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문이 되자



  아마 열다섯 살이었지 싶다. 이무렵부터 ‘한국에서 나오는 신문’은 모두 거짓말투성이라고 깨달았지 싶다. 그러나 이무렵에는 이렇게 깨닫기만 할 뿐, 달리 무엇을 할 수 없었다. 스무 살이 되어 비로소 글쓰기를 할 무렵, 나 스스로 한 가지를 생각한다. 한국에서 나오는 신문이 모두 거짓말투성이라 한다면, 덧없고 부질없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가득 채워 애먼 나무를 괴롭히는 짓만 일삼는다면, 내가 스스로 신문이 되자고 생각한다.


  신문이 엉터리이기 때문에 신문이 될 생각이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꾸준히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삶을 가꿀 때에 아름답기 때문에 ‘어떤 글이나 말’을 꾸준히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 스스로 신문이 되자’ 하고 생각한 까닭은 오직 하나이다. 내가 스스로 삶을 지으면서 하루하루 맞이하는 이야기를 글로 찬찬히 갈무리하여 날마다 꾸준하게 띄울 수 있으면, ‘사람을 바보나 종이 되도록 가두는 굴레’인 신문이나 방송에서, 내 이웃과 동무부터 천천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 느꼈다. 나부터 스스로 내 삶을 새롭게 지어서 배우고, 내가 배운 내 삶을 이웃과 동무한테 보여주는 동안, 내 이웃과 동무는 스스로 삶을 짓고 생각을 짓는 슬기를 깨달으리라 느꼈다.


  참말 내 꿈대로 나는 천천히 신문이 된다. 종이신문도 누리신문도 아닌 ‘이야기신문’이 된다. 마음을 열어 생각을 지으려 하는 이웃이나 동무라면, 내가 쓴 이야기를 읽으면서 스스로 새 이야기를 찾거나 깨달으리라 본다. 스스로 새 이야기를 찾거나 깨달은 이웃과 동무는, 또 이녁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겠지. 4347.10.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내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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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 숨을 쉬지 못할 적에



  권정생이라는 할배가 숨을 거둔 때가 2007년 봄이다. 나는 2003년 여름부터 2007년 이월까지 이오덕 님 글과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았고, 이동안 경상도 안동에 몇 차례 찾아가서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때 권정생 할배한테서 들은 말 가운데 늘 가슴에 남는 대목은 “나 대신 아파 해 달라”이다. 권정생 할배는 옆구리에 구멍을 내어 끼운 노란 고무호스를 보여주었다. 오줌을 이렇게 빼내야 한다면서, 이 고무호스를 아침저녁으로 갈아끼우는데 참으로 아프다고 했다. 이런 일을 마흔 해나 하며 살자니 아주 힘들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을 찬찬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때에나 이제에나 거의 없지 싶다. 권정생 할배가 손님들한테 자주 들려준 말, “나 대신 아파 해 달라”를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얼마나 될는지 궁금하다.


  나는 코로 숨을 잘 못 쉰다. 때때로 코가 잘 뚫려서 숨을 그럭저럭 잘 쉬기도 하지만, 입을 꾹 닫고 지내자면 숨쉬기가 갑갑하기 일쑤이다. 어느덧 마흔 해를 이렇게 산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들면 그야말로 숨을 쉬는 일이 고단하다. 도무지 숨을 쉴 수 없어 코를 훌쩍이거나 풀지만, 아무리 풀고 풀어도 콧물은 끝없이 나온다. 콧물이 나올 뿐 아니라 코가 꽉 막힌다. 나중에는 골이 아프고 온몸을 비틀어 용을 쓰지만 이도 저도 하지 못한다. 밤새 코를 풀고 다시 풀기를 여러 시간 하면 아주 깊은 밤에 겨우 한쪽 코가 살짝 뚫려 가늘게 숨을 쉴 수 있다. 이때에 비로소 잠이 든다.


