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기대는 책



  책은 서로 기대기에 함께 반듯하게 섭니다. 책은 서로 기대기에 구김살이 없이 고이 눕습니다. 책은 서로 기대기에 다 같이 먼지를 덜 먹고 햇빛도 덜 받으면서 오래오래 책시렁에서 살아갑니다. 오랜 숨결이란, 두고두고 보살피는 손길이란, 넌지시 작게 이어집니다. 2018.4.1.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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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나무



  도쿄 진보초 책골목에는 곳곳에 나무가 있습니다. 비록 건물 사이에 작은 자리를 겨우 얻을 뿐이기는 한데, 4월을 맞이해서 꽃이 활짝 피어 낮에도 밤에도 꽃내음을 물씬 풍깁니다. 꽤 멀리 있어도 자동차 방귀 아닌 꽃나무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있기에 길이 싱그럽다면, 나무 한 그루가 있기에 집이 상큼할 테며, 나무 한 그루가 자랄 수 있기에 이 별이 아름답겠지요. 우리가 읽는 모든 책은 나무요 숲입니다. 2018.4.1.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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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리개를 쓰다



  도쿄 진보초에 ‘아카시아서점(アカシャ書店)’이 있습니다. 바둑 책만 다루는 곳인데 가게 앞에 ‘100엔 책’을 두었고, 이 가운데 《奈良の石佛》(西村貞, 全國書房, 1942)도 있어요. 일본 나라현 돌부처를 굳이 알아야 할 까닭이 없을 수 있습니다만, 사진을 가만히 보니 마치 백제 돌부처를 보는 듯했어요. 더욱이 1942년 책이라면, 일본에서 나온 책이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백제·일본 발자취를 이 책에서 넌지시 다루었을는지 모릅니다. 제가 이 책을 쓰는 일이 없더라도 우리 책숲집에 건사하면서 이웃님한테 도움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책이 물에 옴팡 젖어서 축축합니다. 이를 어쩌나 망설이는데, 길손집으로 가져와서 촛불을 켜 보기도 하고 창가에 두기도 하는데 안 마릅니다. 이러다 이튿날 아침에 문득 머리말리개가 떠오르네요. 예전에 갓난쟁이 아이들이랑 길손집에 묵을 때면 천기저귀를 으레 머리말리개로 말렸어요. 그때처럼 책을 머리말리개로 말려 보는데 아주 빠르게 눅눅함이 가십니다. 훌륭하네요. 그러고 보니 헌책집에는 뜬금없어 보이는 머리말리개가 꼭 있었구나 싶어요. 오래된 책은 섣불리 볕에 말리면 안 되니, 머리말리개를 써서 눅눅함이나 축축함을 가셔 주었군요. 2018.4.1.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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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고 안 묻다



  사람으로 물결치는 진보초 책골목이 아닌 사람 발길이 없는 안골을 찾아서 조용히 걷다가 작은 책집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가타가나를 못 읽어 책집 이름도 몰랐어요. 그저 이 작은 책집 가까이에 핀 들꽃내음이 매우 고와서 저절로 발길을 옮겼지요. 그리고 이 책집 앞에 ‘100엔’이란 값이 붙은 책꾸러미를 보고는 살짝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이때에 뜻밖이라 할 만한 선물 같은 한국책을 여럿 보았어요. 한국 백제 유물하고도 맞닿는 ‘한국으로 치면 일제강점기’에 나온 일본 불상을 다룬 책을 보았고, 1950년대에 일본말로 나온 페스탈로치 책을 보았지요. 한글로 된 한국에서 나온 인형극 책도 여럿 보는데, 모두 한국 글쓴이가 일본 아무개한테 선물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 모두 한 권에 고작 100엔. 아, 이럴 수도 있구나. 그런데요, 책값을 셈하려고 책집으로 들어가니 책꽂이에는 온통 바둑 책만 있습니다. 헛! 그래요, 이곳은 오직 바둑 책만 다루는 곳이에요. 그래서 길가에 내놓은 ‘100엔짜리 책’은 책집지기가 바둑 책을 사들이다가 얼결에 딸려서 들어온 ‘바둑 갈래가 아닌 책’이었어요. 바둑을 다룬 책으로만 책집을 가득 채운 곳에서 얼결에 만난 값진 책을 모두 100엔씩, 아홉 권에 900엔으로 장만하면서 속이 벌렁벌렁했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거든요.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허리를 깊이 숙여 고맙다는 말을 한국말로도 일본말로도 영어로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지요 ‘바둑 전문 책집에서 왜 한국책도 100엔으로 다루느냐’ 따위는 물어볼 까닭이 없어요. 2018.4.1.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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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을 흘려넘길 수 있나요



