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있는 교실 - 돼지 P짱과 32명의 아이들이 함께 한 생명수업 900일
쿠로다 야스후미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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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을 길러 목숨을 먹으며 살아간다
 [푸른책과 함께 살기 76] 쿠로다 야스후미, 《돼지가 있는 교실》(달팽이,2011)



- 책이름 : 돼지가 있는 교실
- 글 : 쿠로다 야스후미
- 옮긴이 : 김경인
- 펴낸곳 : 달팽이 (2011.4.27.)
- 책값 : 12000원



 (1) 말과 삶


 내가 쓰는 말마디가 얼마나 옳거나 바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온 지 아직 스무 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열아홉 살 적부터 내 말마디를 생각하면서 살았으니까, 나로서는 마흔 살을 접어들어야 비로소 내 말마디를 차분히 돌아보는 나날을 보냈다 여길 만합니다.

 내 말마디를 처음으로 돌아보던 지난날, 내가 쓴 글을 되읽으면서 내 말마디를 살폈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 말마디가 어떠한 줄을 못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글을 쓸 때에 입으로 소리를 내거나 마음속으로 중얼중얼 읊습니다. 글로만 쓰는 글이 아니라, 입으로 말하는 글입니다. 내 혀로 굴릴 만한 말마디가 아니라면 글로 쓸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렇듯 적바림한 글을 가만히 되읽으면서 그동안 말도 모르고 넋도 모르며 삶도 모른 채 살았구나 하고 하루하루 뼈아프게 깨닫습니다.

 그런데 열여덟 해씩이나 내 말마디를 돌아보거나 되짚으며 살았다지만, 아직까지 내 말마디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합니다. 가야 할 길은 한참 멀었고, 사랑해야 할 말은 영 어렴풋합니다.

 곰곰이 돌이킨다면, 고작 열여덟 해를 추슬렀다 해서 옳게 추스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누군가 아주 똑똑하거나 빼어난 사람이라면 열여덟 해가 아닌 열여덟 달 추스르더라도 훌륭히 추스른다 할 만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똑똑하거나 빼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금세 당신 삶과 넋과 말을 아름다이 추스른다 할 만한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 곤충도 뭔가를 먹음으로써 살아간다. 그런 당연한 진리조차 우리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는 돼지를 볼 기회가 평소에는 거의 없다. 동물원에 가도 멧돼지는 있어도 돼지가 있는 곳은 거의 없다. 하지만 슈퍼에 가면 돼지고기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 아이들은 슈퍼에 진열되어 있는 고기가 처음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니, 사진을 보면 무슨 동물인지 이름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없을 뿐이다 … 물과 소금의 생명 유무와 더불어, 화학조미료에 생명이 있을까 없을까 하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  (16, 22∼23, 101쪽)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나는 아주 낯간지럽구나 싶은 말마디가 책에 가득합니다. 이 책을 읽는 다른 분들은 이 책에 깃든 말마디를 어떻게 느낄까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책에 적힌 말마디’가 옳은지 그른지 바른지 어긋났는지를 모를 뿐 아니라 느끼지 않으니 그냥 줄거리만 죽 살피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한자로 된 말이 한국말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나날이 늘어나는 영어가 얼마나 한국말로 받아들일 만한지, 토씨 ‘-의’를 붙이거나 일본 말투 ‘-的’을 붙이는 일이 얼마나 어울리는지, 어설픈 번역 말투라든지 서양 말법에 흔들리지는 않나를 차분히 곱새기는 한국사람은 있기나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이 나라 말글을 제대로 안다 하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나 싶기까지 합니다. 예부터 이 겨레가 흙을 일구고 옷을 깁고 집을 짓고 하는 흐름과 삶을 송두리째 잃듯이, 예부터 이 겨레가 서로를 사랑하거나 아끼면서 나누던 말을 모조리 잃지는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살아 있는 돼지” 같은 말마디가 참 얄궂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살아 있는 돼지”뿐 아니라 “하지만”도 생각하지 못했고, “-까 하는 문제도 제기되었다”라든지 “뭔가를 먹음으로써” 같은 말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딱히 가르치는 사람이 없고, 국어사전을 읽는들 알 수 없으며, 한국 말법을 다루는 책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 말은 “산 돼지”이고, “그렇지만”이며, “-까 하고 궁금해 했다”인데다가, “뭔가를 먹으면서”입니다.


