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내 마음의 산골마을
박희병 지음 / 그물코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41 ― 돈 아닌 ‘사람’이 가꾸는 고향마을
 : 박희병, 《거기, 내 마음의 산골마을》을 읽으며


- 책이름 : 거기, 내 마음의 산골마을
- 글쓴이 : 박희병
- 펴낸곳 : 그물코(2007.7.25.)
- 책값 : 8000원



 (1) 천막농성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 깃든 동네 한복판을 쑤석거리려는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뜻으로 펼쳐 놓은 천막농성터에 나와 있습니다. 어느덧 열아흐레째(3월 17일). 인천시는 자기들이 밀어붙이려는 산업도로가 주민들 반대에 막히어 공사 삽날이 멈추게 되자, 살그머니 말을 돌려서 여론을 바꾸려고 애를 씁니다. 동네 한복판에 놓으려고 하는 길은 ‘산업도로’가 아닌 ‘6차선 간선도로’라 말하고, 방음벽 세우면 걱정거리가 없다고 하면서.

 처음부터 ‘6차선 간선도로’를 내야 하는 곳이 아니었음에도 ‘산업도로에서 간선도로로 목적을 바꾸었으니, 이런 길은 내야 하지 않느냐?’고 주민들 앞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 길이 나야 공해가 줄어든다니까요?” 하는 말과 “이 동네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길이라니까요?” 하는 말에는 그만 질려 버립니다. 찻길이 나야 공해가 줄어든다니, 찻길이 나야 동네가 발전한다니 …….

 천막농성터를 찾아온 인천 동구 구청장님은 말합니다. “어차피 이 동네는 재개발과 재생사업을 할 텐데, 그런 간선도로 놓아 보았자 중복투자가 되니 쓸모가 없다”고. 구청장님은 “나한테는 권한이 없어요. 그리고 시에다가도 이런 길은 내지 말아야 한다고 요청하는 공문도 보냈습니다.” 하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여쭈어 봅니다. 몇 해 앞서 보낸 공문 말고, 요즘에도 그런 요청을 공문으로 시에 올린 적이 있느냐고. 구청장님은 “요사이에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해 줍니다.

 구청장님은 ‘일개 구청장한테는 아무런 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하다면, ‘일개 주민’은 어떤 힘이 있는가요. 위에서 내려보내는 명령과 지시가 있으면, 힘이 없는 ‘일개 구청장’은 곧이곧대로 따라야 하고, ‘일개 주민’은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들여야 하나요.


.. 벼가 익으면 이른 아침부터 벼를 베었다. 낫으로 한 동씩 한 동씩 정성껏 베었다. 한 손으로 벼포기를 잡고 벼 밑동을 싹둑싹둑 베었다. 벤 벼는 논바닥에 눕혀 놓았다. 벼 베는 일은 허리가 아프고 힘든 일이지만 일 년의 보람이 여기에 있었다 ..  (벼 베기/152쪽)


 구청장님 말이 아니더라도 가난한 동네 사람들 몇몇 힘으로 나라힘(공권력)을 뒤집기는 어렵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옳지 않은 일을 앞에 두고서 힘이 딸린다고, 힘이 모자란다고, 힘이 없다고 하여 물러설 마음은 없습니다. 우리들 삶터가 포크레인 삽날에 찢기고 갈리게 되는 모습을 마냥 불구경 하듯 손 놓고 바라볼 수 없습니다.

 내 모든 이야기와 발자국이 남아 있는 고향인데, 이 고향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모습을 뒷짐 지고 구경할 수 없습니다. 시멘트로 떡바른 아파트가 성냥갑처럼 촘촘히 올라서며 햇볕을 막아 버리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습니다. 우리 뒷사람들이 ‘당신(앞사람)들이 말하는 옛날 자취와 역사와 문화란 무엇이냐?’고 따질 때, ‘우리(뒷사람)들한테 시멘트 아파트만 달랑 남겨 놓고서 우리보고 무엇을 보고 느끼고 꿈꾸며 자라라고 하는 셈이냐?’ 하고 따질 때, 미안합니다 한 마디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흐흐흐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앞사람)는 여기에서 태어나서 이와 같은 집에서 살았고 이러한 골목길에서 뛰놀았으며 이런 역사가 깃든 학교에서 공부했단다’ 하고 들려주고 싶습니다. 공장 굴뚝보다는, 도시락 싸들고 나들이를 올 수 있는 나무그늘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자동차 배기가스보다는 걱정없이 자전거를 타고다닐 수 있는 사람길을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돈으로 이룩한 지엔피 숫자보다는, 땀방울과 웃음울음으로 쌓아올린 책 하나를 남겨 주고 싶습니다.


