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는 눈



  ‘보다’라는 낱말에는 “맛을 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간을 보다”라고도 써요. ‘보다’는 바탕이 두 눈으로 느끼는 삶인데, 맛을 마치 눈앞에서 그리듯이 느낀다면서 “맛을 보다·간을 보다”라 합니다. 어쩌면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다 알지 않았을까요? 우리 몸은 ‘먹어서 기운을 얻어 움직인다’기보다 ‘속으로 받아들여서 알거나 배운다’고 할 만하다는 대목을 말이지요. 한국에 살면서 보리술 한 모금을 입에 댈 적에 보리밭이 떠오른 일이 없습니다. 참으로 맛난 보리술 맛을 느낀 적이 없어서 보리밭이 떠오르는 보리술을 여태 못 먹었을 수 있어요. 엊그제 처음으로 보리밭이 떠오르는 보리술 맛을 보았습니다. 이때 뒤로 가끔 ‘먹을거리나 마실거리가 태어난 터’가 눈앞에 떠올릅니다. 딱히 맛없는 먹을거리라면 아무것도 안 떠오르지만, 꽤 싱싱하면서 좋구나 싶은 먹을거리일 적에는 머리가 번쩍하면서 그림이 촤르르 돌아갑니다. 문득 생각해 봅니다. 오직 글만 있는 책을 읽다가 머리에 촤르르 그림이 돌아가는 때가 있어요. 글이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우면 이 글이 깃든 책을 읽으면서 둘레 다른 소리를 모두 잊고서 글을 그림으로 받아들여 새깁니다. 깨어나는 마음이 된다면 깨어나는 몸이 되어 밥 한 술이든 물 한 모금이든 글 한 줄이든, 눈앞에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그림이 촤르르 돌아가는구나 싶어요. 밍밍한 수돗물을 마실 적에는 거의 아무 그림이 안 떠오릅니다. 때로는 ‘댐부터 긴 물관에서 고단하게 억눌리는 물방울’을 느낍니다. 맑으며 싱그러운 물 한 모금이라면 어느 골짜기에서 촤륵촤륵 흐르다가 나한테 왔는지 한눈에 알아보고요. 마음이 맞는 벗님을 마주할 적에도 머리에 불꽃이 일듯 알아차리면서 맞아들이는 기쁜 숨결이 있어요. 그래서 ‘보다’란 두 눈으로뿐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고 깨어나면서 배우는 몸짓을 가리키지 싶습니다. 2018.7.22.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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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을 쓰는 이가 4을 쓰는 이한테



  우리는 어떤 곳을 어떤 눈으로 보면서 어떤 삶을 보낼까요? 오늘날에는 과학에서 밝히기로도 사람들이 머리(뇌)에서 1/10도 제대로 못 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책을 읽을 적에 글쓴이 눈길이나 마음길을 어느 만큼 헤아리거나 읽어낼까요? 머리를 1/10도 못 쓰는 우리 삶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글쓴이 넋을 거의 못 헤아리는 눈높이로 책을 마구 읽어치우는 셈은 아닐까요? 어느 모로 본다면 숱한 글쓴이도 머리를 고작 1/10만큼 다루면서 책을 써낸 셈은 아닐까요? 지구 아닌 다른 별에서 머리(뇌)를 오롯이 다 쓸 줄 알면서 자그마치 셋이나 넷이 되는 머리로 살아가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다른 별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알아차리거나 읽어낼 수 있을까요? 1993년에 나온 영화 〈contact〉를 보면 다른 별에서 보내 준 엄청난 자료를 지구별 사람 머리로는 도무지 못 알아채다가 한 사람이 문득 수수께끼를 풀어낸 이야기가 흘러요. 그리고 이 수수께끼를 풀었어도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우주선이 별누리를 오가면서 시간을 가로지르는 길’이 무엇인가를 못 깨닫고 못 보며 모르지요. 책을 쓰는 사람으로서, 또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 여기에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로서, 곁님하고 시골에서 보금자리숲을 짓는 사람으로서, 나는 내 머리를 어느 만큼 열어서 쓰는가 하고 아침저녁으로 되돌아봅니다. 나한테는 하나 있는 이 머리를 1/10이 아닌 10/10을 오롯이 쓰면서 살자고 거듭 되새깁니다. 2018.7.21.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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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들을 말만 듣는 책



