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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있는 교실 - 돼지 P짱과 32명의 아이들이 함께 한 생명수업 900일
쿠로다 야스후미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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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을 길러 목숨을 먹으며 살아간다
 [푸른책과 함께 살기 76] 쿠로다 야스후미, 《돼지가 있는 교실》(달팽이,2011)



- 책이름 : 돼지가 있는 교실
- 글 : 쿠로다 야스후미
- 옮긴이 : 김경인
- 펴낸곳 : 달팽이 (2011.4.27.)
- 책값 : 12000원



 (1) 말과 삶


 내가 쓰는 말마디가 얼마나 옳거나 바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온 지 아직 스무 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열아홉 살 적부터 내 말마디를 생각하면서 살았으니까, 나로서는 마흔 살을 접어들어야 비로소 내 말마디를 차분히 돌아보는 나날을 보냈다 여길 만합니다.

 내 말마디를 처음으로 돌아보던 지난날, 내가 쓴 글을 되읽으면서 내 말마디를 살폈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 말마디가 어떠한 줄을 못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글을 쓸 때에 입으로 소리를 내거나 마음속으로 중얼중얼 읊습니다. 글로만 쓰는 글이 아니라, 입으로 말하는 글입니다. 내 혀로 굴릴 만한 말마디가 아니라면 글로 쓸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렇듯 적바림한 글을 가만히 되읽으면서 그동안 말도 모르고 넋도 모르며 삶도 모른 채 살았구나 하고 하루하루 뼈아프게 깨닫습니다.

 그런데 열여덟 해씩이나 내 말마디를 돌아보거나 되짚으며 살았다지만, 아직까지 내 말마디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합니다. 가야 할 길은 한참 멀었고, 사랑해야 할 말은 영 어렴풋합니다.

 곰곰이 돌이킨다면, 고작 열여덟 해를 추슬렀다 해서 옳게 추스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누군가 아주 똑똑하거나 빼어난 사람이라면 열여덟 해가 아닌 열여덟 달 추스르더라도 훌륭히 추스른다 할 만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똑똑하거나 빼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금세 당신 삶과 넋과 말을 아름다이 추스른다 할 만한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 곤충도 뭔가를 먹음으로써 살아간다. 그런 당연한 진리조차 우리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는 돼지를 볼 기회가 평소에는 거의 없다. 동물원에 가도 멧돼지는 있어도 돼지가 있는 곳은 거의 없다. 하지만 슈퍼에 가면 돼지고기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 아이들은 슈퍼에 진열되어 있는 고기가 처음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니, 사진을 보면 무슨 동물인지 이름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없을 뿐이다 … 물과 소금의 생명 유무와 더불어, 화학조미료에 생명이 있을까 없을까 하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  (16, 22∼23, 101쪽)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나는 아주 낯간지럽구나 싶은 말마디가 책에 가득합니다. 이 책을 읽는 다른 분들은 이 책에 깃든 말마디를 어떻게 느낄까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책에 적힌 말마디’가 옳은지 그른지 바른지 어긋났는지를 모를 뿐 아니라 느끼지 않으니 그냥 줄거리만 죽 살피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한자로 된 말이 한국말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나날이 늘어나는 영어가 얼마나 한국말로 받아들일 만한지, 토씨 ‘-의’를 붙이거나 일본 말투 ‘-的’을 붙이는 일이 얼마나 어울리는지, 어설픈 번역 말투라든지 서양 말법에 흔들리지는 않나를 차분히 곱새기는 한국사람은 있기나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이 나라 말글을 제대로 안다 하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나 싶기까지 합니다. 예부터 이 겨레가 흙을 일구고 옷을 깁고 집을 짓고 하는 흐름과 삶을 송두리째 잃듯이, 예부터 이 겨레가 서로를 사랑하거나 아끼면서 나누던 말을 모조리 잃지는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살아 있는 돼지” 같은 말마디가 참 얄궂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살아 있는 돼지”뿐 아니라 “하지만”도 생각하지 못했고, “-까 하는 문제도 제기되었다”라든지 “뭔가를 먹음으로써” 같은 말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딱히 가르치는 사람이 없고, 국어사전을 읽는들 알 수 없으며, 한국 말법을 다루는 책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 말은 “산 돼지”이고, “그렇지만”이며, “-까 하고 궁금해 했다”인데다가, “뭔가를 먹으면서”입니다.


.. 교육에서는 아이의 눈높이에 서야 하고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런 말들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이 중요하다고들 하면서 사실은 교사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대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은 교사가 하고 싶은 일을 아이들의 입을 빌려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니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의견은 아이들이 말했다고 자주적이고, 교사가 말했다고 관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 의견이 모두에게 설득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173쪽)


 나도 나이를 먹고, 내 아이도 나이를 먹으며, 내 옆지기도 나이를 먹습니다. 나는 나이를 먹는 만큼 더 생각이 깊거나 마음이 넓은 사람으로 살아가는가 돌아보지만, 그닥 생각이 깊어지지 못하고 마음이 넓어지지 못하는구나 싶어 부끄럽습니다. 스스로 착하게 살아간다면 걱정거리란 없습니다. 스스로 해맑게 살아간다면 근심거리란 없어요. 스스로 예쁘게 살아간다면 골칫거리 또한 없겠지요.

 2003년에 숨을 거둔 이오덕 선생님을 두 번 얼굴을 뵌 적이 있고, 한 번은 이오덕 선생님이 과천에 살던 아파트로 찾아갔습니다. 이때가 1998년인가 1999년이었지 싶은데, 두 시간에 걸쳐 꼼짝없이 아무 말을 못하며 이야기만 조곤조곤 들었습니다. 한창 스물다섯 즈음 된 젊은이가 한다는 ‘우리 말글 바로쓰기’에서 어설프거나 어리석은 대목을 넌지시 짚었기 때문에 아무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오덕 선생님은 이때에 나무라거나 꾸짖지 않았습니다. 그저 앞으로는 두 가지만 고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는 올해부터 생각나지 않고, 한 가지 떠오르는 대목은 ‘가끔씩’이나 ‘이따금씩’은 잘못 쓰는 겹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떠오르지 않으나, 그때에 말씀을 들은 뒤부터 곧장 바로잡았습니다. 이제는 잘 바로잡아서 쓰니까, 어떠한 말투를 내가 잘못 썼는지를 떠올리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늘 요 말투 조 말투 낱낱이 다독이면서 바로잡으며 살아가니까, 하나하나 남김없이 떠올릴 수는 없어요. 쌀을 씻든 털옷 빨래를 하든, 예전에는 이러저러하게 잘못 했지 하고 떠올리면서 일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안거나 달랠 때에 지난날에는 이러저러하게 어수룩하게 했지 하고 되새기면서 안거나 달랠 수 없어요. 내 부끄러운 발자취를 잊는다는 모습이 아니라, 부끄럽거나 못났던 멍텅구리에서 조금 덜 부끄럽거나 살짝 덜 못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사랑스레 살아갈 길을 헤아리면서, 날마다 더욱 사랑스러운 손길과 마음길이 되도록 힘쓸 때에 즐겁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당신 말마디를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늘 내뱉는 말마디를 아름답거나 착하거나 참다이 다독이지 않아요.

 나는 생각합니다. 스스로 진보를 외치든 보수를 외치든, 스스로 한나라당을 사랑한다 외치든 민주당을 사랑한다 외치든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을 사랑한다 외치든, 내가 날마다 쓰는 말마디를 옳게 들여다보며 제대로 가다듬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좋은’ 일과 어떤 ‘바른’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말이란 넋이고, 넋이란 삶입니다. 삶을 이루는 넋이며, 넋을 이루는 말이에요. 삶을 일구면서 넋을 일구고, 넋을 일구면서 말을 일굽니다. 말을 돌보면서 넋을 돌보고, 넋을 돌보는 동안 삶을 돌봅니다.

 가장 좋은 길은 진보도 보수도 중도도 아니라고 느낍니다. 가장 좋은 길은 그저 ‘가장 좋은’ 길입니다.

 내 아이를 사랑하는 길이란 말 그대로 ‘내 아이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내 아이한테 자가용이나 아파트를 사 줄 때에 내 아이를 사랑하는 길이 아니에요. 이때에는 아이한테 자가용이나 아파트를 사 주었을 뿐입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 준다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 주었을 뿐이지, 아이를 사랑하는 길은 아닙니다. 아이한테 밥을 떠먹였으면 아이한테 밥을 떠먹였을 뿐입니다.

 일은 일이고, 살림은 살림이며, 사랑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 사람들은 ‘한국사람으로서 늘 한국말을 쓰’면서 살아갑니다. 늘 한국말을 쓰지만 ‘한국말을 생각하면’서 한국말을 쓰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한국말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 뿐 아니라 ‘한국말을 사랑하면’서 쓰는 사람은 훨씬 드물어요.


.. 매일 아이들이 짊어지고 오는 책가방 속에는 교과서나 공책이 들어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미처 다 담을 수 없을 만큼의 생활이 빼곡하게 들어 있음을 실감한다 … 이번 회의에 학부모님이 참석하신 아이들은 부모님과 함께 나란히 앉도록 자리를 배치해 두었다. 학부모님의 이야기를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가끔은 힘들어 보이기도 했다. 마유코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모르겠어요.” ..  (21, 186쪽)


 맨 처음, 열여덟 해 앞서 열아홉 살이던 때에 막 ‘우리 말글을 사랑하자’고 다짐하던 때에는 이오덕 선생님이 쓴 ‘우리 글 바로쓰기’가 퍽 해묵었다고 여겼습니다. 좀 고리타분하다고 여겼습니다. 나중에 이오덕 선생님을 한 번 뵙고, 숱한 책을 낱낱이 읽으며, 이오덕 선생님이 남긴 글과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는 동안, 당신 삶과 넋과 말이 하나도 해묵거나 고리타분하지 않다고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당신한테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걸었으며,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했을 뿐 아니라, 당신 뒷사람이 해야 할 몫을 애써 당신이 도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뒷사람이 즐거우며 기쁘게 할 일이 무엇이라고 똑똑히 밝히면서 이러한 자리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말과 넋과 삶이 하나되기란 어렵다 할는지 모르는데, 지식인으로 살아가면서 말과 넋과 삶이 하나되기란 어려울 뿐입니다. 집살림을 일구거나 흙살림을 일구면서 내 보금자리를 내 손으로 땀흘리며 일구는 사람은 말과 넋과 삶이 하나되지 않고서는 아무런 살림을 일구지 못해요.


 (2) 꽃과 삶


 올해 들어 할미꽃을 못 보았습니다. 지난여름에 식구들이 인천 골목동네를 떠나 멧골자락 작은 집으로 옮긴 뒤로 품은 꿈 가운데 하나는, 새로 맞이할 봄철에 멧골짝 할미꽃을 기쁘게 만나면 좋겠다였습니다. 이모저모 일거리가 많기도 했고, 집일에 치이면서 짬을 못 냈다고 할 테지만, 할미꽃 없이 봄을 맞이한 이 찜찜하고 서운한 시골살이란 참 슬픕니다.

 그러나, 할미꽃이야 못 볼 수 있지요. 나는 우리 집에서 옆지기와 아이하고 살아가면서 웃음꽃이나 눈물꽃을 볼 수 있잖아요. 비록 들꽃과 멧꽃 예쁘장한 꽃망울을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이 작은 집에서 식구들하고 사랑꽃을 피울 수 있으면 좋은 나날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다만, 집에서 살림을 옳게 하고 사랑을 제대로 해야지요.


