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알갛게 물드는 쑥잎

 


  가을은 바알간 단풍잎이나 노오란 은행잎에만 찾아들지 않습니다. 알록달록 숲에도 찾아들고, 끝자락부터 바알갛게 물드는 쑥잎에도 찾아듭니다. 스스로 씨를 내리고 스스로 자라다가 스스로 꽃을 피우는 쑥풀은 겨울이 되면 온 잎사귀가 바알갛게 타들면서 시들시들 흙으로 돌아갈까요. 이듬해에 새롭게 피어날 꿈을 꾸면서 새근새근 깊은 겨울잠을 잘까요. 우리 집 뒷밭 땅뙈기에서 흐드러지는 바알간 쑥풀이 겨우내 어찌 지내며 새롭게 거듭날는지 지켜봅니다. (4345.11.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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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쑥꽃 책읽기

 


  바지런히 뜯어서 먹는 쑥풀에서는 꽃대가 나와 꽃잎이 벌어지는 모습을 못 본다. 쑥이 돋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가만히 둔 쑥풀에서는 꽃대가 튼튼히 나오고 꽃잎이 살살 벌어지는 모습을 본다.


  마을 어르신들은 논둑이건 밭둑이건 쑥풀이 자라는 꼴을 지켜보지 않는다. 낫으로 베거나 손으로 뜯거나 기계로 밀거나 약을 뿌려 죽인다. 시골사람이래서 쑥꽃을 보는 일은 만만하지 않으리라 느낀다. 그런데, 쑥풀만 쑥꽃을 보기 힘들지는 않다. 모시풀 모시꽃을 본다든지, 미나리풀 미나리꽃 보기도 만만하지 않다. 따로 꽃씨를 받아 키우는 꽃송이가 아니라 할 적에는 시골 풀섶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호박이나 수세미처럼 열매를 베풀지 않으면, 딸기처럼 열매를 내놓지 않으면, 냉이나 달래처럼 통째로 밥이 되어 주지 않으면, 시골자락이라 하더라도 풀은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얻기 어렵다.


  도시에서는 어떨까. 도시사람은 도시 ‘미관’이나 ‘경관’을 따지니까 쑥풀이 마음껏 흐드러질 데가 드물 테지. 건물지킴이가 뜯을 테고, 어디라도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일 테니까 뿌리를 내리거나 줄기를 올릴 틈바구니가 없겠지. 아주 조그마한 틈에 아주 조그마한 씨가 깃들어 푸른 줄기 올라오더라도 도시사람이 쑥풀을 뜯어서 즐기거나 쑥꽃이 어여쁘다면서 바라볼 일이 있을까. 도시에도 곳곳에 푸른 기운이 넘치지만, 도시사람은 스스로 시멘트와 아스팔트 무덤에 사로잡히면서 잿빛 눈길이 되고 만다. (4345.11.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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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팬클럽·공지영 팬카페

 


  누군가를 마음 깊이 섬기거나 모시는 일은 훌륭하리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마음 깊이 섬기면서 스스로를 올바로 가다듬을 수 있고, 누군가를 마음 넓게 모시면서 스스로를 어여삐 다스릴 수 있어요. 그런데, 팬클럽이나 팬카페처럼 받아들이면 그만 스스로 수렁에 빠집니다.


  팬클럽을 이루거나 팬카페를 여는 일이 잘못일 수 없습니다. 다만, 팬클럽이나 팬카페가 되면서 스스로 잘잘못을 바라보지 못하고 말아요. 제 눈에 들보라는 말처럼, 눈꺼풀이 쓰이고 말아요.


  2012년 대통령 뽑는 자리에 나온 박근혜 님을 깊이 섬기면서, 박근혜 씨가 하는 일이나 읊는 말이라면 모두 받들거나 몽땅 우러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의자놀이》라는 책을 내놓고 ‘진보 의제’까지 건드리면서 더 널리 이름값 높이는 공지영 씨가 쓰는 글이나 내놓는 책이라면 모두 읽거나 몽땅 외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른바 ‘박근혜 팬클럽’과 ‘공지영 팬카페’입니다.


  누군가 박근혜 씨를 좋아하거나 섬기는 일이 잘못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면 좋아할 뿐입니다. 누군가 공지영 씨를 아끼거나 즐겨읽는 일이 허물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즐기면 즐길 뿐입니다.