.. 교육에서는 아이의 눈높이에 서야 하고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런 말들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이 중요하다고들 하면서 사실은 교사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대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은 교사가 하고 싶은 일을 아이들의 입을 빌려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니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의견은 아이들이 말했다고 자주적이고, 교사가 말했다고 관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 의견이 모두에게 설득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173쪽)


 나도 나이를 먹고, 내 아이도 나이를 먹으며, 내 옆지기도 나이를 먹습니다. 나는 나이를 먹는 만큼 더 생각이 깊거나 마음이 넓은 사람으로 살아가는가 돌아보지만, 그닥 생각이 깊어지지 못하고 마음이 넓어지지 못하는구나 싶어 부끄럽습니다. 스스로 착하게 살아간다면 걱정거리란 없습니다. 스스로 해맑게 살아간다면 근심거리란 없어요. 스스로 예쁘게 살아간다면 골칫거리 또한 없겠지요.

 2003년에 숨을 거둔 이오덕 선생님을 두 번 얼굴을 뵌 적이 있고, 한 번은 이오덕 선생님이 과천에 살던 아파트로 찾아갔습니다. 이때가 1998년인가 1999년이었지 싶은데, 두 시간에 걸쳐 꼼짝없이 아무 말을 못하며 이야기만 조곤조곤 들었습니다. 한창 스물다섯 즈음 된 젊은이가 한다는 ‘우리 말글 바로쓰기’에서 어설프거나 어리석은 대목을 넌지시 짚었기 때문에 아무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오덕 선생님은 이때에 나무라거나 꾸짖지 않았습니다. 그저 앞으로는 두 가지만 고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는 올해부터 생각나지 않고, 한 가지 떠오르는 대목은 ‘가끔씩’이나 ‘이따금씩’은 잘못 쓰는 겹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떠오르지 않으나, 그때에 말씀을 들은 뒤부터 곧장 바로잡았습니다. 이제는 잘 바로잡아서 쓰니까, 어떠한 말투를 내가 잘못 썼는지를 떠올리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늘 요 말투 조 말투 낱낱이 다독이면서 바로잡으며 살아가니까, 하나하나 남김없이 떠올릴 수는 없어요. 쌀을 씻든 털옷 빨래를 하든, 예전에는 이러저러하게 잘못 했지 하고 떠올리면서 일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안거나 달랠 때에 지난날에는 이러저러하게 어수룩하게 했지 하고 되새기면서 안거나 달랠 수 없어요. 내 부끄러운 발자취를 잊는다는 모습이 아니라, 부끄럽거나 못났던 멍텅구리에서 조금 덜 부끄럽거나 살짝 덜 못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사랑스레 살아갈 길을 헤아리면서, 날마다 더욱 사랑스러운 손길과 마음길이 되도록 힘쓸 때에 즐겁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당신 말마디를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늘 내뱉는 말마디를 아름답거나 착하거나 참다이 다독이지 않아요.

 나는 생각합니다. 스스로 진보를 외치든 보수를 외치든, 스스로 한나라당을 사랑한다 외치든 민주당을 사랑한다 외치든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을 사랑한다 외치든, 내가 날마다 쓰는 말마디를 옳게 들여다보며 제대로 가다듬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좋은’ 일과 어떤 ‘바른’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말이란 넋이고, 넋이란 삶입니다. 삶을 이루는 넋이며, 넋을 이루는 말이에요. 삶을 일구면서 넋을 일구고, 넋을 일구면서 말을 일굽니다. 말을 돌보면서 넋을 돌보고, 넋을 돌보는 동안 삶을 돌봅니다.

 가장 좋은 길은 진보도 보수도 중도도 아니라고 느낍니다. 가장 좋은 길은 그저 ‘가장 좋은’ 길입니다.

 내 아이를 사랑하는 길이란 말 그대로 ‘내 아이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내 아이한테 자가용이나 아파트를 사 줄 때에 내 아이를 사랑하는 길이 아니에요. 이때에는 아이한테 자가용이나 아파트를 사 주었을 뿐입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 준다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 주었을 뿐이지, 아이를 사랑하는 길은 아닙니다. 아이한테 밥을 떠먹였으면 아이한테 밥을 떠먹였을 뿐입니다.

