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대한민국 부모님과 선생님께 드리는 글
편해문 지음 / 소나무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도 어른도 놀이가 밥이겠지요
 [사랑하는 배움책 9] 편해문,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2012)

 


- 책이름 :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글 : 편해문
- 펴낸곳 : 소나무 (2012.9.20.)
- 책값 : 1만 원

 


  어릴 적에 ‘미술학원’이라는 데를 한 해 다녔습니다. 일곱 살 적인 1981년이었는데, 이름은 미술학원이었지만 유치원하고 같은 데였어요. 그림그리기를 조금 더 자주 시키는 대목이 다를 뿐, 국민학교에 들기 앞서 한 해쯤 아이들을 맡겨 ‘놀게’ 하는 데였지 싶어요.


  내 여섯 살 적을 거의 못 떠올립니다. 다섯 살 적이나 네 살 적도 거의 못 떠올립니다. 그무렵 무엇을 하거나 어떻게 놀았는지 하나도 못 떠올려요. 꼭 일곱 살이던 미술학원 다니던 때부터 떠올려요.


  내가 떠올리는 일곱 살 내 모습은 무척 개구집니다. 틈만 나면 놀고, 틈이 없어도 놉니다. 이것을 하면서 딴생각에 잠겨 놀고, 저것을 할 적에도 딴생각에 빠져 놀아요.


  그림을 그릴 적에도 놀이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디 바깥으로 나들이를 간다 하면 그저 뒹굴고 구르고 온갖 법석을 떱니다.


  일곱 살 내 모습에 비추어 여섯 살이나 다섯 살이던 때에 얼마나 개구졌을까 헤아립니다. 얼마나 말썽을 많이 피우고, 얼마나 어머니를 힘들게 했을까 되새깁니다. 집살림이 썩 좋지 않더라도 개구쟁이 막내를 미술학원이라는 데에 넣고는 아침부터 낮까지 ‘신나게 놀리려’ 하지 않았나 싶어요.


..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놀이가 아이들 삶의 전부라는 진리를 숨기고 지우는 데 거의 성공한 것 같다 … 왕따는 아이들이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중독되기 쉬운, 매혹적인 놀이가 되었다. 소비가 아이들의 새로운 놀이가 된 것처럼 말이다 … 닭장 안에서 조금의 자존감도 느낄 수 없었던 닭들이 다른 닭들을 존중한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이야기다. 왕따는 바로 존중받지 못하고 관심받지 못한 아이들이 벌이는 존재의 드러냄이다 ..  (9, 32, 35쪽)


  놀기는 늘 부산스레 놀지만, 놀이를 잘 했다고는 떠오르지 않아요. 아주 못 하지는 않으나, 퍽 잘 하지는 않았어요. 놀이 가운데 발을 쓰는 놀이는 거의 젬병이었어요. 그래도 공차기를 할 때면 용을 쓰며 달리고 몸싸움을 했어요. 발로 공을 차는 재주는 모자라지만, 그러니까 남들처럼 발끝으로 얹어 발등으로 공을 찰 줄은 모르지만 발을 넓적하게 펴서 차곤 했어요. 문지기 노릇도 곧잘 했고요.


  공치기 놀이를 할 적에도 방망이로 공을 맞히기는 꽤 맞히지만 멀리 보내지는 못해요. 용케 삼진으로 안 죽고, 이래저래 공을 굴리는데, 동무들이 구르는 공을 잘 잡지 못하니 이럭저럭 살아 나가곤 했어요. 다만, 공을 잘 치지는 못하지만, 공은 꽤 잘 잡았고, 투수 자리에 서서 공을 던지는 일을 제법 했어요. 공을 빨리 던질 줄 몰랐으나, 노림수라고 할까, 구석구석 공을 찌른다든지, 때때로 느리게 던져서 박자를 흐트리는 일은 할 줄 알았어요.


