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학의 논리 창비신서 44
최원식 / 창비 / 1988년 3월
평점 :
절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책은, 알라딘에는 안 뜹니다. 헐...

 



 - 책이름 : 황해에 부는 바람
 - 글쓴이 : 최원식
 - 펴낸곳 : 다인아트(2000.8.30.)
 - 책값 : 9000원


 이 책 하나 39 ― ‘눈감고 꼼짝않으면’ 어르신이 아닙지요
 : 최원식, 《황해에 부는 바람》을 덮고 나서


 (1) 어느 한 곳에서 태어나서 산다는 일이란


 국민학교 다닐 적부터 고등학교 다닐 적까지, 지역 사회나 역사를 배울 때면 속이 쓰렸습니다. 갑갑했습니다. 지역 자연 삶터를 배울 때에도 까마득했습니다. 도무지 제 고향 인천이라는 데에서 다른 곳과 견주어 내놓거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어 보여서 그러했습니다. 인천에서 나고자란 훌륭한 어른이라든지 빛나는 분들 또한 보이지 않았습니다.

 철없던 그때, 지역 어르신으로 누가 있는 줄 어찌 알았으랴만, 우리들 철부지들이 알아볼 수 있는 자료나 책은 얼마 없었기에 더욱 어려움이 컸습니다. 문교부에서 만든 〈자연〉 국정교과서로 배우던 국민학교 여섯 해 내내, 가장 어렵고 싫고 짜증나고 괴롭던 숙제 가운데 하나는, “우리 지역 천연기념물로 무엇이 있을까요?”라는 녀석. 허허 참, 그때나 이제나 인천에 어떤 천연기념물이 있는가요. 이제는 ‘직할시’에서 ‘광역시’가 되어 옹진군이 인천에 들어왔으니 백령도 물범을 슬쩍 끼워넣어도 되나요?


.. 초기에 개혁이 비교적 순조로왔을 때 호남은 그 어떤 지역보다도 (김영삼) 문민정부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는 얘기를 최근에 흥미롭게 들었다. 정부 정책의 보수 회귀는 스스로 국민 통합의 절호의 기회를 반납함으로써 오늘날의 기이한 지방할거주의의 틈입을 불러온 꼴이다. 역설적이지만 중앙정부가 국민 통합의 실질적 상징이고자 노력할 대 진정한 지방자치도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28쪽/1995)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제가 치를 대입시험이 수학능력시험과 본고사 두 가지로 바뀌었습니다. 이리하여 제가 받는 학교교육은 제 앞선 형이나 누나와는 사뭇 달라집니다. 그러면서 ‘교과서 아닌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주문이 떨어집니다. 교과서는 여러모로 답답하다고 느껴 왔기에 속으로 참 잘 되었구나 생각했는데, 다른 동무들은 ‘공부할 건수만 더 늘어나’ 괴롭다고 했습니다. 중3 때부터 그랬지만, 이때부터 제 가방은 교과서 아닌 책이 절반이나 1/3쯤 차지합니다. 지루한 수업 때에는 교과서 아닌 책을 교과서 밑에 숨겨 놓고 읽고, 자율학습 때에는 대놓고 읽습니다.


.. 일본의 어느 도시를 가도 도서관과 박물관은 그 지역 시민의 자존심의 상징으로 도시의 중심에 뚜렷하다고 하지 않는가? ..  (86쪽/1990)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부터 헌책방 나들이를 합니다. 이때, 인천에서 나고자란 몇몇 문학가 또는 문학평론가를 알게 됩니다. 첫 번째로는 이가림 시인, 다음으로는 최원식 교수.

 가뭄에 단비 내리듯한 이런 분들 책을 하나둘 새로 알게 되고 즐겨읽으면서, ‘왜 이런 분들 글은 우리가 인천에서 배우는 교과서에는 못 실리’는지 궁금해집니다. 또한 ‘이런 분들 책은 왜 우리가 사는 인천에서 널리 알려지며 읽히지 못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이 궁금함은 아직 못 풀고 있습니다. 다만, 지역 어르신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형편, 지역 문화를 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노릇, 지역 역사를 서민 눈높이에서 헤아리며 살아가는 틀거리가 없음은, 인천뿐 아니라 우리 나라 다른 곳도 비슷비슷하다고 느낍니다.