.. 이렇게 매일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남은 음식물을 모으다 보니, 학교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이 이렇게 많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요리하시는 분께 여쭸더니, 대충, 만든 요리의 10퍼센트는 남는다고 했다 … (돼지)우리를 만드는 데 큰 힘을 발휘한 이번 자금은 아이들이 수집한 폐품을 팔아서 모은 돈인데, 그런 활동도 오랫동안 했다. 실제로 돼지를 키우기 위해서도 자금이 필요하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P짱이 갑자기 병이 났을 때였다 ..  (44, 81쪽)


 엊저녁 모과꽃을 처음으로 봅니다. 모과나무가 선 줄은 진작 알았으나, 늘 모과꽃은 지나쳤습니다. 아니, 모과꽃이 한창이던 때에 모과나무 앞을 지나간 적이 없지 않았나 싶고, 모과나무 앞을 지나갔어도 이 꽃이 모과꽃이었다고 깨닫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멧길을 오르내리며 늘 바라보는 나무입니다. 모과나무뿐 아니라 꿀밤나무이든 떡갈나무이든 단풍나무이든 두릅나무이든 감나무이든 벚나무이든 화살나무이든 느티나무이든 오얏나무이든 복숭아나무이든, 가만히 바라봅니다. 올봄에 우리 텃밭 가장자리에 심은 살구나무도 날마다 바라봅니다. 가느다란 막대기 같은 살구나무에 언제 잎이 돋을까 기다리고 기다리니 그제부터 드디어 잎이 돋습니다. 집 앞에 가지를 뻗는 감나무도 요 며칠 사이에 바야흐로 새잎을 냅니다. 모과나무도 새잎을 낸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모과나무는 잎을 낸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금세 꽃을 냅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잎을 낸 지 얼마 안 되었다지만, 풀이든 나무이든 저마다 알맞춤한 때에 꽃을 피웁니다. 들딸기는 지난달부터 진작에 하얀 꽃을 터뜨렸는데, 들딸기는 들판과 멧자락에 아직 푸른 잎새가 없던 때부터 일찌감치 잎을 냈습니다. 다른 풀보다 일찍 잎을 내고 나서 다른 풀보다 일찍 꽃을 냈습니다. 민들레도 냉이도 일찍 잎을 내고 일찍 꽃을 냅니다. 일찍 꽃을 낸 만큼 일찍 씨앗을 내지요. 4월 끝무렵에 한창 꽃을 피우던 단풍나무도 이제 단풍씨를 하나둘 냅니다. 5월 15일쯤 지나면 단풍씨는 후두둑후두둑 신나게 떨어지겠지요. 팔랑팔랑 춤을 추며 단풍씨가 흙으로 가려 하겠지요.

 꽃을 떨군 나무들은 짙은 잎을 뽐내며 싱그러이 자랍니다. 잎이 두툼해지면서 나무는 줄기가 굵어집니다. 사람들은 열매만 생각하지만, 나무는 열매가 아니라 나무 줄기를 생각합니다. 더 깊고 넓게 뿌리를 뻗어 나무를 버티며, 더 넓고 많이 잎을 내어 줄기를 굵힙니다. 나무는 열매를 내려고 사는 목숨이 아닙니다. 나무는 흙에 더 튼튼하고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며 기운차게 살아내려는 목숨입니다.


.. 하지만 이름도 지어 주지 않고 가축으로서 돼지를 학교에서 키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설령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역시 애완동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가축이라 생각하고 키우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역시 그 가축에게 정을 주었을 것이다 … 목축업을 하는 가정에서는 소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름이 붙여진 소가 적당한 크기로 성장하면 트럭에 실려 출하된다. 어른이니까 할 수 있을까? 일이니까 할 수 있을까? 어른은 어떤 마음으로 가축들을 출하시키고 있을까? 그리고 어린이는 왜 안 된단 말인가? 학교에서는 왜 안 된단 말인가? ..  (148∼149쪽)


 어제 낮과 저녁에 모과꽃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이렇게 어여쁜 빛깔로 꽃을 틔우는 모과나무인데, 왜 사람들은 모과 열매를 못생긴 녀석이라고 일컫는지 아리송합니다. 모과 열매를 능금처럼 썰어서 먹을 수 있다지만, 모과 열매는 썰어서 먹기보다는 단물이나 술에 재어 모과물이나 모과술로 즐기거나 따로 모과차로 마십니다. 모과 열매를 방에 가만히 두기만 해도 오래도록 모과 내음이 집안에 퍼집니다.

 빛고운 모과꽃은 결고운 열매를 맺습니다. 동그스름해야 사람 눈에는 예쁘장하게 보인다 할 만한지 모르겠으나, 나무한테는 자연한테는 새한테는 바람한테는 흙한테는 햇볕한테는 ‘동그스름한 꼴’이 가장 어여쁜 꼴이지 않습니다. 모든 나무는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모든 꽃과 열매 또한 생김새가 달라요.

 사람은 얼굴이나 몸매를 뜯어고치는 수슬을 하곤 합니다. ‘더 예뻐’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야 합니다. 얼굴이나 몸매를 뜯어고치는 수술이란 더 예뻐지는 수술이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하고 비슷하거나 똑같이 생기려는 마음’으로 하는 수술입니다.

 영화배우나 연예인 아무개를 닮은 얼굴이나 몸매라서 예쁘지 않습니다. 예쁜 얼굴이나 몸매는 마음속 깊거나 너른 밑바닥에서 솟아납니다. 사람들 가슴을 저미는 구성진 노래는 목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뱃속에서 솟구치는 소리입니다. 손가락 놀림으로도 기타나 피아노나 북이나 악기를 잘 켜거나 타거나 치거나 뜯는다 하겠지요. 그러나, 악기를 잘 켜거나 타거나 치거나 뜯는 사람은 손가락 놀림을 하지 않습니다. ‘손가락에 온 넋과 삶을 싣’습니다.

 삶으로 우러나오는 결 고운 노래예요. 삶으로 우러나오는 어여쁜 얼굴이에요.


.. 쉬는 날 먹이를 주러 가는 것은 귀찮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가지 않으면 P짱은 굶어야 한다. 그런 갈등 속에서 아이들은 동물을 키우는 데 필요한 책임감을 배워 가고 있었다. 동물을 키우는 데 쉬는 날은 있을 수 없다 …드디어 P짱의 먹이주기를 3학년에게 가르칠 때가 왔다. 지금까지 조금 느슨해져 있던 6학년 2반 아이들도 가르치는 입장이 되자 역시 표정부터가 달라 보인다. 지금까지는 별 관심 없이 P짱을 보았던 3학년 1반 아이들도 P짱을 가까이에서 실제로 보게 되자, 자기들보다 몇 배는 큰 P짱의 덩치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6학년 2반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 냄새도, 3학년 아이들에게는 지독한 냄새로 다가왔다 … 미리 먹이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학급에서 내놓은 냄비를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남은 음식물을 모아야만 했다. 먹이를 가지러 가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우리 안의 물을 바꿔 주고 똥을 치우고 흙을 갈아 주고 하면서 우리 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었다 ..  (48, 167∼168쪽)


 나는 우리 아이가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가 스스럼없이 뛰거나 놀거나 잠들거나 말할 때에 비로소 예쁘다고 느낍니다. 누구 앞에서 재주를 부리거나 재롱을 떨어야 예쁜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 스스로 제 삶결을 아끼거나 좋아하면서 마음껏 뛰거나 놀거나 잠들거나 말할 때에 참으로 예쁜 아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오얏꽃 흐드러진 오얏나무 앞에 서면 오얏 내음이 내 몸을 감쌉니다. 복숭아나무 흐드러진 복숭아나무 옆에 서면 복숭아 내음이 내 몸을 감돕니다. 보리둑 하얀 꽃망울이 흐드러진 보리둑나무 둘레에 서면 보리둑 내음이 내 몸을 휘감습니다.

 빌딩 숲에서는 빌딩 내음이 나를 감싸겠지요. 자동차 물결 사이에서는 자동차 내음이 나를 감돌겠지요. 양복을 빼입은 공무원이나 회사원 둘레에서는 양복 내음이 내 몸을 휘감겠지요.

 내 삶터는 내 마음터이고 내 말터입니다.


 (3) 아이와 삶


 이야기책 《돼지가 있는 교실》(달팽이,2011)을 읽습니다. 《돼지가 있는 교실》을 다 읽고 나서, 이 작품으로 빚은 영화 〈P짱은 내 친구〉가 한국말 판으로 나왔는가 살펴보는데,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쉽다고 해야 할는지,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이들이 6학년이 될 때까지 ‘고기돼지’를 알뜰히 돌보고 키우는 이야기가 수수하게 나온다 하는데,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아이들은 ‘귀염둥이 짐승’이 아닌 ‘고기돼지’를 돌보며 키웠지만, 어찌 되었든 고기돼지는 고기돼지인데, 아이들은 고기돼지를 키우더라도 귀염둥이 짐승을 기른 셈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머나먼 옛날부터 집에서 짐승을 기른다 할 때에는 나중에 잡아먹겠다는 마음으로 기릅니다. 닭을 기르든 염소를 기르든 개를 기르든, 나중에 고기로 먹을 만한 짐승을 기릅니다. 사랑스레 기른 소가 늙거나 아파서 죽었을 때에 고기로 안 먹고 땅에 묻었다는 이야기를 더러 듣기도 하지만, 나와 내 집에서 못 먹으면 이웃집에 주어 먹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문명인이 되어서인지 도시사람이 되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짐승을 기르건 푸나무를 기르건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 목숨을 건사하려’고 기르는데, ‘먹으려고 흙을 일구거나 짐승을 기르는’ 줄을 쉬 잊고 맙니다. 내가 살려고 볍씨를 심어 벼를 돌본 다음 벼를 거두어 쌀을 얻어 밥을 합니다. 돼지와 소와 개만 목숨이 아니라, 벼와 보리와 상추와 쑥갓과 배추도 목숨입니다. 토마토주스이든 사과주스이든 토마토와 사과라는 목숨에서 얻지, 화학조합식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숨을 마십니다. 늘 마시는 물도 목숨이고 바람도 목숨이에요. 목숨 아닌 것을 먹으면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 자연히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가정의 아이들 비율도 줄어들었다. 여름에는 에어컨이, 겨울에는 히터가 틀어진 방에서 지내는 생활스타일이 아이들에게 당연한 것이 되었다. 자연에 둘러싸인 지역에 살면서도,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은 아이들 주변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등하교길에는 풀과 나무와 논과 밭 같은 자연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곤충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 나는 “그럼 아스팔트 밑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요시노부는 아스팔트 밑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요시노부의 말처럼 흙을 밟고 사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다 ..  (16, 109쪽)


 이야기책 《돼지가 있는 교실》은 일본 오사카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새내기 교사와 어린 아이들이 돼지 한 마리를 놓고 900일에 걸쳐 함께 지낸 발자취를 담습니다. 목숨을 아끼는 마음을 다스리자면서 학급마다 짐승을 한 가지씩 기르기로 했다고 할 때에, 오사카 새내기 교사는 ‘돼지를 기르자’ 하고 얘기했고, 참말 돼지를 장만해서 기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이든 일본이든, 기를 수 있는 돼지란 ‘고기로 먹을 수 있도록 품종을 바꾼’ 돼지입니다. 여섯 달 만에 살이 디룩디룩 쪄서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을 웃돌도록 하는 고기돼지만 사서 기를 수 있습니다. 더 빨리 살이 찌고, 더 적은 밥(사료)을 먹여도 되는 고기돼지가 되도록 과학자(농학자와 생물학자)가 머리를 맞대었습니다. 유전공학이란 이러하니까요. 가만히 살피면, 사람들이 오늘날 먹는 곡식 또한 알곡이 더 알뜰히 여무는 씨앗을 갈무리해서 더 심고 북돋우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꼭 과학이 아니더라도 더 맛나게 많이 먹을 수 있도록 사람 손으로 곡식이며 짐승이며 ‘품종 고치기’를 합니다. 나귀도 노새도 품종을 바꾸거나 고쳤습니다. 고기도 고기라지만, 송아지는 어미소한테서 젖을 얻어먹지 못해요. 어미소한테서 얻는 젖은 오직 사람만 먹습니다. 송아지는 그저 사료만 먹으면서 큽니다.

