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랑 놀자 157] 구름다리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찻길이 있을 적에, 이 찻길 위쪽으로 다리를 놓곤 합니다. 찻길에는 자동차가 다니고, 찻길 위쪽으로 놓은 다리에는 사람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다녀요. 자동차하고 사람이 따로 떨어져서 다니니 서로 나쁘지 않다고 할 만하지만, 아기나 많이 어린 아이나 다리가 아픈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는 몹시 힘겨운 다리이지요. 젊고 튼튼한 어른도 다리가 다쳐서 목발을 짚으며 걸으면, 찻길 위쪽으로 드리운 다리는 몹시 고달픕니다. 찻길 위쪽으로 높다랗게 놓은 다리이기에, 이 다리에 올라서면 먼 곳까지 내다볼 만하고 자동차 물결을 내려다보면서 구경할 수 있어요. 제가 어릴 적에 다닌 학교 앞에 이 다리가 하나 있었고, 우리는 이 다리를 건너면서 마치 ‘구름을 밟고 건너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으레 다리에서 콩콩 뛰거나 달리면서 놀았습니다. 그래서 이 다리를 가리켜 ‘구름다리’라 해요. 참말 구름을 밟고 건너는 느낌이니까요.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를 잇는 다리도 구름다리예요. 높은 곳을 지나는 바람을 쐬고 먼 곳을 내다보면서 시원합니다. 이 구름다리를 한자말로 ‘육교’라고도 하지요. 4348.11.2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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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90 밥끊기, 단식



  때가 되어 밥을 끊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밥을 넣어 주어야 몸에 기운이 새롭게 돈다고 하지만, 애써 밥을 몸에 넣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자말로는 ‘단식(斷食)’을 한다고 합니다. 이 한자말은 “일정 기간 동안 의식적으로 음식을 먹지 아니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밥끊기’ 또는 ‘단식’은 왜 할까요? 몸에 밥을 더 넣지 않으면서, 몸을 가볍게 바꾸고, 몸에 따라 마음도 가볍게 다시 태어나도록 하려는 뜻입니다. 몸과 마음이 밥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라고, 몸에 쌓였을 찌꺼기를 찬찬히 내보내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몸은 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 줄 느끼려는 뜻입니다.


  밥을 끊는 사람은 밥을 안 먹습니다. 이때에 물을 마실 수 있고, 국을 마실 수 있으며, 어떤 단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밥끊기란 밥을 끊는 일입니다.


  밥끊기는 하루를 할 수 있고, 이레를 할 수 있습니다. 보름이라든지 달포 동안 밥을 끊을 수 있고, 때로는 온날(백일)을 끊거나 몇 해 동안 밥을 끊어도 됩니다. 사람은 밥을 끊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물을 마셔도 죽지 않으며, 밥이 아닌 풀만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국만 끓여서 먹어도 죽지 않아요.


  밥을 한동안 끊으려 하는 사람은, 내 삶에서 내가 대수롭게 여기면서 바라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바라보려는 마음이 됩니다. 그동안 나 스스로 내 삶에서 무엇이 대수로운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고 여겨서 밥을 끊습니다. 밥을 먹어야 몸이 산다고 하는 생각을 끊고, 밥이 아니면 몸에 기운이 돌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을 끊으려 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도 똑같은데, 목숨 있는 것은 밥을 먹어야 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풀과 꽃과 나무도 밥(양분)을 먹어야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 뭇목숨은 ‘숨을 살리’려면 무엇을 먹을까요?


  바로 ‘바람’을 먹습니다. 밥끊기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바람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먹으려는 삶”으로 나아가려는 몸짓입니다. 늘 마시지만 늘 마시는 줄 제대로 못 느낀 탓에 제대로 못 보고 제대로 모르던 ‘바람’을 제대로 알아내려고 밥을 끊습니다.


  밥은 온날이나 여러 해를 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밥은 얼마든지 끊을 만합니다. 그런데, 밥을 오랫동안 끊으면 ‘몸 많이 쓰는 일’은 하기 어렵습니다. 왜 못 할까요? 스스로 즐겁게 삶을 짓는 일이라면, ‘밥을 안 먹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시키는 일을 종(노예)이 되어서 해야 한다면 ‘밥을 많이 먹어야 남이 시키는 일을 할’ 수 있어요. 이리하여, 사회의식에서는 사람들이 밥끊기를 못 하게 막으려 합니다. 사회의식에서는 사람들한테 도시락조차 못 먹이게 하려 듭니다. 왜냐하면, 도시락은 ‘내 몸을 생각해서 스스로 지은 밥’이거든요. 학교나 회사나 감옥이나 군대에서 왜 ‘도시락’을 못 먹게 하고 집단급식만 시키려 하는가를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집단급식은 사람을 살리지 않습니다. 집단급식은 사람을 죽입니다. 어떻게 죽이느냐 하면, 몸을 죽여서 마음도 몸을 따라서 죽도록 길들입니다. 사회의식에서는 집단급식을 사람들이 먹도록 내몹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밥을 먹으면서 똑같은 몸이 되고 똑같은 생각만 물려받으면서 똑같은 일을 하는 톱니바퀴(부속품)가 되도록 내몹니다.