 일은 일이고, 살림은 살림이며, 사랑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 사람들은 ‘한국사람으로서 늘 한국말을 쓰’면서 살아갑니다. 늘 한국말을 쓰지만 ‘한국말을 생각하면’서 한국말을 쓰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한국말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 뿐 아니라 ‘한국말을 사랑하면’서 쓰는 사람은 훨씬 드물어요.


.. 매일 아이들이 짊어지고 오는 책가방 속에는 교과서나 공책이 들어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미처 다 담을 수 없을 만큼의 생활이 빼곡하게 들어 있음을 실감한다 … 이번 회의에 학부모님이 참석하신 아이들은 부모님과 함께 나란히 앉도록 자리를 배치해 두었다. 학부모님의 이야기를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가끔은 힘들어 보이기도 했다. 마유코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모르겠어요.” ..  (21, 186쪽)


 맨 처음, 열여덟 해 앞서 열아홉 살이던 때에 막 ‘우리 말글을 사랑하자’고 다짐하던 때에는 이오덕 선생님이 쓴 ‘우리 글 바로쓰기’가 퍽 해묵었다고 여겼습니다. 좀 고리타분하다고 여겼습니다. 나중에 이오덕 선생님을 한 번 뵙고, 숱한 책을 낱낱이 읽으며, 이오덕 선생님이 남긴 글과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는 동안, 당신 삶과 넋과 말이 하나도 해묵거나 고리타분하지 않다고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당신한테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걸었으며,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했을 뿐 아니라, 당신 뒷사람이 해야 할 몫을 애써 당신이 도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뒷사람이 즐거우며 기쁘게 할 일이 무엇이라고 똑똑히 밝히면서 이러한 자리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말과 넋과 삶이 하나되기란 어렵다 할는지 모르는데, 지식인으로 살아가면서 말과 넋과 삶이 하나되기란 어려울 뿐입니다. 집살림을 일구거나 흙살림을 일구면서 내 보금자리를 내 손으로 땀흘리며 일구는 사람은 말과 넋과 삶이 하나되지 않고서는 아무런 살림을 일구지 못해요.


 (2) 꽃과 삶


 올해 들어 할미꽃을 못 보았습니다. 지난여름에 식구들이 인천 골목동네를 떠나 멧골자락 작은 집으로 옮긴 뒤로 품은 꿈 가운데 하나는, 새로 맞이할 봄철에 멧골짝 할미꽃을 기쁘게 만나면 좋겠다였습니다. 이모저모 일거리가 많기도 했고, 집일에 치이면서 짬을 못 냈다고 할 테지만, 할미꽃 없이 봄을 맞이한 이 찜찜하고 서운한 시골살이란 참 슬픕니다.

 그러나, 할미꽃이야 못 볼 수 있지요. 나는 우리 집에서 옆지기와 아이하고 살아가면서 웃음꽃이나 눈물꽃을 볼 수 있잖아요. 비록 들꽃과 멧꽃 예쁘장한 꽃망울을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이 작은 집에서 식구들하고 사랑꽃을 피울 수 있으면 좋은 나날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다만, 집에서 살림을 옳게 하고 사랑을 제대로 해야지요.


.. 이렇게 매일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남은 음식물을 모으다 보니, 학교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이 이렇게 많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요리하시는 분께 여쭸더니, 대충, 만든 요리의 10퍼센트는 남는다고 했다 … (돼지)우리를 만드는 데 큰 힘을 발휘한 이번 자금은 아이들이 수집한 폐품을 팔아서 모은 돈인데, 그런 활동도 오랫동안 했다. 실제로 돼지를 키우기 위해서도 자금이 필요하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P짱이 갑자기 병이 났을 때였다 ..  (44, 81쪽)


