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빛 2021.12.8.

책하루, 책과 사귀다 75 육아일기



  저는 돌이(아버지)라서 몸으로 아기를 못 낳고 마음으로 낳아요. 순이는 몸으로 아기를 낳습니다. 아기는 순이돌이가 마음하고 몸이 하나로 나아가는 사랑일 적에 이 별로 찾아듭니다. 아기는 사랑을 빛줄기라는 밥으로 삼아 태어납니다. 이따금 사랑 아닌 막짓(폭력)이 불거지며 태어나는 아기가 있다지만, 어버이 구실을 못하는 치가 엉터리에 멍텅구리라더라도 아기는 달라요. “태어난 아기”는 늘 눈부신 빛덩이예요. 제 곁에 빛덩이가 처음 찾아오고, 다음으로 찾아오고, 사이에 두 빛덩이가 몇 달 만에 숨을 거두어 나무 곁에 묻을 적에, 이 모든 살림길을 지켜보면서 “없는 틈을 내어 이 빛덩이하고 살아낸 하루를 그때그때 옮기자”고 다짐했어요. ‘틈’이란 “흐르도록 새로 내는 자리”입니다. “그럴 틈이 어디 있니?” 하고들 말하는데, 저는 “그럴 틈이 없으니, 새로 내지요.”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보살피는 나날을 보내며 ‘잠을 미루고, 몸을 안 쉬면서’ 살림노래(육아일기)를 날마다 적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너무 바쁘고 힘들어 이녁 삶을 손수 못 쓰셨기에, 온누리 모든 어머니가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살림하는 마음을 받아서, 제가 스스로 쓰려고 했습니다. 돌이도 순이도 스스로 어버이로 설 적에 아이가 웃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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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2021.12.8.

책하루, 책과 사귀다 74 100점



  아이를 어린배움터에 넣은 어버이는 여러모로 걱정투성이예요. 모름지기 배움터란 “배우는 곳”인데, 우리 삶터는 “배우는 터전으로 어우러지는 마을”로 가기보다는 “그다음 배움터를 디디면서 마침종이(졸업장)를 거머쥐어서, 나중에 스무 살이나 스물 몇 살 무렵에 돈을 잘 버는 서울(도시) 일자리를 얻는 발판”인 ‘학교’이거든요. ‘꿈그림’이 아닌 ‘앞으로 돈을 잘 벌까 걱정’을 하면서 아이를 배움터 아닌 학교에 넣다 보니, 이 아이가 ‘맞춤길·띄어쓰기·서울말(표준말)’을 잘 못하거나 자꾸 틀리면 그야말로 또 걱정을 하지요. 그렇다면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아이가 앞으로 스물이나 스물 몇 살이 되어 서울 일자리를 얻으러 나아가는 길에 꼭 모든 셈겨룸(시험)에서 ‘온빛(100점)’을 받아야 하는지 스스로 물어보셔요. ‘아흔아홉빛(99점)’이나 ‘아흔여덟빛(98점)’은 어떻습니까? ‘여든아홉빛(89점)’이나 ‘여든빛(80점)’은 어떻지요? ‘쉰빛(50점)’이나 ‘서른빛(30점)’이면 서운한가요? ‘빈빛(0점)’이면 아이가 싫은가요? ‘맞춤길·띄어쓰기·서울말’을 잘 갖추면 참 좋겠습니다만, 사랑은 아닙니다. 오늘은 모르거나 틀려도 아이가 즐겁게 사랑으로 가면 넉넉합니다. 앞으로 얼마든지 다 해내고 누립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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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73 책나이