  곰곰이 떠올리면, 내가 가장 못하는 놀이는 제기입니다. 제기를 하늘에 띄워 발로 차는 재주가 참 없습니다. 서너 번 차면 그럭저럭 차는 셈이요, 대여섯 번 차면 잘 차는 셈이고, 열 번 넘게 차는 일은 아주 드물어요. 이러면서도 제기놀이는 왜 이리도 많이 했는지, 할 적마다 술래를 도맡으면서도 제기놀이에 안간힘을 썼어요.


  하다 보면 잘 차리라 생각했을까요. 백 번 천 번 만 번을 차면 조금씩 나아지리라 생각했을까요. 1대1일로 붙는 제기놀이는 으레 술래만 했지만, 여럿이 하는 제기에서는 공격을 잘 했습니다. 수비도 잘 했어요. 제기를 차는 재주는 떨어지지만, 맞은편이 뻥뻥 찬 제기를 잽싸게 좇아가서 붙잡는다든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제기를 손바닥 아픈 줄 모르고 잡아낸다든지, 이런 대목에서 살짝 돋보였어요. 동무들은 제기놀이를 할 적에 ‘제기 차는 점수는 기본만 해라’ 하고 말했어요. 나머지는 저희들이 채울 테니, 공격과 수비 때에 잘 하면 그만이라고 받아들여 주었어요.


  무리지어 하는 제기를 앞두고 연습하던 때, 제기를 잘 차는 가시내가 ‘넌 왜 제기를 그리 못 차나?’ 하면서 ‘이렇게 차면 돼!’ 하고 가르치지만, 나는 몇 번을 보고 숱하게 따라해도 도무지 안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문간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제기차기 연습을 해도 나아지지 않아요.


.. 아이들은 오랫동안 ‘놀이’라는 은혜로운 햇살과 빗줄기를 받고 자랐다 … 아이들 삶이란 것은 놀이로 촘촘히 박음질되어야 나중에 쉽게 터지지 않는다 … 마음껏 놀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아이라야 행복을 찾아갈 수 있다 … 책 말고 재미있는 것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을 아이들이 몸으로 먼저 만나야 한다. 어디까지나 놀고 나서 그래도 시간이 남을 때 읽는 것이 책이라는 순리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  (10, 11, 12, 76쪽)


  나는 발이 퍽 느렸습니다. 몸도 꽤 여렸습니다. 싸움이 붙으면 언제나 먼저 코피가 터지며 우는 쪽이었습니다. 씨름을 붙으면 나보다 몸집이 작은 아이한테도 뒤집어지곤 했어요. 그렇지만, 이런 발에 몸에 몸집이면서 ‘오징어놀이’를 할 때에는 꽤 날렵했습니다. 내가 보아도 놀랍고, 동무들이 보아도 놀라웠어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서른여덟 먹은 오늘, 여덟 살 적 내 모습을 헤아려 봅니다. 열두 살 적 오징어놀이를 하던 때를 그립니다. 서른 해 지난 오늘에도 그무렵을 떠올리면 짜릿짜릿합니다. 돌멩이로 흙땅에 금을 그어 판을 만듭니다. 금을 안 밟으면서 적진을 가로지르던 느낌이라든지 금이 어디가 끝이고 내 발은 어떻게 춤을 추어야 맞은편 손아귀에서 벗어나 두 발을 마음껏 쓰도록 살아나는가 하고 되새길 수 있습니다.


