등이 처음 생긴 역사도 짧고, 제 어릴 적까지는 그닥 안 많았습니다.

 인천 공기가 썩 맑지 않았습니다만,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숨이 턱턱 막혀서 일부러 입을 앙다물며 숨을 참기도 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내릴 때는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메스꺼웠습니다. 서울사람들은 이런 지하철을 어떻게 타고다니나 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고 보면 요사이 서울 작가들은 뭐 하는지 모르겠다. 귀향할 것도 아니면서 고향타령이나 하든지, 서울의 겉모습에 취해서 관념적 포우즈 속에 생뚱맞은 소리나 하고 있지, 이 중요한 공간을 하나의 지방으로 탐구하는 작업은 가물에 콩나기다 ..  (36쪽/1995)


 그런데 뒷날 제가 서울에서 여덟 해 남짓 살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어릴 적에는 머리 아프고 숨쉬기 어려운 서울에서는 안 살 테야 하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이 그렇게 쉽게 깨질 줄은.

 서울 나들이를 할 적마다 저를 보는 서울사람들이 ‘너, 서울사람 아니지?’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저 사람(어른)들은 어떻게 그걸 다 알까 싶어 놀랐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인천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보면, 내 느낌으로도 ‘저 사람은 인천사람 아니네’ 하는 티가 물씬 풍겼습니다. 말씨도 다르지만 몸짓도 다르고, 바라보는 눈길과 눈썰미가 다르거든요.


.. 우리 사회는 특히 5ㆍ16 이후의 개발독재 아래 농촌 및 지역의 독자성은 파괴되고 서울로 지나치게 통일되었다. 더구나 민주주의의 진정한 기초라고 일컬어지는 지방자치제도가 오랫동안 유보됨으로써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이 서울을 향해 질주하였던 것이다 ..  (53쪽/1991)


 서울과 얽힌 옛말이 여럿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 서울 가는 놈이 눈썹을 빼고 간다. 서울 가서 김 서방 찾는다. 서울놈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 서울서 매 맞고 송도서 주먹질한다.

 이런저런 옛말을 듣고 배우면서 늘 ‘왜 사람을 서울로 보내야 하나? 자기가 나고자란 곳에서 무럭무럭 자라면서 자기가 나고자란 곳을 알뜰살뜰 키우면 되지 않어?’ 하고 생각했습니다. ‘큰일을 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말은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흔히 들었습니다. 사람이 크려면 물이 좋은(?) 곳에서 커야 한다고 말하고, 사람 많은 곳에 가야 돈도 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며 늘 ‘왜? 왜? 왜 자꾸 서울 이야기만 해? 우리 동네 이야기는 왜 안 해?’ 하고 대들듯 따졌지만, 저한테 돌아오는 대꾸는 한결같이 ‘넌, 아직 어리구나.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커서 큰물을 한번 먹어 봐야지.’ 한 마디.


.. 요즘 경인선은 살풍경이다. 인천과 서울 사이가 이제는 빈틈없이 시멘트 건물로 들어차 숨이 막힌다. 경인선 개통 한 세기만에 서울과 인천 사이에 시골은 멸종하고 말았다 ..  (101쪽/1996)


 아버지가 빚까지 얻어가며 마흔여덟 평짜리 새 아파트로 집을 옮기지 않았다면, 저는 인천에 눌러앉지 않았겠느냐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옛날 일이지만.

 그곳이 좁은 우물일지라도, 더 많은 사람과 더 넓은 세상을 못 보는 일이라고 해도, 제가 나고자란 곳에서 조용히, 고즈넉히, 아옹다옹을 하든 쿵떡쿵떡을 하든 제가 선 자리에서 살아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집안 문제를 넘어서, 대학입시 원서를 내야 하는 때가 다가와 고3 담임이 상담을 할 때, ‘웬만하면 인천에 있는 대학교에 가라’는 말에 불뚝불뚝 싫은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왜 거기를 가야 하는데? 재단비리가 철철 넘치는 그곳에 왜 가야 하는데(그때는 끔찍했는데, 이제는 이 비리 문제가 많이 풀렸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학문은 인천에 있는 대학에서는 안 가르쳐 주는데?

 한낱 고3 수험생이 어떤 건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인천이든 서울이든 대구이든 부산이든 제주이든, 대학교에서 꾸리는 학과가 거의 똑같은 모습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서울에 있으면 서울이라는 곳 특성을, 제주에 있으면 제주라는 곳 특성을, 대전에 있으면 대전이라는 곳 특성을 키우는 대학교여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했습니다. 왜 모든 대학교가 한결같이 영문과 일문과 경영학과 의학과 기계공학과 전자공학과 건축과 법학과 무역학과 …… 똑같은 학과를 꾸리고 있는지.


.. 정부는 굴업도 주민 9명이 찬성한다는 것을 방패로 이 중대한 문제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 온갖 쓰레기들은 지방으로 내려보내면서 좋은 것은 전부 서울에 두는 특별시민들과 쓰레기들을 뒤집어쓴 채 핵쓰레기만은 재고하라고 애원하는 지방사람들과 과연 누가 진짜 지역이기주의자들인가? 더구나 요사이 거대언론들은 입만 열면 환경보호를 외치고 있는 중이니 ..  (225쪽,226쪽/1995)


 이런저런 싸움(담임하고 벌인 싸움)과 걱정과 실랑이 끝에, 인천에 있는 대학교에는 원서를 넣지 않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 세 군데에 원서를 넣었고, 두 군데에서 붙어 이 가운데 한 곳에 들어갑니다. 이름하여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종합대학교’인데, 다른 곳과 달리 ‘서양어대’와 ‘동양어대’가 나뉘어 있는 모습이 다르기는 해도 ‘상대’과 ‘법대’가 있고, 용인에는 이공계열학과가 있습니다. 재미있지요.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친다고 하면서 이렇게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면. 더욱이 이 대학교 신문방송학과는 꽤나 이름났고, 무역학과 역사도 오래되었으니. 서울이란 참, 대한민국이란 참.





 (3) 몸으로 겪어내기


.. 가끔 인천바다도 바다냐는 핀잔 같은 말을 듣습니다. 그때는 그냥 웃고 마는데, 한번 구경 온 사람과 직접 그 속에 사는 사람이 보는 바다는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작은 사물도 그것을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사물과 나 사이의 깊은 친교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44쪽/1998)


 1994년에는 인천 왼편 끝에서 서울 오른편 끄트머리께까지 머나먼 전철길을 따라 오징어가 되고 떡이 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1995년부터는 집을 뛰쳐나와 신문사지국에 들어가 신문을 돌리며 혼자살림을 꾸리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군대를 마친 뒤 다시 서울로 가서, 내처 살았습니다.