 엊저녁 모과꽃을 처음으로 봅니다. 모과나무가 선 줄은 진작 알았으나, 늘 모과꽃은 지나쳤습니다. 아니, 모과꽃이 한창이던 때에 모과나무 앞을 지나간 적이 없지 않았나 싶고, 모과나무 앞을 지나갔어도 이 꽃이 모과꽃이었다고 깨닫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멧길을 오르내리며 늘 바라보는 나무입니다. 모과나무뿐 아니라 꿀밤나무이든 떡갈나무이든 단풍나무이든 두릅나무이든 감나무이든 벚나무이든 화살나무이든 느티나무이든 오얏나무이든 복숭아나무이든, 가만히 바라봅니다. 올봄에 우리 텃밭 가장자리에 심은 살구나무도 날마다 바라봅니다. 가느다란 막대기 같은 살구나무에 언제 잎이 돋을까 기다리고 기다리니 그제부터 드디어 잎이 돋습니다. 집 앞에 가지를 뻗는 감나무도 요 며칠 사이에 바야흐로 새잎을 냅니다. 모과나무도 새잎을 낸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모과나무는 잎을 낸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금세 꽃을 냅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잎을 낸 지 얼마 안 되었다지만, 풀이든 나무이든 저마다 알맞춤한 때에 꽃을 피웁니다. 들딸기는 지난달부터 진작에 하얀 꽃을 터뜨렸는데, 들딸기는 들판과 멧자락에 아직 푸른 잎새가 없던 때부터 일찌감치 잎을 냈습니다. 다른 풀보다 일찍 잎을 내고 나서 다른 풀보다 일찍 꽃을 냈습니다. 민들레도 냉이도 일찍 잎을 내고 일찍 꽃을 냅니다. 일찍 꽃을 낸 만큼 일찍 씨앗을 내지요. 4월 끝무렵에 한창 꽃을 피우던 단풍나무도 이제 단풍씨를 하나둘 냅니다. 5월 15일쯤 지나면 단풍씨는 후두둑후두둑 신나게 떨어지겠지요. 팔랑팔랑 춤을 추며 단풍씨가 흙으로 가려 하겠지요.

 꽃을 떨군 나무들은 짙은 잎을 뽐내며 싱그러이 자랍니다. 잎이 두툼해지면서 나무는 줄기가 굵어집니다. 사람들은 열매만 생각하지만, 나무는 열매가 아니라 나무 줄기를 생각합니다. 더 깊고 넓게 뿌리를 뻗어 나무를 버티며, 더 넓고 많이 잎을 내어 줄기를 굵힙니다. 나무는 열매를 내려고 사는 목숨이 아닙니다. 나무는 흙에 더 튼튼하고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며 기운차게 살아내려는 목숨입니다.


.. 하지만 이름도 지어 주지 않고 가축으로서 돼지를 학교에서 키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설령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역시 애완동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가축이라 생각하고 키우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역시 그 가축에게 정을 주었을 것이다 … 목축업을 하는 가정에서는 소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름이 붙여진 소가 적당한 크기로 성장하면 트럭에 실려 출하된다. 어른이니까 할 수 있을까? 일이니까 할 수 있을까? 어른은 어떤 마음으로 가축들을 출하시키고 있을까? 그리고 어린이는 왜 안 된단 말인가? 학교에서는 왜 안 된단 말인가? ..  (148∼149쪽)


 어제 낮과 저녁에 모과꽃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이렇게 어여쁜 빛깔로 꽃을 틔우는 모과나무인데, 왜 사람들은 모과 열매를 못생긴 녀석이라고 일컫는지 아리송합니다. 모과 열매를 능금처럼 썰어서 먹을 수 있다지만, 모과 열매는 썰어서 먹기보다는 단물이나 술에 재어 모과물이나 모과술로 즐기거나 따로 모과차로 마십니다. 모과 열매를 방에 가만히 두기만 해도 오래도록 모과 내음이 집안에 퍼집니다.

 빛고운 모과꽃은 결고운 열매를 맺습니다. 동그스름해야 사람 눈에는 예쁘장하게 보인다 할 만한지 모르겠으나, 나무한테는 자연한테는 새한테는 바람한테는 흙한테는 햇볕한테는 ‘동그스름한 꼴’이 가장 어여쁜 꼴이지 않습니다. 모든 나무는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모든 꽃과 열매 또한 생김새가 달라요.