.. 내가 머카서(맥아더)의 공적을 격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익을 수호했던 미국의 장군이었다. 아무리 탁월한 무훈을 세웠어도 외국 장군의 동상을 시의 중심에 모셔놓고 경배하는 도시는 아마도 세계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다 … 어찌하여 외국 장군의 동상은 이처럼 정성들여 멀쩡하게 잘 만들면서, 여타의 인천 기념조각들은 그처럼 조잡할 수 있을까? ..  (90쪽,92쪽/1995)


 인천 아닌 데에 사는 또래 동무나 선후배들이 듣거나 아는 인천은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인천은 바닷가에 있다. 공장이 많아 공기가 더럽다. 서울과 가깝다. 서울과 가까운데 가 보면 볼 게 없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뜬다더라. 인천은 술값이 싸더라. 당구값도 싼데 인천 다마는 세더라. 요새 여기에 하나 덧붙이면, 월미도 바이킹은 사람 죽이도록 재미있더라. 아저씨가 내키면 끝없이 돌리고 또 돌려 주더라.


.. 우리의 학식은 과연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던가? ..  (202쪽/1990)


 국민학교 적 〈사회〉 숙제로 ‘우리 동네 사회와 경제가 어떠한가’ 하는 숙제로 적어낸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집 앞에 경인고속도로 들머리가 있고, 제2부두가 있어서 쉴새없이 자재와 수출입 물건을 실어나른다. 우리 집 앞에는 제일제당 공장이 있고, 학교 가는 길에는 연탄공장이 있어서, 이곳에서 만든 연탄은 기차에 실려 서울로 간다, 개항 100주년 기념탑이 있고(이 끔찍한 탑은 몇 해 앞서 드디어 철거되었습니다), 자유공원에는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한미수교가 아닌 함포외교에 따른 강제개항이었는데 ‘수교’라는 말로 눈속임을 하는. 이 탑은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이 있다는둥 ……. 지금 돌아보면 하나같이 부끄러운 모습이 ‘내 고향 인천 자랑거리’였고, 저뿐 아니라 다른 동무들도 비슷비슷한 줄거리로 숙제를 내놓았습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이런 이야기를 가르쳤습니다.





 (2) 서울


 돈 많이 벌며 잘사는 작은아버지 두 분은 서울에 살았습니다(한 분은 인천서 살다가 서울로 갔다가 목포로 옮기시고). 때때로 우리 집 네 식구가 인천에서 서울 강남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갈 때면, 하인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한참 동안 달려 서울역까지 갑니다. 그런 뒤 택시를 타고 가는데 길은 얼마나 멀고 택시미터기 돈은 얼마나 빨리 올라가든지. 나중에 2호선이 뚫리고 나서 택시삯은 덜 들었지만, 구역마다 촘촘히 선 신호등에 막힐 때면 제가 짜증이 다 났습니다. 생각해 보니, 인천에 신호등이 처음 생긴 역사도 짧고, 제 어릴 적까지는 그닥 안 많았습니다.

 인천 공기가 썩 맑지 않았습니다만,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숨이 턱턱 막혀서 일부러 입을 앙다물며 숨을 참기도 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내릴 때는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메스꺼웠습니다. 서울사람들은 이런 지하철을 어떻게 타고다니나 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고 보면 요사이 서울 작가들은 뭐 하는지 모르겠다. 귀향할 것도 아니면서 고향타령이나 하든지, 서울의 겉모습에 취해서 관념적 포우즈 속에 생뚱맞은 소리나 하고 있지, 이 중요한 공간을 하나의 지방으로 탐구하는 작업은 가물에 콩나기다 ..  (36쪽/1995)


 그런데 뒷날 제가 서울에서 여덟 해 남짓 살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어릴 적에는 머리 아프고 숨쉬기 어려운 서울에서는 안 살 테야 하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이 그렇게 쉽게 깨질 줄은.

 서울 나들이를 할 적마다 저를 보는 서울사람들이 ‘너, 서울사람 아니지?’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저 사람(어른)들은 어떻게 그걸 다 알까 싶어 놀랐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인천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보면, 내 느낌으로도 ‘저 사람은 인천사람 아니네’ 하는 티가 물씬 풍겼습니다. 말씨도 다르지만 몸짓도 다르고, 바라보는 눈길과 눈썰미가 다르거든요.