.. 추수를 끝낸 논에 가 보면 너무도 허전하였다. 그 많던 개구리며 물방개며 소금쟁이며 미꾸라지는 싹 종적을 감추고, 벼 밑동만이 논바닥 까만 흙 위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추수가 끝난 논을 혼자 밟으며 노는 일은 너무나 유쾌한 일이었다. 그 속에는 개구리, 물방개, 소금쟁이의 기억들이 서랍 속의 물건들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었따 ..  (추수한 뒤의 논/35쪽)


 (2) 내 고향 네 고향


 일곱 살 앞서는 거의 떠오르지 않지만, 일곱 살 때부터는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그 무렵 살던 다섯 층짜리 아파트는 연탄으로 때던 곳이었고, 1층 집으로 들어가려면 계단 다섯을 밟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2층부터는 일곱 계단이었다고 생각하는데, 한 칸씩 밟고 올라가기보다는 멀리서 달음질을 해 오며 폴짝 뛰어오르기를 좋아했습니다. 처음에는 네 칸 뜀뛰기가 되었고 드물게 다섯 칸 뜀뛰기가 됩니다. 제자리뛰기를 하면 거의 세 칸 뜀뛰기가 되고, 네 칸을 밟을락 말락 하다가 뒤로 자빠질 뻔하기도 하고 앞으로 콩 넘어지며 무릎이 깨지기 일쑤입니다. 4층에 있는 우리 집으로 갈 때면 형하고 잡기놀이 하듯 신나게 뛰어올라갑니다. 이때부터는 셋셋하나, 또는 셋둘둘, 또는 셋넷, 또는 둘셋둘.

 거꾸로 4층집에서 내려갈 때에는 한꺼번에 일곱 칸 뛰기를 해 보는데 이럴 때면 무릎이 아프기도 하여 셋넷 나누어 뛰기로 내려오곤 합니다. 때때로 나무로 된 손잡이를 잡고는 계단밟기를 않고 아래쪽 손잡이를 밟고 다시 아래쪽 손잡이를 잡은 뒤 그 아래쪽 손잡이를 밟고 하기를 되풀이. 손잡이에 한쪽 엉덩이를 깔고 미끄러져 내려오기도 합니다.

 어머니 일을 도와서 신문돌리기를 할 때에도 뜀뛰기 놀이 하듯 쉬지 않고 달립니다. 겨드랑이에 끼고 달리는 신문이 무거워 1층 난간 손잡이에 신문을 올려놓고는 한두 부만 집어서 후다닥 올라가 우유주머니에 넣거나 문틈에 끼우거나 문 아래로 밀어넣습니다. 신문 보는 집마다 ‘넣어 달라고 하는 방법’이 달라서, 작은 쪽지에 이런저런 방법을 적어 놓고는 그때그때 보면서 넣습니다. 5층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신문이 한 부씩 사라질 때가 있어서 나중에는 무거워도 통째로 들고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도 합니다. 신문돌림꾼이 지나가는 때를 알고는 슬쩍 한 부 훔쳐가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 흙이 있는 데는 어디든지 땅강아지가 있었다. 마당에도 있고 담부랑 밑에도 있고 집 뒤에도 있고 집 앞에도 있고 밭에도 있고 길에도 있고 강변에도 있고 묵은땅에도 있고 논두렁에도 있고 숲에도 있었다 ..  (땅강아지/138쪽)


 열다섯 동으로 이루어진 다섯 층짜리 아파트에는 큰 놀이터가 둘 있었습니다. 한쪽은 모래밭으로만 제법 길게 이어져 있어서, 이곳에서는 공차기도 하고 공치기도 합니다. 먼저 와서 찜 하는 아이들이 차지하고 놀곤 해서(어차피 같이 놀게 되기는 하지만), 학교 마치고 집으로 올 때면 집에 책가방 던져놓기 앞서 먼저 찜해 놓는 아이가 있기 마련. 넓은 모래밭을 차지하지 못하면, 바로 건너편에 있는 조금 좁은 모래밭을 차지. 이곳도 차지하지 못하면, 1동부터 8동 사이로 퍽 널찍하게 나 있는 찻길이 놀이터. 여기도 차지하지 못하면, 차가 가장 적게 서 있는 동과 동 사이가 놀이터.