  밥끊기는 바로 이 같은 사회의식을 끊는 몸짓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왜 남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바로 내 삶을 짓는 내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내 삶을 바라보면서 내 길을 걸어야 합니다.


  밥을 끊을 줄 아는 사람은, 바람을 맛봅니다. 바람맛을 처음으로 보면서,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기릅니다. 이리하여, 밥을 끊은 뒤 다시 밥을 마주하는 사람은, 이제부터 ‘밥한테 휘둘리지 않’고, ‘밥을 내가 다스리는’ 손길을 익힐 수 있어요. 그러니까, 밥끊기를 제대로 해서 바람을 제대로 바라보고 깨달은 사람은, 사회의식에서 집단급식을 시켜도, 이 집단급식을 ‘새롭게 바꾸’는 기운이 생깁니다.


  밥은 많이 먹거나 적게 먹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밥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먹으면 됩니다.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먹는 밥일 때에는 언제나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스스로 짓지 않고 스스로 먹지 않는 밥이라면 언제나 괴롭고 고단합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푸나무이든 ‘바람이 없’으면 바로 죽습니다. 바람이 없는 지구별은 아무런 목숨(생명)이 없는 죽음터입니다. 그래서, 사회의식에서는 자꾸 공장을 지으려 하고, 자꾸 지하자원을 캐내어 바람을 더럽히려 합니다. 아무리 ‘무공해 에너지’가 있고 ‘무한동력 장치’가 있더라도 사회의식은 이를 안 받아들입니다. 돈을 벌려는 권력자가 있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사회의식이 시키는 짓대로 따르기를 바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사회 제도’에 길들면서 ‘새로운 것을 꿈꾸지 못하는 멍청이’가 되도록 내몰려 하기 때문입니다.


  밥을 끊으려 하는 사람은 밥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몸을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다른 것은 다 잊고, 오직 바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밥을 끊는 까닭은, 오직 바람을 나한테 제대로 맞아들이려 하는 몸짓인 만큼, 나를 둘러싼 바람이 어떠한 결인가 하고 느껴야 합니다. 내가 들이마시는 바람을 어떤 숨결로 녹여서 내 몸으로 태우려는가 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람결이 나한테 깃들면서 숨결이 되고, 이 숨결은 살결로 나타납니다. 바람결은 ‘너’이고, 숨결은 ‘나’입니다. 숨결은 ‘마음’이 되고, 살결은 ‘몸’이 됩니다. 이제, 내가 받아들인 바람은 내 몸에 새로운 씨앗으로 드리워서 내 마음에 새삼스레 깃듭니다. 바람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삭일 수 있는 넋이라면, 새로운 생각을 마음에 심을 수 있습니다. 바람결은 숨결을 거쳐 마음결로 거듭납니다. 새로운 마음결이 될 수 있으면, 내 눈은 바람결을 언제 어디에서나 늘 알아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습니다. 빛결을 헤아리는 눈결이 되어요. 이때부터 나는 귓결로 흘리는 소리가 없습니다. 모든 소리가 노래인 줄 깨달을 수 있는 생각을 바람결에 새롭게 실어서 날립니다.


  바람을 제대로 먹으려고 밥을 끊습니다. 바람을 제대로 먹는 몸이 되도록 밥을 끊습니다. 바람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몸으로 거듭나면, 이제 어떤 밥을 어디에서 어느 만큼 먹더라도, 나는 내 몸을 따사롭게 보살피면서, 내 마음을 언제나 넉넉하게 돌봅니다.