 사람은 얼굴이나 몸매를 뜯어고치는 수슬을 하곤 합니다. ‘더 예뻐’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야 합니다. 얼굴이나 몸매를 뜯어고치는 수술이란 더 예뻐지는 수술이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하고 비슷하거나 똑같이 생기려는 마음’으로 하는 수술입니다.

 영화배우나 연예인 아무개를 닮은 얼굴이나 몸매라서 예쁘지 않습니다. 예쁜 얼굴이나 몸매는 마음속 깊거나 너른 밑바닥에서 솟아납니다. 사람들 가슴을 저미는 구성진 노래는 목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뱃속에서 솟구치는 소리입니다. 손가락 놀림으로도 기타나 피아노나 북이나 악기를 잘 켜거나 타거나 치거나 뜯는다 하겠지요. 그러나, 악기를 잘 켜거나 타거나 치거나 뜯는 사람은 손가락 놀림을 하지 않습니다. ‘손가락에 온 넋과 삶을 싣’습니다.

 삶으로 우러나오는 결 고운 노래예요. 삶으로 우러나오는 어여쁜 얼굴이에요.


.. 쉬는 날 먹이를 주러 가는 것은 귀찮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가지 않으면 P짱은 굶어야 한다. 그런 갈등 속에서 아이들은 동물을 키우는 데 필요한 책임감을 배워 가고 있었다. 동물을 키우는 데 쉬는 날은 있을 수 없다 …드디어 P짱의 먹이주기를 3학년에게 가르칠 때가 왔다. 지금까지 조금 느슨해져 있던 6학년 2반 아이들도 가르치는 입장이 되자 역시 표정부터가 달라 보인다. 지금까지는 별 관심 없이 P짱을 보았던 3학년 1반 아이들도 P짱을 가까이에서 실제로 보게 되자, 자기들보다 몇 배는 큰 P짱의 덩치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6학년 2반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 냄새도, 3학년 아이들에게는 지독한 냄새로 다가왔다 … 미리 먹이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학급에서 내놓은 냄비를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남은 음식물을 모아야만 했다. 먹이를 가지러 가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우리 안의 물을 바꿔 주고 똥을 치우고 흙을 갈아 주고 하면서 우리 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었다 ..  (48, 167∼168쪽)


 나는 우리 아이가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가 스스럼없이 뛰거나 놀거나 잠들거나 말할 때에 비로소 예쁘다고 느낍니다. 누구 앞에서 재주를 부리거나 재롱을 떨어야 예쁜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 스스로 제 삶결을 아끼거나 좋아하면서 마음껏 뛰거나 놀거나 잠들거나 말할 때에 참으로 예쁜 아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오얏꽃 흐드러진 오얏나무 앞에 서면 오얏 내음이 내 몸을 감쌉니다. 복숭아나무 흐드러진 복숭아나무 옆에 서면 복숭아 내음이 내 몸을 감돕니다. 보리둑 하얀 꽃망울이 흐드러진 보리둑나무 둘레에 서면 보리둑 내음이 내 몸을 휘감습니다.

 빌딩 숲에서는 빌딩 내음이 나를 감싸겠지요. 자동차 물결 사이에서는 자동차 내음이 나를 감돌겠지요. 양복을 빼입은 공무원이나 회사원 둘레에서는 양복 내음이 내 몸을 휘감겠지요.

 내 삶터는 내 마음터이고 내 말터입니다.