  박근혜 씨를 일부러 깎아내릴 까닭이 없고, 공지영 씨를 애써 나무랄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 그대로 바라보면서 숨결 그대로 맞아들이면 됩니다. 말과 넋과 삶이 어떠한가를 가만히 헤아리면서 내 삶을 옳고 바르며 즐겁고 아름다이 추스를 수 있으면 됩니다.


  박근혜 씨는 ‘독재자 딸’이 아니라 박근혜 한 사람입니다. 공지영 씨는 ‘유명 작가’가 아니라 작가 한 사람 공지영입니다. 정치밭에서 정치를 하겠다는 박근혜 씨라면, 정치밭에서 하는 일과 읊는 말을 살피면서 이이 매무새를 가늠할 노릇입니다. 글밭에서 글을 쓰겠다는 공지영 씨라면, 글밭에서 하는 일과 읊는 말을 살피면서 이이 몸가짐을 헤아릴 노릇입니다.


  팬클럽을 만들든 팬카페를 열든 ‘취향’이고 ‘자유’라 할 테지요. 그런데, 팬클럽과 팬카페 목소리에 묻혀 정작 ‘작고 낮은 여러’ 목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팬클럽 목소리와 팬카페 글이 넘치면서 온누리 ‘작고 낮은 여러’ 사람들 얼굴과 몸뚱이가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따지고 보면, ‘리영희 팬클럽’이든 ‘이오덕 팬카페’이든 몹시 부질없습니다. 리영희를 읽는 이라면 리영희 님 넋과 얼을 내 넋과 얼이 거듭나는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뿐입니다. 이오덕을 읽는 이라면 이오덕 님 슬기와 깜냥을 내 슬기와 깜냥이 새로워지는 밑틀로 삼아야 할 뿐이에요.


  밭에서 풀을 뽑을 때에나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숙입니다. 사람이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숙일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를 재우거나 젖물리는 어버이가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굽힙니다. 사람이 사람 앞에서 줄을 세우거나 금을 그을 까닭이 없습니다. 삶을 살피지 못하고 ‘박근혜 팬클럽 줄서기’를 한다든지(또는 ‘공지영 팬카페 금긋기’를 하는 이들은 스스로 이녁 가슴속에 깃든 빛줄기를 짓밟는 꼴입니다. 스스로 서야지, 남을 세울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빛나야지, 남을 빛낼 일이 아닙니다. 즐기지 않고 무리를 만드는 사람은 권력으로 치달아 독재자를 만듭니다. (4345.11.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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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진은 ‘찰칵(스냅)’입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119] 김태한, 《김태한 사진집》(열화당,1993)

 


  모든 사진은 ‘찰칵(스냅)’입니다. ‘스냅사진(snap寫眞)’ 말풀이를 찾아보면 “변화하는 장면을 인위적으로 연출하지 않고 재빨리 촬영하여 기록한 사진”이라고 하는데, 이 말풀이를 따르든 안 따르든 어떠한 사진이든 ‘찰칵(스냅)’이 아닐 수는 없습니다.


  어느 사진은 ‘찰칵(스냅)’이 아니기도 하다고 여긴다면, 왜 어느 사진은 ‘찰칵(스냅)’이 아닌가를 가만히 따져 보셔요.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 왜 모든 사진이 ‘찰칵(스냅)’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헤아려 보셔요.


  먼저, 말풀이대로 생각합니다. ‘달라지는 모습을 따로 꾸미지 않고’ 찍는 사진이 스냅사진이라 하는데, 어떤 모습을 연출한다(꾸민다) 하더라도 사진으로 찍으려 하는 사람은 ‘연출한 모습 가운데 어느 한 가지’입니다. 곧, 스스로 찍으려 하는 모습에서 벗어나도록 연출할(꾸밀) 수는 없어요. 스스로 연출한 모습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이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재빨리 찍’습니다. 다만, 누군가는 ‘재빨리 찍’는 겨를이 1초일 수 있고 1시간일 수 있어요. 하루나 이틀이 걸릴 수도 있겠지요. 열 해나 서른 해를 기다려 사진 한 장 얻는 이가 바라보기에는 1시간을 기다리든 하루를 기다리든 ‘아주 짧은 겨를’입니다. 곧, 어떻게 찍든 모든 사진은 ‘재빨리’ 찍는 사진이요, ‘내가 찍고 싶은 모습에서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찍는’ 사진이 돼요.