 이러는 동안 고향이라는 곳은 이름 두 글자만 남고 몸이고 마음이고 훌훌 떨어져 갑니다. 좋아하지 않는 곳이면서 ‘일’ 때문에, 또 ‘책’ 때문에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거의 모든 출판사가 서울에 몰려 있고, 크고작은 알뜰한 헌책방이 서울에 쏠려 있습니다. 걸어서 몇 분 거리로 종로서적(이제는 사라졌으나)과 교보문고와 영풍문고가 모여 있으며, 끝까지 버티고 있는 인문사회과학책방도 서울에 서너 곳 있습니다.


.. 아마도 인천에서 아니 전국적으로도 가장 근사한 일본식(식민지 때) 주택의 하나로 꼽힐 터인데, 교회가 사서 까뭉개고 주차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자동차를 모시기 위해 이 아름다운 건축을 이처럼 파괴하다니. 율목동을 관통하는 도로를 뚫는다고 당당한 기와집 근업소를 흔적없이 부숴버린 몰지각이 다시금 생각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째서 역사의 흔적을 지우지 못해 안달일까? ..  (96쪽/1996)


 2003년 가을부터 서울을 벗어나 충북 충주에서 일합니다. 삶터와 일터가 서울에서 벗어나니, 서울이 사람을 얼마나 잘 빨아들이는구나 깊이깊이 느낍니다. 시골에서는 책방 하나 구경하기 어렵고, 면내나 읍내로 나들이를 나온다 한들 바라는 책 하나 찾을 수 없습니다. 한두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시골버스를 기다리느니, 삼십 분에 한 대씩 있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 편이, 책방 나들이에 한결 나았습니다. 사람을 만나려고 해도 서울로, 책을 사려고 해도 서울로, 뭐를 하려고 해도 서울로 …….

 서울에 있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했던 ‘서울 쏠림’을 어릴 적에 이어 다시금 느끼면서, 서울사람은 서울사람대로 서울 아닌 곳 사람은 서울 아닌 곳 사람대로 ‘외로 쏠린 마음’으로 살아가며 서로 못 만나고 있구나 싶더군요. 넘치게 누리는 사람도 딱하고 모자라서 못 누리는 사람도 안쓰럽고.


.. 내 발로 밟고 내 눈으로 보면서 확인한 중국은 독서로 안 중국과 다른 점도 많았거니와, 같다고 하더라도 실감한다는 일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감득했던 것이다 ..  (165쪽/1998)


 지난 2007년 4월, 충주 산골자락에서 고향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또 충주에서 돌아오기 두어 달 앞서부터, ‘동네 한복판 꿰뚫으려는 산업도로’ 막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처음 이 ‘산업도로 계획과 인천시 행정’을 맞닥뜨렸을 때,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다 벌어지는구나, 거짓말이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네 한복판 집을 싹 쓸어내어, 너비 50∼70미터에 길이 400미터 남짓 하게 파헤쳐 놓은 땅을 두 눈으로 보고 그 땅을 두 발로 디디고 서 보니, ‘이거 장난이 아니네. 이거 참말 밀어붙이려나 보네. 이거 밀어붙여서 이 동네를, 이 삶터를 어떻게 망가뜨리려는 속셈이야?’ 하는 생각이 절로 샘솟았습니다.

 새 대통령이 되신 이명박 씨께서 밀어붙이려고 하는 ‘서울-부산 물길(경부운하)’이 한 나라를 더욱 모질게 두 동강으로 쪼개어 버리는 끔찍한 재앙이라면, 두 번째 인천시장을 하고 계신 안상수 씨께서 몰아세우고 있는 ‘중ㆍ동구 관통 너비 50미터 산업도로’는 인천을 더더욱 아프게 두 동강으로 갈라 버리는 못난 재앙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서울-부산 물길’ 문제는, 이 물길이 놓일 터를 우리가 몸소 다녀 보면서 느끼지 못하면 살갗으로 와닿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고용창출 효과-경제성장 효과’라는 숫자놀음에 놀아나기 쉽습니다. 인천 ‘중ㆍ동구 관통 너비 50미터 산업도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 몸소 와 보고 싹 쓸려버린 동네 한복판 허허벌판을 두 눈으로 보고,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이 ‘폭탄 맞은 듯한 모습’을 내려다보지 않고서는, 또 동네 골목길을 거닐어 보지 않고서는, 그리고 서민 동네 바로 옆에 우람하게 늘어서 있는 중화학공장 들을 쳐다보지 않고서는, 살갗으로 와닿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지역발전-균형발전’이라는 허울좋은 사탕발림에 놀아나기 좋습니다.





 (4) 최원식 교수님, 다 아시면서……


 우리 나라 내로라하는 지식인, 또는 ‘사회 어르신’ 들은 ‘서울-부산 물길’ 문제를 높은 목소리로 나무라고 있습니다. 계층과 직업과 성별과 학문갈래 모두를 넘나들면서 한목소리로 꾸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천에서 내로라하는 지식인, 또는 ‘지역 어르신’ 들은, 당신들 고향이자 어린 날과 젊은 날 추억이 물씬 담겨 있는 곳, 또 당신들 고향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 삶터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판인데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동네 주민이 당신들을 찾아뵈면서 이곳에 이런 문제가 있다고 말씀을 드리고, 이곳 문제와 얽힌 자료를 꾸준히 보내드려도 아무 말이 없고 아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 저는 시립도서관 근처에 살기 때문에 가끔 제 아이들을 데리고 율목동으로 산책을 나가 옛 근업소, 박두성 선생의 집, 그리고 인천 유일의 주정공장 터였던 기와집 등을 둘러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길이 뚫리고 이 기와집들은 흔적이 없던 것입니다. 물론 도시계획 좋습니다. 그러나 새길을 뚫기 전에 보존해야 할 유적은 없는지 그 동네 토박이들의 의견을 청취해서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은 그 쇠락한 기와집들을 무어 그리 애석해 하느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온고이지신이란 말이 있듯이 미래의 창조적 발전은 전통의 힘으로부터 솟아오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  (178쪽/1989)


 최원식 교수님, 이제는 입을 여실 때가 되지 않았는가요. 교수님이 율목동에 사실 때에는 그 동네 ‘보존해야 할 유적’을 하루아침에 허물어버린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탓하고 나무라고 꾸중하는 글을 쓰셨는데, 이제는 율목동 아닌 다른 동으로 집을 옮기신 탓인지, 당신 예전 집터 둘레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마음을 안 기울이셔도 좋은지요. ‘우리 앞날을 슬기롭게 키워 나가는 힘은 전통에서 비롯한다’고 말씀하시던 그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가요. 대학교 강단에서 제자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신가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아무리 교수님이 당신을 스스로 가리켜 ‘저(최원식)는 백면서생입니다’ 하고 털어놓는다 하더라도, 몸도 안 쓰고 입도 안 쓰면서 어떻게 당신 몸과 마음이 깃든 ‘지역’ 문화와 사회와 역사를 지키거나 가꿀 수 있습니까.