 (3) 아이와 삶


 이야기책 《돼지가 있는 교실》(달팽이,2011)을 읽습니다. 《돼지가 있는 교실》을 다 읽고 나서, 이 작품으로 빚은 영화 〈P짱은 내 친구〉가 한국말 판으로 나왔는가 살펴보는데,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쉽다고 해야 할는지,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이들이 6학년이 될 때까지 ‘고기돼지’를 알뜰히 돌보고 키우는 이야기가 수수하게 나온다 하는데,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아이들은 ‘귀염둥이 짐승’이 아닌 ‘고기돼지’를 돌보며 키웠지만, 어찌 되었든 고기돼지는 고기돼지인데, 아이들은 고기돼지를 키우더라도 귀염둥이 짐승을 기른 셈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머나먼 옛날부터 집에서 짐승을 기른다 할 때에는 나중에 잡아먹겠다는 마음으로 기릅니다. 닭을 기르든 염소를 기르든 개를 기르든, 나중에 고기로 먹을 만한 짐승을 기릅니다. 사랑스레 기른 소가 늙거나 아파서 죽었을 때에 고기로 안 먹고 땅에 묻었다는 이야기를 더러 듣기도 하지만, 나와 내 집에서 못 먹으면 이웃집에 주어 먹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문명인이 되어서인지 도시사람이 되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짐승을 기르건 푸나무를 기르건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 목숨을 건사하려’고 기르는데, ‘먹으려고 흙을 일구거나 짐승을 기르는’ 줄을 쉬 잊고 맙니다. 내가 살려고 볍씨를 심어 벼를 돌본 다음 벼를 거두어 쌀을 얻어 밥을 합니다. 돼지와 소와 개만 목숨이 아니라, 벼와 보리와 상추와 쑥갓과 배추도 목숨입니다. 토마토주스이든 사과주스이든 토마토와 사과라는 목숨에서 얻지, 화학조합식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숨을 마십니다. 늘 마시는 물도 목숨이고 바람도 목숨이에요. 목숨 아닌 것을 먹으면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 자연히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가정의 아이들 비율도 줄어들었다. 여름에는 에어컨이, 겨울에는 히터가 틀어진 방에서 지내는 생활스타일이 아이들에게 당연한 것이 되었다. 자연에 둘러싸인 지역에 살면서도,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은 아이들 주변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등하교길에는 풀과 나무와 논과 밭 같은 자연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곤충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 나는 “그럼 아스팔트 밑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요시노부는 아스팔트 밑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요시노부의 말처럼 흙을 밟고 사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다 ..  (16, 109쪽)


 이야기책 《돼지가 있는 교실》은 일본 오사카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새내기 교사와 어린 아이들이 돼지 한 마리를 놓고 900일에 걸쳐 함께 지낸 발자취를 담습니다. 목숨을 아끼는 마음을 다스리자면서 학급마다 짐승을 한 가지씩 기르기로 했다고 할 때에, 오사카 새내기 교사는 ‘돼지를 기르자’ 하고 얘기했고, 참말 돼지를 장만해서 기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이든 일본이든, 기를 수 있는 돼지란 ‘고기로 먹을 수 있도록 품종을 바꾼’ 돼지입니다. 여섯 달 만에 살이 디룩디룩 쪄서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을 웃돌도록 하는 고기돼지만 사서 기를 수 있습니다. 더 빨리 살이 찌고, 더 적은 밥(사료)을 먹여도 되는 고기돼지가 되도록 과학자(농학자와 생물학자)가 머리를 맞대었습니다. 유전공학이란 이러하니까요. 가만히 살피면, 사람들이 오늘날 먹는 곡식 또한 알곡이 더 알뜰히 여무는 씨앗을 갈무리해서 더 심고 북돋우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꼭 과학이 아니더라도 더 맛나게 많이 먹을 수 있도록 사람 손으로 곡식이며 짐승이며 ‘품종 고치기’를 합니다. 나귀도 노새도 품종을 바꾸거나 고쳤습니다. 고기도 고기라지만, 송아지는 어미소한테서 젖을 얻어먹지 못해요. 어미소한테서 얻는 젖은 오직 사람만 먹습니다. 송아지는 그저 사료만 먹으면서 큽니다.

 《돼지가 있는 교실》 끝마무리에서 담임 교사는 돼지를 더 키우지 않고 잡기로 합니다. 아이들은 돼지를 3학년 동생한테 물려주고 학교를 마치겠다며 기나긴 이야기 끝에 마무리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 마무리를 가볍게 뒤엎습니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가 아니라 할 만하고, 교육 또한 아니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민주주의라 할 만하며, 어찌 보니 교육이라 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다수결이든 만장일치이든 어린이회의이든 민주주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도나 결정이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아이들이 회의를 열어 ‘우리도 선생님하고 똑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를 다니기로 했어요!’ 하고 말할 때에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일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우리도 선생님하고 똑같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겠어요!’ 하고 말할 때에 그대로 받아들이면 민주주의가 될까요. 국가보안법이나 한미자유무역협정 같은 법과 제도를 정부가 다루는 모습을 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는 까닭하고 한동아리입니다. 아이들이 세 해에 걸쳐 아끼고 사랑한 돼지를 동생한테 물려주어 아끼고 사랑하도록 하는 일이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이 돼지한테 먹이를 주고 돼지를 씻기고 돼지집을 치우는 일이란 더없이 훌륭합니다.