  다음으로, 말풀이에서 홀가분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진이든 ‘있는 그대로’를 찍습니다. ‘없는 모습을 만들어’ 찍을 수 없어요. 내가 어떤 모습을 ‘따로 꾸민다(만든다/연출한다)고 할 때’조차, ‘꾸며진 모습 그대로’를 찍지, ‘꾸며진 모습에서 더 달라지는 모습’을 찍지는 않아요. 모델 ㄱ을 이곳에 놓고 모델 ㄴ은 저곳에 놓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놓은 모습 그대로’를 찍어요.


  곧, 어느 사진이든 그예 ‘사진’입니다. 패션사진을 찍든 다큐사진을 찍든, 모든 사진은 사진이에요. 패션사진은 다큐사진이 되기도 하고, 다큐사진이 거꾸로 패션사진이 되기도 해요.


  바라보는 눈에 따라 달라지거나 나누는 사진이 아닙니다. ‘쓰는 자리’에 따라, 이 사진은 패션사진으로 쓰고 저 사진은 다큐사진으로 쓸 뿐입니다. 이렇게 찍기에 패션사진이 아니고, 저렇게 찍어야 다큐사진이 아니에요. 어떻게 찍든 모두 ‘사진’이에요. 이렇게 찍거나 저렇게 찍거나, 어떻게든 찍은 사진을 쓰는 사람이 어느 자리에 쓰는가에 따라 ‘패션사진’이나 ‘다큐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추상사진’과 ‘구상사진’도 따로 없습니다. 스스로 찍는 사진이 추상사진이라고 말한달지라도 ‘추상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사진을 찍는 사람 눈에 구상으로 드러난 모습’이요 ‘사진을 읽는 사람 마음에 구상으로 그려지는 모습’이에요.


  추상을 찍어 추상이 아니고, 구상을 찍어 구상이 아니에요. 구상사진이 가장 추상사진다울 수 있으며, 추상사진이 가장 구상사진다울 수 있어요. 왜냐하면, 모두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김태한 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듯 내놓은 《김태한 사진집》(열화당,1993)을 읽습니다. 김태한 님은 처음 사진을 배우고 찍고 가르치고 나누려 할 때에 무척 힘들었다고 해요. 사진책 머리말에 “사진인은 방황했다.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할는지를 몰라 우왕좌왕했다. 평론가도 없었다. 선배도 수를 헤아릴 정도다. 그때 사진을 하는 사람은 한국사단이 선구자라 할 만하다. 처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은 평가받을 때가 없었다. 그래서 길은 하나였다. 그것은 해외국제사진전에 출품하여 평가를 받는 방법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어떠할까 생각해 보셔요. 오늘날 여느 어버이를 생각해 보셔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아이키우기’를 가르치는 적이 없어요. 어느 교사도 학생한테 ‘너희가 말야, 아이를 낳아서 키울 때에는 이렇게 슬기로운 길을 걸으며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아름답단다’ 하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교과서로도 없고 시험문제에도 안 나와요. 그런데, 모든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고 대학교를 마치며 회사원이 되거나 말거나 월급쟁이가 되든 가게를 차리든, 이러고서 짝꿍을 만나 아이를 낳잖아요. 사랑놀이 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나 어버이조차 없어요. 아이들은 그저 저희끼리 알음알이로 사랑놀이를 즐기다가는 아이를 낳아요. 그러고는 처음으로 ‘아이키우기’를 맞딱뜨려요. 이제는 인터넷으로 뒤질 수 있고 책을 찾아 읽을 수 있다지만, 인터넷 자료와 책이 있다 하더라도, ‘처음으로 맞딱뜨리는 아이키우기 앞에서 헤매거나 길을 잃는’ 어른들이 참 많아요. 그렇지만 다들 이래저래 용을 쓰기도 하고 애를 쓰기도 하면서 아이를 돌보고 사랑해요. 지식은 없어도 마음이 있고, 정보가 없어도 사랑이 있거든요.


  사진을 찍는 사람도 이와 같구나 싶어요. 지식으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마음으로 찍는 사진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든, 내가 꿈꾸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든, 내 마음이 움직일 때에 찍어요. 아무 때나 수도 없이 단추를 누르지 못해요.


  사진을 차츰 찍으면서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서 스스로 무언가 깨달아요. 아하, 사진을 찍을 때에는 내 마음이 움직여야 할 뿐 아니라, 나 스스로 사진을 좋아하고 즐길 뿐 아니라, 사진기로 바라보는 모습을 모두 사랑할 수 있어야 하네, 하고 깨달아요.


