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보기
― 보고 싶은 사진이란

 


  내가 보고 싶은 사진이란, 내가 찍고 싶은 사진입니다. 살아가면서 스스로 좋거나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기쁘거나 신나거나 보람차거나 멋지다고 느낄 적에 비로소 ‘사진으로 찍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진이 없던 지난날에는 어떠했을까요. 사진이 있는 오늘날에는 기계를 빌려 종이에 앉히거나 파일에 담아 셈틀이나 손전화를 켜서 들여다봅니다. 사진을 누구나 흔히 즐기는 오늘날 흐름에서는 ‘사진이 없던 때’를 떠올리기 쉽지 않을는지 모릅니다만, 1980년대를 살거나 1950년대를 살거나 1910년대를 살거나 1700년대를 살아갈 내 모습을 헤아려 보셔요. 500년대나 기원전 어느 한때를 그려 보셔요. 그 옛날 내 삶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을 느낄 적, 나는 어떻게 할까요.


  사진이 태어나기 앞서 그림이 있었겠지요. 그림을 빌어 내가 느낀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움을 담았겠지요. 그러면 글은? 말은? 글이나 말은 언제 왜 태어났을까요. 서로 생각을 나누거나 이야기를 꽃피우려고 글이나 말이 태어났달 수 있습니다만, 글도 말도 없을지라도 생각을 나눌 수 있고 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우리한테는 마음이 있거든요. 마음으로 얼마든지 생각을 나눌 수 있어요. 마음과 마음이 만나면 이야기꽃은 언제라도 흐드러지게 누릴 수 있어요.


  깊고 깊은 바다에서 고래들이 서로 이야기 주고받는 모습을 그려 봅니다. 고래들은 바닷속에서 ‘고래끼리 주고받는 결’을 빌어 수백 수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에서도 생각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요. 사람은 이 결을 느끼기 힘들다 하지만, 때때로 ‘고래 노랫소리’를 듣기도 한대요. 바닷속에서 ‘고래 노랫소리’를 들어 본 사람은 이토록 아름다운 노래는 이 지구별에 없다고까지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타내기에 ‘고래 노랫소리’이지, 고래는 소리가 아닌 어떤 ‘결’로 서로 이야기꽃을 피운다고 해야 옳지 싶어요. 이른바 ‘텔레파시’이든 무엇이든 말예요. 만화영화 〈미래소년 코난〉에서 코난과 라나는 마음으로 생각을 주고받아요. 가장 맑고 밝은 마음을 열면 아무리 멀리 떨어진 데에 있더라도 마음읽기를 해요.


  곰곰이 생각합니다.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이 아이들은 어버이인 나한테 늘 마음으로 이야기를 건넨다고 생각합니다. 참말 언제나 ‘마음말’을 느껴요. 입술을 달싹여 낱말을 내뱉지 않더라도, 아이들은 눈빛으로 어깻짓으로 몸빛으로 손짓으로 저희 느낌과 생각을 드러내요. 이러한 ‘마음말’을 어버이인 내가 읽거나 느끼거나 받아들일 때가 있으나, 못 읽거나 안 느끼거나 미처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어요.


  먼먼 옛날, 사진도 그림도 글도 말까지도 없던 옛날을 그려 봅니다. 아마 그무렵에는 어느 사람한테도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이나 말은 부질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서로 생각을 나눌 수 있으면, 구태여 사진으로 찍지 않아도 ‘남기고 싶은 모습’을 얼마든지 마음밭에 남길 테니까요. ‘아로새기고 싶은 이야기’라면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마음밭에 아로새길 테니까요.


  나는 가끔 내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사진기이건 그림종이이건 하나도 없지만, 동무들과 신나게 뛰놀던 모습을 아주 환하게 마음속으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 이 내 마음을 읽는다면 ‘아하, 그러게요. 그때 당신은 이렇게 웃으며 뛰놀았네요.’ 하고 느끼리라 생각해요.


  기뻤던 일 슬펐던 일 고마웠던 일 반갑던 일 괴롭던 일 모두 하나하나 환하게 떠올릴 수 있어요. 따로 사진을 안 보더라도 떠올릴 수 있어요. 사진을 찍었기에 ‘그래, 그렇지. 그때에는 그랬어.’ 하고 되새길 때가 있습니다. 사진을 안 찍더라도 지난 한때 내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기는 고운 이야기를 되새기곤 해요.


