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살 먹는 나무가 죽는 삶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고 이야기한다. 참말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 그런데, 사람도 누구나 아주 오래 살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 스스로 ‘백 살을 채 못 산다’고 생각하면서, 또 이러한 생각을 퍼뜨리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제 목숨을 백 살 언저리에서 마감하지 않았으랴 싶다. 그러니까,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고 여기기에, 나무도 스스로 이처럼 생각하고, 나무는 이러한 삶 그대로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셈이라고 느낀다. 다른 목숨들도 이와 같겠지. 사람들 스스로 밝은 생각 아닌 어리석은 생각을 품으면서 지구별 목숨들 삶과 죽음이 엇갈렸으리라 느낀다. 가만히 살피면, 사람들 때문에 숱한 목숨이 아예 똑 끊어지듯 지구별에서 사라진다. 하나하나 따지면, 사람들 때문에 어느 목숨은 갑작스레 끔찍하게 늘어난다.


  사람은 왜 태어나서 살아가는가. 사람은 언제부터 스스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은 언제부터 걷기만 할 뿐, 하늘을 날지 못하고 물위를 걷지 못할까. 사람은 왜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꿈이 있는 한편, 사랑과 믿음이 있을까.


  요 며칠 나무를 깊디깊이 헤아려 본다. 호젓한 시골마을에서만 지내다가 퍽 먼길을 달려 도시 고등학교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찾아가다가, 나무 한 그루 싱그럽게 자라기 힘든 그 도시에서 이틀을 보내니, 내 몸과 마음이 그리 홀가분하지 못해 자꾸 나무를 헤아려 본다. 이동안 ‘이천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 삶을 떠올린다. 때로는 천오백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을 테고, 어느 때에는 삼천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을 테지.


  나무들은 더 오래 살아갈 수 있을까. 나무들은 그쯤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 할까. 나무들 스스로 그쯤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에, 이녁이 그동안 뿌린 씨앗이 무럭무럭 자란 어린나무가 힘차게 솟아오를 자리를 내어줄 수 있을까.


  유럽 나라는 모르겠지만, 중남미와 북미와 아시아와 호주와 아프리카에는, 또 아시아에서도 중국이나 일본까지, 천 살이나 이천 살을 먹고는 어느 날 문득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으리라 느낀다. 그렇지만, 남녘이나 북녘에는 천 살을 먹은 나무조차 마주하기 힘들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남녘이나 북녘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천 살이나 이천 살을 살아오며 스스로 북돋우고 살찌운 슬기를 둘레에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삶을 마감하고 새 삶으로 나아가는 나무를 만날 수 없다는 소리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슬기를 빛내는 나무를 꾸준히 마주하면서 사람들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지만, 남녘과 북녘은 스스로 슬기를 키우지 못하고, 스스로 슬기를 밝히지 못하며, 스스로 슬기를 누리지 못하는 나날이라고 느낀다.


  이천 살 먹은 나무가 죽는 삶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밝히지 못하곤 한다. 고작 도시에서 톱니바퀴 같은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될 뿐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월급봉투를 은행계좌로 받아서 ‘소비 쳇바퀴’를 돌 뿐이다. 이러는 동안 아이들한테도 똑같은 ‘대학입시 쳇바퀴’를 물려줄 뿐, 저마다 삶을 밝히는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


  미국은 한국전쟁 때 왜 남북녘 두멧자락까지 폭탄과 미사일을 뿌려대며 잿더미로 만들었을까. 미국은 한국전쟁 때 왜 이 나라 골골샅샅 민둥산이 되도록 모든 숲과 마을을 깡그리 망가뜨렸을까.


  사람들은 ‘수목원’에 가면 마음이 탁 트이고 머리가 환히 열리다가는 생각이 곱게 빛난다고까지 말한다. 과학자 아닌 누구나 이처럼 말한다. 그러면, 수목원이란 무엇인가. ‘숲’이 수목원이다. 숲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풀과 나무로 이루어진다. 농약을 치는 숲이 아닌, 숲결 그대로 흐르는 숲이다. 벌레가 살고 새가 노래하며 짐승들 보금자리가 있는 숲이 바로 ‘수목원’이다.