.. 우리 사회는 특히 5ㆍ16 이후의 개발독재 아래 농촌 및 지역의 독자성은 파괴되고 서울로 지나치게 통일되었다. 더구나 민주주의의 진정한 기초라고 일컬어지는 지방자치제도가 오랫동안 유보됨으로써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이 서울을 향해 질주하였던 것이다 ..  (53쪽/1991)


 서울과 얽힌 옛말이 여럿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 서울 가는 놈이 눈썹을 빼고 간다. 서울 가서 김 서방 찾는다. 서울놈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 서울서 매 맞고 송도서 주먹질한다.

 이런저런 옛말을 듣고 배우면서 늘 ‘왜 사람을 서울로 보내야 하나? 자기가 나고자란 곳에서 무럭무럭 자라면서 자기가 나고자란 곳을 알뜰살뜰 키우면 되지 않어?’ 하고 생각했습니다. ‘큰일을 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말은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흔히 들었습니다. 사람이 크려면 물이 좋은(?) 곳에서 커야 한다고 말하고, 사람 많은 곳에 가야 돈도 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며 늘 ‘왜? 왜? 왜 자꾸 서울 이야기만 해? 우리 동네 이야기는 왜 안 해?’ 하고 대들듯 따졌지만, 저한테 돌아오는 대꾸는 한결같이 ‘넌, 아직 어리구나.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커서 큰물을 한번 먹어 봐야지.’ 한 마디.


.. 요즘 경인선은 살풍경이다. 인천과 서울 사이가 이제는 빈틈없이 시멘트 건물로 들어차 숨이 막힌다. 경인선 개통 한 세기만에 서울과 인천 사이에 시골은 멸종하고 말았다 ..  (101쪽/1996)


 아버지가 빚까지 얻어가며 마흔여덟 평짜리 새 아파트로 집을 옮기지 않았다면, 저는 인천에 눌러앉지 않았겠느냐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옛날 일이지만.

 그곳이 좁은 우물일지라도, 더 많은 사람과 더 넓은 세상을 못 보는 일이라고 해도, 제가 나고자란 곳에서 조용히, 고즈넉히, 아옹다옹을 하든 쿵떡쿵떡을 하든 제가 선 자리에서 살아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집안 문제를 넘어서, 대학입시 원서를 내야 하는 때가 다가와 고3 담임이 상담을 할 때, ‘웬만하면 인천에 있는 대학교에 가라’는 말에 불뚝불뚝 싫은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왜 거기를 가야 하는데? 재단비리가 철철 넘치는 그곳에 왜 가야 하는데(그때는 끔찍했는데, 이제는 이 비리 문제가 많이 풀렸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학문은 인천에 있는 대학에서는 안 가르쳐 주는데?

 한낱 고3 수험생이 어떤 건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인천이든 서울이든 대구이든 부산이든 제주이든, 대학교에서 꾸리는 학과가 거의 똑같은 모습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서울에 있으면 서울이라는 곳 특성을, 제주에 있으면 제주라는 곳 특성을, 대전에 있으면 대전이라는 곳 특성을 키우는 대학교여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했습니다. 왜 모든 대학교가 한결같이 영문과 일문과 경영학과 의학과 기계공학과 전자공학과 건축과 법학과 무역학과 …… 똑같은 학과를 꾸리고 있는지.


.. 정부는 굴업도 주민 9명이 찬성한다는 것을 방패로 이 중대한 문제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 온갖 쓰레기들은 지방으로 내려보내면서 좋은 것은 전부 서울에 두는 특별시민들과 쓰레기들을 뒤집어쓴 채 핵쓰레기만은 재고하라고 애원하는 지방사람들과 과연 누가 진짜 지역이기주의자들인가? 더구나 요사이 거대언론들은 입만 열면 환경보호를 외치고 있는 중이니 ..  (225쪽,226쪽/1995)


 이런저런 싸움(담임하고 벌인 싸움)과 걱정과 실랑이 끝에, 인천에 있는 대학교에는 원서를 넣지 않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 세 군데에 원서를 넣었고, 두 군데에서 붙어 이 가운데 한 곳에 들어갑니다. 이름하여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종합대학교’인데, 다른 곳과 달리 ‘서양어대’와 ‘동양어대’가 나뉘어 있는 모습이 다르기는 해도 ‘상대’과 ‘법대’가 있고, 용인에는 이공계열학과가 있습니다. 재미있지요.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친다고 하면서 이렇게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면. 더욱이 이 대학교 신문방송학과는 꽤나 이름났고, 무역학과 역사도 오래되었으니. 서울이란 참, 대한민국이란 참.