.. 자, 인천을 한번 둘러보십시요. 우리 고장 인천은 아름답습니까? 아닙니다. 개발이란 이름 아래 인천은 가장 자연파괴적인 도시로 저렇게 잿빛으로 누워 있습니다. 온갖 폐기물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  (233쪽/1996)


 ‘지역 어르신’이라면서 섬김을 받으나, 섬김에 값하는 마음씀이 보이지 않으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지역 지식인’이라는 떠받듬을 받으며 대학교 교수 자리를 얻으나, 떠받듬에 값하는 몸씀이 보이지 않으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한테는 ‘세상을 꿰뚫어볼 줄 아는 눈’이 틀림없이 올곧게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한테는 ‘세상흐름을 날카롭게 파헤칠 줄 아는 눈’이 환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요, 이런 눈만 있으면 무엇하지요? 눈은 있는데 입이 없다면? 입은 있는데 몸뚱이는 없다면? (4341.3.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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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와 테러리스트 - 앙굴리말라 이야기
사티쉬 쿠마르 지음, 이한중 옮김 / 달팽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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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부처와 테러리스트
- 글 : 사티쉬 쿠마르
- 옮긴이 : 이한중
- 펴낸곳 : 달팽이(2005.1.27.)
- 책값 : 6500원



 이 책 하나 35 ― 바보 기자와 어리석은 공무원한테 책 선물
 : 사티쉬 쿠마르, 《부처와 테러리스트》를 읽고



 (1) 기자와 공무원


 월요일인 어제, 2월 25일 아침 아홉 시 사십팔 분, 연합뉴스 인천지사에서 일하는 기자한테서 전화가 옵니다. 이분이 쓴 ‘배다리 산업도로 공사재개’ 기사가 오로지 인천시에서 보도자료로 돌린 글에 바탕을 두고 쓰느라, 주민들 목소리를 하나도 담지 않기도 했으나, 이보다도 사실관계를 찬찬히 살피지 않고 썼기에 인터넷편지로 ‘정정보도 요청’을 했어요. 기자는 자기가 주민 목소리를 담지 않은 대목과, 자기가 쓴 기사와는 달리 ‘인천시가 주민하고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은 한편, 이야기를 나누려 애쓰지도 않았다’는 대목, 또 공사진행율을 수치로 따져서 말할 때 당신들로서는 그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대목 들을 말합니다.

 그분으로서는 고침 기사를 쓸 수는 없구나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전화 한 통 넣어 주니 고맙습니다. 우리 동네 한복판, 아니 인천이라는 곳이 지금 모습으로 자리잡는 동안 뿌리내리고 살아온 오래된 서민 동네 한복판에 너비 50∼70미터에 이르는 산업도로를 우격다짐으로 뚫어내겠다고 하는 인천시 공무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우리 동네 사람들하고 ‘그래, 무엇이 문제냐?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안다, 안다. 그대가 누군지 안다. 하지만 그대는 내가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죽어 줄 수 있다는 걸 모르는가?” 부처는 잠시 한숨을 돌리더니 말했다. “난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죽는 것은 아무도 해롭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이는 건? 남들을 죽이니 어떤 기분이 들지, 앙굴리말라? 죽이는 것에 관해 자신의 감정을 깊이 한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  (25쪽)


 공무원은 누구 때문에 일하는 사람일까 생각해 봅니다. 공무원은 어디에서 일하는 사람일까 생각해 봅니다. 공무원은 왜 일하는 사람일까 생각해 봅니다. 공무원이 되면 ‘먹고살기 힘든 요즘 세상에 안정된 일자리와 넉넉한 노후보장’이 되니 좋은가요. 위에서 내려보낸 일을 말없이 따르기만 하면 되는가요.

 관청 어느 곳마다 ‘민원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민원실’에서는 어떤 ‘주민 목소리’를 듣고 고치려고 하는지요. 주민들이 살기 팍팍하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한테 있어야 할 것은 수천 억이나 수 조에 이르는 돈을 쏟아부으며 새로 닦는 찻길이 아닌데, 그 어마어마한 돈을 우리 주머니에서 뽑아낸 세금으로 닦을 까닭이 없는데, 그 엄청난 돈으로는 지역 문화를 북돋우고 지역 사회를 가꾸고 지역 복지와 교육을 일으키는 데에 써야 할 텐데, 이런 목소리는 ‘민원’이 아니라고 여겨서 입 닫고 귀 막고 눈 감고 있어도 되는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보다 찻길이 더 많은 세상이 되어 버리면, 사람이 걱정없이 걸어다닐 길이 아니라 주차장만 잔뜩잔뜩 만들어 버리면, 우리들이 이 땅에 목숨붙이 하나로 태어난 보람과 기쁨은 어디에서 어떻게 맛볼 수 있을는지요.


.. “사랑의 힘을 발휘해 보라. 본성의 힘은 칼의 힘보다 강하다. 사랑의 힘은 그대 안에서 자라는 것인 반면, 칼의 힘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 칼의 힘은 남들의 나약함과 굴종과 무기력에 의존한다. 그러나 사랑의 힘은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주지.” ..  (32∼33쪽)


 어제 아침 연합뉴스 기자한테 전화를 받은 뒤, 부지런히 짐을 챙겨 인천시청으로 갑니다. 아침 11시에 시청 기자실에서 ‘산업도로 강행하려는 인천시를 규탄하며, 다시금 인천시장 면담을 요청’ 하는 기자회견을 하기에. 동네사람 가운데 하나이면서,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는 시민기자인 하나로 찾아갑니다.

 인천시청은 퍽 뻘쭘한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다닐 무렵, 인천 중구에서 지금 자리로 옮겨 왔는데, 그때에나 이제에나 교통 편이 아주 나쁩니다. 버스도 잘 다니지 않아요. 더욱이 버스는 시청 뒷문에 멈출 뿐입니다. 시청으로 찾아갈 때 앞이 아닌 뒤에서 버스를 내려서 찾아가도록 하는 곳이 인천 말고 다른 데에 또 있을까요?

 옆지기가 버스를 타면 멀미를 하기에 인천지하철을 타고 갑니다. 돌고 돌아 인천시청역에서 내리니 우람하게 지은 땅밑 건물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인천지하철에는 짐칸이 없어, 타고 오면서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고 투덜투덜거렸는데, 전철에서 내려 높직한 계단을 하염없이 밟고 오르면서, ‘지하철역 안에 이렇게 대리석으로 꾸미는 데 들어간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데?’ 하는 푸념이 끊이지 않습니다. 앉아서 다리쉼 할 자리도 거의 보이지 않으면서 그예 큼직큼직하게 이것 꾸미고 저것 꾸미고 …… 누구한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 건물인지.