  나무가 나무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사람들한테 마음과 머리와 생각을 열어 준다면, 가끔 자가용 몰고 찾아가는 수목원 아닌 집 둘레에서 언제나 누리는 숲이 있어야 마땅하다. 고속도로를 내거나 고속철도를 낸다며 멧자락에 구멍을 내거나 아스팔트길을 함부로 늘려서는 안 된다. 고속도로는 더 없어도 된다. 새로운 찻길은 더 없어도 된다. 숲이 있어야 하고, 나무와 풀이 자라야 한다. 발전소를 더 지어서 전기를 늘려야 한다지만, 발전소는 더 없어도 된다. 나무가 설 땅이 있어야 한다. 전자파 일으키는 송전탑이 멧줄기 따라 길게 이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송전탑이 들판 한복판에 우뚝 서서는 안 된다. 송전탑을 세우지 말고, 천 살 이천 살 먹는 나무가 자라도록 해야 한다. 자가용을 몰지 말고 두 다리로 숲길을 걸어야 한다. 버스도 전철도 타지 말고 자전거를 몰며 숲 사이를 달려야 한다.


  미군기지가 떠난 넓은 터에 무슨무슨 시멘트건물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 그저 풀과 나무가 스스럼없이 자랄 숲을 일구어야 한다. 우리 삶터 곳곳에 빈터를 마련하고, 빈터가 바야흐로 숲이 되도록 돌보아야 한다.


  마을 어디나 ‘수목원’처럼 ‘숲’이 되어야 한다. 집집마다 나무를 보살펴야 한다. 어느 집이나 나무그늘을 누려야 한다. 학교도 관공서도 회사도, 무슨무슨 예술쟁이 작품을 건물 앞에 세울 일이 아니라, 씨앗 한 알에서 비롯하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 몇 천만 원이나 몇 억 원 한다는 소나무를 나무젓가락처럼 박지 말고, 나무다운 나무로 조그맣게 숲을 일구어야 한다.


  사람은 숲사람이다. 새는 숲새이고, 벌레는 숲벌레이다. 짐승은 숲짐승이다. 모든 목숨은 숲에서 비롯하기에 숲목숨이다.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려는 이들은 도끼로 나무를 찍기 앞서 나무한테 절을 한다지. ‘집지을 재료’ 아닌 ‘맑은 넋 깃든 숨결’을 얻기 때문에 나무한테 절을 한다지. 집을 지으려고 삼백 살이나 오백 살 먹은 나무를 벨 적에 누구라도 절을 했다면, 천 살이나 이천 살 먹은 나무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며 쓰러질 적에는 어떤 기운과 넋과 사랑과 숨결이 흘러나와서 우리한테 드리울까. 오늘 내가 씨앗 한 알 심으면 이천 해 뒤를 살아갈 내 뒷사람은 이 나무가 드리울 사랑과 꿈을 누릴 수 있을까. (4345.10.2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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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테 영향 끼친 작가

 


  글을 쓰는 나한테 영향을 끼친 작가가 있는지 궁금해 하는 분이 있어 내 삶을 찬찬히 이야기한다. 먼저, 나한테 영향을 끼친 작가는 아직 아무도 없다. 그리고, 나한테 영향을 끼칠 작가는 앞으로 아무도 없으리라 느낀다. 왜냐하면, 나는 나한테 영향을 끼치지, 어느 다른 사람이 나한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나 스스로 마음그릇이 넉넉할 때에 다른 사람들 글이나 책을 받아들이거나 헤아릴 수 있지, 내 마음그릇이 넉넉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들 글이나 책을 못 받아들이거나 못 헤아린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 눈높이가 얕을 때에는 ‘둘레에서 아름답다고 손꼽는 책’을 내가 읽는다 하더라도 ‘이 책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눈높이 낮은 내가 못 알아채게 마련’이다. ‘알차고 훌륭하며 좋다 하는 책’이라 하더라도 ‘눈썰미 얕은 내가 못 읽어내게 마련’이다. 줄거리를 살피거나 훑는대서 책읽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알찬 이야기를 알찬 삶으로 받아들여 알찬 넋을 일굴 때에 비로소 책읽기가 이루어진다.


  곧, 나는 ‘아름다운 책이 얼마나 어떻게 왜 아름다운가를 알아챌 수 있게끔’ 스스로 눈높이를 기르고 가꾸며 북돋아야 한다. 마음그릇이 얕거나 눈높이가 낮을 때에는 어느 책을 읽더라도 못 알아듣고 못 알아보며 못 알아챈다. 눈높이가 낮은 사람은 어느 누구한테서도 영향을 못 받는다. 영향을 받는 일이란 ‘스스로 거듭나는’ 일이거나 ‘스스로 새 눈길을 얻는’ 일인데, 눈높이가 낮을 때에는 이도저도 되지 않는다. 마음그릇이 얕을 적에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나아가지 못한다. 마음을 갈고닦지 않았을 때에는 어떠한 책도 읽지 못한다. 생각을 열지 못했을 때에는 어떤 스승이 곁에 있더라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나한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나한테 영향을 끼친다. 나는 나 스스로 곰곰이 돌아보거나 되짚거나 헤아리면서 나 스스로 얼마나 아름답게 거듭나고 얼마나 사랑스레 다시 태어나야 즐거운가를 깨달을 뿐이다. 내가 나를 가르치고 내가 나한테서 배운다. 스스로 삶을 일구면서 넋을 일구고, 스스로 넋을 일굴 때에 책 하나 글 한 줄 살살 녹일 수 있다. (4345.10.2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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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책