  도쿄 진보초에 ‘adult shop’이라는 곳이 여럿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들어간 일이 없고, 겉에서 사진만 찍었어요. 그런데 ‘adult shop’이 어떤 곳인지 한동안 몰랐지요. 영어로 적힌 글씨를 읽으며 ‘내 나이를 헤아리면 나도 어른이니, 나는 들어가도 되는 곳인가 보네’ 하고 여기면서 굳이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누가 알려주어 그 ‘adult shop’은 알몸인 가시내가 나오는 사진책이나 영화만 갖춘 책집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얼핏 보기로 그 ‘adult shop’ 비슷한 책집을 어제 진보초에서 보았어요. 다만 ‘adult shop’ 비슷하기는 한데 ‘adult shop’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안 붙더군요. ‘total visual shop’이라고만 적혔어요. 이곳에 ‘adult shop’이란 말이 붙었으면 안 들여다보았을 텐데 ‘total visual shop’이라는 이름을 보고는 ‘그러면 사진책이 있겠네’ 하고 여기며 들여다보기로 했어요. 그러나 안에는 들어가지 말고 길에서만 보자고 여겼어요. 이러면서 길가 책꽂이를 살피는데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살피다가, 이 책집 앞에 ‘1000엔’짜리 값싼 사진책이 있다는 알림글을 일본말로 읽었고, 구경이나 해 보자는 생각으로 쳐다보았지요. 이때에 ‘알뜰한 사진책 세 가지’를 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한동안 생각이 멎었어요. 어, 어, 이 사진책이 여기에? 아니, 왜 여기에? 아차, 그렇구나, 그래, 맞아, 그렇지. …… 아, 이 사진책 《朝鮮民族》을 한 권 더 만나고 싶어서 그토록 별렀는데, 바로 이곳에서, 가시내 알몸 사진책을 안쪽에 잔뜩 갖추었다는 ‘total visual shop’ 길가 책꽂이에서 이 엄청난 사진책을? 아무 말이 나오지 않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볼을 타고 길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아찔했습니다. 넋을 잃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녁 여덟 시가 거의 다 된 무렵, 일본 도쿄 진보초 ‘ARATAMA total visual shop’ 앞에서 두 무릎을 길바닥에 꿇고서 사진책을 가슴에 품어 보았습니다. 이러고는 다시 책상자에 얹고서 사진을 한 장 찍었어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구나. 이곳은 책집 안쪽 너른 책꽂이에는 알몸 가시내 사진책을 비싼값으로 갖추어 놓지만, 알몸 가시내가 아닌 재일조선인을 비롯한 한겨레 이야기를 담은 사진책이며, 아시아 여러 겨레 수수한 살림살이를 담은 사진책이며, 일본 인간문화재 삶을 담은 사진책은 길가에 1000엔짜리로 값싸게 팔려고 내놓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른바 ‘주력 상품’은 햇빛에 스러지지 않고 먼지도 먹지 않고 아무 손이나 타지 않도록 안쪽에 고이 모신다면, ‘비주력 상품’은 길가에 값싸게 내놓는 셈입니다. 처음에 저는 ‘ARATAMA’라는 책집은 굳이 들여다보지 말자고 여겼습니다만, ‘adult shop’이라고 해서 이 겉얼굴에 얽매일 까닭이 없이, 저로서는 제가 바라는 책이 길가 책꽂이에 있을 수도 있으니, 게다가 어떤 책집이건 참말로 길가에 버젓이 나올 수 있으니, 제가 바라는 책만 생각하면서 바라보면 될 뿐인 줄 새삼스레 뉘우치며 배웠습니다. 진보초 책집 앞 길바닥에 눈물을 떨구고 마음속으로 웃음을 지으면서 사진책 세 권을 3000엔에 선물처럼 장만했습니다. 2018.3.31.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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