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가 숨쉬다



  바위나 돌이 숨을 쉬는 줄 예전부터 알았습니다. 어릴 적에 크고작은 돌을 귀나 볼에 가져다 대면 돌이 얼마나 따뜻하면서 반기는지 몰라요. 돌은 우리가 저희를 가만히 집어서 손바닥에 올려놓을 적에 대단히 기뻐합니다. 커다란 바위는 우리가 저희한테 다가가서 몸을 맡겨 기대면 아주 좋아합니다. 돌이나 바위는 매우 단단하면서 무거운 몸으로 이 별에 있어요. 그래서 돌이나 바위는 저희 몸으로 나들이를 다니지는 않습니다. 돌이나 바위는 무거운 몸에서 숨결로 빠져나와서 홀가분하게 온누리를 날아다녀요. 우리가 작은 돌을 손바닥에 얹으면, 돌이 그동안 넋으로 온누리를 날아다닌 이야기를 우리한테 마음으로 들려줍니다. 우리가 커다란 바위에 몸을 기대거나 안기면, 돌이 여태 넋으로 온누리를 두루 누빈 이야기를 우리한테 마음으로 알려주고요. 퍽 오랫동안 돌이나 바위하고 안 놀았다고 느낍니다. 아마 아이에서 어른이 되면서 여러모로 할 일이 늘어서 바쁘다는 핑계를 댈 만할 테고, 어른이란 몸을 입으면서 돌이나 바위보다는 다른 동무나 놀잇감이 생겼다고 할 만할 테지요. 참으로 오랜만에 아주 느긋하게 바위 품에 안겨 엎드려 보았습니다. 커다란 바위는 처음에는 시큰둥해 하는 듯했지만, 어느새 아주 기쁨이 차올라서 출렁출렁 너울처럼 큰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이러다가 곧장 저를 꿈나라로 이끌었고, 저는 바위한테 녹아들어서 긴긴 나날 바위가 지구라는 별에서, 또 지구 바깥 뭇별에서 어떤 삶과 이야기를 엮었는지 하나하나 듣고 볼 수 있었습니다. 바위는 단단하면서 묵직한 덩어리로 이룬 새롭고 놀라운 책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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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귀가 앉다



  사마귀가 제 오른손등에 앉았습니다. 한참 이렇게 앉아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커다란 바위에 몸을 맡겨 오른귀를 대고 엎드리다가 깜빡 잠들었는데, 사마귀가 저를 잠에서 깨우더군요. 이러면서 저한테 물어요.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봐.” “‘하고 싶은 말’이라니, 무슨 말?” “네가 바라는 것, ‘소원’ 같은 말.” “그래? 그러면 내가 돈을 바라면 돈을 줄 수 있니?” “돈? 그게 뭔데? 나(사마귀)는 돈이 뭔지 모르지만 네가 바라면 줄게.” 사마귀가 마음으로 하는 말을 듣다가 슬쩍 웃었습니다. 사마귀는 저한테 제가 바라는 돈이 있으면 주겠다고 하기에 어떤 숫자를 가만히 마음에 띄운 다음 다른 말을 합니다. “그런데 네가 모른다는 돈을 바라고 싶지는 않고, 나는 ‘보금자리숲’이면 좋아.” “알았어.” 사마귀하고 말을 섞다가 생각했습니다. 저는 여태 사마귀를 늘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우리 집에서 함께 살기도 하지만, 정작 사마귀가 제 손등이나 팔뚝이나 어깨나 머리에 올라앉도록 내주지는 않았더군요. 어제(2018.8.4.) 처음으로 제 몸을 맡겼습니다. 사마귀는 아주 부드러우면서 날렵하게, 또 바람 따라 한들한들 춤을 추면서 오랫동안 저하고 놀다가 숲으로 돌아갑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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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이랑 믿음