 


  잠이 오는 아이들 데리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별을 본다. 마을 곳곳에 켜진 등불 때문에 별빛이 가린다. 손을 들어 등불을 가리면 별빛이 새삼스레 반짝인다.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등불에서 홀가분한 논자락으로 올라선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을 노래한다. 이불에 싸여 품에 안긴 작은아이가 고개를 까딱까딱 들며 하늘을 함께 올려다본다. 큰아이도 하늘을 올려다본다. 모두 함께 별을 바라본다. 비행기 한 대 빨간 점으로 지나간다. 빨간 점은 뭇별 사이에서 살짝살짝 반짝이며 지나는 또 다른 별처럼 보인다. 큰아이가 “비행기는 어디에서 자? 비행기는 힘들겠다.” 하고 말한다. 깜깜한 밤에 날아가니 잘 곳이 없는 셈일까. 이 밤에도 날아가니 쉬지 못하는 셈일까.


  겨울을 앞두고 해가 많이 짧다. 읍내에 볼일을 보러 낮에 나가면 으레 저녁에 돌아오는데, 읍내라 하더라도 가게가 얼마 안 많지만, 이 작은 가게들 사이에서 별을 보기는 만만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읍내 고등학교이든 면내 고등학교이든, 기숙사에서 지내며 시험공부에 매달리는 아이들은 별을 보며 지내지 못하겠구나 싶다. 나로섬이든 거금섬이든, 섬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집과 학교를 오가며 별을 한 번쯤 올려다볼까. 읍내 언저리나 면내 둘레 시골마을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집과 학교를 오가는 사이 별을 한두 번쯤 가만히 바라볼 수 있을까.


  시골에서 살아간다고는 하나, 정작 별을 볼 틈조차 없는 아이와 어른이 무척 많을 수 있겠다고 느낀다. 날마다 별을 보는 시골사람은 몇쯤 될까. 한 달에 한 차례라도 별을 헤아리거나 그리는 도시사람은 얼마쯤 될까. 별들이 밤새 노래를 하고, 그믐을 지나 가늘게 뜬 초승달이 곁에서 나란히 춤을 추는데. (4345.10.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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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면서 읽는 책


  하루 내내 놀기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루 내내 책만 읽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루 내내 놀기만 하며 지낸 어린 날을 떠올리면, 참말 놀기만 하면서 지낼 수 있다. 하루 내내 책만 읽던 때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그예 책만 읽고는 지내지 못한다고 느낀다.


  하루 내내 집일만 붙잡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루 내내 빨래만 하거나 밥만 짓거나 비질과 걸레질만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저런 집일로 하루를 보내는 때가 꽤 있지만, 이렇게 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만 보낼 때에 내 삶은 어떤 그림이 될는지 잘 모르겠다.


  실컷 놀던 어린 날을 떠올린다. 그저 놀기만 하면 곧잘 지친다. 몸을 쉬어야 한다. 풀밭이든 모래밭이든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낮잠을 자든 딴짓을 하든 ‘놀이틈’을 만든다. 그러고 보면 신나게 놀기에 홀가분한 몸이 되어 책을 읽거나 어떤 공부를 할 수 있구나 싶다. 마음껏 뛰놀며 가벼운 몸이 되기에 집일이든 흙일이든 기쁘게 거들거나 물려받을 수 있구나 싶다.


  놀이하는 힘이란 스스로 살아내게 하는 힘이리라 생각한다. 천천히 놀고 잽싸게 놀며 바지런히 놀고 느긋하게 논다. 천천히 살고 잽싸게 살며 바지런히 살다가는 느긋하게 산다.


  놀면서 읽는 책이리라. 살면서 읽는 책이리라. 놀면서 가까이하는 책이리라. 살면서 가까이하는 책이리라. 책만 섣불리 손에 쥘 수 없다. 책만 딥다 파고들 수 없다. 노는 마음에 책이 깃들고, 놀며 즐거운 넋에 책이 스며든다. (4345.10.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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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책을 읽고 쓸 수 있는가

 


  교과서를 덮고 책을 처음으로 읽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92년부터 두 가지 다짐을 했다. 이제부터 내가 읽을 수 있는 모든 책을 읽어 보기로 하자는 다짐 하나. 여기에, 이제부터 내가 읽을 수 있는 모든 책을 읽고서, 내가 읽은 책마다 한 줄로든 백 줄로든 느낌글을 써 보자는 다짐 둘.