 《돼지가 있는 교실》 끝마무리에서 담임 교사는 돼지를 더 키우지 않고 잡기로 합니다. 아이들은 돼지를 3학년 동생한테 물려주고 학교를 마치겠다며 기나긴 이야기 끝에 마무리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 마무리를 가볍게 뒤엎습니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가 아니라 할 만하고, 교육 또한 아니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민주주의라 할 만하며, 어찌 보니 교육이라 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다수결이든 만장일치이든 어린이회의이든 민주주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도나 결정이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아이들이 회의를 열어 ‘우리도 선생님하고 똑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를 다니기로 했어요!’ 하고 말할 때에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일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우리도 선생님하고 똑같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겠어요!’ 하고 말할 때에 그대로 받아들이면 민주주의가 될까요. 국가보안법이나 한미자유무역협정 같은 법과 제도를 정부가 다루는 모습을 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는 까닭하고 한동아리입니다. 아이들이 세 해에 걸쳐 아끼고 사랑한 돼지를 동생한테 물려주어 아끼고 사랑하도록 하는 일이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이 돼지한테 먹이를 주고 돼지를 씻기고 돼지집을 치우는 일이란 더없이 훌륭합니다.

 그러면, 돼지를 왜 키울까요.


..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서는 수많은 동물들이 가축으로 사육되고 있다. 그 동물들이 있어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 내가 지금까지 받아 온 교육에서 죽음에 대해 전혀 배우지 않았다 … 식육센터 견학 후에 쓴 아이들의 감상문에는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고도 남을 만큼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  (25, 37, 125쪽)


 사람은 누구나 밥을 먹습니다. 하루에 한 끼니를 먹건 네 끼니를 먹건, 누구나 밥을 먹습니다. 밥을 먹으려면 흙을 일구어야 합니다. 내가 내 손으로 흙을 일구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흙을 일구어 얻은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를 장만해야 합니다.

 배나무를 배꽃이 예쁘대서 배꽃이 안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알뜰히 돌보았대서 벼를 안 베고 누런 들판이 되도록 지켜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심어 거둔 콩이 예뻐서 콩을 안 먹고 책상에 올려놓고 모셔 두어도 될 만할까 모르겠습니다.

 자전거를 장만했으면 타야 합니다. 내가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해서 넘어지면 자전거가 다칠까 봐 안 탈 수 없습니다. 비오는 날에는 자전거에 흙탕이 튈까 봐, 바람 부는 날에는 자전거 체인에 먼지가 낄까 봐, 다른 날에는 또 이런저런 까닭 때문에 자전거를 안 타고 집에 모셔 둘 수 없습니다.

 새로 마련한 젓가락이나 밥그릇은 신나게 써야 합니다. 잘 닦아서 말려야 합니다. 예쁘장한 밥그릇이니까 밥을 안 담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수 없습니다. 예쁘다 싶어 장만한 옷이니 예쁘게 입고 돌아다니다가는 즐겁게 빨아서 말린 다음에 다시 입어야 합니다. 예쁜 옷이니 그냥 옷걸이에 걸어 둘 수 없습니다.


.. 아이들은 인생의 목표이자, 그리고 마침내는 뛰어넘어야만 하는 존재인 부모님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 P짱 때도 사실읕 텔레비전에 방송되지 않은, 길고도 단조로운 하루하루를 아이들과 함께 담담하게 지내 왔던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이벤트나 이슈는 그 실천을 화려하게 꾸며 주는 효과는 있지만, 그보다는 소박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바라보는 시점이 중요하지 않을까? ..  (190, 244∼245쪽)


 어른들은 살아갑니다. 아이들도 살아갑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키운다고 하지만,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또다른 목숨일 뿐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책이나 교과서로 배운다지만, 아이들은 책이나 교과서에 앞서 어른들 삶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아이들은 예쁜 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식물원에 가두어 놓고 예쁘게 구경하는 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너른 들판을 쏘다니는 싱그러운 목숨입니다. 아이들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기도 하고, 때로는 팔다리가 부러지기도 하는 가녀린 목숨입니다. 아이들은 제 가녀린 목숨을 스스로 건사하면서 씩씩하게 이 땅에 두 다리를 디딜 목숨입니다.

 어른들은 누구나 아이였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넘어지거나 까지거나 다치거나 울거나 웃으면서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던 목숨입니다.

 《돼지가 있는 교실》은 아무런 가르침(교훈)을 담지 않습니다. 그저, 한 사람 고운 목숨을 어버이한테서 고맙게 선물받아 꾸리는 나날을 어떻게 즐기거나 누릴 때에 아름답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줍니다. 교육책도 환경책도 아닌, 이야기책 《돼지가 있는 교실》이에요. 천천히 새기면서 읽고, 가만히 아로새기면서 마음에 담아, 내 삶을 내가 선 자리에서 알뜰살뜰 일구는 길동무로 삼을 수 있으면 참으로 기쁘겠습니다. (4344.5.1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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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2011.3.4 - 창간호
교육공동체벗 편집부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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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잡지 ‘우리교육’과 새 잡지 ‘오늘의 교육’
 [책읽기 삶읽기 57] 교육공동체벗 펴냄, 《오늘의 교육》 1호(2011년 3·4월)



 “진보적 교육 담론은 지금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어야 한다(8쪽).”는 이야기를 내걸며 새로 나오는 교육잡지 《오늘의 교육》 1호(2011년 3·4월)를 읽습니다. 교육잡지 《오늘의 교육》은 또다른 교육잡지 《우리교육》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아는 사람은 그닥 안 많고,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을 뿐더러, ‘진보적 대중지’라 하는 언론매체에서조차 이러한 이야기를 기사로 다루지 않았습니다만, ‘(주) 우리교육’이라는 출판사에서 ‘잡지 우리교육’이 더는 돈이 안 된다고 여겨 이 잡지를 ‘전교조 회원 기관지’로 바꾸려 하면서 잡지를 만들던 일꾼을 모두 쫓아낸(정리해고) 일이 있습니다.

 마땅한 일이지만, 정리해고는 대통령이나 공공기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커다란 회사에서만 하는 정리해고는 아닙니다. 노동조합에서도 정리해고를 할 만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라 해서 정리해고를 못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해고를 하는 나라’이니까, 이러한 나라에서 전교조 또한 ‘정리해고를 하는 권력’을 누렸을 뿐이라 할 만합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라 하더라도 돈이 안 되는 사업이라면 얼른 접어야 할 노릇일 테니까요. 교사 노동조합이든 아니든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샘솟을 까닭이 없으니까요. 그예 돈을 퍼붓기만 하는 잡지라 한다면 마땅히 그만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잡지 우리교육’이란 무엇이며, ‘(주) 우리교육’이란 또 무엇일까요.


.. 오늘날 대한민국의 인문계 고등학교는 사실상 ‘여관’이다. 교육 당국과 일선 학교 관리자들은 어쨌든 모든 아이들을 깨워서 수업 과정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을 것이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한 상태에서 교육행정을 펼쳐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그들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는 순간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되므로 그들은 이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 오늘날 아이들의 이러한 일탈과 저항을 학교는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익히 지켜보았다시피, 학교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그저, 학칙의 처벌 규정을 턱없이 강화하고, 자퇴나 전학을 권고하거나 퇴학시키거나 아니면 아이들을 학교 바깥 기관에 떠넘기는 것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다 ..  (17, 21쪽)


 “진보적 교육 담론”을 다루겠다는 새 교육잡지 《오늘의 교육》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진보적 교육 담론”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보적 교육 담론”이 아니라 “보수적 교육 소론”이라 하더라도 나쁘지 않다고 여깁니다.

 교육, 곧 ‘가르치거나 배우는’ 일이란 진보나 보수하고 아랑곳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보라서 더 좋은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보수라서 아주 나쁜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자그마치 쉰 해만에 새롭게 빛을 보는 교육소설 《인간의 벽》(이시카와 다쓰조 씀,양철북 펴냄,2011)을 읽을 때에도 곳곳에 나옵니다만, 1950년대에 일본 교직원노동조합인 일교조가 지키려 하는 배움터란 ‘진보 교사가 진보 학생을 일구는 배움터’가 아닙니다. 일교조 여느 교사들이 지키려 하던 배움터란 ‘참답고 착하며 아름다이 살아갈 올바른 사람으로 배우거나 가르칠’ 터전입니다.

 진보가 옳대서 진보라는 길을 갈 까닭이 없습니다. 옳은 길을 가다 보니 진보와 만날 수 있을 뿐입니다. 착하게 살아가다 보니, 이 삶이 진보와 만나기도 할 뿐입니다.

 페스탈로치이든 야누쉬 코르착이든 ‘진보 교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최현배이든 성내운이든 이오덕이든 ‘진보 교육’을 외친 적이 없습니다. 나라 안팎 훌륭한 교육자들은 한결같이 ‘옳은 배움길’을 이야기하고, ‘착한 배움길’을 온몸으로 살아냈습니다. 《이 여자 이숙의》(삼인 펴냄,2007)에 나오는 이숙의 님 또한 ‘진보’라는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페스탈로치와 야누쉬 코르착과 최현배와 성내운과 이오덕과 이숙의 어느 누구도 ‘민주 교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말마디, 그러니까 구호로 떠드는 민주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바르며 착하고 아름다이 살아내는 ‘참배움’만을 조용히 읊었습니다.


.. 전공과목을 가르치는 목적은 전공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습득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유로이 사고할 수 있겠는가. 물론 최근 학문은 대부분 영어권 국가가 주도하고 있고, 전공 용어를 한국어로 바꾸면 제대로 뜻이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게 강의를 영어로 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 카이스트에서 강의하는 대부분의 교수들은 학생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태도는 은연중에 드러나 왠지 이걸 물어 보면 바보 취급을 받을 것 같은 불안감을 갖게 하여 학생들이 자유롭게 질문을 던질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든다 ..  (119, 120쪽)


 나는 생각합니다. 옛 교육잡지 《우리교육》이든 새 교육잡지 《오늘의 교육》이든 ‘진보’도 ‘민주’도 ‘평화’도 ‘평등’도 말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잡지라 한다면, 말 그대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이야기를 말하면 넉넉합니다. 가르치거나 배우는 이야기는 입으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습니다. 교실 안쪽에서만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습니다. 살아내는 배움이고 살아가는 가르침일 뿐입니다.

 교사가 되든 어버이가 되든, 입으로 아무리 옳고 바른 소리를 읊는다 하더라도, 삶으로 고스란히 보여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어느 하나 옳고 바르게 배우지 못합니다. 옳고 바르다는 책을 천 권쯤 읽었기에 옳고 바르게 살아가겠습니까. 옳고 바른 책을 구백구십구 권쯤 읽었기에, 구백아흔여덟 권쯤 읽었기에, 구백아흔일곱 권쯤 읽었기에 …… 오백한 권쯤 읽었기에, 오백 권쯤 읽었기에, 사백아흔아홉 권쯤 읽었기에 …… 아흔아홉 권쯤 읽었기에, 아흔여덟 권쯤 읽었기에, 아흔일곱 권쯤 읽었기에 …… 다섯 권쯤 읽었기에, 네 권쯤 읽었기에, 세 권쯤 읽었기에, 옳고 바른 가르침과 배움을 ‘안다’거나 ‘산다’고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옳고 바르다는 책은 한 권조차 안 읽어도 됩니다. 나부터 옳고 바르게 살아가면 됩니다. 옳고 바르게 살아왔다는 훌륭한 교육밭 어르신을 아무도 몰라도 됩니다. 나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가면 됩니다.