  글쓴이는 ‘저 할 말만 하는’ 책이라면, 읽는이로 보면 어떠할까요? 읽는이는 읽는이대로 ‘저 듣고픈 말만 듣는’ 책입니다. ‘저 들을 말만 듣는’ 책이기도 합니다. 제대로 보면 좋겠어요. 글쓴이 넋이나 뜻을 모든 읽는이가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글쓴이처럼 살지 않았거든요. 글쓴이 넋이나 뜻이 100이 담긴 책에서 우리는 몇 가지나 받아먹거나 알아차리거나 느낄까요? 우리는 100이면 100 모두 낱낱이 알아내고 샅샅이 깨달아서 글쓴이 이야기를 아로새기거나 나무라거나 따지는가요, 아니면 100 가운데 한둘만 살피거나 훑고서 섣불리 따따부따 하는가요? 글쓴이 넋이나 뜻 100 가운데 한둘만 살폈다고 해서 책읽기나 글읽기를 못했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한두 가지라도 살폈으면 잘 했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100을 모두 헤아리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못 읽어내었으면 이튿날이나 이듬해에 읽어내어도 됩니다. 책이란, 서둘러 읽어치울 종이꾸러미가 아니에요. 나무 목숨만큼, 나무한테서 얻은 숨결로 빚은 종이 목숨만큼 두고두고 곁에 두면서 차근차근 새길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이야기꾸러미인 책은 사람마다 다 다르게 읽어냅니다. 곧 우리는 누구나 다 다른 비평가란 소리입니다. 우리 나름대로 읽은 책은 우리 마음으로 읽은 길이요, 우리는 다 다르면서 아름답고 즐거운 눈썰미를 밝혀서 살림을 새로 짓는 손길을 배우는 벗님입니다. 2018.7.20.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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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할 말만 하는 책



  사람들은 저마다 저 할 말만 합니다. 어릴 적부터 이를 어렴풋이 느꼈으나 곁님이 어느 날 이 대목을 똑똑히 밝혀 준 뒤로 제대로 마음으로 푹 꽂힙니다. 어버이하고 아이 사이에서도, 동무랑 동무 사이에서도, 가까운 이웃 사이에서도, 좋은 뜻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자리에서도, 참말로 사람들은 제 뜻을 펼 뿐이에요. 얼핏 보면 다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지만, 가만가만 살피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맞추어 저 하고픈 말’을 생각해 내어서 폅니다. 그리고 이처럼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저 할 말을 곰곰이 생각해서 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되는구나 싶습니다. 사람들이 ‘저 할 말’이 아닌 ‘남 눈치를 보는 말’이나 ‘남 입맛에 맞는 말’이나 ‘남을 따르는 말’을 한다면 어떠할까요? 이때에 이야기가 될까요? ‘내 생각’이 아닌 ‘남 생각’을 ‘내 입’을 거쳐서 내놓으면 서로 어떤 이야기가 될 만할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서로 말을 나눌 수 있는 까닭은 저 할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까닭도 저 할 말을 하기 때문이지요. 책이란, 바로 글쓴이 나름대로 펴는 글쓴이 말이자 생각이자 뜻이자 꿈이자 사랑입니다. 글쓴이가 남 눈치를 보고서 글을 썼다면, 이런 책은 읽을 값어치가 없습니다. 그림이나 사진도 남 눈치를 보며 멋들어지거나 그럴싸하게 꾸몄다면, 이런 그림이나 사진이 깃든 책도 읽을 일이 없어요. 우리 마음에 스며들면서 생각을 새로 지피고 아름답게 북돋우는 책이란, 글쓴이·그린이·찍은이 모두 ‘글쓴이 나름대로 저 할 말을 신나게 편’ 책입니다. 2018.7.20.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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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는 옷



  입는 옷에 따라 사람이 달라질까요? 누구는 입는 옷에 따라서 달라질 테고, 누구는 어느 옷을 입든 안 달라지겠지요. 고운 옷을 입기에 곱게 거듭나는 사람이 있고, 안 고운 옷을 입어도 이 옷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한결같이 고운 사람이 있어요. 손에 어떤 책을 쥐느냐에 따라 배움거리가 달라질까요? 누구는 손에 쥔 책에 따라서 배움거리가 달라질 텐데, 누구는 어느 책을 읽든 스스로 배우려는 길을 오롯이 배울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누구는 입는 옷이나 쥐는 책에 따라서 늘 달라지지만, 누구는 어떤 옷이나 책을 곁에 두든 스스로 오롯이 지키거나 가꾸면서 삶길을 걷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 두 모습을 함께 품으면서 살지 않을까요? 때로는 옷이 날개이듯, 책을 날개로 삼아서 배워요. 때로는 겉모습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씩씩하고 사랑스럽듯, 겉이름에 기대거나 매이지 않으면서 온삶을 오롯이 배우는 길을 아름답게 걷습니다. 2018.7.15.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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