 그러면, 돼지를 왜 키울까요.


..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서는 수많은 동물들이 가축으로 사육되고 있다. 그 동물들이 있어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 내가 지금까지 받아 온 교육에서 죽음에 대해 전혀 배우지 않았다 … 식육센터 견학 후에 쓴 아이들의 감상문에는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고도 남을 만큼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  (25, 37, 125쪽)


 사람은 누구나 밥을 먹습니다. 하루에 한 끼니를 먹건 네 끼니를 먹건, 누구나 밥을 먹습니다. 밥을 먹으려면 흙을 일구어야 합니다. 내가 내 손으로 흙을 일구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흙을 일구어 얻은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를 장만해야 합니다.

 배나무를 배꽃이 예쁘대서 배꽃이 안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알뜰히 돌보았대서 벼를 안 베고 누런 들판이 되도록 지켜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심어 거둔 콩이 예뻐서 콩을 안 먹고 책상에 올려놓고 모셔 두어도 될 만할까 모르겠습니다.

 자전거를 장만했으면 타야 합니다. 내가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해서 넘어지면 자전거가 다칠까 봐 안 탈 수 없습니다. 비오는 날에는 자전거에 흙탕이 튈까 봐, 바람 부는 날에는 자전거 체인에 먼지가 낄까 봐, 다른 날에는 또 이런저런 까닭 때문에 자전거를 안 타고 집에 모셔 둘 수 없습니다.

 새로 마련한 젓가락이나 밥그릇은 신나게 써야 합니다. 잘 닦아서 말려야 합니다. 예쁘장한 밥그릇이니까 밥을 안 담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수 없습니다. 예쁘다 싶어 장만한 옷이니 예쁘게 입고 돌아다니다가는 즐겁게 빨아서 말린 다음에 다시 입어야 합니다. 예쁜 옷이니 그냥 옷걸이에 걸어 둘 수 없습니다.


.. 아이들은 인생의 목표이자, 그리고 마침내는 뛰어넘어야만 하는 존재인 부모님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 P짱 때도 사실읕 텔레비전에 방송되지 않은, 길고도 단조로운 하루하루를 아이들과 함께 담담하게 지내 왔던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이벤트나 이슈는 그 실천을 화려하게 꾸며 주는 효과는 있지만, 그보다는 소박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바라보는 시점이 중요하지 않을까? ..  (190, 244∼245쪽)


 어른들은 살아갑니다. 아이들도 살아갑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키운다고 하지만,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또다른 목숨일 뿐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책이나 교과서로 배운다지만, 아이들은 책이나 교과서에 앞서 어른들 삶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아이들은 예쁜 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식물원에 가두어 놓고 예쁘게 구경하는 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너른 들판을 쏘다니는 싱그러운 목숨입니다. 아이들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기도 하고, 때로는 팔다리가 부러지기도 하는 가녀린 목숨입니다. 아이들은 제 가녀린 목숨을 스스로 건사하면서 씩씩하게 이 땅에 두 다리를 디딜 목숨입니다.

 어른들은 누구나 아이였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넘어지거나 까지거나 다치거나 울거나 웃으면서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던 목숨입니다.

 《돼지가 있는 교실》은 아무런 가르침(교훈)을 담지 않습니다. 그저, 한 사람 고운 목숨을 어버이한테서 고맙게 선물받아 꾸리는 나날을 어떻게 즐기거나 누릴 때에 아름답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줍니다. 교육책도 환경책도 아닌, 이야기책 《돼지가 있는 교실》이에요. 천천히 새기면서 읽고, 가만히 아로새기면서 마음에 담아, 내 삶을 내가 선 자리에서 알뜰살뜰 일구는 길동무로 삼을 수 있으면 참으로 기쁘겠습니다. (4344.5.1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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