  그때에나 이제에나 늘 매한가지인데, 힘이 세다든지 키가 크다든지 몸집이 좋다든지 하는 동무들은 늘 ‘마음을 놓아’요. 나처럼 몸도 작고 힘도 여리며 발도 느린 아이들이 적진 한복판을 가로질러 ‘외발’에서 ‘두발’이 될 줄은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늘 이런 ‘마음 놓는 동무들 빈틈’을 찌른다고 할까요. 또한, 내 편에서도 나처럼 여리고 어설픈 아이는 ‘죽거나 살거나 그만’이라 여긴다고 할까요. 내가 한복판 가로지르기를 하다가 죽더라도 맞은편 힘센 동무 하나를 붙잡고 늘어져 함께 넘어지면 둘이 같이 죽으니 ‘너 죽고 나 죽자’ 작전이라고 할 텐데, 여린 내가 죽으며 센 동무를 잡으면 우리 편한테 도움이 된다고 여겼어요.


  이런저런 까닭이 얼크러져 오징어놀이에서는 제몫을 단단히 했어요. 마지막에 적진을 달려들어 작은 동그라미에 발을 디딜 적에도 나는 덩치 우람한 동무하고 부딪히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동무하고 쿵 부딪히더라도 발이 동그라미에 먼저 닿으면 되니까 그냥 몸을 날렸어요. 몸을 날리다가 튕겨져서 흙땅에 얼굴이 긁히든 몸이 구르든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하다 보니,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면서, 나를 만만하게 보지는 않더라고요.


.. 놀이는 머리 좋아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행복을 미래가 아닌 오늘 당장 만나기 위해 하는 것이다 … 놀이는 끝났어도 놀이감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 이게 놀이다 …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물건을 함부로 사주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 텔레비전을 보라. 텔레비전은 아이들을 울타리 안에 묶어두는 일을 한다 … 아이한테 알맞은 일을 거들 수 있게 하자. 아이들은 세상을 일과 놀이를 통해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데, 어른들은 조각난 지식만을 억지로 먹이려 하니 아이들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  (21, 22, 42, 50, 98쪽)


  내가 공을 치거나 차는 일은 잘 못하지만, 두 가지나 못하다 보니 ‘받기’ 하나만큼은 잘 해내자고 생각하고 다짐했어요. 생각과 다짐에다가 기나긴 연습이 있은 까닭인지, 발야구를 하든 야구를 하든, 또 오재미를 하든 피구를 하든, 수비를 하며 늘 악착같았어요. 오재미를 할 때에는 일부러 맞은쪽 끝줄에서 몸을 옹크려요. 그러면 저쪽 끝줄에서 오재미를 이쪽 끝줄로 던지며 나를 잡으라고 할 적에, 나는 펄쩍 뛰어올라 이 오재미를 잡곤 했어요. 저쪽에서는 ‘아차!’ 하지만 때는 늦지요. 나는 이 꼼수를 ‘최종규 작전’이라고 내 이름을 붙여서 선보였어요. 맞은편에서 내가 이러는 줄 안다 하더라도, 막상 우리 편 아이들 두엇이 옹크릴 적에는 ‘그리 높이 안 던져도 우리 편이 받아서 저 녀석들을 잡을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마는가 봐요. 그래서, 우리들이 옹크리면서 기다리면 그리 안 높게 오재미가 날아오고, 우리들은 이 오재미를 펄쩍 뛰어서 잡아내지요.


  그렇지만, 이런 놀이 저런 놀이는 국민학교를 마치며 거의 다 사라집니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운동장에서 놀이를 즐기는 동무가 사라집니다. 중학생이 된 동무들은 농구를 하느니 축구를 하느니 할 뿐입니다. 놀이를 하지 않아요. 때로는 게임기를 학교에 가져온다든지, 미팅을 한다든지, 벌써 당구장에 간다든지, 담배를 태운다든지, 하는 쪽으로만 흐릅니다. 더군다나, 중학생이 된 사내들은 패싸움도 하고 깡패짓까지 합니다. 열셋에서 열넷이 되었을 뿐인데, 숱한 놀이를 스스로 몽땅 버려요. 아니, 몽땅 빼앗긴다고 해야겠지요. 중학생 때부터 오직 대학바라기 입시공부만 시키니까요. 중학생한테조차 밤 열 시까지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시키니, 놀 겨를이 없어요. 운동장에서 금긋기를 하고 땅놀이를 할라치면 어느새 이런 교사 저런 주임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두들겨패거나 욕설을 하거나 손찌검을 해요. 이렇게 ‘놀 겨를이 어디 있느냐’고 ‘문제집 하나라도 더 풀라’고 닦달을 해요.