  한 해 내내 숨쉬기가 힘겨운 나날이다 보니, 냄새와 맛을 잘 느끼지 못하고, 웬만한 일에는 무디거나 무덤덤하게 지내자고 여기곤 한다. 숨을 한 차례 쉬는 일보다 대수로운 일이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늘 막히고 갑갑하던 코가 처음으로 뚫린 때는 군대에서이다. 스물한 살 나이에 비로소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시골이라기보다 두멧자락에서 스물여섯 달을 보내야 했는데, 군대에서는 숨을 쉬는 걱정이 없었다. 다만, 군대에서도 한겨울이나 한여름은 괜찮았으나 봄과 가을은 죽을 노릇이었다. 그래도,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는 코가 확 트인다고 깨달았다. 예부터 몸이 나쁜 이들이 시골로 가서 맑은 바람과 밝은 햇볕을 머금으면서 싱그러운 물과 꽃내음과 나무노래를 들으면서 몸을 되살리려 했다는 이야기를 아주 잘 느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몸이니, 군대라는 데에도 안 가야 했다. 신체검사를 맡은 군의관은 나더러 어떻게 군대에 가려 하느냐며 거꾸로 나한테 따졌다. 그래서 신체검사를 받던 때 군의관더러, 그렇게 잘 알면 그렇게 검사 결과가 나온 대로 하십쇼 하고 말했는데 면제가 아닌 현역을 주었다. 군대를 안 갔다면 내 오늘이 어떤 모습이었을는지 모르겠는데, 군의관이 부정을 저질러 준 탓에 나는 ‘두멧시골’이라는 터전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튼, 군대를 마치고 도시로 돌아오니 다시 괴로운 나날이 이어진다. 도무지 숨을 쉴 수 없었다. 참말 다들 어떻게 이런 도시에서 같은 바람을 마시면서 살는지 아리송했다. 그렇다고 섣불리 도시를 떠나지도 못했다. 시골에 아는 사람이 없고, 밑돈도 없었으니까.


  숨을 쉬기 몹시 어려운 몸이기에 ‘몸이 아픈 사람’을 볼 때면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곤 한다. 몸이 아플 적에는 작게 다쳤건 크게 다쳤건 똑같이 아프다. 더 아프거나 덜 아픈 일이란 없다. 그런데 나는 마음속으로 늘 이렇게 생각한다. ‘자네는 숨을 쉴 수 있잖아? 숨을 못 쉬니?’


  숨은 쉬더라도 숨통이 안 붙은만 못하다 싶은 삶도 있으리라 느낀다. 그런데,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워 골골대야 할 적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못 한다. 잠을 자지도 밥을 먹지도, 그리고 숨을 쉬지도 못한다.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한다. 참으로 어정쩡하게 코를 부여잡고 산다.


  코가 없으면 입으로 숨쉬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다문 십 분만 입으로 숨을 쉬어 보라고, 아니 일 분만 입으로 숨을 쉬라고 말해 주고 싶다. 입으로도 숨을 쉴 수야 있겠지. 그런데 입으로 숨을 쉬면 곧 목이 막힌다. 목이 말라서 재채기가 끝없이 나온다. 재채기가 나오다가 나중에는 피가 나오고, 입으로 더는 숨을 쉴 수 없다.


  우리 몸은 왜 밥을 먹어야 할까. 우리 몸은 왜 숨을 쉬어야 할까. 우리 몸은 왜 물을 받아들여야 할까. 어릴 적부터, 아주 어릴 적부터 숨쉬기가 몹시 힘들어 날마다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하다 보니, 참말 나는 어릴 적부터 ‘밥·숨·물’이 왜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했다. 밥도 숨도 물도 없는 몸으로는 살 수 없는가. 넋이 깃드는 몸은 오롯이 홀가분할 수 없는가. 스물다섯 살 무렵이던가, 권정생 할배가 쓴 《하느님의 눈물》이라는 동화책에서 토끼가 풀잎이 아닌 이슬과 바람만 먹으면서 살고 싶다고 하느님한테 눈물로 이야기하는 대목을 읽었는데, 참말 나는 토끼와 같은 마음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게다가 이슬과 바람조차도 없이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어릴 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꼭 한 가지를 느낀다. 숨을 제대로 쉬기 벅차서 몸은 가없이 힘들고 괴롭지만, 내 넋은 몸과 달리 참으로 고요하다. 아프기 때문에 배운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왜냐하면 안 아파도 얼마든지 배우기 때문인데,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아픈 몸으로 넋과 마음을 늘 새삼스레 되돌아볼 수 있다. 4347.10.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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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ilob 2015-04-04 12:03   좋아요 0 | URL
저도 코가 막혀 거의 잠을 못자요