  바람이 있어야 물이 흐릅니다. 바람이 있어야 불이 탑니다. 바람이 있어야 숲이 푸릅니다. 바람이 있어야 하늘이 파랗습니다. 바람이 있어야 지구별에서 온 목숨이 깨어납니다. 바람이 있어야 온별누리(모든 은하계)에 이야기가 자랍니다. 바람을 바람대로 바라보면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람으로 몸과 마음을 함께 씻습니다. 바람이 우리 몸과 마음을 고루 씻어 주면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납니다. 바람을 들이켜서 내 몸과 마음을 구석구석 씻는 동안 내 넋은 기쁘게 웃고 노래합니다. 4348.3.11.물.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숲말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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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식사 食事


 식사가 끝나다

→ 밥을 다 먹다 

 저녁 식사로 국수를 먹었다

→ 저녁으로 국수를 먹었다

→ 저녁밥으로 국수를 먹었다

 친구와 식사 약속을 하였다

→ 친구와 밥을 먹기로 하였다

→ 친구와 밥을 먹자고 하였다


  한자말 ‘식사(食事)’는 “끼니로 음식을 먹음”을 뜻하고, ‘음식(飮食)’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든, 밥이나 국 따위의 물건”을 뜻합니다. 한국말 ‘밥’은 “쌀, 보리 따위의 곡식을 씻어서 솥 따위의 용기에 넣고 물을 알맞게 부어, 낟알이 풀어지지 않고 물기가 잦아들게 끓여 익힌 음식”을 가리켜요. 한국말사전은 ‘음식 = 밥’으로 풀이하고, ‘밥 = 음식’으로 풀이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음식’하고 ‘밥’은 같은 낱말이라는 뜻이며, 한국사람이 쓸 한국말은 바로 ‘밥’이라는 소리입니다. 영어로 하자면 ‘푸드(food)’일 테지요.


 아침 식사 → 아침밥 / 아침

 식사 예절 → 밥 예절 / 밥 버릇

 식사 관리 → 밥 관리 / 밥 다스리기


  밥을 먹습니다. 밥먹기를 두고 “밥을 즐긴다”고 하거나 “밥을 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럿이 함께 밥을 먹는다면 “밥을 나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밥을 짓기에 ‘밥짓기’입니다. 밥을 하기에 ‘밥하기’입니다. 밥을 먹으면 어떻게 가리키면 될까요? 네, ‘밥먹기’입니다. 밥을 차린 모습을 두고 ‘밥차림’이라 합니다. 밥을 먹으며 느끼는 맛은 ‘밥맛’입니다.

  “아침을 먹는” 우리들은 “아침밥을 먹는다”고도 말합니다. 이처럼 말하면 됩니다. “식사 당번”이 아닌 “밥 당번”이요, “식사 시간”이 아니라 “밥때”요 “밥 먹는 때”입니다. 4348.11.21.흙.ㅅㄴㄹ



아침식사를 하고

→ 아침밥을 먹고

→ 아침을 먹고

→ 아침밥을 즐기고

→ 아침을 누리고

《헬렌 니어링/권도희 옮김-헬렌 니어링의 지혜의 말들》(씨앗을뿌리는사람,2004) 184쪽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 저녁 때였다

→ 저녁 먹을 때였다

→ 저녁을 먹는 때였다

→ 저녁밥 때였다

《박채란-까매서 안 더워?》(파란자전거,2007) 46쪽


식사 더 안 하세요?

→ 진지 더 안 드세요?

→ 진지 더 안 자세요?

→ 밥 더 안 드세요?

《강윤중-카메라, 편견을 부탁해》(서해문집,2015) 106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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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권하다 勸


 해외 유학을 권했지만 → 외국 유학을 하라고 했지만 / 외국 유학을 부추겼지만

 부모들이 권하는 대로 → 부모들이 시키는 대로 / 부모들이 하라는 대로

 술을 권하다 → 술을 들라고 하다 / 술을 마시라고 하다

 담배를 권하다 → 담배를 피우라 하다 / 담배를 건네다

 음식을 권하면서 → 음식을 들라 하면서 / 음식을 먹으라 하면서


  ‘권하다(勸-)’는 “1. 어떤 일을 하도록 부추기다 2. 음식, 담배, 물건 따위를 먹거나 피우거나 이용하라고 하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추기다’나 ‘하라고 하다’나 ‘하라고 말하다’를 가리키는 셈입니다.