.. 대한민국은 작은 골목을 없애 도로를 만들고 동네 마당을 메꾸어 큰 건물을 지어, 이제는 아기자기한 골목도 마당도 보기 쉽지 않다. 골목과 마당이 사라지니 아이들도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 정말 무서운 것은 게임에 가까워질수록 동무와 형제와 부모 같은 사람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것, 사랑한다는 것, 가슴 아프다는 것, 힘들다는 것, 눈물겹다는 것, 관계라는 것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무엇인지 점점 느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 아이들을 중독에 빠트려 돈을 벌려는 게임 개발업자들을 장려하고, 상을 주지만 그 피해자인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나라를 어떻게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  (53, 55∼56, 70쪽)


  중학교 다니면서 구슬치기도 딱지치기도 사라집니다. 제기차기는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오재미나 묵찌빠는 애들 놀이로 여깁니다. 중학생이 묵찌빠를 할 때에는 돈 놓고 돈 먹기를 할 생각일 뿐, 즐거운 놀이로 삼지 않습니다.


  중학생이 된 나는 무척 외롭습니다. 외로울 뿐 아니라 힘듭니다. 놀지 못하고 놀이를 생각하지 못할 뿐 아니라 놀이동무가 없습니다. 다른 동무도 나와 같았을까 궁금한데, 몽둥이에 길들고 시험성적에 주눅듭니다.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 목이 매이고, 체벌과 괴롭힘에 몸이 얽힙니다.


  생각이 자랄 수 없습니다. 생각이 뻗칠 수 없습니다. 생각이 홀가분할 수 없습니다. 학교는 우리한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학교는 나와 동무 누구나 생각 없이 주어진 틀에 맞추라고 윽박지릅니다. 배우는 터인 학교가 아니라 길들여지는 터인 학교요, 삶을 누리면서 빛내는 학교가 아닌 톱니바퀴 되는 길을 걸어가는 학교입니다.


.. 학교가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이들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려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그 속에 부모들로부터 손쉽고 길게 노동을 빼앗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 아이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피부로 느낄 수 있고, 껴안으면 가슴이 따듯해지는 실제의 것을 만나고 싶어 한다 … 마을 공동체의 중심인 (시골) 학교의 문을 닫고, 제가 사는 곳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차를 타고 멀리 있는 학교에 다니며 사이버 세계와 유행과 도시를 동경하게 만드는 것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인가 ..  (78, 87, 147쪽)


  편해문 님이 쓴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2012)를 읽습니다. 편해문 님은 우리더러 텔레비전을 버리고, 인터넷은 줄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어른 스스로 텔레비전하고 헤어지면서 인터넷하고도 살짝 멀어질 수 있을 때에, 아이들하고 놀 수 있거든요. 어른들 스스로 놀고픈 마음을 북돋울 때에 아이들도 실컷 놀 수 있어요. 어른들은 안 놀면서 아이들만 놀라 할 수 없어요. 어른 스스로 옭매이지 않는 가벼운 몸과 마음일 적에, 아이들 또한 가벼운 몸과 마음 되어 신나게 뛰놀 틈과 겨를과 터와 동무한테 길을 열 수 있어요.


  참 마땅한 말인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이토록 마땅한 말이 거의 안 받아들여집니다. 어른들 스스로 밥벌이 일에 얽매일 적에 아이들도 입시학원에 얽매여요. 어른들 스스로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느라 하루 내내 시달리니, 아이들 또한 집 바깥에서 학원을 빙빙 돌면서 입시공부에 허덕이고 말아요.