 “진보 교육 담론”이든 “보수 교육 소론”이든 부질없습니다. 어떠한 목소리이든 아름답지 않습니다. 따스한 땀방울과 사랑스러운 손길과 믿음직한 눈동자이면 넉넉합니다. 왜냐하면 ‘가르침과 배움(교육)’이거든요.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한테는 더 많은 돈이 있으면 더 많은 물건을 사거나 더 큰 집을 장만해서 더 많은 놀잇감을 사들이며 더 넉넉히 누린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돈이 있더라도 참다운 사랑이 없으면 어떡하나요. 더 많은 물건을 사들여서 누린다지만 착한 손길이 없으면 어찌하나요. 더 큰 집에서 떵떵거리며 자가용 씽씽 몬다지만 고운 마음이 없으면 무슨 보람이 있나요.

 아이는 돈을 먹지 않습니다. 아이는 사랑을 먹습니다.

 어른도 돈을 먹지 못합니다. 어른도 사랑을 먹습니다.


.. 교대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대충’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대충’이다. 무엇을 이야기하든 “대충 해”라는 말이 돌아온다. 미술 과제가 재미있어서 “나 어제 미술 했어. 은근 재밌더라.”라고 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대충 해.”였고, 물리 과제가 너무 어려워 물어 봤을 때도 대답은 설명 대신 “대충 해.”였다. “이건 어떻게 할까?” “이건 뭐야?” “재미있지 않아?” “네 생각은 어때?” 이 모든 것의 대답은 대부분 “대충 해.”로 돌아왔다. 특히 과제를 할 땐 ‘대충’이 정석이었다. 잘하려고 너무 ‘오바’하지 말고, 과제도 아닌 것에 관심 갖는 그런 ‘오바’하지 말라는 얘기다 ..  (183쪽)


 나는 다시금 생각합니다. 옛 교육잡지 《우리교육》이 잘 안 팔리면서 빚을 자꾸 지고 말았다면, 옛 교육잡지인 《우리교육》 스스로 사랑을 잃거나 사랑하고 등돌리거나 사랑하고 멀어진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주식회사 우리교육은 ‘스스로 잃거나 버리거나 놓거나 등돌린 사랑’을 다시금 찾아서 북돋우도록 힘써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교육잡지를 빚으려 하는 분들이라면 무엇보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른(어버이·교사·이웃)’으로서 착한 사랑과 참다운 사랑과 고운 사랑을 되찾으면서 아끼는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없이 ‘담론’만 있으면, 사랑은 없는데 ‘진보’라는 옷만 걸치면, 사랑하고는 동떨어진 채 ‘교육’만 들먹인다면, 참배움도 참사랑도 참사람도 참말도 참나라도 참꿈도 참길도 이루어질 수는 없으리라 느낍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교육》이 지식조각에 얽매이는 잡지이기보다는 참말과 참사랑을 바탕으로 참배움과 참삶을 차근차근 보살피어 어루만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호에는 딱딱하거나 어려운 말로만 이루어진 지식조각 글이 너무 많습니다. (4344.5.8.해.ㅎㄲㅅㄱ)


― 오늘의 교육 1호(2011년 3·4월) (교육공동체벗 펴냄,2011.3.1./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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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마을 하진이 보리피리 이야기 8
박형진 지음 / 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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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어른이 되어 삶얘기를 들려줄 때에
 [책읽기 삶읽기 56] 박형진·박지훈, 《갯마을 하진이》(보리,2011)


 아이가 하루하루 자라며 어른이 됩니다. 아이일 때에는 동무들끼리 왁자지껄 떠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홀로 가슴에 묻으며 지내는 이야기가 있곤 합니다. 어른이 되어 글을 쓰는 일을 하다 보면, 어린 날 겪거나 살아낸 이야기를 적바림합니다. 따로 글을 쓰지 않더라도 내가 낳아 키우는 아이한테 내 어린 나날을 말로 들려주곤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로 살아가면서 저 살아가는 나날을 어른한테든 동무한테든 이야기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로 살아온 저 예전 나날을 아이한테든 어른 동무한테든 이야기합니다.

 문득 돌아보면, 아이들은 ‘아이로서 저희 어린 나날’을 이야기하는 일이 드뭅니다. 아이들은 ‘아이로서 저마다 보내는 오늘’을 이야기합니다. 어른들은 ‘어른으로서 저희 어른 나날’을 이야기하는 일이 드뭅니다. 어른들은 ‘어른이 되기 앞서 어리던 지난 나날’을 이야기합니다.

 왜 어른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한테 ‘어제를 살았던 이야기’만 들려주는가 아리송합니다. 왜 어른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하고 나누려 하지 못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른 누구나 어린이 나날을 보냈’으니까, ‘오늘 어린이로 살아가는 이들 앞’에서 ‘너희보다 먼저 그때를 겪은 만큼 어른 얘기를 귀담아들으’라는 뜻으로 당신들 옛이야기를 들려줄는지요. ‘난 이런 사람이야’ 하고 무언가를 뽐내려는 뜻이 될는지요. ‘너희는 이런 일 겪지 못했지? 너희는 이런 일 겪을 수도 없지?’ 하는 마음이 될는지요. ‘예전에는 이렇게 가난하며 힘들게 살았단다. 그러니 너희는 요즈음 얼마나 걱정없고 좋게 살아가는지 아니?’ 하는 넋이 될는지요.


.. 나는 이리저리 굽기만 하던 제비 다리를 영숙이한테 내밀었다. “싫어, 너 먹어. 나는 참새 고기도 먹기 싫은디…….” “야, 이리 줘! 내가 먹으께. 느들은 둘이 맨날 바지락만 캐다 처먹어라, 흐흐흐.” 용제가 짓궂게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  (59쪽)


 바닷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박형진 님이 쓴 《갯마을 하진이》를 읽습니다. 박형진 님이 당신 고향에서 보낸 어린 나날을 글 몇 자락으로 만납니다. 버스를 탈 때에 어떤 느낌이었는가를 헤아리고, 처음 새끼를 꼬던 느낌을 곱씹으며, 하나둘 사라지듯이 바닷마을을 떠나는 동무들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던 느낌을 생각합니다.

 새조개를 캐던 모습을 떠올리고, 고구마밥 말고는 없는 낮밥에 배를 곯다가는 웃 형님들한테 시달리는 동무를 걱정하는 마음을 살피며, 땔나무를 하다가 낫에 손가락이 베면 얼마나 아팠을까 하고 가눕니다.

 온통 쓸쓸하거나 허전하기만 하던 어린 나날이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나랑 너랑 하나도 다르지 않은 어린 나날을 함께 보내던 동무들이 복닥복닥하면서 쓸쓸함이나 허전함을 달랬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난한 어버이들만큼 가난한 아이들이고, 힘겨운 어버이들만큼 힘겨이 부대껴야 하는 아이들입니다.

 너른 바다와 함께 살아가지만 너른 바다 품을 고이 껴안기 힘든 살림입니다. 넉넉한 갯벌과 함께 살아숨쉬지만 넉넉한 갯벌 가슴을 살뜰히 부둥켜안기 벅찬 살림입니다.

 집집마다 아버지와 어머니 되는 분들은 바지런히 바닷일을 하고 갯일을 하며 밭일을 했을 텐데, 왜들 이렇게 고달프거나 고단해야 했을까요. 바다에서 애써 잡은 고기들을 내다 팔면서 왜 살림이 넉넉해지지 못하고, 갯벌에서 갯것을 캐서 내다 팔 때에 왜 살림이 펴지 못했을까요.

 글을 쓴 박형진 님 또한 ‘하얀 쌀밥이 맛나’고 ‘누런 보리밥은 맛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난날을 살던 어른들은 으레 이런 이야기를 오늘날 아이들한테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들은 ‘보리밥을 파는 밥집’에 따로 찾아가 퍽 비싼값을 치르면서 보리밥을 맛나게 사다 먹습니다. 돌이켜보면, 쌀밥을 먹든 보리밥을 먹든, 어린 나날 끼니를 안 굶거나 조금만 굶거나 때때로 굶는다 하더라도 밥을 먹을 수 있었다면 몹시 고마운 살림이라 할 만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밥을 먹으니 고마우면서 좋은 나날이지, 보리밥을 먹는대서 슬프거나 아쉬운 나날이지 않습니다. 쌀밥을 먹는대서 기쁘거나 좋은 나날이지 않습니다.

 글쓴이 어머님은 당신 언니가 조카들하고 혼자 사는 모습이 안쓰러워 “여그넌 없는 것잉께(18쪽)” 하고 말하면서 “마른오징어 스무 마리, 국물 새지 말라고 비료 포대에 싸서 고무줄로 묶은 황석어와 중하젓 한 자루, 참기름 한 병, 고사리와 취나물 뜯어 말린 것, 더덕 캔 것(16쪽)”을 풀어놓는다고 합니다. 가끔가끔 언니네에 찾아가서 이런 보퉁이를 풀어놓는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바닷마을에서 살아가며 쌀밥을 먹기를 바라는 일은 엉터리입니다. 바보라 할 테지요. 바닷마을에서는 바닷마을에 흔하거나 너른 먹을거리를 먹어야지요. 둘레가 온통 논뿐인 마을에서야 쌀밥을 먹는다 하지만, 쌀밥 말고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을 얻어서 먹을까요. 부자가 고깃국을 날마다 먹을까 모르겠습니다만, 고깃국을 날마다 먹든 자주 먹든 더 좋은 밥살림이 아니에요. 하얀 쌀밥을 마음껏 먹는대서 더 좋은 나날이나 살림이 되지 않아요. 밥 한 그릇을 받아들며 얼마나 고마우며 즐거운가를 느끼거나 나눌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나날입니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저는 어린 나날 쌀밥을 먹었는지 보리밥을 먹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만(아마 쌀밥을 먹었겠지요), 집에서 차려 주는 쌀밥은 언제나 ‘정부미 쌀밥’이었습니다. ‘일반미 쌀밥’은 명절 때에, 때로는 생일 때에 구경해 보았다고 떠오릅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어버이 두 분 다 살아서 밥을 얻어먹는다는 나날이 좋을 뿐입니다.

 그러나, 어버이 한 분이 안 계신다든지, 정부미 쌀밥도 버거워 잡곡밥만 먹는다든지 대수롭지 않습니다. 집에 어떤 슬픔이 있든, 저마다 어떤 아픔이 있든,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개구지게 얼크러지며 놀면서 하루하루 살아내며 무럭무럭 컸으니까요.


.. “불깡통 헐라고 내가 숨겨 논 깡통이 하나 있음게 너는 호멩이(호미)나 하나 갖고 와라, 너는 여잔게 니 호멩이 있잖여?” 용제가 말하며 영숙이를 보았다. “호멩이는 뭣 헐라고?” “호멩이가 있어야 바지락을 캐잖여?” ..  (51쪽)


 요즈음 아이들은 너나없이 자전거를 타며 놉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인라인이든 무어든 어렵잖이 얻어서 즐깁니다. 놀잇감이나 먹을거리로 근심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기도 할 테지만, 이와 맞물려 놀잇감이든 먹을거리이든 근심하는 아이들 또한 많겠지요. 도시이든 시골이든, 어느 한쪽에서는 자전거이든 스케이트이든 무어든 마음껏 누리면서 논다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어두운 땅밑 단칸방에서 쪼그리며 울는지 모릅니다. 어느 한쪽에서는 영어 그림책이니 영어 과외이니 한다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퍽 어린 나이부터 바깥일을 하면서 돈을 벌거나 집안일을 하면서 더 어린 동생을 돌볼는지 모릅니다.