 중학교에 들어선 1988년까지도 집에 차를 모는 사람이 드문 우리 동네라서, 우리들 놀이터는 언제나 넓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차도 많지 않은 아파트마을에 웬 빈터를 그리 넓게 마련했는가 모를 일인데, 인천 시내에 있는 다른 5층짜리 아파트도 동과 동 사이 빈터는 모두 넓었어요.


.. 아무리 추워도 사흘만 견디면 다시 따뜻한 날이 온다는 희망 때문에 긴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나흘이 따뜻하면 사흘이 아무리 추워도 견딜 만하였다. 견뎌내기만 하면 다시 따뜻한 날이 온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행복하였다 ..  (삼한사온/127쪽)


 이렇게 모래밭 놀이터를 차지하면서 공차기를 할 때는, 발이 푹푹 빠지니 제대로 달릴 수 없지만, 그래도 좋다며 신이 나서 달리고 찹니다. 야구놀이를 할 때에는 뜬공 잡기 힘들고 튄공 잡기 버겁지만 좋다고들 뛰고 치고 북적댑니다.

 하드볼이 아닌 테니스공으로 했으니 유리창 깰 일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요즈음 아파트처럼 툇마루 통유리를 한 집이 몇 군데 없었기에 파울을 치면 툇마루 안쪽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이때는 공을 친 아이가 그 집을 찾아가서 딩동딩동 단추를 눌러서 공 꺼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허구헌날 여러 차례 공 꺼내기 해 주어야 하는 아주머니나 할머니는 우리들 개구쟁이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공을 안 꺼내 주겠다고 하면서 욕설이나 큰소리가 나왔고, 공 들어간 집이 1층이나 2층이면 몰래 담벼락을 타고 들어가서 꺼내오곤 하는데, 그러다가 수위 아저씨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죽도록 얻어맞거나 안 붙잡히도록 내빼기.

 동과 동 사이에서 야구를 할 때는 포수가 없이 벽을 포수 삼고 분필로 스트라이크존을 그립니다. 여기에 들어가면 스트라이크. 안 들어가면 볼. 그런데 벽치기 야구를 할 때에도 걸림돌이 있습니다. 벽치기 대상이 되는 1층 집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창문을 열고 “딴 데 가서 놀아!” 하고 빽 소리를 지르니까요.

 벽치기 야구를 할 때에는 으레 2층이나 3층 또는 4층이나 5층까지도 공이 들어갑니다. 어쩌다가 옥상에 공이 올라가면 이때에도 수위 아저씨가 있나 없나 두리번두리번 살핀 뒤 살짝 옥상문 열고 들어가서 공을 주워 옵니다. 위험하다고 해서 옥상에는 못 올라가게 하지만, 이 옥상에 올라가서 공을 주울 때면 우리 아파트마을 오른편에 있는 경인고속도로 들머리가 내려다보이고, 왼편에 있는 제2부두가 내려다보입니다. 공을 줍고 나서 한참 동안 큰 짐차와 컨테이너차를 구경합니다. 타워크레인으로 컨테이너를 집어서 큰 짐배에 싣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다가 저 멀리 수위 아저씨가 저를 보고 꽤액 하고 소리를 치면, 부리나케 옥상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어디엔가 숨습니다. 이윽고 다른 동무들이 ‘아저씨 갔다’는 신호가 나오면 조용히 나와서 다시 벽치기 야구놀이를 하고.


.. 웬만한 마을 바위는 모두 이름이 있었다.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들은 대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자식은 부모에게서 듣고 부모는 그 부모에게서 듣고 부모의 부모는 또 그 부모에게서 듣고 부모의 부모는 또 그 부모에게서 듣고 이런 식으로 들어 알기도 했을 테지만, 어릴 때부터 마을사람들한테 들어 알기도 했을 것이다 ..  (바위/101쪽)


 모래밭에서 동 대항 야구놀이를 하던 어느 날, 우리 형이 타자로 나온 모습을 보고는 뒤에서 응원한다고 촐싹거리다가 야구방망이에 귀가 맞아서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기도 했습니다. 이날 형은 집에서 구두주걱이 부러지도록 얻어맞고, 야구놀이는 파장이 되고, 저는 너덜거리며 아픈 귀를 잡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고 엉엉 울기만 하고.