  보고 싶은 사진이란, 참말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이 되겠지요. 그리고, 보고 싶은 사진이라 한다면 굳이 사진기를 들어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된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보고 싶은 모습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아로새겨졌으니까요. 내가 떠올리려고만 하면 그 예쁘고 멋지며 신나는 모습을 실컷 떠올릴 수 있으니까요. 사진을 즐겁게 찍으려 하는 분들은 이 마음결을 잘 건사하기를 빌어요. 사진은 없어도 되며, 사진이 있기에 한결 즐거운 삶인 줄 생각할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2.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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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아이 책읽기

 


  한복 입기를 좋아하는 큰아이는 이모 시집잔치에 맞추어 한복 빌려주는 곳에서 어머니랑 같은 옷을 맞추어 빌려 입는다. 졸음에 겨우면서 고단하기에 꽁꽁거리기는 하지만, 착하고 상냥하게 잘 따르며 퍽 오랫동안 얌전히 있어 준다. 고맙다. 네 고운 마음결을 네 이모가 사뿐사뿐 받아서 산들산들 춤을 추는 새 삶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네 이모는 너무 바쁜 나머지 네 얼굴을 쳐다볼 겨를이 없지만, 네가 시집잔치 내내 바라보는 마음결을 차곡차곡 곱다시 받으며 새 사랑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4345.12.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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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책이 되는 사람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책입니다. 나는 나 스스로 책이고, 내 옆지기와 아이들은 저마다 스스로 책입니다. 책이란 삶이고 슬기이며 꿈이요 사랑입니다. 곧, 책읽기라 할 때에는 삶읽기이고 슬기읽기이며 꿈읽기요 사랑읽기입니다. 책 한 권에서 앎조각이나 정보조각을 읽지는 않습니다. 앎조각이나 정보조각은 그때그때 스쳐 지나가듯 훑는 부스러기입니다. 이를테면 정치꾼 아무개 지지율이라든지, 경제성장율이라든지, 주식시세표라든지, 방송편성표라든지, 사람살이에 어떠한 이바지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앎조각 저런 정보조각이란 삶도 슬기도 꿈도 사랑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으로 깃들며 오래도록 아로새길 만한 대목이란 오직 삶과 슬기와 꿈과 사랑입니다.


  글을 쓰는 까닭은 글을 쓰는 사람 스스로 삶이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반갑거나 기쁘거나 좋거나 흐뭇하기 때문이에요. 그림을 그리는 까닭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 스스로 삶을 곱게 누리거나 꿈을 아리답게 펼치거나 사랑을 따스히 나누거나 슬기를 멋스러이 북돋우기 때문이에요.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면서 서로를 아낍니다. 서로를 아끼는 두 사람은 삶을 알뜰살뜰 여미면서 하루하루 빛냅니다. 하루하루 빛내는 동안 슬기가 자라고, 슬기가 자라면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밭에 씨앗을 심으면서, 밭에서 푸성귀를 거두면서, 밥상을 차리면서, 밥을 나누면서, 밥을 먹고 나서 하늘바라기를 하는 동안,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면서, 사람들은 즐겁게 이야기를 빚습니다.


  이야기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내 마음이 예쁜 삶이 되도록 가꾸고, 내 마음에 꿈이 자라도록 이끌며, 내 마음이 온통 사랑으로 가득하도록 살찌우다가는, 내 마음이 슬기롭게 환하도록 웃음꽃을 터뜨릴 적에, 바야흐로 책읽기입니다. 나는 스스로 책이고, 당신 또한 스스로 책입니다. 4345.1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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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을 먹는 책읽기

 


  나는 풀만 먹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풀맛을 즐겁게 누리고픈 사람입니다. 사회에서는 채식이나 육식이니 잡식이니 하고 금을 그으려 하지만, 고기를 많이 먹는다는 사람치고, 밥을 아예 안 먹는 사람은 없어요. 밥이란 쌀이요 쌀이란 벼며 벼란 곡식인데, 곡식이란 풀입니다. 곧, 푸성귀를 많이 먹든 고기를 많이 먹든, 누구나 풀을 먹어요. 풀 한 포기는 목숨 이을 밥바탕이 됩니다.


  나는 밥이 되는 벼풀 말고 다른 풀을 즐겁게 누리고 싶습니다. 무도 좋고 배추도 좋습니다. 감자도 좋고 쑥도 좋습니다. 고구마도 좋고 마늘도 좋습니다. 들판에서 스스로 자라는 온갖 풀 모두 좋습니다. 괭이밥풀도 망초풀도 좋습니다. 주홍서나물풀도 좋고 유채풀도 좋습니다. 내 몸으로 깃들며 고운 목숨이 될 모든 풀이 반갑습니다.