 버스와 마찬가지로 시청 뒷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인천지하철. 시청 앞은 오로지 자가용만 몰고 가서 내리도록 짜 놓았습니다. 예전에 한 번 버스를 타고 시청 앞으로 오며 이십 분 가까이 걸었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버스정류장부터 시청 앞문까지 얼마나 멀든지.


.. “그렇다면, 지금 현재 불행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데 어찌 미래에 행복해질 생각을 한단 말인가? 어찌 엉겅퀴 씨앗을 뿌리고 장미를 기대할 수 있는가? 지금이야말로 언전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순간이다.” ..  (42쪽)


 시청으로 들어갑니다. 가운데문은 닫혀 있습니다. 수위실과 맞닿은 왼쪽 쪽문 하나만 열립니다. 가운데에 버젓이 있는 큰문이 왜 닫혀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시청 경찰 여러 사람이 가운데에 우뚝 서서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을 샅샅이 훑어봅니다.

 기자실은 2층. 기자실로 올라가는 계단은 왼쪽으로 돌아서 가라고 합니다. 나중에 보니 가운데 계단도 있어요. 그런데 이 가운데 계단은 ‘인천시장 전용 계단’으로 느껴집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시장실에 들르려고 하니 시청 경찰 대여섯이 우리를 막아서며 ‘어디를 가느냐? 시장은 지금 밥먹으러 가고 없다’면서 붙잡습니다. 다른 경찰 하나는 ‘내려가는 계단은 저기에 있다. 저쪽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가운데에 널찍하고 좋은 계단이 있는데, 왜 구석진 곳에 조그맣게 있는 꽉 막힌 계단으로 가야 하나요?

 오늘도 지난달처럼, 또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인천시장 얼굴은 못 봅니다. 시장 비서 얼굴조차도 구경하지 못합니다. 시청 경찰 얼굴만 잔뜩 보고는 돌아서야 합니다.


.. “연꽃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연꽃은 화를 낼 줄도 모릅니다. 연꽃은 누구를 기쁘게 할지, 누구를 불쾌하게 할지 모릅니다. 연꽃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연꽃은 성인에게도 죄인에게도 기쁨을 줍니다. 인간은 왜 연꽃처럼 될 수 없을까요?” ..  (59쪽)


 기자회견 자리를 물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옆지기가 말합니다. ‘기자라는 사람이 다들 저런가?’ 하고. 당신도 아까 한 마디를 하려다가 참았다는데, 인천에서 인천 이야기를 쓰는 기자들이 인천 이야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태껏 배다리 산업도로 이야기가 한두 번 나오지 않았는데, 올 때마다 똑같은 대답을 해 주어야 한다’면서, 어쩜 이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씁쓸하게 웃습니다. 한 마디 대꾸합니다. “인천시장도, 인천시 공무원도 배다리에 한 번도 안 와 보지만, 기자들도 배다리에 한 번도 안 와 보잖아요. 공무원도 주민하고 만나려고 안 하지만, 기자도 주민하고 만나려 안 하잖아요.”

 허허허. 허전하고 텅 비어 가는 마음 따라 눈물이 살그머니 맺힙니다.


.. “꿀벌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니며 한 번에 조금씩만 꽃 속의 꿀을 얻는다. 꿀벌이 해를 끼친다고 불평하는 꽃은 없다.” ..  (68쪽)


 기자로 일하는 분들 가운데 대학교 안 나온 사람 하나 없으리라 봅니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분들 가운데 대학교 안 나온 사람 하나 없으리라 봅니다. 선배 공무원도, 선배 기자도 학교교육 튼튼히 받고, 여러 가지 지식과 상식이 많으리라 봅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왜 이렇게밖에 일을 못할까요.

 기자든 공무원이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쉽게 일해서는 안 되는 자리일 텐데요. 책상머리에서 일해서는 안 되는 기자이자 공무원 아닌가요. 전화통만 붙들면서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기자이자 공무원 아닌가요. 어떤 정책을 꾸려나가면서, 간담회든 공청회든 설명회든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십 차례 이어나가면서, 또 몸소 주민을 찾아다니며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잘잘못을 가다듬어야 하지 않나요. 기사 한 줄에 자기 목숨을 걸듯 꼼꼼히 살피고, 바로 그 한 줄을 올바르게 적어내려가려는 매무새로 바삐 뛰고 움직이고 돌아다녀야 하지 않나요.

 그러나 기자와 공무원 탓만 할 수 없습니다. 이분들이 학교 다니며 배우는 동안, 이분들을 가르친 또다른 분(교사, 교수)들이 이분들을 올곧게 이끌지 못했거든요. 지식보다 삶을, 지위나 계급보다는 사람을, 돈보다는 사랑을, 권력보다는 믿음과 나눔을 섬기라는 뜻을 몸으로 곰삭이도록 다스리지 못했잖아요.


 (2) 사람과 살면서 사람을 못 보면


 새벽 한 시 오십 분에 잠에서 깹니다. 일어나서 오줌을 누고 바깥을 바라보니 온통 하얗습니다. 하얀 밤입니다. 이 하얀 밤, 언손을 녹이며 신문을 돌리고 우유를 돌리고 골목길을 비질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고될까요. 소복소복 내리는 눈에 첫 발자국을 남기거나 두 번째나 세 번째 발자국을 남길 이들 얼굴은 얼마나 꽁꽁 얼어붙어서 바알갈까요.

 창가에 기대어 골목길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몇 장 찍습니다. 이 깊어가는 밤, 발자국을 하나하나 만들면서 돌아다녀 볼까. 기자들이 이 동네를 손수 밟지 않는다고 안쓰러워하지 말고 내가 이 동네를 밟으면 되니까. 공무원들이 정작 자기가 일하는 동네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기만 할 뿐 아니라 알려고도 안 하는 몸가짐을 슬퍼하지 말고 내가 이 동네를 더 알아가면 되니까.


.. “전하, 폭력은 폭력을 낳습니다. 복수와 정의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어디선가 폭력이 일으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정의보다 위대합니다.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진정한 용서와 자비는 야만적인 행위를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용서해 줄 수 있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  (57쪽)


 사흘 춥고 나흘 따뜻하다던 옛날씨는 말 그대로 옛날씨이고, 내내 춥다가 살포시 풀리려던 날씨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쌀쌀해지더니 비가 한 차례, 눈이 한 차례.