  놀아 본 어버이가 아이들을 놀게 한다지만, 놀아 본 어버이라 하더라도 ‘오늘 한국 사회에서 돈을 버는 톱니바퀴 기계 구실’을 한다면 아이들을 놀리지 않아요.


  무엇보다, 집에 텔레비전이 있으면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눈이 빠지게 들여다봐요. 텔레비전에 길든 어른들은 텔레비전에 길드는 아이들을 낳아요. 텔레비전 없이 삶과 꿈과 사랑을 생각하는 어른들은 삶과 꿈과 사랑을 생각하는 아이들을 돌봐요.


.. 모든 것을 과외와 암기, 그리고 부모의 기획력에 의존해 오로지 등수에만 몰두한 아이들이 도대체 스스로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 아름다운 것, 새로운 것, 즐거운 것을 만든 것은 언제나 놀이다. 아이들은 놀면서 생명의 기운을 몸에 담고 새로운 세계로 발을 옮긴다 … 게임의 폭력성이 아이들을 폭력에 물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사는 곳이 이미 싸움터요 전쟁터란 말이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유기농도 무엇도 아닌 누구랑 먹느냐이다. 혼자 밥 먹기만큼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이것은 혼자 놀기의 어려움을 짐작하면 이해할 수 있다. 골방에서 유기농 혼자 먹으면 오래 못 산다 ..  (200, 201, 209, 214쪽)


  아이들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갈 아이들이 아니에요. 아이들은 사랑을 받을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은 놀아야 하는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은 마음껏 땅을 박찰 아이들이요, 아이들은 개구지게 뒹굴거나 구르다가 무릎이 까지고 얼굴이 긁힐 아이들이에요. 무릎이나 어깨나 볼에 핏자국 멍자국 있는 일은 대수롭지 않아요. 아이라면 마땅히 온몸에 지는 멋진 무늬예요. 아이다운 그림이요, 아이다운 빛살이에요.


  아이는 아이답게 살아야 해요. 그리고, 어른은 어른답게 살아야 해요. 돈을 잘 벌어다 준대서 어른이 아니에요. 밥을 잘 차리고 빨래를 잘 한대서 어른이 아니에요. 망치질을 잘 하거나 톱질을 잘 하니까 어른일까요. 삶을 사랑하고 삶을 꿈꾸며 삶을 지을 때에 어른이라고 느껴요. 삶을 사랑하기에 하루하루 즐겁게 놀겠지요. 삶을 꿈꾸기에 날마다 기쁘게 놀 이야기를 찾겠지요. 삶을 짓기에 언제나 아름다이 보살피는 놀이를 이루겠지요.


  더 큰 도시에서 살아야 하지 않아요. 공무원이 되거나 고시에 붙거나 큰회사 달삯쟁이가 되어야 하지 않아요. 굳이 자가용을 몰려고 하지 말아요.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한테 자가용이 있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저희랑 손을 잡고 거니는 어른을 좋아해요. 아이들은 저희를 안거나 업으며 걷는 어른을 좋아해요. 아이들은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함께 헤엄을 치며 함께 멧골을 오르내리는 어른을 좋아해요.


  살아온 이야기를 구성지게 들려주며 살아갈 기운을 북돋우는 어른을 반기는 아이들이에요. 살아온 나날을 기쁘게 돌아보며 이야기꽃 피우는 어른을 달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이에요.