garilob 2015-04-04 12:03   좋아요 0 | URL
글에 공감이 합니다
 

갑갑한 가슴



  어쩐지 가슴이 많이 갑갑하다. 생각을 기울이고 다시 기울인다. 남이 나를 갑갑하게 하는가, 내가 나를 괴롭게 하는가.


  어떤 이는 밀양이나 강정에서 갑갑하다고 느낀다. 어떤 이는 공장에서 갑갑하다고 느낀다. 어떤 이는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에서 갑갑하다고 느낀다. 어떤 이들은 ㅈㅈㄷ신문을 들추면서 갑갑하다고 느낀다. 요즈음 참 많은 이들은 세월호에서 갑갑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어떤 이는 시골 논밭에서 갑갑하다고 느끼며, 어떤 이는 한국말을 놓고 갑갑하다고 느낀다.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엉터리로 쓰는 줄 느끼지 못하는 얼거리가 갑갑하다. 나는 참말 이 대목이 갑갑하다. 살며시 눈을 감고 마당에 선다. 후박나무 밑에 서서 생각에 잠긴다. 곰곰이 헤아리고 보니,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고 한국말을 알맞게 쓰려 하지 않는 모습을 어릴 적부터 익히 보면서 내가 이 길로 왔다고 느낀다.


  일제강점기 때문에 한국사람이 엉터리가 되었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탓도 있지만, 이 하나뿐이겠는가. 사람을 신분과 계급으로 나누어 어마어마하게 짓밟은 조선 사회 탓도 아주 크다. 조선이라고 하는 ‘임금님 권력 봉건 정치’가 무너질 즈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양반 문서’를 사겠다고 법석댄 꼴을 돌아본다. 얼마나 괴롭고 아팠으면 양반 문서 따위를 돈으로 사서 끔찍한 푸대접에서 벗어나고 싶었을까. 그런데, 양반 문서를 산대서 신분과 계급이 사라질까? 양반 문서를 못 사는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은, 이런 문서를 안 사고 버티는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지난날 한겨레가 양반 문서를 사들이려고 악다구니였듯이 오늘날 한국은 대학교 졸업장을 거머쥐려고 악을 쓴다. 이뿐인가. 돈을 더 많이 거머쥐려고 용을 쓴다. 이러는 동안 스스로 삶을 가꾸는 길하고 아주 동떨어진다. 삶이 아닌 신분이나 계급만 바라보니, 삶이 아닌 돈만 바라보니, 삶이 아닌 겉치레만 바라보니, 우리는 스스로 넋을 잃거나 잊는다.


  삶은 생각으로 짓는다. 생각은 말로 짓는다. 그러니, 스스로 말을 올바로 세우지 못한다면 생각을 올바로 짓지 못할 테니, 삶을 올바로 짓지 못하리라 느낀다. 내가 한국말을 살피면서 한국말을 올바로 다스리려고 하는 일을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대목에 있다고 느낀다. 나부터 스스로 내 삶을 슬기롭게 짓고 싶기에 내 삶을 짓는 바탕이 되는 생각을 슬기롭게 가누고 싶다. 생각을 슬기롭게 가누고 싶으니 말부터 슬기롭게 다스리고 싶다. 나부터 말과 넋과 생각과 삶을 즐겁고 슬기로우면서 사랑스럽게 지으면서, 내 이웃과 동무도 이녁 말과 넋과 생각과 삶을 이녁 나름대로 즐겁고 슬기로우면서 사랑스럽게 지을 수 있기를 꿈꾼다. 4347.9.2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내 마음 읽기/람타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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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졸업장



  소설쓰는 김훈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나는 이분이 쓴 책이나 글을 거의 안 읽습니다. 어쩐지 나한테는 안 맞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쓴 책이 새로 나와도 궁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책이 새로 나온 줄 아예 모릅니다.


