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먹는다



  책을 읽을 틈이 없어서 못 읽는 사람이 있고, 책을 살 돈이 없어서 못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책을 읽을까요? 바로 책을 읽을 틈이 있는 사람에다가, 책을 살 돈이 있는 사람이겠지요. 책을 읽을 틈이란 언제일까요? 그저 책을 읽을 틈입니다. 남이 내어 주는 틈이 아닌, 스스로 내는 틈입니다. 하루 1분이든, 살짝 숨을 돌리는 틈이든, 밥을 다 먹고 몸을 쉬는 틈이든, 잠들기 앞서이든, 하루 일을 여는 새벽이든, 버스나 전철로 오가는 길이든, 자전거를 달리다가 그늘에서 쉬는 틈이든, 모든 틈은 마음을 읽으면서 생각을 읽고 길을 읽기에 책을 읽는 틈입니다. 이제 책을 사는 돈을 헤아려 봅니다. 책 살 돈은 누가 줄까요? 남이 줄까요? 때로는 남이 줄 수 있으나, 스스로 생각을 가꾸어 삶을 지피는 책이란, 스스로 돈을 장만해서 살 적에 제대로 빛나면서 값이 있습니다. 집이나 자동차를 장만하려고 여러 해, 때로는 열 해나 스무 해 동안 돈을 모으듯, 마음을 가꾸면서 배울 책을 장만하려고 한두 해를 일할 수 있어요. 다달이 받는 일삯을 조금씩 덜어서 살 수 있지요. 책을 사려고 한 달 동안 일해서 책값을 모으며 기다릴 만합니다. 책을 사려고 열 해나 스무 해를 땀흘려 일하고는 활짝 웃음짓는 낯으로 가슴에 책을 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먹습니다. 우리는 바쁘거나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어 책을 안 읽을 뿐 아니라, 삶이나 사랑을 안 읽기 일쑤입니다. 시간은 먹지 말아요. 삶을 먹고 사랑을 먹으면서 책으로 마음밥을 즐거이 먹어 봐요. 2018.7.15.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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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붑니다. 서울에서는 건물 사이를 휭휭 바람이 지나다닙니다. 서울바람은 건물바람에 자동차바람에 찻길바람입니다. 이 바람은 시골에서는 시골길을 가로지르기도 하지만, 농약이나 비닐이나 비료 내음을 듬뿍 머금고 불기도 합니다. 이 바람은 숲에서 숲내음을 물씬 싣지요. 그리고 이 바람은 핵발전소에서는 방사능을 머금고, 화력발전소 곁에서는 잿가루를 머금어요. 우리는 어떤 바람을 마시는 살림일까요? 우리는 어떤 바람을 몸에 넣으면서 두 손에 어떤 책을 쥐어 어떤 이야기를 마음에 심으려는 하루일까요. 바람이 붑니다. 새로운 바람도 불지만 매캐한 바람도 붑니다. 바람은 그저 머금어서 실어 나를 뿐입니다. 우리 몸이나 마음도 우리가 살아가는 결에 따라서 고스란히 받아들일 뿐입니다. 어떤 책을 어떤 눈으로 어디에서 가리거나 추려서 어떤 손으로 쥐어 읽겠습니까? 2018.7.14.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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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읽는다



  누리책집에서 쉽게 사는 길보다는 마을책집으로 나들이를 가서 품하고 틈을 들여 책을 어렵고 느리게 사는 길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예전에는 모두 마을책집에서 책을 만났다면, 한때 누리책집이 봇물처럼 터져서 퍼졌으며, 이동안 마을책집이 죽다시피 했는데, 마을책집이 한창 죽어나는 동안 ‘참고서 다루는 책집’은 아주 힘든 판이 됩니다. 이러면서 ‘참고서 안 다루고 처세경영 안 다루는 책집’이 꾸준히 늘어요. 우리는 매우 크게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 끙끙 앓고서야 한 가지를 배운 셈입니다. 누리책집에서 사든 마을책집에서 사든 모든 책은 손이 읽습니다. 손이 있어야 읽습니다. 그리고 눈하고 귀가 있어야 읽지요. 다만 몸뚱이라고 하는 손·눈·귀만이 아닙니다. 두 다리로 걷는 마을이나 골목에서 맞아들이는 숨결을 헤아리는 손이며 눈이며 귀입니다. 물건으로 쉽게 받는 책이 아닌, 고이 건사하면서 고루 나눌 뿐 아니라, 고스란히 사랑으로 새로 가꿀 이야기를 두고두고 살피는 책인 줄, 손이 읽는 책인 줄,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오늘날 흐름이지 싶습니다. 2018.7.13.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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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먼저 툭 끊는



  오늘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곳 일꾼하고 전화를 두 번 하는데, 둘 모두 그곳 사람이 그쪽 할 말을 마친 뒤 전화를 ‘툭!’ 소리 나게 확 먼저 끊습니다. 둘 모두 녹음을 했으니 누가 물어도 얼마든지 녹음파일을 들려주면서 밝힐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남기느냐 하면, 다른 곳도 아닌 ‘국가인권위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전화를 ‘먼저’, 게다가 ‘툭!’ 소리가 크게 들리도록 먼저 끊을까요? 이들은 대통령이나 위원회 우두머리하고 통화를 할 적에도 ‘먼저’ ‘툭!’ 소리가 나게 끊을까요? 이분들이 일을 제대로 할는지 안 할는지는 지켜보아야 알겠습니다만, 인권을 다루는 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전화를 이렇게 받고 끊는구나 싶어 놀랐고, 이런 모습이 이 나라 모습이네 하고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이분들은 책을 어떤 손길로 읽거나 마주하려나요? 2018.7.12.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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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과 책은 같아서



  저는 이제껏 뜨겁게 살아 본 적이 없습니다. 얼마 앞서 서른세 권째 책인가를 내놓았지 싶고, 곧 서른네 권째 책인가를 내놓습니다만, 저도 제 책을 세지 않을 뿐더러, 늘 꾸준히 새로 나오니 숫자세기는 영 부질없는데요, 뜨겁게 살기에 책을 써내지 않아요. 예나 이제나 늘 노래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지으려 하니 어느새 책이 태어납니다. 문득 돌아보면, 스무 살 언저리에 하루도 삶터도 이웃도 참으로 갑갑하다고 여겨서 ‘이 오늘을 갈아치우는 길’은 무엇인가 하고 헤아리면서 ‘새로 맞이할 모레를 그리면서 오늘을 살자’고 여겼습니다. 이러면서 제 곁에 두는 책도 새삼스레 갈무리했어요. 오늘 하루 빛나는 책이 아닌, 앞으로 두고두고 빛이 날 책을 곁에 두자고 여겼습니다. 둘레에서 사람들이 오늘 널리 읽는 책이 아닌, 앞으로 널리 읽힐 수밖에 없으면서, 앞으로 사람들 가슴에 고이 씨앗으로 깃들 책을 스스로 쓰고 스스로 찾아서 읽기로 했습니다. 제가 걷는 길은 참말 언제나 노래하는 길입니다. 다른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웃님한테도 이렇게 말해요. “우리 함께 노래해요.” 2018.7.10.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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