 이야기책 《갯마을 하진이》라 한다면, 참말 ‘갯마을’에서 살아가는 하진이다운 어린 나날 이야기를 듬뿍 실어서 들려줄 때에 훨씬 나았겠다고 느낍니다. 또는, 굳이 어린 나날 이야기를 들추지 않아도 되니까, ‘어른 하진이’로 살아가는 기쁨과 보람을 조곤조곤 들려주어도 좋겠어요. ‘오늘을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또 ‘어제를 살아온 어린이’로서, 어른 삶과 어린이 삶을 차근차근 오가면서 두 나날이 당신한테 얼마나 아름답거나 기쁜 삶이며 보람인가를 들려주면 좋겠습니다.

 어린 나날 자취를 너무 성기게 담은 《갯마을 하진이》라고 느낍니다. 이것저것 온갖 이야기를 주워담는다 해서 좋은 이야기책이 되지 않아요. 다문 한 가지, 새조개를 잡는 이야기라든지, 미영을 감는 이야기라든지, 꼭 한 가지 이야기만을 훨씬 깊이 잡아채면서 옛날은 옛날대로 즐겁고 오늘날은 오늘날대로 즐거울 이야기로 엮는다면 좋겠어요. 이 이야기책을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갈 아이들한테 들려줄 생각’이라면,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가며 이 이야기책을 읽을 아이들 또한 스스럼없이 바닷마을로 찾아와 미영을 감거나 갯벌에서 뒹굴며 살아갈 기운을 낼 수 있게끔, 또는 도시에서만 복닥이더라도 도시라는 또다른 삶터를 사랑하고 아끼는 넋을 북돋울 수 있게끔, ‘어른 하진이’로서 남달리 보여주거나 들려줄 사랑과 믿음을 이 작은 책에 깃들일 노릇 아닌가 싶습니다.

 한 가지 덧붙여, 《갯마을 하진이》에 그림을 많이 넣었는데, 그림이 하나같이 그닥 사랑스럽거나 따스하거나 재미나거나 포근하지 못하구나 싶습니다. 아이들 얼굴이 모두 똑같습니다. 사내아이라 하든 계집아이라 하든 똑같아요. 게다가 ‘굶기를 밥먹듯이 했다’는 아이들 얼굴이며 몸이며 너무 포동포동합니다. 그림 빛깔 느낌은 퍽 보드라우면서 예쁘다 할 수 있습니다만, 싱그럽거나 시원스럽다고 느끼기 힘듭니다.

 아이들이 읽을 책에 그림을 많이 넣어도 좋습니다만, 제대로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면 굳이 많이 안 넣어도 됩니다. 아이들이 글을 읽으면서 생각날개를 펴도록 도울 만큼만 그림을 넣으면 됩니다. 더 많이 실을 그림보다는 이야기 한 꼭지에 그림 하나만 넣어도 되니까, 이야기 꼭지마다 ‘가장 깊이 살피며 가장 사랑스레 보여줄 모습’ 하나를 가장 살가우면서 맑고 싱그러이 담는다면 좋겠습니다. 1968년을 살던 ‘갯마을 하진이’ 그림이어야 할 텐데, 그림을 보아서는 1968년일는지 2008년일는지 2028년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그림마다 아이들한테 무엇을 느끼도록 이끌려는지 잘 읽히지 않습니다. 눈길이 머무는 그림이 아니라 마음길이 사랑스러워지는 그림을 담아야 비로소 ‘어린이책에 싣는 그림’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4344.5.3.불.ㅎㄲㅅㄱ)


― 갯마을 하진이 (박형진 글,박지훈 그림,보리 펴냄,2011.4.20./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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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벽 1 - 거대한 슬픔
이시카와 다쓰조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사람은 울타리를 세우지 않아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75] 이시카와 다쓰조, 《인간의 벽 (1)》(양철북,2011)



- 책이름 : 인간의 벽 1
- 글 : 이시카와 다쓰조
- 옮긴이 : 김욱
- 펴낸곳 : 양철북 (2011.3.30.)
- 책값 : 14000원



 (1) 사랑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이를 줄세우지 않습니다. 어버이로서 집에서건 교사로 학교에서건 아이를 줄세울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를 바라볼 때에 시험성적이 어떻다고 따지거나 무슨 좋은 재주가 있다거나 얼굴이 어떻게 예쁘다 하면서 줄세울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어른이라면 언제나 따스하면서 보드랍게 손을 내밀고 어깨동무를 합니다. 사랑하는 손길이기에 따스합니다. 사랑어린 몸짓이기에 보드랍습니다.

 누구나 사랑받을 때에 즐겁습니다. 누구나 사랑받지 못할 때에 괴롭습니다.

 누구라도 사랑할 때에 기쁩니다. 누구라도 사랑하지 못할 때에 갑갑합니다.

 아이한테든 어른한테든 삶을 잇도록 이끄는 힘은 사랑입니다. 밥그릇에 사랑을 담고, 말마디에 사랑을 담습니다. 눈빛에 사랑을 싣고, 손길에 사랑을 싣습니다. 때로는 회초리에도 사랑을 깃들일 수 있겠지요. 온몸 가득 사랑인 사람이라면 손에 무얼 쥐거나 놓더라도 사랑이 되겠지요. 온몸 가득 감싸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면 손에 김 모락모락 나는 밥그릇을 들었어도 차갑거나 메마릅니다. 돈이 없더라도 사랑이 있으면 배부르고, 돈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배고픕니다.


.. 아이들을 민주시민으로 키워 내려면 먼저 선생 자신이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 시노다 선생의 눈물은 오열로 바뀌었다. 더 따라 부르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을 더 아름답게, 밝게 살고 싶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 그것만이 행복이며 삶의 보람이다 … “선생 본인이 아이들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다면 결국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거든요.” ..  (120, 212∼213, 219쪽)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사람이 사랑을 나눕니다.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나 사랑을 못 나누는 사람이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나눔이란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는 일이란 서로를 꾸밈없이 받아들이며 아낌없이 돌볼 수 있는 매무새입니다. 틀에 가두지 않을 뿐더러 틀에 갇히지 않는 사랑입니다. 좋은 길이니까 어서 오라 부르지만, 좋은 길이니까 억지로 밀어넣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착한 길입니다. 착하지 않으면서 사랑길을 걷지 못합니다. 사랑길을 걷는데 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길은 착하게 일구며 즐기는 어여쁜 내 삶길인 셈입니다.

 사랑하기에 착하고, 착하기에 바릅니다. 바르기에 따뜻하며, 따뜻한 만큼 넉넉합니다. 넉넉한 흐름으로 보드라운 결과 무늬를 아끼고, 보드라이 아낄 줄 알면서 신나게 즐기거나 나눕니다.

 지식을 가르치려는 교과서만 있는 학교라면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고, 지식은 사랑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식을 다스리거나 익혀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채 지식을 다스리거나 익힐 때에는 슬픕니다. 사랑하고 살아갈 동무랑 이웃이랑 살붙이를 헤아리면서 다스리거나 익힐 지식입니다. 내 밥그릇을 키우거나 단단히 거머쥐려고 다스리거나 익힐 지식이 아닙니다.


.. 수신 과목이 사라지고 도덕이라는 독립된 학과도 없지만 선생들은 굳이 그런 과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과서였다 … “요즘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얘기는 오늘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수없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부모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그 아이가 훌륭하게 자란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개성이 부족한 아이일수록 시키는 일은 잘합니다 … 시키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 혼자서는 생각할 줄도 모르는 사람, 개성도 없고 신념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키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모나 선생이 시키는 건 무조건 해야 한다고 가르치면 아이들은 커서 그런 사람이 되고 말 겁니다.” … 이 사람은 월급 때문에 일하는 선생이 아니다. 직업이니까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선생이 아니다. 교육의 참된 의미를 알기에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안으려고 한다 … 교육을 걱정하는 사와다 선생의 열정은 지금 이 교무실에서는 오히려 고독하게 느껴졌다. 동료 교사들에게서 외떨어져 자기 혼자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였다 ..  (118, 227, 327, 330쪽)


 사랑으로 가득한데 돈이 없어 쪼들린다면 퍽 힘들 만합니다. 그래요, 퍽 힘들 테지요. 그렇지만, 힘든 살림살이를 견디거나 버티거나 이기거나 받아들이는 기운은 사랑입니다. 돈이 더 있거나 돈이 넘치기 때문에 즐거운 삶이 되지 않아요. 돈이 더 있거나 돈이 넘칠 때에는 사랑을 잊습니다. 돈에 따라 흐르는 삶이 될 때에는 사랑이란 하찮거나 보잘것없습니다. 말 그대로 돈이 좋은 나날일 테니까요.

 돈이야 벌면 됩니다. 돈이야 얻으면 됩니다. 돈을 생각하기 앞서 내가 오늘 아침에 일어난 보금자리에서 누구하고 어떻게 새 하루를 보낼까 하는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할 사람을 생각하고, 내가 사랑할 사람이 짊어지거나 느끼거나 품에 안은 여러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한테 가장 모자란 곳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가장 힘들거나 가장 바라는 대목이 무엇인가를 돌아봅니다.

 천천히 천천히 길을 걷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길을 걸어, 내가 걷는 이 길에 무엇이 있고, 내가 걷는 이 길을 따라 어떤 삶이 있는지를 헤아립니다. 찬찬히 찬찬히 등허리를 주무르고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아픈 이한테 도움이가 되고 튼튼한 이한테 길동무가 됩니다.

 믿고 맡길 수 있도록 나부터 믿습니다. 믿고 손을 내밀 수 있게끔 나부터 믿으면서 손을 내밉니다. 믿고 가만히 바라볼 수 있도록 나부터 믿으면서 가만히 바라봅니다. 믿고 이야기할 수 있게끔 나부터 사랑스레 믿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 교사가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 아이들의 인격이 달라진다. 위험하고도 무서운 이야기다. 그런데 학부모들은 이 같은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만큼 학교와 교사를 믿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게으르기 때문이다 … 현재의 학교 제도에서는 이 아이를 다른 아이들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아이에게 매달리는 것이 선생의 마음이다 … 선생은 사랑이 아이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아이의 변화된 마음이 아이의 행동을 새롭게 이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도덕교육이 아닐까 … “그럴까요?” 시노다 선생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이 사람은 아이를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아이들 마음속에 추함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질투심도, 허영심도, 교활함도 있다. 그러나 아이의 마음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느냐, 추함을 발견하느냐 하는 것은 교육자와 비교육자를 구분하는 오직 하나뿐인 근거다 ..  (217, 325, 340, 341∼342쪽)


 저쪽에서 내 뒷통수를 후려갈기는데 내가 얌전히 참을 수 있겠느냐 할 만합니다. 저쪽에서 내 발을 밟고는 아무 거리낌이 없는데 내가 뿔이 안 날 수 있겠느냐 할 만합니다. 저쪽에서 자꾸 딴죽을 걸거나 가로막는데 내가 골이 안 나겠느냐 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하면서 살아갈 노릇입니다. 사랑을 하고 싶으면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노릇입니다. 생각을 하자면 내 몸을 움직여 내 삶을 건사할 노릇입니다.