 열흘쯤 앞서 오랜만에 형과 형 옛동무를 만나서 신포시장에서 순대 한 접시 시켜 놓고 소주를 마시다가 옛날 제 귀 떨어진 이야기를 했습니다. 형은 “야, 너 때문에 내가 집에서 얼마나 맞은 줄 알아?” 하고 웃으며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때 아버지한테 얼마나 모질게 혼이 났을까요. 참 미안한 옛일입니다.


.. 한쪽 다리로 나무를 밟고 큰 도끼를 어깨 너머까지 힘차게 들었다가 휙 내리치면 나무가 딱 벌어지며 쪼개지는 것이었다. 한 번에 쪼개지지 않는 나무도 있었는데, 그런 나무에는 반드시 옹이가 있었다. 옹이는 나무의 상처였다. 아버지는 “상처가 있는 나무는 단단하단다”라고 하셨다 ..  (장작/40쪽)


 그런데 이런저런 이야기가 깃든 5층짜리 아파트는 헐려서 없어지고 22층인가 23층짜리 새 아파트가 이 자리에 우람하게 올라섰습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끔 이 앞을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 있던 기름집도 함께 사라지고 기름집 자리에는 맥도널드가 2층짜리 건물로 들어섰습니다. 예전 집자리 건너편 정석빌딩은 지금도 그대로. 예전 집자리 왼편에 있던 한국은행 인천지점은 지금도 그대로. 새로 올라선 높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옛 이웃은 지금도 몇 집 있으나, 우리 집을 비롯한 거의 모든 이웃은 다른 데로 살림을 옮겼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인천을 떠난 사람도 있을 테고, 우리 나라를 떠난 사람도 있을 테지요. 멀리멀리 떠나간 사람들이 자기 어린 나날을 보낸 집자리로 돌아와 볼 일이 있을까 모릅니다만, 예전 집자리로 돌아와 본다 한들, 어린 날을 돌이킬 수 있는 ‘무엇인가’는 거의 한 가지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신흥 남여 중학교로 가는 울타리도 없고, 울타리에 자라던 까마중도 없으며, 제일제당에서 인천 앞바다로 흘려보내는 쓰레기물 흐르는 개천은 뚜껑이 덮이어 뚜껑 밑으로 쓰레기물이 흐르는지 민물이 흐르는지 똥물이 흐르는지 아무도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때나 이제나 이곳 하늘을 날고 있는 갈매기를 만납니다. 공장과 자동차에서 뿜어내는 매캐한 연기와 먼지밖에 없는 곳임에도, 갈매기는 이곳, 바닷가 마을을 잊지 않고 찾아와 줍니다. 몸에 좋을 턱이 없는 새우깡이나마 던져 주는 이 없고, 지친 날개 쉬며 느긋이 앉을 너럭바위 어디에도 없이 모텔만 줄줄줄 늘어선 이곳이지만, 갈매기는 한결같이 찾아와 줍니다.

 바다를 앞에 끼고 살아가는 인천사람이지만 갈매기 바라보는 사람이 없는데.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인천으로 찾아오는 바깥사람들도 갈매기를 바라보지 않는데.


 (3) 《거기, 내 마음의 산골마을》을 책꽂이에 꽂으며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천막 둘레로 지나갑니다. 먼저 초등학생들이 지나갑니다. 재잘재잘 쫑알쫑알. 곧 중학생들이 지나갑니다. 천막 둘레에 걸어 놓은 걸개천 글씨를 읽으며 지나갑니다. 이제 어둠이 깔리면 고등학생들도 지나갈 테지요.