  김태한 님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진은 스냅 사진이다. 그래서 스냅 사진을 기피하였다. 이쯤 되고 보니 자기 자신의 나아갈 방향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사진만 보면 이것은 누구 사진이라는 것을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사진 경향은 추상적인 사진으로 정했다.” 하고 말합니다.

 


  열 아이를 낳을 때에 한 아이는 싫어할 수 있을까 궁금해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 모든 손가락은 저마다 사랑스럽습니다. 내 아이 모두 사랑스럽고, 이웃 아이 모두 사랑스럽습니다. 내가 아는 아이들이든 내가 모르는 아이들이든 모두 사랑스러울밖에 없어요. 곧, 김태한 님이 스냅사진을 싫어한다고 대놓고 말한다 하더라도 ‘정작 싫어할’ 수는 없어요. 모든 사진이 ‘찰칵(스냅)’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이렇게 밝히며 ‘추상사진’을 찍는다 하더라도, ‘찰칵(스냅)’하는 단추질 없이는 어떠한 사진도 태어나지 않아요. 복사기에 몸뚱이를 얹든 인화지만으로 사진을 만들든 ‘바로 이 한때(결정적 순간)’이 사진으로 깃들어요. 바로 이 한때에 찰칵 하고 거치지 않으면 아무런 사진이 태어나지 않아요.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진은 ‘바로 이 한때’를 찍고 ‘찰칵’으로 이루어져요.


  김태한 님은 “나는 사진의 프램 속의 세계에 집중했다. 소재로는 보통의 것, 무시된 것, 의미가 없는 것을 선택했다. 즉 벽, 거리의 보도, 철제품 등 이제까지 사람들이 애용하였으나 지금은 버려져서 돌보지 않는 것.” 하고 말합니다. 참말 적잖은 분들이 이와 같이 ‘많은 이가 등돌린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해요. ‘사람들한테서 사랑 못 받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려고 해요.


  그렇지만, 다른 이가 이런저런 등돌려지거나 사랑 못 받는 모습을 사진으로 안 찍는다고 할 적에 내가 이런저런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바로 누구보다 ‘나한테서 사랑을 받고 눈길을 받는’ 모습이 돼요. 내가 사진으로 찍으면서 ‘널리 읽히고 알려지며 사랑받는’ 모습으로 거듭나요. 나로서는 이것저것 ‘따돌려진 모습을 따스하게 바라봐 주며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나조차 들여다보지 않거나 나마저 눈여겨보지 못한 모습이 매우 많아요. 어쩌면, 내가 찍는 모습은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은 모습’이 아니라, 그저 ‘내가 눈여겨보며 사랑해 주는 모습’이지 않을까요. 따돌려지거나 안 따돌려지거나 하는 금이란 처음부터 없지 않을까요.


  김태한 님은 “사진이론서적을 구하기 힘들어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일본을 내왕하면서 책을 사모았다. 교단에서 학생을 바라보면 사진의 메카니즘이 너무나 급격하게 발달함으로써 학생들은 귀중한 것을 뺏들어 버렸다. 만약 사진의 메카니즘이 좀더 천천히 발달하였으면 학생들은 좀더 훌륭한 것을 찾았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또 많은 학생들은 셔터를 누르는데 이상한 흥미를 나타내나 표현성에 대해서 고려하는 학생은 적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하고 말합니다. 더없이 맞는 이야기로구나 싶은 한편, 다른 한편으로 바라보면 ‘새 기계’를 발돋움한 사람은 ‘사진기를 만들’고 ‘사진을 찍’는 어른입니다. 어른 스스로 더 빠르게 바뀌고 더 많이 바꾸었어요. 어른 스스로 삶을 재빠르게 옮겨요. 아이들(대학생)은 이 흐름에 맞추어 스스로 재빠르게 달라질밖에 없어요. 어른 스스로 느긋하게 즐기지 않는 삶인데, 아이들만 느긋하게 즐기라 할 수 없어요. 어른 스스로 새 기계를 자꾸 내놓고, 기계 솜씨를 더 눈부시게 바꾸려고 용을 써요. 아이들 또한 새 기계에 더 손뼉을 치고, 더 낫다 하는 새 기계에 마음을 빼앗길밖에 없어요.


  그러고 보면, 이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내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나는 내 사진을 찍고, 내 나름대로 사진을 읽으며, 내 깜냥껏 사진을 말하면 돼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대서 내가 그 말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책에 이런 사진흐름 저런 사진역사가 적혔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아이들(대학생)한테 가르쳐야 하지 않아요. 그저 내 삶길과 같이 내 사진길을 걸어가면 즐겁습니다. 내 사랑길을 아끼며 내 사진길을 보살피면 기뻐요. 내 꿈길을 다스리면서 내 사진길을 갈고닦으면 아름답습니다.