 온도가 떨어진 이 밤, 방온도는 1∼2도를 오락가락. 보일러를 돌리고 싶으나 기름이 바닥나고 있어서 살짝 한 번 돌린 뒤 끄고. 집에 도시가스가 들어온다면 보일러를 돌렸을지 모르겠다고 생각. 어쩌면, 도시가스로 불을 때는 집은 ‘기름이며 가스며 얼마나 쓰이는가를 살갗으로 못 느끼는 채 돈만 벌어서 불값을 치르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다고 자기가 잡아먹는 자원이 얼마나 되는가를 살갗으로 못 느끼지는 않을 터이나, 깊이깊이 느끼기는 어렵지 않을까. 주머니 걱정에 앞서 자원 걱정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들은 따숩게 겨울나기를 한다지만, 바로 우리들이 낳아서 기를 다음세대는 어찌하지? 기름이 바닥나고 가스도 모자랄 스무 해 뒤는, 쉰 해 뒤는 어찌하지? 우리가 낳을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은 어찌하지? 우리는 다음세대뿐 아니라 다음다음세대한테 아무런 책임을 안 지고, 지금 이 자리에서 이대로도 좋고 즐겁다고 생각하며 살아도 되는지?


.. “그대의 마부가 화살에 맞았는데 그대는 누가 활을 쐈느냐고 알아보겠느냐?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어느 대장간에서 만든 것인지, 누가 만들었는지, 화살촉이 쇠로 만든 것인지 구리로 만든 것인지를 먼저 알아보겠느냐?” ..  (87쪽)


 기자회견 자리에서, 주민대책위 부위원장 아저씨와 헌책방 아주머니 한 분이 거의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여기에 길을 낸다고 들인 800억(이 돈은 시에서 밝힌 돈이지만, 800억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느냐 하는 내역을 공개하지 않습니다.)이 큰 돈이고 조금만 더 하면 공사가 끝나는데 왜 반대하느냐고도 말하는데, 앞으로 길게 내다보면 훌륭한 투자를 한 셈이 됩니다. 지금은 이만큼이지만, 지금 잘못된 결정을 내려서 밀어붙이면 앞으로는 더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망가져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돈을 들여서 어떻게 보면 도심지 퍽 넓은 자리에 빈 자리가 생겼습니다. 이 빈 자리는, 인천을 인천시장이 명품도시를 바라는 그 뜻대로 참으로 인천다운 인천 모습을 가꾸며, 인천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숲을 가꿀 수 있으며, 인천이라는 곳 역사와 문화를 살리는 데에 아름답고 훌륭하게 되쓸 수 있습니다’ 하고.

 저도 잠깐 말미를 얻어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이 산업도로 공사 예산으로 수천 억이 잡혀 있는데, 앞으로 몇 천 억을 더 들여서 세금을 더 내버리기보다는, 그 돈으로 배다리를 비롯해 이 동네 살림집을 조금만 손질하면 서울 인사동보다 멋진 문화마을로 가꿀 수 있어요. 이곳에 와서 영화를 찍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파이란〉이라든지 〈고양이를 부탁해〉라든지, 이곳은 50∼60년대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편, 인천상륙작전 때 폭탄 안 맞고 살아남은 30년대 건물도 제법 있어요. 동인천역 앞에는 옛날 양조장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 문화유산이 지금은 노래방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 건물은 아파트 짓겠다고 허물면 그냥 사라져요. 다시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문화유산을 그냥 노래방 건물로 있게만 해도 될까요? 인천에서 앞으로 2014년에 아시안경기를 치르며 숙소가 모자라서 아파트를 새로 지어야만 한다고 하는데, 배다리 둘레 창영동 금곡동 송림동 송현동 율목동 숭의동 도원동 화수동 화평동 들 해서, 이곳에 있는 집을 살짝살짝 고치면 얼마든지 민박으로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은 이 집 그대로 귀중한 근현대 문화유적지 터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지금 사는 대로 보람을 느끼게 하고, 이 동네는 동네대로 아시안경기 때 숙소로 쓰도록 하면서 나라밖, 인천 바깥 사람한테 인천이라는 곳이 어떠한 곳인가를 말하도록 할 수 있어요. 우리는 그런 넓고 큰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겁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앙굴리말라의 말이 진심이라 하더라도 카스트제도와 그의 극악무도한 행동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왜 앙굴리말라가 카스트제도를 비난해야 하는지, 그것을 왜 자기 범죄에 대한 변명거리로 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대부분의 ‘돔’ 사람들과 불가촉천민들은 법을 잘 따르지 않는가.” ..  (119∼120쪽)


 밤 두 시 반, ‘배다리를 지키는 인천시민모임’ 인터넷방에 들어가 봅니다. 어제 기자회견 자리에 와 준 기자들이 올린 기사가 너덧 올려져 있습니다. 이 깊은 밤에 잠을 쫓아가며 애쓰는 분이 있군요. 기사를 하나하나 살핍니다. 허허. 거참. 이거야 원. 기자회견문이라고 나눠 준 종이에 적힌 말을 제대로 옮겨적지도 못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뜻도 담지 못하고, 산업도로라는 길이 어떻게 주민 삶과 삶터를 무너뜨리는지를 짚어내지 못하고. 그래도 기사를 써 주기라도 했으니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하는지. 길게 한숨을 쉽니다. 찬방에 입김이 길게 뻗습니다.

 사람을 마주하며 사람을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인데. 잘못 생각했나요? 잘못 보았나요? 서로 보는 눈이 다른가요? 우리한테는 보이는 사람이, 누군가한테는 돈으로 보이나요? 우리한테는 보이는 골목집이 누구한테는 재개발 이익으로 보이나요?


 (3) 《부처와 테러리스트》라는 책


 처음 나왔을 때는 읽지 않고 지나쳤던 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사티쉬 쿠마르. 요 몇 해 사이에 한국땅에서 부쩍 이름값을 높이는 인도사람. 꽤 많은 이들이 사티쉬 쿠마르를 읽습니다만, 《부처와 테러리스트》는 그다지 안 읽히는 듯합니다. 이분 사티쉬 쿠마르는 입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사는 사람이고, 지식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닙니다. 더 많은 돈이나 적은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자기 몸뚱이로 사는 사람입니다. 돈이 아닌 온몸 부대낌과 온마음 쏟아부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먹고살자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하지만, 돈이 쓰이는 곳을 살피면, ‘물건을 사는 일’입니다. 돈으로 사는 물건이 아닌 우리 손으로 만드는 물건이 된다면, 또 돈으로 사는 먹을거리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일구는 먹을거리가 된다면, 또 돈으로 사는 집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짓고 돌보는 집이 된다면, 우리한테는 ‘적은 돈’조차 아닌, ‘한푼 없어도’ 넉넉한 삶이 됩니다.