  아이는 책을 손에 쥘 적에 오직 책을 바라봅니다. 아이는 어버이하고 눈을 마주할 적에 오로지 어버이 눈을 바라봅니다. 아이는 하늘하고 별을 볼 적에 그저 하늘하고 별을 바라봅니다. 아이는 이야기를 들을 적에 오롯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이는 혼자 놀거나 동무하고 놀거나 한결같이 놀이 하나에만 신나게 마음을 쏟습니다. 아이는 길을 걸을 적에 두 다리를 놀리고 온몸을 움직이는 바로 이곳을 듬뿍 누립니다. 아이는 책을 “누가 언제 썼고, 어느 곳에서 펴냈으며, 책값이 얼마이고, 책이 새것인지 헌것인지”를 하나도 안 봅니다. 그냥 책을 봅니다. 아이 눈빛은 왜 오롯이 사랑일까요? 아이 손길은 왜 언제나 노래요 웃음이자 춤짓일까요? 아이는 높고 낮음이나 옳고 그름을 안 가립니다. 바로 마음으로 파고들거나 스며들어서 동무하는 눈빛이 되지요. 우리 어른은 마음읽기를 잊거나 잃었지 싶습니다. 책을 읽으며 이야기를 느끼고 마음을 헤아려 스스로 새롭게 피어나는 사랑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 책이 “어느 해에 나왔는가”도 “누가 썼는지”도 “어느 곳에서 펴냈는지”도 굳이 볼 일이 없어요. 겉모습이나 겉이름을 치워야 속빛하고 속사랑을 만납니다. 책을 책으로 마주하자면 아이다운 눈빛이요 손길일 노릇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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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72 알기 앞서



  알았기 때문에 “알기 앞서”를 생각합니다. 알지 않았으면 “알기 앞서”가 없습니다. 모르던 때에는 늘 “모르는 오늘하고 어제”만 있을 뿐 “모르기 앞서”조차 없어요. 다만 “모르기 앞서”라 한다면, 모르는 줄조차 모르던 때라면, 아직 이곳에 태어나지 않고서 푸른별을 떠도는 조그마한 빛씨앗이라고 하겠지요. 알았기 때문에 “알기 앞서”가 있고, “알기 앞서·알고 나서”가 나란히 있는 터라, 어느덧 한 뼘이 자란 마음을 마주할 만합니다. 무언가 알아낸 우리는 “알았기 때문에 예전처럼 안 하기”도 하지만 “알았기 때문에 예전처럼 새롭게 하기”도 합니다. “알았기 때문에 알기 앞서처럼 군다면 어떻게 새길이 나는가를 미리 어림”하기도 하는데, 알기 앞서처럼 굴더라도 오늘과 똑같은 길을 가지는 않더군요. 몰랐어도 알았어도 우리가 나아가는 삶이라는 길은 늘 달라요. “알기 앞서로 돌아가지 못하는 줄 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알기 앞서로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는 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늘 마음에 따라 다르고, 마음에 심는 생각에 따라 다르니까요. 아이가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면서도 씩씩하게 자라는 하루를 늘 지켜보노라니, “알다·알기 앞서·모르다”는 모두 우리 스스로 친 그물이더군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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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71 눈길



  우리는 늘 ‘눈길(관점)’을 읽는구나 싶습니다. ‘우리 눈’으로 ‘이웃 눈’을 읽고, ‘이 눈’으로 ‘하늘과 바람과 땅과 비와 흙과 풀꽃나무와 숲과 바다가 흐르는 눈’을 읽는구나 싶어요. 우리 눈으로 이웃 눈을 읽기 마련이라, 글이든 책이든 ‘글쓴이·책쓴이 눈길·눈썰미·눈빛’이 흐르지 않는다면 어쩐지 밍밍하거나 밋밋하다고 느끼지 싶어요. 또는 눈속임이나 눈가림을 한다고 느낄 테고, 뭔가 거짓말을 하거나 겉치레로 고물을 챙기려는 셈속이 있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글 한 줄을 쓰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우리 눈빛을 밝히거나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리부터 뭔가 스스로 감추거나 숨기려는 뜻이라고 느껴요. 반가우니 반갑다고 말하고, 아름다우니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속낯까지 못 들여다본 눈길이더라도, 우리가 때때로 겉낯에 휩쓸려 엉성하거나 엉터리로 바라보았더라도, 오늘 이곳에서 우리 눈망울을 스스럼없이 밝히고 나누기에 참을 깨닫고 거짓을 알아채면서 우리 속마음을 즐겁고 슬기로이 가꿀 만하지 싶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릴 글이나 책이 아닌, 눈빛을 나누고 눈길을 헤아리면서 눈결을 가꾸려는 마음으로 마주하는 글 한 줄이요 책 한 자락이지 싶습니다. 이웃 눈길을 읽는 사이 우리 눈길이 자라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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