 (3) 몸으로 겪어내기


.. 가끔 인천바다도 바다냐는 핀잔 같은 말을 듣습니다. 그때는 그냥 웃고 마는데, 한번 구경 온 사람과 직접 그 속에 사는 사람이 보는 바다는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작은 사물도 그것을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사물과 나 사이의 깊은 친교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44쪽/1998)


 1994년에는 인천 왼편 끝에서 서울 오른편 끄트머리께까지 머나먼 전철길을 따라 오징어가 되고 떡이 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1995년부터는 집을 뛰쳐나와 신문사지국에 들어가 신문을 돌리며 혼자살림을 꾸리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군대를 마친 뒤 다시 서울로 가서, 내처 살았습니다.

 이러는 동안 고향이라는 곳은 이름 두 글자만 남고 몸이고 마음이고 훌훌 떨어져 갑니다. 좋아하지 않는 곳이면서 ‘일’ 때문에, 또 ‘책’ 때문에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거의 모든 출판사가 서울에 몰려 있고, 크고작은 알뜰한 헌책방이 서울에 쏠려 있습니다. 걸어서 몇 분 거리로 종로서적(이제는 사라졌으나)과 교보문고와 영풍문고가 모여 있으며, 끝까지 버티고 있는 인문사회과학책방도 서울에 서너 곳 있습니다.


.. 아마도 인천에서 아니 전국적으로도 가장 근사한 일본식(식민지 때) 주택의 하나로 꼽힐 터인데, 교회가 사서 까뭉개고 주차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자동차를 모시기 위해 이 아름다운 건축을 이처럼 파괴하다니. 율목동을 관통하는 도로를 뚫는다고 당당한 기와집 근업소를 흔적없이 부숴버린 몰지각이 다시금 생각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째서 역사의 흔적을 지우지 못해 안달일까? ..  (96쪽/1996)


 2003년 가을부터 서울을 벗어나 충북 충주에서 일합니다. 삶터와 일터가 서울에서 벗어나니, 서울이 사람을 얼마나 잘 빨아들이는구나 깊이깊이 느낍니다. 시골에서는 책방 하나 구경하기 어렵고, 면내나 읍내로 나들이를 나온다 한들 바라는 책 하나 찾을 수 없습니다. 한두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시골버스를 기다리느니, 삼십 분에 한 대씩 있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 편이, 책방 나들이에 한결 나았습니다. 사람을 만나려고 해도 서울로, 책을 사려고 해도 서울로, 뭐를 하려고 해도 서울로 …….

 서울에 있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했던 ‘서울 쏠림’을 어릴 적에 이어 다시금 느끼면서, 서울사람은 서울사람대로 서울 아닌 곳 사람은 서울 아닌 곳 사람대로 ‘외로 쏠린 마음’으로 살아가며 서로 못 만나고 있구나 싶더군요. 넘치게 누리는 사람도 딱하고 모자라서 못 누리는 사람도 안쓰럽고.


.. 내 발로 밟고 내 눈으로 보면서 확인한 중국은 독서로 안 중국과 다른 점도 많았거니와, 같다고 하더라도 실감한다는 일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감득했던 것이다 ..  (165쪽/1998)


 지난 2007년 4월, 충주 산골자락에서 고향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또 충주에서 돌아오기 두어 달 앞서부터, ‘동네 한복판 꿰뚫으려는 산업도로’ 막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처음 이 ‘산업도로 계획과 인천시 행정’을 맞닥뜨렸을 때,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다 벌어지는구나, 거짓말이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네 한복판 집을 싹 쓸어내어, 너비 50∼70미터에 길이 400미터 남짓 하게 파헤쳐 놓은 땅을 두 눈으로 보고 그 땅을 두 발로 디디고 서 보니, ‘이거 장난이 아니네. 이거 참말 밀어붙이려나 보네. 이거 밀어붙여서 이 동네를, 이 삶터를 어떻게 망가뜨리려는 속셈이야?’ 하는 생각이 절로 샘솟았습니다.