..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앙굴리말라, 내가 그걸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  (34쪽)


 국민학교였나 중학교였나, 자연인가 과학 시간인데, 아, 중학교 1학년 때로 떠오릅니다. 그때 과학(물상 시간이었지 싶습니다)을 배우는데, 첫머리에 ‘체험’ 이야기가 나왔어요. ‘과학은 실험을 거쳐 알아내는 체험’이라고. 이론으로만 따져서는 과학이 되지 못하고, 반드시 실험을 거쳐서 현실에서 이루어내야 비로소 과학으로 자리를 잡는다고.

 따지고 보면, 과학만 실험과 체험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인문학도 실험과 체험이 뒤따라야 합니다. 여성학은 어떻습니까. 환경학은 어떻습니까. 교육학과 사회학은, 예술학은 어떠한가요. 어느 학문이 실험과 체험 없이 바탕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요.

 실험과 체험, 온몸 부대낌 없이 신문기사 하나 나올 수 있습니까. 온마음 쏟아부음 없이 서민을 헤아리는 정책 하나 나올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이하여 야무지게 살아가는 사람을 알아보고 이들 이야기를 기사로 다루지 못하는가요. 우리는 어찌하여 낮은자리 사람들을 헤아리며 이들이 어깨동무하고 잘살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치지 못하는가요.


.. “난디니야, 나를 그저 따르기만 하지는 말아라.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 말을 그냥 받아들이지는 말아라. 그것을 직접 자기 삶 속에서 시도해 보아라. 내가 말한 것이 그대의 경험, 그대만의 진실과 공명할 때에 비로소 받아들여라.” ..  (89쪽)


 이야기책 《부처와 테러리스트》는 저마다 다 다른 땅에서 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한테 무엇이 참으로 소중하며 가장 마음을 기울이면 좋은가 하는 물음 하나 내놓습니다. 다만, 풀이법은 내놓지 않습니다. ‘이런 길도 있느니라’ 할 뿐 ‘이 길로 가야 하지는 않느니라’ 하고 넌지시 옷소매를 잡습니다. ‘내가 간 이 길이 나한테는 좋았다고 당신도 무턱대고 이 길을 가지 말라’고 합니다. 길찾기는 저마다 다 다른 자기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 새롭게 가꾸고 일구어야 오래오래 싱그럽고 반갑고 단단할 테니까. (4341.2.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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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따뷔랭 - 작은책
장자끄 상뻬 지음,최영선 옮김 / 열린책들 / 199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이름 : 자전거포 아저씨 라울 따뷔랭
- 글ㆍ그림 : 장 자끄 상뻬
- 옮긴이 : 최영선
- 펴낸곳 : 열린책들(1998.7.25.)
- 책값 : 6500원



 이 책 하나 37 ― 자전거를 못 타는, 또는 안 타는 당신
 : 장 자끄 상뻬, 《자전거포 아저씨 라울 따뷔랭》



 (1) 자전거를 타요?


 엊그제 서울 나들이를 하며 하룻밤을 묵은 집에서, ‘서울 시내 자전거도로 안내 지도’를 보았습니다. ‘자전거길’을 알려주는 서울 시내 길그림인데, 자전거길이 ‘끊어지지 않고’ 죽 이어진 데는 한강 한 곳뿐입니다. 다른 데에서는 자전거길이 얼마쯤 있다가도 툭툭 끊어집니다.

 ‘자전거길 길그림’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이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끊어지는’ 자전거길을 그려 놓은 이 길그림은 누구한테 쓸모가 있을까 하고. 자전거길이 끊임없이 끊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걱정없이 즐겁게 자전거를 타고다니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 영 가시지 않는 침울함을 달래려고 따뷔랭은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는 단순한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때때로 입이 근질근질한 것을 참아 가며 그 일을 성공적으로 비밀에 붙여 왔다는 사실이 가져온 이로운 점들을 열거해 보았다. 그러나 이 방법은 효과가 없었다 ..  (91쪽)


 여러 해 앞서부터 요즈음까지, 해마다 ‘자전거 문화를 북돋운다’는 정책이 쏟아집니다. 새로운 자전거길을 닦는다며 수십 억에서 수백 억에 이르는 돈을 들인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지자체마다 ‘우리 지자체가 자전거길을 몇 km나 늘렸는가’ 하는 이야기를 자랑삼아서 내놓습니다. 그런데, 자전거로 학교나 일터를 오가는 사람들 숫자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습니다.

 값나가고 잘나가는 자전거를 장만하는 분들 숫자가 늘어납니다. 해마다 부쩍부쩍 늘어납니다. 나라밖 좋은 자전거를 수입대행 하는 분도 늘고, 몸소 나라밖에서 자전거를 사들이는 사람도 늡니다. 그러나, 자전거로 학교와 일터를 오가는 사람들 숫자 또한 그다지 안 늘어납니다.

 인천에서 나고 자라며, 서울로 가서 열 해 가까이 살면서, 충주로 가서 네 해쯤 살면서,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내처 지내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걸쳐 어떤 사람이 어떤 자전거를 타고다니는가를 살펴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 동안 고루 자전거를 타는 분은 늘 탑니다. 비가 와도 타고 눈이 와도 탑니다. 추워도 타고 더워도 탑니다. 그렇지만, 자전거를 안 타는 분은 비가 와도 안 타고 눈이 와도 안 탑니다. 따뜻해도 안 타고 시원해도 안 탑니다. 다만, 운동을 삼아서 타는 분이 있습니다. 취미를 삼아서 산을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 봄이 되자 《프랑스의 어느 작은 마을》이라는 겸손한 제목을 단 예의 사진집과 병원에 있던 따뷔랭이 동시에 나왔다. 한 번 골절을 당해 본 팔다리가 더욱 튼튼해지듯이 따뷔랭과 피구뉴의 우정도 더욱 돈독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었다. 무의식과 오만, 영웅심리가 밑바탕에 깔린 이 영광으로 인해 기술자 양반은 영 거북했기 때문이다 ..  (80쪽)