  모든 사진은 ‘찰칵(스냅)’입니다. 모든 사진은 사랑입니다. 모든 사진은 삶입니다. 모든 사진은 꿈입니다. 모든 사진은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진은 웃음이요, 눈물이고, 빛이며 그림자입니다. (4345.11.10.흙.ㅎㄲㅅㄱ)

 


― 김태한 사진집 (김태한 사진,열화당 펴냄,1993.9.10.)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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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밥풀꽃입니다. 11월 8일에 활짝 피어난 시골꽃이에요. 도시에도 이 꽃은 많이 피지요.)

 

..

 

 꽃을 읽다

 


  골목마실을 할 적에 참 많은 분들이 골목꽃을 알아보지 못한다. 제법 커다란 꽃그릇에서 빨갛고 노랗고 파란 꽃송이가 피어올라도, 꽃그릇 하나 놓인 골목집은 커다란 골목 가운데 아주 작은 점이고, 골목동네는 커다란 도시에서 아주 작은 섬과 같아서일까.


  골목마실을 하면서 골목 틈바구니에서 예쁘게 피어나는 골목꽃을 생각없이 발로 밟는 분이 제법 많다. 어른 손바닥만큼 꽃송이가 올라와야 알아볼까. 어른 손톱만큼 되는 노란 민들레조차 알아보지 않고 밟는 분이 참으로 많다. 아이 새끼손톱보다 작은 괭이밥풀꽃이라든지 봄까지꽃이라든지 별꽃은 거의 아무렇지 않게 밟고 만다.


  시골을 찾아온 도시내기라고 다르지 않다. 가끔 논둑이나 숲길을 함께 거닐며 바라보면, 도시 분들은 으레 유채꽃이든 갓꽃이든, 또 엉겅퀴꽃이든 자운영꽃이든, 또 들꽃이든 풀꽃이든 마음쓰지 못한다. 부추꽃을 본 도시내기는 얼마나 될까. 감자꽃이나 진달래꽃은 알아볼 테지만, 장미꽃과 동백꽃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보면서 예쁘게 들여다보는 도시내기가 너무 적다. 그러니까, 도시에서는 장미잔치를 할 테지만 동백잔치를 하지 못한다. 벚꽃잔치를 하지만 매화꽃잔치라든지 살구꽃잔치나 복숭아꽃잔치 이야기는 듣지 못한다.


  작은 들꽃 하나 들여다보지 못하고, 작은 들꽃에 서린 이야기를 읽지 못한다면, 이 땅 이 나라 이 마을에 있는 ‘이름 안 알려진 작고 여린’ 사람들 목소리와 이야기 또한 못 듣거나 못 읽는 셈이라고 느낀다. ‘이름난’ 몇몇 사람들 ‘이름난’ 몇몇 책은 읽을는지 모르나, 아름다운 삶과 어여쁜 사랑과 아리따운 꿈이 깃든 ‘작은 풀꽃과 풀꽃 같은 사람’, 또 ‘작은 들꽃과 들꽃 같은 사람’ 목소리와 책은 얼마나 가까이하려나.


  그런데, 풀꽃은 도시내기가 저를 알아보지 못한대서 서운해 하거나 슬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풀꽃은 너르며 조용한 시골이 좋아 풀꽃끼리 옹기종이 어깨동무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니까. 들꽃은 도시내기가 저를 알아채지 못한대서 안타까와 하거나 밉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들꽃은 따사롭고 넉넉한 시골이 기뻐 들꽃끼리 알콩달콩 얼크러지면서 재미나게 살아가니까.


  작은 사람들은 작은 사람들끼리 작은 보금자리를 이루어 재미나게 살아간다. 여린 사람들은 여린 사람들끼리 사랑 어린 마을을 일구며 즐겁게 살아간다. 작은 보금자리에는 신문이 없다. 사랑 어린 마을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신문을 안 읽고 신문기자도 없으나, 집집마다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훤히 안다. 텔레비전을 안 보고 방송기자라든지 지식인이라든지 학자라든지 교수라든지 작가라든지 아무도 없으나, 네 철 날씨를 알고 아이들 보살피는 따순 손길을 고이 물려줄 줄 안다. (4345.11.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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