  1920년대에 나온 소설 가운데 현진건 님이 쓴 〈술 권하는 사회〉가 있습니다. 소설에 붙은 이름은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는데 “술을 권하는 사회”란 “술을 마시라 하는 사회”이거나 “술을 부추기는 사회”인 셈입니다. “술을 건네는 사회”요 “술을 내미는 사회”이지요. 4348.11.19.나무.ㅅㄴㄹ



서울에 다녀올 것을 권했다

→ 서울에 다녀오라고 말했다

→ 서울에 다녀오라고 얘기했다

→ 서울에 다녀오라고 했다

《양희은-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우석,1993) 189쪽


여행을 권한다

→ 여행을 하라고 말한다

→ 여행을 하라고 한 마디 한다

→ 여행을 해 보라고 말한다

→ 여행을 부추긴다

→ 여행을 이야기한다

《신경숙-아름다운 그늘》(문학동네,1995) 112쪽


일기 쓰는 일을 권하고 싶다

→ 일기 쓰는 일을 해 보라 말하고 싶다

→ 일기 쓰기를 하라고 말하고 싶다

→ 일기를 쓰라고 말하고 싶다

→ 일기를 써 보라 얘기하고 싶다

→ 일기 쓰기를 바란다

《가와이 에이지로/이은미 옮김-대학인, 그들은 대학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유원,2003) 28쪽


책을 권하고 싶다

→ 책을 쥐어 주고 싶다

→ 책을 안겨 주고 싶다

→ 책을 읽히고 싶다

→ 책을 읽으라 말하고 싶다

→ 책을 알려주고 싶다

《이주영-어린이책 100선》(너른들,2003) 80쪽


들쥐도 억지로 권하지는 않았습니다

→ 들쥐도 억지로 먹으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 들쥐도 억지로 내밀지는 않았습니다

→ 들쥐도 억지로 주지는 않았습니다

→ 들쥐도 억지로 쥐어 주지는 않았습니다

《유모토 카즈미/김정화 옮김-여우의 스케이트》(아이세움,2003) 69쪽


선생님은 아저씨에게 의자를 권하며 말했다

→ 선생님은 아저씨한테 걸상을 내주며 말했다

→ 선생님은 아저씨한테 걸상을 밀어 주며 말했다

→ 선생님은 아저씨한테 걸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 선생님은 아저씨한테 걸상에 앉으라 하며 말했다

→ 선생님은 아저씨한테 걸상에 앉으라고 했다

《최연식-웅이의 바다》(낮은산,2005) 99쪽


철학책을 권했지만

→ 철학책을 건넸지만

→ 철학책을 내밀었지만

→ 철학책을 읽으라 했지만

→ 철학책을 보라 했지만

→ 철학책을 말했지만

《김담-그늘 속을 걷다》(텍스트,2009) 82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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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0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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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0 08: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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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의무적


 의무적 규정 → 의무 규정 / 꼭 지킬 규정 / 마땅히 지킬 규정

 의무적인 만남 → 의무 같은 만남 / 꼭 지킬 만남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 꼭 참석해야 / 반드시 함께해야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 꼭 써야 / 반드시 써야


  ‘의무적(義務的)’은 “마음이 어떻든 상관없이 해야만 하는”을 뜻하고, ‘의무(義務)’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로는 “꼭 해야 하는”이나 “마땅히 해야 할”이나 “반드시 할”로 손질해서 쓰면 됩니다. ‘의무’라는 한자말을 꼭 써야 한다면 이 낱말을 쓰되 ‘-적’을 털면 되고요. 글흐름을 살펴 “누구나 지켜야 하는”이나 “억지로”나 “구태여”나 “짐스러운”으로 풀어내 볼 수 있습니다. 4348.11.19.나무.ㅅㄴㄹ



그의 자작시를 의무적으로 읽지 않으면

→ 그가 쓴 시를 억지로 읽지 않으면

→ 그가 쓴 시를 억지라로도 읽지 않으면

→ 그가 쓴 시를 울며 겨자먹기로 읽지 않으면

→ 그가 손수 쓴 시를 꼭 읽지 않으면

→ 그가 애써 쓴 시를 읽지 않으면

《김수영-퓨리턴의 초상》(민음사,1976) 218쪽


학교교육을 의무적인 것으로 만들 만큼

→ 학교교육을 의무로 삼을 만큼

→ 학교교육을 반드시 받도록 할 만큼

→ 학교교육을 꼭 받게 할 만큼

→ 학교를 반드시 다니도록 할 만큼

→ 학교를 꼭 다니게 할 만큰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허울뿐인 세계화》(따님,2000) 101쪽


의무적인 시간이 끝난 뒤

→ 의무 같은 시간이 끝난 뒤

→ 짐 같은 시간이 끝난 뒤

→ 짐스러운 시간이 끝난 뒤

→ 억지스럽던 시간이 끝난 뒤

《린다 멀랠리 헌트/강나은 옮김-나무 위의 물고기》(책과콩나무,2015) 186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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