  나는 지구별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어떤 통계나 숫자로 따진다면 아마 읽을 수 없다고 하리라. 그러나 내 마음을 살피고 내 뜻을 헤아린다면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모든 책을 다 읽는다’는 뜻을 돌아보면, 내가 온 땀과 품과 겨를을 들어 ‘종이에 찍혀 태어난 책’을 다 읽는 바로 이때에 새로운 책이 태어난다. 내가 잠든 사이, 또는 내가 숨을 거둔 뒤, 수많은 책이 새로 쏟아진다.


  어떤 사람한테든 뜻과 넋이 있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느낀다. 스스로 울타리를 세우고 틀을 짓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느낀다. 한자말로 ‘초인’이라는 이름은, 곧 ‘넘어선 사람’이라는 이름은, 스스로 아무런 허울도 울타리도 틀도 없는 사람한테 붙는다.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하늘을 난다. 물을 밟고 걸을 수 있다고 여기니 물을 밟고 걷는다. 곧, 지구별 모든 책을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다. 주머니를 털어 책을 사야만 책을 읽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 있고, 책방에 찾아가서 선 채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내 살림집 작은 방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읽을 수 있다. 지구별 곳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가를 지긋이 헤아리면서, 숱한 사람들이 저마다 슬기를 빛내어 영글어 놓는 열매를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떠한 책이든 다 읽을 수 있다고 깨달은 뒤, 그러면 이렇게 읽은 책 이야기를 느낌글로 낱낱이 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때에 나는 스스로 틀을 지었다. 나 스스로 틀을 짓지 않았으면 아마 나 스스로 읽은 모든 책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썼겠지. 그러니까, 눈에 드러나는 글 숫자와 부피로만 살피면 이러한 글쓰기는 할 수 없다. 눈으로 드러내는 모양새 아닌, 삶으로 녹이는 글쓰기를 한다면, 누구나 어떠한 글이라도 쓸 수 있다.


  스스로 읽은 책에 얽힌 이야기를 쓰는 일이란, 바닷가에서 물결 출렁이는 소리를 쓰는 일하고 같다. 몸소 읽은 책마다 무엇을 느꼈는가 하고 돌아보며 쓰는 일이란, 멧등성이 너머로 날아가는 멧새가 우짖는 소리를 쓰는 일하고 같다. 가을바람에 살랑이는 억새풀 이야기를 쓸 수 있는가. 풀벌레가 밤낮으로 노래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가. 누렇게 익는 나락빛 이야기를 쓸 수 있는가. 해맑게 웃는 아이들 놀이 이야기를 쓸 수 있는가.


  햇볕을 글로 쓰고, 흙빛을 글로 쓰며, 달빛을 글로 쓸 수 있을 때에, 스스로 어떤 이야기라도 글로 쓸 수 있다. 책 읽은 느낌이야 아무것 아닌 글쓰기가 된다. 독후감이나 논문이란 얼마나 손쉬운 글이요, 손쉬우면서 덧없는 글이 될까. 삶을 밝히려고 쓰는 글일 때에는 어떠한 글도 마음에서 우러나와 홀가분하게 쓸 수 있다. 삶을 밝히지 않거나 삶을 짓지 않는 글일 때에는 아무런 글도 사랑스럽게 쓸 수 없다.


  가만히 돌아보니,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적에 두 가지 다짐을 하고, 이 다짐을 곰곰이 아로새기면서 한 가지 다짐을 더 해서 세 가지 다짐을 했다. 마지막 셋째 다짐은, 읽고 느낀 모든 이야기를 삶으로 풀어내자 하고 다짐했다. 읽는 까닭과 쓰는 까닭은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살아가려는 마음이나 뜻이 없다면 읽을 까닭도 쓸 까닭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삶을 빚거나 누려야 할까. 사랑하며 살아갈 나날이란 무엇이요, 꿈을 꾸며 착하게 다스릴 삶이란 무엇일까. 읽을 수 있는 책을 종이에서건 풀에서건 하늘에서건 찬찬히 읽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 읽는 까닭은 스스로 어떠한 삶을 즐기고 싶기 때문인가 하고 돌아본다. 내가 무언가 쓰는 까닭은 스스로 어떠한 삶을 빛내고 싶기 때문인가 하고 되짚는다. 곧, 셋째 다짐인 ‘삶으로 녹이기’가 있을 때에 책읽기가 생겨나고 글쓰기가 일어난다. ‘삶으로 지내기’가 있어야 비로소 책도 글도 이 땅에 태어난다. (4345.10.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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