― 나무를 보고 있으면, 말이 없는 것이라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갈참나무/136쪽)
― 두릅을 먹으면 두릅나무에 왜 가시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두릅/133쪽)
― 나무를 모르면 그 눈꽃이 그 눈꽃이지만, 나무를 알면 눈꽃이 저마다 달랐다.  (눈꽃/96쪽)
― 같은 밥을 늘 같이 먹으니 누렁이는 얼굴이며 성품이 우리와 같았다.  (누렁이/83쪽)
― 산골마을에는 교회나 절 같은 건 없어도 밤하늘의 별들 때문에 평화로웠다.  (별/47쪽)



 산골마을에서 어린 날을 보냈던 박희병 님은 당신 어린 날을 돌아보면서 책 하나를 적어내려 갑니다. ‘오늘날 박희병’을 이루어낸 뿌리가 무엇인가를 되짚으면서 책 하나 끄적여 내놓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면서 우리 옛문학 이야기를 틈틈이 책으로 써 내다가, 뜬금없이 당신 옛 고향 발자취를 더듬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어쩌면 뜬금없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까뭉개며 없애려고 하지만, 없어져서는 안 될, 아니 찬찬히 되살아나야 좋을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엮어내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고향마을이 될 터전을 자꾸자꾸 짓뭉개거나 밟아 없애려고 하기에, 이러다가는 우리 모두 죽음길로 갈밖에 없다는 걱정이 커지면서 내놓았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거의 모두 도시에 지어진 높고 우람한 아파트에서 살며 부모나 학원 차를 타고 집과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지냅니다. 흙 밟을 일이 없지만 아스팔트와 시멘트 바닥 밟을 일도 드뭅니다. 이런 가운데 자라고 있는 아이들은 앞으로 스무 해쯤, 또는 서른 해나 마흔 해쯤 뒤, 자기가 자랐던 어린 날 고향을 떠올리면서 어떤 이야기를 남길 수 있을까요. 자연과 담을 쌓는다기보다 아예 ‘자연이라고 하는 국물도 건더기도’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돌아보면서 끄적일 이야기는 누구한테 얼마나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요.


.. 똥물을 주면 채소는 몸이 실해져 벌레가 잘 달라붙지 않고 잎에서는 당장 윤기가 났다. 사람은 자기가 먹은 것을 똥으로 누고 똥은 다시 먹을 것이 되고 먹은 것은 또다시 똥으로 되고 똥은 또다시 먹을 것이 되니 결국은 제한테서 나와 제한테로 돌아가는 듯 싶었다. 마을 어딜 가도 늘 똥냄새가 났으나, 그래서 그 냄새는 싫지 않았다 ..  (똥바가지/118쪽)


 천막농성 열아홉 날이 저물고 스무 날이 다가옵니다. 지난 3월 3일 낮, 인천시 종합건설본부장은 천막농성 터로 한 번 찾아왔습니다. 그날 그분은 우리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거 강제로 포크레인 가지고 때려부수면 그만이라니까!”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태껏 동네사람들하고 ‘막공사 산업도로’ 문제로 열린 토론마당을 한 번도 마련하지 않고 ‘시에서 2020년까지 내다보면서 마련한 계획이니 이대로 해야 한다’는 방침만 통보하고 있는 마당에, 종합건설본부장이라는 자리에 앉은 분 말로는, 더욱이 천막농성터에 찾아온 분이 꺼낼 말로는, 그다지 알맞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뜨거운 무엇이 머리끝까지 솟구쳐올랐고, 헛웃음을 웃으며 돌아가는 종건본부장 겉옷자락 꽁무니를 볼 때에는 소름이 돋았으며, 주민과 만나서 이야기를 할 마음이 없다는 뜻을 다시금 알게 된 뒤에는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일구어 가는 우리 고향이요 우리 문화요 우리 사회요 우리 세상이 아니라, 돈(경제) 논리 하나만으로 삽날을 앞세워 파헤치고 무너뜨린 다음에 다른 돈보따리를 들고 와서 새로운 집을 지으면 된다고 하는 마음씀은 그지없이 불쌍하고 못난 지식쪼가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높은 대학교까지 다니면서 얻은 지식이, 그동안 나라밖 여러 곳을 다니며 듣고 보았다는 경험이, 여태 정부 부처 여러 자리에서 나라일을 주물러 왔다는 움직임이 고작 이만큼밖에 안 되느냐 싶으니 눈물이 다 날 노릇이었습니다.

 길은 돈으로 내고 아파트도 돈으로 짓는다지만, 길은 누가 다니고 아파트에는 누가 살지요? 두 다리가 아닌 자동차로만 움직이는 사람은 얼마나 사람다운 사람이며, 온 몸뚱이가 아닌 돈으로 사들여 잠만 자고 떠나는 아파트는 얼마나 사람 깃들일 만한 집입니까? (4341.3.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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