 가는 말이 곱다지만 오는 말은 안 고울 수 있습니다. 가는 말이 곱지 않은데 오는 말만 곱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어찌 되든 가는 말이 고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는 말이 고울 때에만 가는 말을 곱게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 안 따라 준대서 아이들한테 윽박지르는 사람이라면 교사라 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어버이 말을 잘 안 듣는대서 아이들을 나무라거나 손찌검하는 사람이라면 어버이라 하기 힘듭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리거나 작거나 아프거나 다친 가슴을 들여다보아야 교사요 어버이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며 차츰 단단해지거나 슬기롭게 거듭나거나 아픔이 여물기를 바라는 마음결로 아이들을 보드라이 어루만져야 할 교사요 어버이예요.


.. 이 그림에는 ‘우’를 주고, 저 그림에는 ‘양’을 준다. 과연 이런 평가가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미술 전람회에 출품하는 작품이 아니다 … 담임선생이라면 이 그림에 점수를 매기기 전에 학생이 행복하지 않은 까닭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학생의 마음을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점수를 매기는 것 따위는 교육이 아니다. 58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우등생과 열등생으로 구별하는 것은 교육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 시노다 후미코는 50∼60장이 되는 그림을 앞에 두고 어떻게 채점해야 할지 당황하고 있다. 기계처럼 우열을 정하는 것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채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학교는 교사에게 아이들을 채점하라고 명령한다. 교사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의 마음을 ‘우’와 ‘양’으로 구별한다. 월급을 받는 ‘피사용인’의 숙명이다 ..  (185, 187, 191∼192쪽)


 누구한테든 따로 교과서로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학교에는 굳이 교과서나 교재가 없어도 됩니다. 온누리 모든 사람과 흙과 나무와 바람과 햇볕이 교과서이고 교재이며 책입니다.

 봄날 햇볕은 수우미양가로 나뉘지 않습니다. 겨울날 찬바람은 가양미우수로 가르지 않습니다. 입맞춤을 수우미양가로 살필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스러운 마음결과 손길과 눈길은 가도 양도 미도 우도 수도 아닙니다. 그저 사랑스러운 마음결이거나 손길이거나 눈길입니다.

 우리 집 아이는 언제나 우리 집 아이입니다. 우리 학교 아이는 노상 우리 학교 아이입니다. 저마다 고운 아이요, 누구나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하나하나 착한 삶이요, 모두 고마운 목숨입니다. 아이들이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사랑을 즐기고 사랑을 나눌 씩씩한 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거나 도울 어른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제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를 숫자나 점수로 따지거나 재지 않도록, 오직 사랑으로 바라보며 믿음으로 얼싸안도록 이끌거나 도울 어른으로 지내야 합니다.

 지식을 가르칠 어른이 아니라 사랑을 가르치며 삶을 나눌 어른입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며 갖출 지식을 아이들 스스로 깨닫도록 보드라이 알려주거나 물려줄 어른입니다. 가르쳐야 한다면 사랑스러운 삶 한 가지입니다. 배워야 한다면 믿음직한 꿈 한 가지입니다.


 (2) 울타리


 울타리가 높은 곳이라면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울타리가 있어야 하느냐 없어야 하느냐가 아닙니다. 울타리가 높은 곳에서는 숨이 막힙니다.

 멀디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멀디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밥을 먹고 살림을 꾸리며 지냈습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람이 있건 없건 저마다 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제 삶터를 돌보았습니다. 대한민국·조선·고려·신라·백제·고구려·가야라는 이름에 앞서 사람들이 살았고, 저마다 제 살림살이를 조용히 일구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들은 땅바닥에 금을 긋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땅이고 저기부터는 너희 땅이라고 금을 긋습니다. 그러나 풀·나무·짐승·물·햇볕·바람은 금으로 그어 나눌 수 없습니다. 두루미는 한국에만 살지 않고 일본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백두산부터 이어졌다는 멧줄기는 휴전선이 있대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남북녘에만 백두산 멧줄기가 아니라, 중국땅으로도 이어지는 백두산 멧줄기입니다.

 햇볕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똑같이 내리쬡니다. 바닷물은 이곳에서든 저곳에서든 같은 바닷물입니다. 음성군과 진천군 사이, 서울시와 인천시 사이, 제주시와 서귀포시 사이, 길그림책에는 금이 또렷하게 갈린 사이사이에는 무엇이 있으려나요. 벽이나 울타리 하나로 마주한 이웃집하고 우리 집은 사이에 무엇이 있으려나요.


.. 게으르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선생이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은 1년 동안 재난을 겪는다. 그 재난이 평생토록 아이들의 인생을 따라다닐 수도 있다 … 교사와 학생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과정이야말로 지식과 사물을 공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그 마음의 교류 없이 초등학교 교육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일본의 군대에 도덕 같은 건 없었습니다. 물론 질서는 있었지요. 강제적이고 계급적인 질서는 있었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은 없었습니다.” … “당신은 원래 중학교 선생이잖아요.” “그게 뭐.” “요즘엔 아무리 봐도 선생 같지가 않아요.” … “당신은 진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마음이 없어요. 당신이 말하는 조합은 선생들의 조합 아닌가요? 당신은 이미 선생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이 위원장이 되겠다고요?” … 이 남자에게는 이기심만 있을 뿐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없다. 애정만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견뎌 냈을지도 모른다. 겐이치로는 부정한 마음 같은 것이 있다 ..  (107, 183∼184, 231, 315, 316쪽)


 예나 이제나 정부란 부질없습니다. 어떠한 사람이건 어느 살림집이건 돈을 더 많이 벌어들여 집안에 쟁여 놓을 때에 즐거운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집식구가 즐거이 밥을 먹고 즐거이 하루하루 맞이하지 못한다면, 엄청나게 쌓은 돈이건 오십만 원 즈음 쌓은 돈이건 똑같이 덧없습니다. 정부가 정책을 잘 꾸린대서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정부는 여느 사람들이 보태는 돈으로 먹고사는 무리이지, 정부가 여느 사람들을 먹여살리지 않습니다. 여느 사람들이 이룬 돈으로 길을 닦든 공항을 만들든 군대를 키우든 경찰을 두든 합니다. 여느 사람들이 흙을 일구어 거둔 곡식으로 대통령이 밥을 먹든 군인이 밥을 먹든 공무원이 밥을 먹든 합니다.

 공무원이 없어도 나라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공무원이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없대서 민주주의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느 농사꾼이나 여느 노동자가 없을 때에 나라 또한 없어집니다. 여느 농사꾼이나 여느 노동자가 없다면 민주주의란 싹트지 않습니다.

 투표권이 민주주의이지 않습니다. 다수결이든 만장일치이든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란 나 스스로 일구는 내 살림살이입니다. 내 논밭을 알차게 일구는 삶이 민주주의입니다. 내 보금자리를 깨끗하게 돌보는 삶이 정치입니다.

 지역자치란 마을자치입니다. 지역 스스로 살림을 꾸린다는 얘기는 마을 스스로 살림을 꾸린다는 얘기입니다. 마을 스스로 살림을 꾸린다 할 때에는, 마을 지도자가 있어 슬기롭게 이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마을을 이루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집에서 저마다 다 다른 길로 저마다 다 다르게 착하며 사랑스러이 살림을 일군다는 뜻입니다. 지도자이고 공무원이고 정부이고 대통령이고 하나도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대수로운 한 가지라면, 나 스스로 내 살림을 얼마나 알차고 아름다이 일구면서 내 하루를 사랑하느냐입니다. 내 집이 평화요 평등이요 통일이요 민주요 꿈이면 됩니다.


.. 가난한 집 아이를 위해 나라에서 대신 교과서를 사 주겠다는 법률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교과서를 사 줬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 보지 못했다 … 마음 놓고 교과서를 살 수 없는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국가는 의무교육을 강요하고 있다 … “초등학교에서는 야간 수업이 허용되지 않아요.” “정식으로 허용되지 않지만 특별한 사정이 있는 아이들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법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졸업장은 못 받아요.” 교장이 다시 말했다. “졸업장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배울 기회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어른으로 자라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졸업장은 받지 못해도 그 아이에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사와다 선생은 더듬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 “방금 이치조 선생님은 장기 결석자는 우리 같은 평교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럼 문부성이 해결해 줄까요.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요. 규칙이나 제도만 만들어 낼 뿐이에요. 예산은 어디에도 없어요.” ..  (172, 331, 334쪽)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하지만, 오늘날 교육이란 교육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육이란 오직 졸업장 따기입니다. 졸업장을 딸 때에 시험성적이 잘 나온 성적표를 받아쥘 졸업장 따기입니다.

 오늘날 한국땅 학교 가운데 ‘사랑이 숨쉬는 어린이’를 ‘착하고 해맑으며 싱그러이’ 이끌어 ‘아름다우면서 올바른 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돕겠다고 하는 데는 없습니다. 허울이야 교육이지, 모두 아이들을 틀에 박힌 기계처럼 다루거나 내몰기만 합니다. 수없이 많은 지식조각을 아이들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에 집어넣기만 하는 학교이고 교육인 오늘날입니다.

 아이들은 무엇을 배워야 좋으며 즐거울까요. 어른들은 무엇을 가르쳐야 좋으며 즐거울까요.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자라야 기쁘며 반가울까요.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무엇을 보여주며 살아야 기쁘며 반가울까요.

 즐거움이나 기쁨은 성적표도 졸업장도 교육도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아닙니다. 즐거움이나 기쁨은 내 삶입니다. 참다이 교사 노릇을 하겠다는 이라면, 아이들이 하나하나 맑게 생각하고 밝게 뛰놀면서 제 결과 무늬를 찾도록 지켜보거나 거드는 길동무 노릇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옳게 어버이 노릇을 하려는 이라면, 아이가 늘 웃고 떠들면서 작은 몸뚱이에 튼튼한 힘살이 붙도록 따순 밥을 먹이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도록 힘쓰는 살림꾼 노릇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제도권학교도 대안학교도 교육이 아닙니다. 모두 울타리입니다. 참다이 배움터 구실을 하자면 참다이 삶터 구실을 해야 합니다.


.. 굳이 말한다면 사회라는 과목을 배우면서 아이들은 무엇을 얻게 되는 걸까 …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학문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쳐 본들 과연 몇 명이나 그 핵심을 이해할 수 있을까. 네안데르탈인이라든가, 쥐라기, 숭문토기 같은 고고학적인 전문 용어만 수박 겉핥기 식으로 외울 뿐이다 … 구체적인 지식을 몰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중학교 입학시험에서는 구체적인 지식만 알아본다. 얼마나 많이 외우고 있는지가 당락을 결정한다 … 아이에게 구도의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조화로운 색채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것은 예술 교육의 일부다. 그러나 도베 유조가 그린 불이 난 그림이나 와다 고스케가 그린 불길한 자화상은 예술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아이들의 마음이다. 아이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비극이다. 그 비극이 여과 없이 표현된 한 편의 슬픈 시다. 이것은 아이들의 하소연이며 고백이다 ..  (149∼150, 190∼191쪽)


 돈을 벌자면서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돈이 되도록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돈을 벌자면서 쓴 글이란 문학이 아닙니다. 돈이 되도록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었으면서 예술이라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돌이킨다면, 돈을 벌자면서 썼기에 문학인지 모릅니다. 돈이 되도록 그리거나 찍었기에 예술인지 모릅니다. 살아가며 내 웃음과 내 눈물을 담아서 쓰는 글과 그리는 그림과 찍는 사진은 ‘문학도 문화도 예술도 아닙’니다. 그예 내 삶입니다.

 삶이 될 때에 비로소 글이라 하고 그림이라 하며 사진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삶이 되지 않고 돈이 되거나 힘(권력)이 되거나 이름값(명예)이 된다면 모조리 ‘문학·문화·예술’이라는 허울(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으랴 싶어요.