  엊그제인데, 이웃 한 분이 한 가지 이야기를 알려줍니다. 소설쓰는 김훈이라는 분이 1980년대에 ‘전두환 찬양 기사’를 무척 많이 썼고, 2000년대가 넘은 뒤에는 ‘여성비하’와 ‘인종차별’ 이야기를 줄줄이 쏟아놓았다고 알려줍니다.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전두환 찬양 기사’가 궁금해서 살펴보니, 참으로 그악스러운 ‘전두환 용비어천가’를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전두환 용비어천가’를 놓고 소설쓰는 김훈을 비판하거나 나무라거나 꾸짖은 사람은 매우 드문 듯합니다.


  그나저나, 소설쓰는 김훈이라는 분은 2000년 10월 5일치〈한겨레21〉하고 만난 자리에서 아마 처음으로 ‘전두환 찬양 기사 자기고백’을 했지 싶습니다. 이 때문에 〈시사저널〉 편집장 자리에서도 물러나야 했다는데, 2002년에 〈한겨레〉 사회부 기자로 특별채용이 되어요. 조금 더 알아보니, 소설쓰는 김훈은 〈한겨레〉에 특별채용으로 들어간 일을 나중에 이야기하는데, 신문사에 들어가니 이녁더러 ‘대학교 졸업 증명서’를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대학교 졸업 증명서’는 없고 ‘고등학교 졸업 증명서’는 있으니 그것을 주면 되느냐고 물었다고 해요. 소설쓰는 김훈은 대학교에 살짝 발을 담근 적이 있으나 그만두었기에 ‘고졸 학력’입니다.


  이 대목을 알아보고 나서 문득 내 지난날이 떠오릅니다. 나도 ‘고졸 학력’입니다. 나는 1999년 2월에 〈한겨레〉 이사 한 분한테서 ‘특별채용’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무렵까지 〈한겨레〉에 없던 특별채용이라고 했는데, ‘신문배달을 하던 젊은이를 기자로 채용’하려고 했어요. 그때에 〈한겨레〉 이사로 있던 분은 나한테 ‘대학교 졸업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 교육이 너무 부질없고 제대로 학문을 닦지 않는다고 여겨 자퇴했다’고 말했습니다. 〈한겨레〉 이사로 있던 분은 ‘한겨레는 학력제한을 두지 않으니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한겨레〉에 못마땅하게 여긴 대목이 있었어요. 특별채용을 한다니 무척 기뻤습니다만, 입사시험 자격으로 토익 점수를 내라 했어요. 그래서 이 대목을 여쭈었지요. 학력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하면서 토익 점수를 내라고 한다면, 지원자는 처음부터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하는 셈 아니냐고, 영어 시험을 보려 하면 ‘1:1 면접’으로 영어 시험을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여쭈었습니다. 특별채용이니 입사시험을 안 치러도 되지만, 나처럼 ‘고졸 학력’으로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테니, 그런 조항이 사라져야 한다고 느꼈어요. 졸업장이 아닌 스스로 갈고닦은 솜씨로 서류를 내고 입사시험을 치를 수 있어야 올바르니까요. 그때 〈한겨레〉 이사로 있던 분은, ‘젊은이 말이 맞는데, 회사 규칙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마운 제안을 받고 나서 곰곰이 헤아렸습니다. 신문배달을 이제 그만두고 신문기자가 되느냐 하는 갈림길이었습니다. 엉성한 회사 규칙은 회사에 들어가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대목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토익 점수’를 바라는 일은 ‘대학교 졸업장’을 바라는 일하고 똑같습니다. 학력제한이 없다는 말은 허울입니다. 허울을 스스로 없애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신문이 될 수 없습니다. 제대로 된 신문이 될 수 없다면, 〈한겨레〉가 아무리 올바른 목소리로 ㅈㅈㄷ신문을 나무라거나 꾸짖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올바른 삶이나 넋이 못 됩니다.