 서울에서 충주로, 또 충주에서 서울로 자전거를 타고다니는 동안 밉살맞은 자동차꾼을 꾸준히 만났습니다.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뺑소니를 하는 자동차꾼도 서너 차례 만났습니다. 이리하여 제 어깨와 팔꿈치는 여느 때에도 삐걱거리는 반편이가 되었습니다. 1998년 9월 어느 날 새벽에는, 신문배달을 마치고 가벼워진 짐자전거를 몰며 신나게 집으로 돌아가는데 뒤쪽에서 자동차 한 대가 저를 와락 들이받아서 하늘에서 빙글빙글 두 바퀴를 돌다가 아스팔트 길바닥에 쿵 찧기도 했습니다. 자전거는 짜부라졌고 제 오른손목은 평생불구가 되었습니다(그래도 머리를 오른손으로 감싸서 손목만 깨졌으니 죽다가 살아난 셈입니다). 그러나 저를 친 자동차꾼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 달 내내 아픈 손목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신문을 돌리니 아픔이 좀 가라앉더군요. 망가진 자전거는 신문사 지국장님이 여러 시간에 걸쳐 겨우 고쳐 주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뺑소니 사고를 겪을 때마다 ‘그러니까 자전거를 타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저런 죽일 놈들이 다 있나? 그래, 못 잡았어?’ 하고 화를 내 주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도 안 죽고 살았으니 다행이다.’ 하고 토닥여 주는 분이 있습니다. 둘레를 살피면, 자전거를 오래오래 타는 분들치고 크고작은 사고를 안 겪어 본 분이 없습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다치는 사고도 있으나, 자동차가 친 사고가 제법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 교통법은 ‘힘없는 걷는이와 자전거꾼을 지키는 쪽’으로 고쳐지거나 나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교통 얼거리는 오로지 자동차가 막히지 않고 빨리빨리 오갈 수 있는 데에만 맞춰져 있을 뿐입니다. 버스만 다니는 길은 생기지만, 자전거만 다니는 길은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걸어다녀야 하는 길을 반으로 뚝 잘라서 ‘여기에서 자전거와 사람이 함께 다니라’고 할 뿐입니다.

 그런데 거님길(인도)을 뚝 잘라서 마련한 자전거길에는 턱이 많습니다. 깨진 길이 많습니다. 가게에서 내놓은 선간판이 있고 버스정류장이 있으며 구청이나 시청 따위에서 마련해 둔 모래상자나 염화나트륨통이나 배전반이나 가로등이나 전봇대나 교통표지판 기둥이나 거리나무나 …… 자전거가 아늑하게 달릴 수 없도록 걸림돌을 잔뜩 올려놓고 있습니다.


.. “자 이제 달려 봐요!” 그러자 따뷔랭이 말했다. “어디를요?” 그리고 그는 꺼벙하게 웃기 시작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심정으로 그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나, 자전거 탈 줄 몰라요!” 점점 더 화가 난 피구뉴는 그에게 소리쳤다. “그 농담 되게 웃기네요! 그러나저러나 뭘 걱정하고 그래요? 간호사와 결혼까지 한 양반이!” ..  (70쪽)


 인천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으면서 시내 구석구석을 자전거로 돌아다녀 보기도 합니다. 가까운 부천이나 서울까지 자전거로 오가기도 했습니다. 이러는 동안 찻길 형편을 헤아리니, 길마다 무단주차를 해 놓은 자동차가 가득가득입니다. 하염없이 서 있는 차를 단속하거나 치우도록 하는 교통경찰은 구경을 못합니다. 함부로 세워 놓은 차가 없는 길을 달리든, 함부로 세워 놓은 차 때문에 왼쪽으로 빙글 돌아서 가야 하든, 뒤따르는 다른 자동차들은 신나게 빵빵빵 울려댑니다. 때로는 자전거 쪽으로 큰 덩치를 밀어붙이며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다만, 자동차 100대가 자전거 옆으로 지나가면 이 가운데 10대쯤 이렇습니다. 다른 90대는 얌전히 지나가 주거나 널리 마음을 기울여 줍니다. 그런데 바로 그 10대 때문에 자전거로 다니기 아슬아슬하며, 목숨이 간당간당하기도 합니다. 자동차들이 자전거를 앞질러 씽하고 지나간다 한들, 도심지에서는 얼마 못 가서 신호에 걸리거나 밀려 있는 차에 막혀서 ‘저(자전거)’하고 다시 만납니다. 그러면 저는 막힌 자동차 사이로 느긋하게 앞질러 가고, 자전거한테 신나게 빵빵이를 먹인 자동차가 다시 자전거 옆으로 다가올 때 또 윽박질을 하다가 차에 막히고…….


.. 요즈음처럼 자동차들로 빽빽하지 않았던 골목이나 한길에서 따뷔랭은 시험의 종류를 늘려 갔지만, 그 불굴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전거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하지는 못했다 ..  (29쪽)


 이마부터 눈을 거쳐 입술로 흐르는 땀을 후후 불어 떨구어 내면서 속으로 생각합니다. ‘저 딱한 자동차꾼, 지가 나를 윽박지르고 앞질러 간다고 해 보아야 몇 초나 더 빨리 간다고, 몇 초 더 빨리 가 보았자 지 앞은 꽉 막힌 자동차뿐인데.’ 그래도 자동차를 모는 분들로서는 그 몇 초 더 빨리 달릴 수 있기 때문에 당신 삶이 더욱 살찌거나 아름답게 되거나 잘살 수 있게 되나요.


 (2) 몸으로 타는 자전거


 요사이는 오래도록 자전거를 쉽니다. 지난날 여러 차례 뺑소니 사고를 입으며 다쳤던 왼어깨와 오른팔꿈치와 왼무릎까지 몹시 쑤시고 저려서 그렇습니다. 자전거를 안 타고 날마다 틈틈이 주물러 주고 몸풀이를 하고 있으나 영 나아질 낌새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아프면 아픈 대로 자전거를 탈까 싶기도 한데, 자전거에 몸을 실은 지 십 분이 지나면 이를 앙다물게 되고 눈에서는 눈물이 찔끔찔끔 흐릅니다. 어깨와 팔꿈치와 무릎이 너무 아파서.

 아픈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오른어깨에 자전거를 메고 계단을 터덜터덜 밟고 올라와서 도서관 귀퉁이 한쪽에 자전거를 세워 놓습니다. 히유 한숨을 쉽니다. 어떡하나. 어떡하긴. 어쩌겠나. 또다른 내 몸뚱이로 여긴 자전거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내 몸뚱이처럼 함께하기 어려우니 떠나보내야지. 그래도 모두 떠나보낼 수는 없어서 석 대를 남기고 두 대는 아는 분한테 ‘제 몸이 나으면 돌려받을게요’ 하는 말과 함께 빌려 드립니다. 남은 석 대 가운데 한 대는 부속이 다 닳고 낡아서 못 타게 되었기에 바퀴 바람을 살짝 뺀 채 장식품처럼 세워 둡니다. 옆지기와 함께 탈 일을 생각해서 두 대만 집에 남겨 놓습니다.