  어린이로 살다가 어른이라는 몸으로 자라면서 둘레 어른한테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 하나는 ‘믿음’이었습니다. 둘레 어른들이 ‘참을 참대로 느끼지 못하’기도 하고, ‘참이라고 느끼면서 정작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하며, ‘참을 굳이 알지 않으려 하’거나, ‘참인 줄 알아차리면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왜 이래야 하는지 참으로 수수께끼였습니다. 이제 저는 둘레에 있는 사람들한테 으레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믿기는 쉽지 않겠지만 참입니다. 그대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참이 사라지거나, 참이 거짓이 될까요? 참은 늘 참 그대로 있습니다.” 참이란 삶입니다. 믿음이란 삶이 아닙니다. 참이란 삶에서 비롯합니다. 믿음이란 삶 아닌 곳에서 비롯하여 우리 마음에 깊이 또아리를 뜬 채 모두 가로막는 높다란 담벼락입니다. 참을 다룬 책을 멀리한다고 해서 참이 사라질 수 없습니다. 참이 아닌 믿음을 다룬 책을 가까이한다고 해서 ‘믿음이 참으로 바뀔’ 수 없습니다. 믿음을 버려야 참을 볼 수 있고, 믿음을 깨야 참을 배울 수 있습니다. 2018.8.4.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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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헤아리면 됩니다. 네가 읽을 책 아닌 내가 읽을 책을 고르는 만큼, 네 마음 아닌 내 마음을 헤아리면 됩니다. 남들이 어떤 책을 읽거나 말거나 쳐다볼 일이란 없습니다. 다만 남들이 읽는 책에 문득 눈길이 간다면 왜 그 책에 눈길이 갔는지, 또는 남들이 좋아하는 책에 왜 얼결에 눈길이 가는가를 헤아리면 됩니다. 우리가 읽을 책이란 우리 스스로 배울 길을 즐겁게 걸어가도록 북돋우는 책입니다. 남이 먹을 밥 아닌 내가 먹을 밥을 챙겨서 먹습니다. 남이 만날 사람이 아닌 내가 만날 사람을 사랑하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남이 배울 책이 아닌 내가 배울 책을 두 손에 쥐어 가만히 마음을 열고 생각을 키웁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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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외버스 책꽂이



  일본 오사카로 배움마실을 다녀오고 부산에서 내립니다. 기차를 타고 순천을 거쳐 고흥으로 돌아갈는지,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까지 네 시간을 내처 달릴는지 어림하다가 시외버스를 타기로 합니다. 시외버스 일꾼은 언제나 그러했다는 듯이 텔레비전을 켭니다. 이 시외버스는 우리 집 아이들이 함께 탔는데, 버스 일꾼은 ‘아이가 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아무 방송이나 틀어 놓습니다. 곁님은 이를 보고 얼른 앞으로 걸어가서 버스지기님한테 말을 여쭙니다. 아이들이 타서 저 방송에서 나오는 얘기나 소리가 안 좋으니 소리를 끄거나 화면을 꺼 주십사 하고. 버스지기님은 처음에는 안 끄겠다고 하셨는데 조금 뒤에 갑자기 꺼 줍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때 불쑥 한 가지 생각이 들어요. 시외버스에 놓은 텔레비전을 몽땅 치우고, 그 자리에 ‘책꽂이’를 두면 좋겠구나 싶은. 시외버스에는 아이를 이끄는 어버이가 으레 타곤 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타고, 젊은이라든지 군인이라든지 길손이라든지 나라밖 마실벗이 타기도 해요. 이주노동자도 타고 푸름이나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도 타지요. 시골지기도 타고 여느 회사원이나 공무원도 탑니다. 이렇게 온갖 자리 갖은 사람이 드나드는 시외버스이니, 그냥그냥 맞춰서 갖추는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가 아닌, 책을 잘 알거나 사랑하는 책지기가 찬찬히 가려서 뽑은 책을 두면 좋겠구나 싶어요. 그림책, 어린이책, 시집, 만화책, 사진책, 문학책, 인문책, 과학책, 때로는 국어사전까지도. 시외버스 텔레비전 크기를 헤아리면 적어도 예순 권쯤은 꽂을 만한 책꽂이를 둘 만해요. 이렇게 시외버스에 책꽂이를 둔다면, 사람들 눈길이나 손길이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요? 멍하니 화면을 좇는 눈길이 아닌, 스스로 생각을 살찌우는 길로 시나브로 바뀔 만하지 않을까요? 아마 한동안 책을 아무도 안 빌려 읽을는지 모르고, 때로는 책을 훔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래도 ‘시외버스 책꽂이’를 문화부와 지자체와 버스회사와 출판사가 서로 손을 잡고서 알차고 알뜰히 건사하고 다룰 수 있다면, 버스지기님도 일을 쉬면서 책을 틈틈이 펼 수 있다면, 우리 삶자리는 차근차근 새로워질 만하지 싶습니다. 2018.7.26.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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