  “말씀이 무척 고맙지만, 아무래도 고졸 학력을 넉넉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조직이지 싶어서, 이사님 제안은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한겨레〉 기자가 되는 꿈은 접어야겠습니다. 오늘 술이나 한잔 사 주셔요. 신문배달 월급으로는 술도 못 사 마십니다.”


  소설쓰는 김훈이라는 분은 ‘고졸 학력’이면서 어떻게 신문기자 노릇을 했을까요? 1970년대 신문사에서는 학력제한이 없었을까요? 소설쓰는 김훈은 그무렵에 특별채용으로 뽑혔을까요? 글을 잘 쓰기만 하면 누구라도 신문기자가 될 수 있을까요?


  졸업장은 사람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자격증은 사람을 밝히지 못합니다. 졸업장은 학교를 마친 증명일 뿐입니다. 학교를 마쳤기에 더 많이 배우거나 잘 알지 않습니다. 자격증이 있기에 기계를 더 잘 다룬다든지 어떤 지식이 더 빼어나지 않습니다.


  아기는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졸업장을 묻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차린 밥을 먹으면서 어버이한테 자격증을 묻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있어야 문학을 할 수 있지 않습니다. 자격증이 있어야 신문을 만들어 기사를 쓸 수 있지 않습니다. 그뿐입니다. 4347.9.1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내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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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머리카락



  머리숱이 그리 안 많은 채 태어났습니다. 우리 식구 가운데 왜 나만 머리숱이 적을까 하고 생각하며 어릴 적부터 여러모로 힘들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머리숱이 적어서 힘들 일이란 없을 수 있어요. 가만히 보면, 내가 머리숱이 적다고 해서 누가 나를 쳐다볼 일이 없으며, 내 머리카락 숫자를 셀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내 적은 머리숱을 쳐다볼는지 몰라’ 하고 혼자 생각할 뿐입니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자꾸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숱이 그리 많지도 않은데 이렇게 빠지면 어떡하나’ 하고 여겼습니다.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거울을 들여다보면 참말 머리숱이 훨씬 줄어들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머리숱 걱정으로 살던 어느 무렵, 아마 서른 살 언저리였을 텐데, 머리숱이 줄고 줄어 자꾸 줄면 ‘머리카락을 다 밀고 살면 되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머리숱이 자꾸 줄어든다고 걱정할 일 없이, 머리숱이 줄어들면 민머리로 살면 됩니다.

  그러고는 이때부터 거울을 안 보고 삽니다. 집에도 거울을 안 둡니다. 나는 내 머리숱도 안 보지만, 내 낯도 안 봅니다. 내 몸도 안 봅니다. 머리숱이라는 데에 마음을 빼앗길수록 정작 내 모습이 무엇인지를 놓친다고 느꼈어요.

  이렇게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문득 한 가지를 알아차렸습니다. 많이 줄었구나 싶던 머리숱이 꽤 늘었습니다. 그렇다고 머리카락이 수북해지지는 않았으나, 예전에는 가까운 이웃이나 동무가 “머리숱이 많이 줄었네.” 하고 말하곤 했는데 “얘, 네 머리숱 다시 늘었네.” 하고 알려주었습니다.

  내 손등과 발등을 뒤덮은 사마귀하고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손등에 돋은 사마귀는 들여다보고 건드릴수록 늘어날 뿐입니다. 손등에 돋은 사마귀는 안 들여다볼 뿐 아니라 잊어버리면 사라집니다. 머리숱이 줄어든다고 걱정하면서 자꾸 쳐다보니 머리숱은 차츰 나한테서 사라집니다. 머리숱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스스로 걸어갈 길을 즐겁게 걸어가면 머리숱이 돌아옵니다. 4347.8.2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내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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