.. 포르똥 영감님은 마음을 낚시 쪽으로 완전히 굳히고 가게의 경영권을 라울 따뷔랭에게 넘겨 버렸다. 따뷔랭은 잘 다린 푸른 작업복이 좋았고, 훌륭한 간호사이자 집에서는 좋은 아내인 마들렌이 준비해 주는 도시락이 좋았다. 마들렌은 남편이 걸어서 출근하는 것을 자기를 사랑하는 증거로 여겼다. (그녀는 자동차 교통량 증가로 인해 자전거가 당하는 사고가 증가한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이 불안해 하던 터였다.) ..  (49쪽)


 자전거를 못 타게 되니 자전거 모임에 얼굴 디밀기 힘들어집니다. 그래도 자전거를 아끼거나 즐겨타는 사람들은 마음이 넉넉하고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바깥모임이 있으면 술이라도 한잔 함께 하고픈 마음입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이 자동차를 몰면 무턱대고 쓩쓩쓩 달리지 않고 좀더 느긋하게 차를 몰면서 자전거꾼한테 눈길 한 번 따숩게 보낼 수 있으리라 믿는 마음입니다. 골목길을 차로 몰 때에도 걷는이가 아슬아슬하지 않도록 살펴볼 줄 알겠지 하고 믿는 마음입니다. 아는 분들 자동차를 얻어타게 되면, 일부러 자전거 이야기를 꺼냅니다. 멀리 나다니지 않으신다면 접을 수 있으면서 값도 눅은 자전거 한 대를 마련해서 짐칸에 싣고 다니시면 더 좋다고, 일터나 학교까지 자전거로만 다니기 수월하지 않으면 자동차나 대중교통으로 어느 만큼 움직인 뒤, 자전거르 마무리를 지어도 좋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때로는 아침에 좀더 일찍 일어나서 느긋하게 자전거로 일터나 학교로 가노라면, 그동안 오가던 길에서 미처 못 보았던 여러 가지 모습을 보실 수 있고 느끼실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날이 풀려 따땃한 봄이 되면, 싱그러운 바람에 꽃내음을 느껴 보시라고, 잠깐 다리를 멈추고 길가 풀섶에 앉아서 풀기운과 흙기운을 맛보시라고, 그러면 일하면서 새힘이 솟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문을 걸어 봅니다.


.. 왜냐하면, 따뷔랭은 자신의 실패의 비밀을 밝혀내 보려는 희망을 가지고 자전거의 모든 부분들을 방법론적으로, 줄기차게 연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에게 수리를 맡기기 시작했다 ..  (34쪽)


 자동차를 몰자면, 차를 새것으로든 헌것으로든 사야 합니다. 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기름값이 나갑니다. 따지고 보면, 자동차를 몰기보다 날마다 택시만 타고다녀도 외려 찻삯이 남을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굳이 좋은 녀석으로 장만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만, 지금 바로 자동차와 ‘잘 가렴, 다음에는 보지 말자!’ 하고 헤어진다면, 석 달치 ‘굳는 자동차 유지삯’으로 대단히 훌륭한 자전거를 한두 대 장만할 수 있어요. 차값으로 들였던 돈은 사회에 내놓거나 시민단체에 기부를 하거나 지역도서관에 책을 사줄 수 있을 테지요.

 편도 30킬로미터 안쪽이라면, 자전거로 오가는 시간과 자동차로 오가는 시간은 그다지 벌어지지 않아요. 게다가 몸은 한결 튼튼해지지요, 찻삯이 어마어마하게 굳지요, 몸이 튼튼해지니 밥도 잘 먹고 똥도 잘 누고 얼굴에 핏기가 돌지요. 봄이면 봄을 여름이면 여름을 가을이면 가을을 겨울이면 겨울을 느끼니, 살아 있는 목숨붙이라는 느낌을 짙게 받을 수 있어요. 비기운을 눈기운을 구름기운을 바람기운을 느끼며 날마다 다른 느낌에 세상을 더 널리 껴안기도 하고요.

 몸으로 타는 자전거이니, 우리 몸에 좋은 여러 가지가 돌아옵니다. 마음으로 타는 자전거라면, 우리 마음에 좋은 여러 가지가 깃듭니다. 돈을 생각하며 타는 자전거라고 해도, 우리 살림을 아끼고 여밀 수 있으니, 이런 생각이더라도 반갑습니다.


 (3) 《자전거포 아저씨 라울 따뷔랭》이라는 책


 그림과 글이 어우러진 책 《자전거포 아저씨 라울 따뷔랭》을 덮습니다. 여러 번 읽고 난 뒤에도 책상맡에 고이 꽂아두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책상맡에서 끄집어내 ‘자전거 갈래’ 책꽂이로 옮겨놓을 참입니다. 자리를 옮기기 앞서 한 번 더 죽 읽어 봅니다.


.. 사람들이 웃기는 사람들을 정말 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호젓한 어스레함이 주는 무게를 갑자기 깨 버릴까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사람들은 이 웃기는 사람들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둔다. 자신에게도 가슴이 있으며 이 가슴에는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영혼은 때로는 남과 함께 나누고픈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내놓고 말하고 싶어지는, 낭만이 과하게 들린 사람들이 자주 당하는 유혹을 따뷔랭도 느끼곤 했다 ..  (39쪽)


 이야기책 《자전거포 아저씨 라울 따뷔랭》에 나오는 자전거집 아저씨 ‘라울 따뷔랭’은 자전거를 못 타는 분입니다. 온힘을 다해 자전거를 타 보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자전거를 못 타는 분입니다. 마지막에는 자전거를 다 뜯으며 연구를 했으나 그예 자전거를 못 타고 만 분입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깊이깊이 살피고 공부를 하는 동안 ‘자전거 수리 박사’가 되었습니다. 자전거는 못 타는 신세이지만, 누구보다도 자전거를 잘 알고 자전거를 사랑하고 자전거를 아끼고 자전거와 함께 살아가는 몸이 되었습니다.

 글쓰는 재주가 없으나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훌륭히 하는 분이 있습니다. 책 지식은 없으나 새책방이나 헌책방에서 좋은 책을 아낌없이 알아보고 두루두루 사고파는 분이 있습니다. 그림 그리고 사진 찍는 재주는 없어도 늘 그림과 사진을 곁에 두며 즐기는 분이 있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하셨어도 아이들을 훌륭히 가르치고 이끈 어버이가 있습니다.

 성서를 100만 번 읽었다고 하여 하느님 사랑을 고루 받을 수 있지는 않아요. 배워서 얻은 앎(지식)이 바다처럼 넓지만 남들한테 두루 베풀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동안 벌어들인 돈이 어마어마하지만 이웃하고 오순도순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보다 세고 큰 힘(권력)을 누리지만 사랑스럽고 애틋하게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나라를 쥐고 흔드는 무기(펜, 신문, 방송, 인터넷 따위)를 가지고 있으나 더 즐겁고 아름답고 살갑고 푸진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자전거집 아저씨 ‘라울 따뷔랭’ 씨는 자전거를 탈 줄 몰라도 ‘자전거 타는 모든 이를 아끼고 사랑하며 돌보는’ 일을 자기 보람으로 여기며 웃으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4341.2.24.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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