 삶이 될 때에 시나브로 배움이거나 가르침입니다. 곧, 삶이 되지 않고 돈이 되거나 힘이 되거나 이름값이 되도록 이끈다면 한낱 ‘교육’이 될 뿐입니다. 어느 교사이고 어버이이고, 아이들이 돈을 더 잘 벌도록 가르칠 수 없습니다. 돈을 더 잘 벌 일자리를 찾도록 아이들을 내모는 사람이라면 교사도 아니요 어버이도 아닙니다. 돈을 잘 벌 만한 졸업장이나 자격증이나 성적표를 손에 쥐도록 닦달하는 사람은 교사일 수 없고 어버이일 수 없습니다. 교사나 어버이라 한다면, 교사와 어버이부터 사랑스레 살아가면서 아이들 누구나 사랑스레 살아가도록 돕습니다.


..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단 한 번도 정기 승진이 실시되지 않았다. 교사는 권리마저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까. 치과 의사는 교사가 성직이라고 했다. 성직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두고 교사의 권리를 무시한 채 완벽한 교육만 요구한다. 비좁은 교실에 정원 50명을 훨씬 웃도는 60명 가까운 아이들이 어깨를 맞댄 채 앉아 있다. 운동 장비도, 과학 교재도, 시청각교육에 필요한 설비도, 도서관도 제대로 갖춰 놓지 못하고 있다 … 이렇게 모인 교사들의 모습은 박봉에 시달리는 노동자일 뿐이었다. 더구나 여교사는 더 어둡고 초라해 보였다. 기업이나 관공서의 여직원들과 견주면 복장은 형편없었다. 머리 모습에도, 비옷에도, 신발에도 가난이 흠뻑 배어 있었다. 바로 그 여성들이 도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일본의 의무교육은 가난한 청년과 가난한 여성들이 유지해 왔다 … 교사라는 직업의 성격을 따지기 전에 그들은 분명 노동자였다. 노동자가 아닌 존재로 취급받을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선생들은 공장 노동자보다 더 무거운 마음의 부담을 강제로 짊어지고 세상의 비판 앞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  (382, 396∼397쪽)


 착하게 살아가며 착한 마음밭을 함께 나눌 어른과 어린이입니다. 사랑스레 지내며 사랑스러운 마음자리를 서로 나눌 교사와 학생입니다. 믿음직하게 어깨동무하며 믿음직한 마음씨를 같이 맞잡을 어버이와 아이입니다.

 사람이 되고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은 하나입니다. 사랑입니다. 돈이 되거나 이름값이 되거나 힘이 되는 길 또한 하나입니다. 교육입니다. 사람이 되고 싶고 사람답게 이끌고 싶으면 사랑해야 합니다. 돈이나 이름값이나 힘을 바란다면 교육을 할 노릇입니다.

 내 삶을 바탕으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바라보며 껴안을 때에는 사랑입니다. 교과서와 교재에 따라 성적표를 마련하고 시험을 치르려 하면 교육입니다.

 콩 세 알을 심어 한 알은 사람이 먹고 한 알은 짐승이 먹으며 또 한 알은 어찌저찌 흙으로 돌아간다면 사랑이고 삶입니다. 콩 세 알 모두 사람만 홀로 차지하며 먹으려 한다면 교육입니다. 종이 한 장을 맞들 때에 삶이고, 종이를 똑바로 들라고 시킬 때에 정치입니다.


 (3) 삶


 교육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야기책 《인간의 벽》 1권을 읽습니다. 《인간의 벽》 1권에는 “거대한 슬픔”이라는 이름이 따로 붙습니다. 큰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몹시 슬프다는 소리입니다.

 무엇이 그리도 슬프기에 사람들이 울타리를 높직하게 쌓을까요. 아니, 사람들은 어이하여 울타리를 높직하게 쌓고, 이렇게 높직하게 쌓은 울타리는 왜 사람들을 슬프게 할까요.


.. 그 어린 마음을 겪어 보는 기쁨은 저학년을 담당하는 선생만이 느낄 수 있다 … 아이들은 애정에 민감하다. 누군가 자신을 관심 있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아주 기뻐한다 … 한마디뿐인 선생의 짧은 말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  (12, 154쪽)


 사람이 스스로 쌓은 울타리가 아니라, 사람으로 살아가며 이루는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아니, 사람으로 태어난 고마운 목숨을 참말 고맙게 여기면서 사랑을 나누어야 그야말로 사람일 텐데요.

 어린이도 어른도 사랑이 가장 반가우며 즐겁습니다. 학생도 교사도 사랑일 때에 가장 힘이 나고 아름답습니다. 아이도 어버이도 사랑으로 마주할 때에 애틋한 꿈결을 누립니다.

 가난한 아이들한테 장학금을 주어도 아이들은 활짝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한테 장학금 아닌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자리라면 아이들은 언제나 스스럼없이 활짝 웃습니다.


.. 힘 앞에는 도리가 없다는 논리가 지난 1000년 동안 일본 사회를 지배해 왔다 … 윗사람이라는 계급의식이 부모들의 마음속에서 쉽사리 사라질 리 없다. 도쿠가와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감정이다 ..  (166, 220쪽)


 교육소설이라는 이름이 붙기는 하지만,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며 나눌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고이 보듬고자 하는 꿈을 담은 이야기책 《인간의 벽》은 조곤조곤 속삭입니다. 서로서로 어떻게 태어난 목숨이고, 서로서로 어떻게 자라는 목숨이며, 서로서로 어떻게 부대끼는 목숨인가를 살몃살몃 들려줍니다.

 주의주장이나 강요나 교육이나 이론이나 사상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인간의 벽》입니다.

 참배움을 나누려는 교사한테 길잡이가 될 만한 《인간의 벽》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야기를 펼치는 《인간의 벽》입니다.


.. 시노다 선생은 목 언저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기분으로 모래밭 위에 서 있었다. 햇빛이 내리쬐는 바닷가 동굴에 사람이 살고 있다 … 가나야마에게 과연 학교가 필요할까. 학교보다 생활이 먼저가 아닐까. 학교보다 생활이 먼저인 아이를 억지로 학교에 데려가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일까 …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아버지와 아들을 마주하자 시노다 선생은 가슴이 쓰려 왔다. 이토록 가난이라는 것이 지독할 줄은 몰랐다. 이 가정의 생활을 지탱해 주는 것이라고는 건강뿐이다. 오직 건강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고 있다 … 아키오는 아마 학교에 오지 않을 테다. 공부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만 할 수 있다. 가난한 아키오에게 공부는 사치품일 뿐이다 ..  (353, 355, 357쪽)


 모든 교사는 어른입니다. 모든 어버이는 어른입니다. 모든 학생과 어린이(와 푸름이)는 아이입니다. 어른 앞에 선 아이요, 아이 앞에 선 어른입니다.

 물지게를 지면서 배우거나 가르칩니다. 밥숟깔을 뜨면서 가르치거나 배웁니다. 아기를 업고 논둑길을 걸으면서 배우거나 가르칩니다.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배우거나 가르칩니다.

 모진 바람이 그치지 않아 나무가 부러지거나 풀이 뽑히곤 합니다. 그런데, 나무가 부러지건 풀이 뽑히건,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싹이 돋아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새로운 풀이 돋습니다.

 지구별에서 숲이 모조리 사라질는지 모릅니다. 지구별에서 숲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사람뿐 아니라 모든 짐승이나 목숨이 나란히 사라지겠지요. 지구별은 숨을 거둘 수 있고, 지구별은 모든 생채기를 천천히 삭이거나 씻으며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비가 오기에 흙땅에 골이 패여 냇물이 흐릅니다. 바람이 불기에 모래바람이 날리고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햇볕이 내리쬐기에 새싹이 기운을 얻어 한결 푸른 빛깔을 뽐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받는 사랑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자랍니다. 사랑과 함께 지식을 받아들이면 사랑과 함께 받아들인 지식을 예쁘게 나누겠지요. 사랑은 없이 지식만 맞아들이면 사랑이 없는 지식으로 홀로 쇠밥그릇을 챙기겠지요.


.. “부모 세대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려고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건 아니잖아요. 부모 세대와 다르게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아이들을 키우려고 고생하는 거잖아요.” … 획일적인 의무교육은 이 아이에게도 영어를 가르치고,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고, 대수와 기하학을 가르칠 것이다. 미술 수업은 일 주일에 한 시간 정도. 아사이 요시오는 자신에게 없는 재능 때문에 절망해야 한다. 자신이 타고난 재능은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다. 표현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모든 어린이는 개성과 능력에 따라 교육되며” 하고 어린이헌장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의무교육은 모든 아이를 똑같이 교육한다. 아사이 요시오는 의무교육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의무교육을 마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열등의식만 자랄 뿐이다. 사회에 들어서기도 전에 패배자라는 절망을 맛본다 … 결국 아이를 만드는 것은 교과서가 아니다. 교사도 아니다. 친구도 아니다. 가정이다. 교육의 기본은 부모다. 교사는 다만 도와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자녀 교육의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 떠넘기고 있다. 그만큼 부모들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  (143, 241, 261쪽)


 모든 고추포기가 똑같은 크기 똑같은 숫자 똑같은 부피로 고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모든 볍씨가 똑같은 키 똑같은 알맹이 똑같은 굵기로 벼 열매를 맺지 않아요. 봉숭아 씨앗 하나에서 자라는 봉숭아는 모두 다릅니다. 돼지 한 마리가 낳는 새끼이든 고양이 한 마리가 낳는 새끼이든 다 다른 생김새이고 다 다른 모습이며 다 다른 삶이자 목숨입니다.

 스무 아이라 하든 예순 아이라 하든, 줄을 착착 맞추어 책상 앞에 앉았다 하더라도 다 다른 아이자 삶이자 목숨이자 사랑입니다. 다 다른 아이를 다 똑같은 책걸상에 앉히고 다 똑같은 급식을 먹이며 다 똑같은 교과서로 다 똑같은 교대 수업을 받은 교사한테서 다 똑같은 지식을 머리속에 담도록 하는 학교란, 말 그대로 학교가 되어 아이들한테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쥐어 줍니다. 이 졸업장이나 자격증은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도록 하느냐 하고 가르는 잣대가 됩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고, 열 손가락 모두 다 다른 크기와 생김새로 다 다른 노릇을 합니다. 호미를 쥐든 자판을 두들기든 젓가락을 쥐든 사랑하는 사람을 쓰다듬든, 다섯 손가락 더하기 다섯 손가락은 모두 다른 구실을 합니다.

 이야기책 《인간의 벽》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자리에서 모두 다른 삶을 꾸립니다. 누군가는 사랑과 믿음으로 웃음과 눈물을 아끼려 합니다. 누군가는 돈과 이름과 힘으로 더 큰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쥐려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으로 어깨동무할 수 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지식으로 울타리를 쌓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기쁘고, 사랑이 없기에 슬픕니다. 사랑받는 보람을 느끼기에 예쁘며, 사랑받는 고마움을 모르기에 가엾습니다. (4344.4.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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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2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책인가 봅니다, 제게 참 좋은 리뷰고요~
여러가지 말들에 아침부터 가슴 뭉클합니다.