  옆지기 동생이 시집잔치를 하기에 전남 고흥에서 경기 일산까지 먼길을 달려옵니다. 시집잔치를 며칠 앞두고, 옆지기 동생이 새로 마련한 작은 집으로 찾아가서 튀김닭을 함께 뜯으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옆지기 동생네 단골집이라 하는 데에서 시킨 튀김닭인데, 밥상에 튀김닭을 펼칠 적에 깍뚝무와 튀김닭이 놓일 뿐, 흔하디흔한 양배추버무림조차 없습니다. 고기랑 무조각만 있을 뿐, 달리 아무런 풀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흥을 벗어나 순천 기차역에서 도시락을 사다 먹을 적에도 ‘도시락 반찬’은 온통 고기 반찬이었지, 싱싱한 풀 한 줌 없어요. 따로 고기집에 들러 세겹살을 구워 먹을 때가 아니라면 싱싱한 풀을 반찬으로 내주는 밥집이 없어요. 어느 밥집에서건 김치를 빼면 ‘풀 반찬’은 구경할 수 없습니다.


  문득 깨닫습니다. 도시에는 풀이 홀가분하게 자랄 터가 없습니다. 도시사람은 풀이 길가나 아파트 잔디밭에서 ‘함부로’ 자랄라치면 약을 치거나 북북 뜯거나 뽑습니다. 가게 많고 자동차 많으며 밥집 많은 도시이지만, 막상 나무가 없고 풀이 없으며 꽃이 없는 도시예요. 예쁘장한 꽃을 다발로 사고파는 꽃가게는 있습니다만, 풀이 씨앗을 틔워 자라난 다음 새 씨앗을 맺으려고 피우는 소담스러운 꽃은 없는 도시예요. 길가에 나무를 심기는 하되, 사람들이 오붓하게 나무열매 즐길 수 없는 도시예요.


  도시로 마실을 왔다면 풀 먹을 생각은 할 수 없겠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도시로 나들이를 왔으면 도시 흐름에 발맞추어 고기만 먹을 노릇이구나 하고 다시금 느낍니다. 시골로 돌아가 흐뭇하게 풀 먹을 나날을 그립니다. 시골집에서 호젓하게 풀 먹으며 풀방귀 뀔 나날을 헤아립니다. 4345.11.3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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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배우는 책읽기

 


  가르치는 사람은 늘 배우는 사람입니다. 나는 국민학교 여섯 해와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다니는 동안, ‘나와 동무를 가르치는 자리’에 선 분들이 당신 스스로 얼마나 배우려 했는가를 살피면서 삶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당신 스스로 즐겁고 힘차게 배우는 분들을 볼 때면, 이분들한테서는 말투 하나 말씨 하나 살뜰히 돌아보면서 내 마음밥으로 삼습니다. 당신 스스로 배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언제나 판박이 같은 앎조각만 잔뜩 늘어놓는 분들을 볼 때면, 이분들한테서는 저러한 어른으로 지내는 삶이란 얼마나 따분하고 쓸쓸한가 하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려면, 먼저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누군가 읽을 글을 쓰려면, 먼저 스스로 즐거이 돌아볼 글(삶)을 읽어야 합니다. 곧, 글(삶)을 쓰려면 책(삶)을 얼마나 깊고 넓게 읽느냐에 따라 내 글매무새가 달라지는 줄 느껴야 합니다. 삶은 종이책에만 담기지 않습니다. 삶은 종이책에도, 나뭇가지에도, 풀잎에도, 나비 날갯짓에도, 아이들 웃음에도, 할머니 일노래에도, 파란하늘 흰구름에도, 달빛과 별빛에도, 목숨을 살리는 흙에도, 따사로운 볕에도 고이 담깁니다. 책(삶)을 읽으려는 사람은 내 둘레 모든 책(삶)에 서린 이야기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럴 때에, 글(삶)을 쓰면서 내 고운 이웃과 동무한테 아름다운 글(삶)을 들려줄 수 있어요.


  종이책조차 제대로 읽지 않으며 사람책이나 숲책을 읽지 않는다면 스스로 바보가 됩니다. 종이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종이책에 서린 삶을 헤아리지 못하면, 이야기샘을 길어올리지 못합니다. 4345.11.2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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