 새 대통령이 되신 이명박 씨께서 밀어붙이려고 하는 ‘서울-부산 물길(경부운하)’이 한 나라를 더욱 모질게 두 동강으로 쪼개어 버리는 끔찍한 재앙이라면, 두 번째 인천시장을 하고 계신 안상수 씨께서 몰아세우고 있는 ‘중ㆍ동구 관통 너비 50미터 산업도로’는 인천을 더더욱 아프게 두 동강으로 갈라 버리는 못난 재앙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서울-부산 물길’ 문제는, 이 물길이 놓일 터를 우리가 몸소 다녀 보면서 느끼지 못하면 살갗으로 와닿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고용창출 효과-경제성장 효과’라는 숫자놀음에 놀아나기 쉽습니다. 인천 ‘중ㆍ동구 관통 너비 50미터 산업도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 몸소 와 보고 싹 쓸려버린 동네 한복판 허허벌판을 두 눈으로 보고,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이 ‘폭탄 맞은 듯한 모습’을 내려다보지 않고서는, 또 동네 골목길을 거닐어 보지 않고서는, 그리고 서민 동네 바로 옆에 우람하게 늘어서 있는 중화학공장 들을 쳐다보지 않고서는, 살갗으로 와닿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지역발전-균형발전’이라는 허울좋은 사탕발림에 놀아나기 좋습니다.





 (4) 최원식 교수님, 다 아시면서……


 우리 나라 내로라하는 지식인, 또는 ‘사회 어르신’ 들은 ‘서울-부산 물길’ 문제를 높은 목소리로 나무라고 있습니다. 계층과 직업과 성별과 학문갈래 모두를 넘나들면서 한목소리로 꾸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천에서 내로라하는 지식인, 또는 ‘지역 어르신’ 들은, 당신들 고향이자 어린 날과 젊은 날 추억이 물씬 담겨 있는 곳, 또 당신들 고향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 삶터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판인데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동네 주민이 당신들을 찾아뵈면서 이곳에 이런 문제가 있다고 말씀을 드리고, 이곳 문제와 얽힌 자료를 꾸준히 보내드려도 아무 말이 없고 아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 저는 시립도서관 근처에 살기 때문에 가끔 제 아이들을 데리고 율목동으로 산책을 나가 옛 근업소, 박두성 선생의 집, 그리고 인천 유일의 주정공장 터였던 기와집 등을 둘러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길이 뚫리고 이 기와집들은 흔적이 없던 것입니다. 물론 도시계획 좋습니다. 그러나 새길을 뚫기 전에 보존해야 할 유적은 없는지 그 동네 토박이들의 의견을 청취해서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은 그 쇠락한 기와집들을 무어 그리 애석해 하느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온고이지신이란 말이 있듯이 미래의 창조적 발전은 전통의 힘으로부터 솟아오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  (178쪽/1989)


 최원식 교수님, 이제는 입을 여실 때가 되지 않았는가요. 교수님이 율목동에 사실 때에는 그 동네 ‘보존해야 할 유적’을 하루아침에 허물어버린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탓하고 나무라고 꾸중하는 글을 쓰셨는데, 이제는 율목동 아닌 다른 동으로 집을 옮기신 탓인지, 당신 예전 집터 둘레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마음을 안 기울이셔도 좋은지요. ‘우리 앞날을 슬기롭게 키워 나가는 힘은 전통에서 비롯한다’고 말씀하시던 그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가요. 대학교 강단에서 제자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신가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아무리 교수님이 당신을 스스로 가리켜 ‘저(최원식)는 백면서생입니다’ 하고 털어놓는다 하더라도, 몸도 안 쓰고 입도 안 쓰면서 어떻게 당신 몸과 마음이 깃든 ‘지역’ 문화와 사회와 역사를 지키거나 가꿀 수 있습니까.


.. 자, 인천을 한번 둘러보십시요. 우리 고장 인천은 아름답습니까? 아닙니다. 개발이란 이름 아래 인천은 가장 자연파괴적인 도시로 저렇게 잿빛으로 누워 있습니다. 온갖 폐기물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  (233쪽/1996)


 ‘지역 어르신’이라면서 섬김을 받으나, 섬김에 값하는 마음씀이 보이지 않으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지역 지식인’이라는 떠받듬을 받으며 대학교 교수 자리를 얻으나, 떠받듬에 값하는 몸씀이 보이지 않으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한테는 ‘세상을 꿰뚫어볼 줄 아는 눈’이 틀림없이 올곧게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한테는 ‘세상흐름을 날카롭게 파헤칠 줄 아는 눈’이 환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요, 이런 눈만 있으면 무엇하지요? 눈은 있는데 입이 없다면? 입은 있는데 몸뚱이는 없다면? (4341.3.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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