그중 오늘 아침은 '믿고 맡길 수 있도록 나부터 믿습니다.'를 곰곰이 생각해 보려구요~^^

숲노래 2011-04-28 12:09   좋아요 0 | URL
'츠보이 사카에'라는 분이 쓴 교육소설과 함께 이시카와 다쓰조 님 교육소설은 '교육 고전'일 뿐 아니라, 무척 훌륭한 '문학'이기도 해요. 우리 나라에서 교사와 부모들이 이러한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곰곰이 내 삶을 사랑하는 길을 찾아보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나는 닭 생생 푸른 교과서 6
장-클로드 페리케 지음, 얀 르브리 외 그림, 최인령 옮김 / 청어람주니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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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들부터 모르는 ‘닭고기’ 이야기
 [책읽기 삶읽기 54] 장 클로드 페리케·얀 르브리·장 올리비에 에롱, 《나는 닭》(청어람주니어,2008)



 꽤 예전부터 어른책보다 어린이책이 더 많이 나옵니다. 어른책만 내던 적잖은 출판사들은 어린이책을 함께 내는 틀로 바꾸곤 했으며, 어린이책을 내는 출판사를 따로 새끼회사로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아이들한테 읽힐 마땅한 책이 없다며 아쉽게 여기거나 안타까이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이들한테 읽힐 책이 대단히 많은 나머지 추리거나 가리거나 솎거나 골라야 합니다. 좋다고 할 만한 책을 추려서 책이름과 간기와 겉그림만 단출히 그러모은 ‘권장도서목록’만 하더라도 두툼한 책 하나가 될 만큼 이 나라 책마을은 달라졌습니다.

 곰곰이 돌아봅니다. 해마다 새로 나오는 책이 대단히 많습니다. 어린이책은 어른책보다 훨씬 많이 나옵니다만, 어린이책이든 어른책이든 새로 나오는 책이 퍽 많습니다. 한 해만 지나도 여러 갈래 여러 이야기를 파고드는 여러 가지 책이 새로 태어납니다. 지난날에는 한 권조차 없던 이야기가 이제는 여러 권 되기도 하고, 지난날에는 아무도 다루지 않던 이야기를 오늘날에는 퍽 자주 다루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른책에서 깊이 있게 살피거나 돌아보는 책은 차츰 줄어든다고 느낍니다. 어린이책에서 깊이 있게 살피거나 돌아보는 책을 한결 찬찬히 헤아리거나 곱씹는 어른책이 좀처럼 못 나오는구나 싶습니다.


.. 시대가 바뀌면서 다른 모습의 닭들이 생겨났어. 농부들이 좋은 닭만 골라 키웠기 때문이야. 유럽 사람들은 작은 닭만 보다가, 19세기 중반 아시아에서 건너온 큰 닭을 보고 감탄했어. 곧 유럽의 닭과 아시아의 닭을 교배해서 종자 개량에 들어갔지 … 오늘날에는 알을 얻기 위한 닭과 고기를 얻기 위한 닭을 분리해서 사육해. 알을 더 잘 낳거나, 살이 더 많이 찌도록 품종을 개량했거든 … 고기를 얻기 위한 닭의 사육시설에는 물통, 먹이통, 그리고 배설 공간이 반드시 있어야 해. 하지만 그 수가 하도 많아서 한 마리당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이 책을 펼친 크기 정도야. 게다가 닭들이 서로 물어뜯고 때로는 죽이기도 하기 때문에, 부리의 끝을 잘라 버려. 야외에서 기르는 닭도 부리를 잘라 버릴 때가 있어. 사육기간은 다양한데, 표준 닭은 35일 내지 40일째에 목표 무게인 2킬로그램에 도달해. 때로는 너무 빨리 성장해서, 약한 발로 몸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어 ..  (12, 34, 36쪽)


 《나는 닭》이라는 이야기책을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어린이책으로 나온 《나는 닭》이라는 이야기책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닭 한삶을 헤아리는 데에 길잡이가 될 만큼 잘 빚은 알찬 책’이라 할 만합니다. 어린이들은 이 책 하나로 닭 한삶을 차근차근 짚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른책으로 ‘닭 한삶’을 알뜰히 다룬 이야기책으로는 무엇이 있다 할 만할까요. 아니, 어른들은 닭 한삶을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돌아보거나 생각하는 일이 있기나 하는지요. 닭고기를 밥으로도 먹고 술안주로도 먹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닭고기를 사 주는 어른들은, 닭튀김이니 백숙이니 닭곰탕이니 닭꼬치이니 훈제이니 숯불구이니 하면서 즐기는 어른들은, 흔히 값싸게 먹는 닭 한 마리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기르며 어떻게 가게에 들어오는지를 알기는 할까요.


.. 병아리는 6개월이면 어른 닭이 돼. 그때부터 수평아리는 수탉, 암평아리는 암탉이 되어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아 … 암탉은 하루에 몇 번씩 알을 굴려서 골고루 따뜻하게 해 줘. 하루 종일 끈기 있게 알을 품고 있다가, 한 번씩 둥지에서 나와 먹이나 물을 먹고 배설을 해 … 닭을 비롯한 꿩과의 새들은 날기보다는 땅에서 걸어 다니기를 좋아하고, 땅바닥에서 먹이를 찾아. 닭은 아직 이런 습성이 남아 있어서 흙만 보면 단단한 발가락으로 땅을 헤치며 먹이를 찾곤 해. 닭은 흙이나 모래 목욕을 즐기는데, 먼저 땅을 파 모래나 흙이 깃털 속으로 들어가게 해. 그런 뒤에 푸다닥 털면 피부와 깃털 속에 있던 기생충이나 불결한 것들이 함께 떨어져서 깨끗하게 돼 ..  (29, 33, 66쪽)


 예나 이제나 학교에서는 ‘달걀이 몇 일이 지나야 깨어나는가’를 배웁니다. 앎조각으로 배웁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떠올리는 사람이 있으나, 나이가 들어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닭》이라는 책에도 나오지만, 달걀이 깨려면 세이레가 걸립니다. 스물하루가 걸려요.

 《나는 닭》이라는 책에는 ‘사람들이 먹는 고기가 되는 닭’을 며칠 만에 길러내는지도 밝힙니다. “표준 닭은 35일 내지 40일째에 목표 무게인 2킬로그램에 도달해” 하고 들려줍니다. 여기에, 병아리가 어른 닭으로 ‘자연스럽게 자라기’까지는 얼마쯤 걸리는 지도 알려줘요. 여섯 달이 걸린다고도 알려줍니다.

 한국사람은 항생제와 촉진제를 써서 서른닷새보다 더 빨리 고기닭을 만들곤 합니다. 한국사람은 고기닭 한 마리를 아주 값싸게 팔기도 합니다. 아예 다 익혀서 그냥 돈만 내면 값싸게 사먹을 수 있는 닭을 이름난 큰 회사에서 널리널리 팔곤 합니다. 2011년 3월까지 한국에 있는 ‘닭고기 체인점’이 만육천 곳이 넘는다 하는데, 동네에서 조그맣게 하는 곳까지 치면 훨씬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들 닭고기집에서 다루는 닭고기란 한 가게에서 한 마리만 팔아도 날마다 만육천 마리는 가볍게 넘겠지요.

 나라안에 손꼽히는 닭고기회사는 하루에 삼십만 마리이니 사십만 마리이니를 고기닭으로 다룬다고 합니다. 하루에 삼십만 마리를 다루는 닭고기회사가 세 곳이라면 날마다 백만 마리를 웃도는 닭이 고기가 된다는 소리이고, 날마다 백만 마리가 넘는 병아리가 새로 태어나 닭우리에서 자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닭이란, 사람한테 잡아먹히도록 날마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태어나서 어마어마하게 많이 죽어야 하는 목숨이 되었어요. 사람들이 먹는 달걀은 닭고기보다 훨씬 많겠지요. 한국에서는 하루에 달걀이 몇 알쯤 사람들 입으로 들어갈까요.


.. 시골에서 암탉은 매우 소중해.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고, 달걀을 낳아 주거든. 달걀을 낳지 못하면 닭을 요리해 먹을 수 있어 ..  (13쪽)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면서 집에서 닭을 칠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닭을 칠 만한 널따란 마당을 마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파트 툇마루에 닭장을 두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시원하며 어여쁜 꽃밭은 마련할 테지만 닭우리를 두거나 닭을 풀밭에 풀어서 키우는 도시사람이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기만 하지 않던 지난날에는, 시골집 어디에서나 닭을 풀어서 키웠고, 달걀을 때때로 고맙게 얻어서 먹었으며, 닭고기는 더욱 고맙게 여기며 잡아서 먹었습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고부터는 닭을 치는 사람은 더 돈을 벌고자 더 좁은 우리에 더 많은 닭을 집어넣고 더 빨리 길러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적은 돈으로 더 큰 닭을 더 맛나게 먹고픈 꿈을 키우며 돈만 치릅니다. 닭 한 마리 어떻게 자라거나 죽는가를 아는 도시사람은 몹시 드물어요.


.. 집약적 사육장에서는 닭의 사료에 항생제를 첨가해. 항생제를 먹인 닭은 많이 먹지 않아도 살이 빨리 찌거든. 그러나 항생제는 세균의 저항력을 키워서, 항생제에도 죽지 않는 슈퍼박테리아가 생겨나게 할 위험이 있어 ..  (40쪽)


 아이들은 《나는 닭》을 읽으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곱씹어 봅니다. 닭은 어떤 짐승이고, 닭과 사람은 서로 어떤 역사를 이었으며, 더 크고 맛있다는 고기닭을 만들려고 사람들이 어떻게 ‘품종 개량’을 했는가를 알 수 있을까요. 고기닭을 만든다며 항생제를 쓴다는 대목이 한 줄 깃들기는 하지만, 정작 닭우리에서 어떤 항생제를 쓰고, 이 항생제 성분이 무엇이며, 이 항생제가 사람몸에 어떻게 파고드는지는 한 줄이건 한 낱말이건 다루지 못합니다. 고기닭한테든 고기소한테든 고기돼지한테든 먹이는 항생제를 알려면 《항생제 중독》(시금치,2005) 같은 책을 따로 사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고기짐승한테 먹인다는 항생제 이야기를 다루는 어린이책은 아직 따로 없구나 싶습니다. 항생제 이야기를 살뜰히 다루는 어른책 또한 몇 없습니다. 어른들부터 너무 바쁜 나머지 항생제를 쓰건 말건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아이들 또한 어른 못지않게 너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이 책 저 책 지식쌓기 하려고 읽기는 하지만, 아이 스스로 제 삶으로 삭이기까지 차근차근 톺아보기란 몹시 힘듭니다.

 이야기책 《나는 닭》은 어른들부터 모르는 닭고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제 이러한 이야기책은 어른책으로 읽기보다 어린이책으로 함께 읽어야 ‘어른 스스로 이 나라와 사회 흐름을 읽을’ 수 있다 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한결 쉬운 말과 더 차근차근 풀어낸 이야기를 담은 어린이책이야말로,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이 함께 즐기면서 배울 이야기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더 생각합니다. 이야기책은 이야기책으로 그치는 책일 수 없습니다. 책을 읽으며 새기는 이야기는 앎조각이 아닌 삶으로 녹이도록 되새길 때에 뜻과 보람이 있습니다. 앎조각만 쌓으려 한다면 앎조각을 더 많이 쌓은 사람이 더 훌륭하거나 좋은 사람이 되겠지요. 삶으로 녹이도록 되새기며 살아가려 한다면, 책을 한 권만 읽었든 백 권을 읽었든 만 권을 읽었든, 나 스스로 착하며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착하며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테지요.

 책을 읽는다고 똑똑해지지 않습니다. 몸을 움직이며 땀을 흘리는 사람이 똑똑합니다. 집에서 닭을 치는 사람이라면 굳이 《나는 닭》을 읽지 않아도 됩니다. (4344.4.25.달.ㅎㄲㅅㄱ)


― 나는 닭 (장 클로드 페리케 글,얀 르브리·장 올리비에 에롱 그림,최인령 옮김,청어람주니어 펴냄,2008.7.25./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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