  고무줄놀이는 어린이만 하던 놀이가 아니에요. 공기놀이는 어린이만 할 놀이가 아니에요. 고누도 두고 오목도 두어요. 장기도 두고 장기알 따먹기도 해요. 흙놀이도 함께 즐기고, 풀밭에서 풀놀이도 함께 누려요. 꽃 한 송이 꺾어 서로 꽃순이 꽃돌이가 되어 주셔요. 해맑은 눈빛으로 햇살을 올려다보며 밝고 따사로운 기운을 우리 가슴에 살포시 안을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0.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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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 - 인생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한홍구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대학생은 졸업장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3] 한홍구·홍세화·김규항·강신주·김현정·간호섭·오강남, 《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

 


- 책이름 : 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
- 글 : 한홍구·홍세화·김규항·강신주·김현정·간호섭·오강남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9.18.)
- 책값 : 13000원

 


  중앙대학교 신문사에서 중앙대학교 학생들한테 도움이 되리라 여겨 ‘한국 사회 여러 갈래 지성인’ 일곱 사람을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를 그러모은 책 《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철수와영희,2012)를 읽습니다. 일곱 ‘어른’은 젊거나 어린 대학생을 만나 수수하면서 꾸밈없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젊거나 어린 대학생들은 일곱 어른 이야기를 다른 자리에서는 들은 적 없을 수 있습니다. 대학생이 되기까지, 또 대학생이 되고 나서, 또 앞으로 대학교를 마친 뒤까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다른 어른이 없을는지 몰라요.


  두 아이 아버지로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를 어렵지 않게 읽습니다. 내가 저 일곱 어른 자리에서 대학생을 마주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고 할 때에는 어떤 말을 들려줄 만한가 하고 헤아리며 차근차근 읽습니다. 옳은 정치를 말하면 좋을까요? 바른 사회의식이나 민주의식을 말하면 좋을까요? 착한 몸가짐이나 곧은 넋을 말하면 좋을까요? 아름다운 꿈이나 어여쁜 사랑을 말하면 좋을까요? 돈을 잘 버는 길이라든지, 아이를 낳고 어떻게 살림을 꾸려야 즐거울까 하는 길을 말하면 좋을까요?


.. 옛날이야기를 들어 보면 우리네와 같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역사라 하면 장군, 예술가 등 특별한 사람들만 떠올리게 되잖아요 … 대학생 모두가 다 같이 개미처럼 스펙 경쟁에 뛰어들어서 어떻게 됐습니까? 스펙을 쌓기 위해 돈과 마음과 열정을 다 쓰고 거기에 더해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까지 받지요 … 사람들이 괴로운 이유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도 재벌 2세처럼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면서 정말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해요 ..  (한홍구/14, 21. 25쪽)


  내가 대학생을 마주하며 이러구러 이야기꽃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무엇보다 이 한 가지를 먼저 대학생한테 묻고 싶습니다. “대학생인 당신은 졸업장을 내려놓을 수 있나요?”


  대학교 여덟 학기를 잘 마치고 졸업장을 따든, 대학교를 몇 학기 다니다가 그만두든, 스스로 ‘대학교 졸업장’을 잊거나 내려놓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 궁금해요. 참으로 마땅한 일이지만, 졸업장이 있어야 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지 않아요. 초등학교 졸업장이든 대학교 졸업장이든, 이런저런 졸업장이 있기에 능금이나 복숭아를 더 맛나게 먹을 수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논밭에서 두레를 하며 품을 팔 적에 더 김을 잘 맬 수 있지 않아요.


  회사이든 공장이든 공공기관이든, 대학교 졸업장 가진 이들이 달삯을 더 받습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졸업장이 있기에 더 돈을 번다고 해요. 다만,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알바를 할 적에는 졸업장이 있건 말건 돈을 더 받지 않아요. 신문배달을 하건 택배 일꾼을 하건, 이때에도 졸업장을 내밀며 일삯을 더 받을 수 있지 않아요.


  가만히 보면, 굳이 졸업장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졸업장은 아랑곳하지 않는 일터’가 무척 많아요. 우유배달이나 신문배달뿐 아니라, 시골마을 흙일꾼이나 고기잡이도 졸업장을 따지지 않아요. 과수원에서 능금을 따거나 김매기를 할 때이든, 이삿짐 나르는 일을 할 때이든, 졸업장이 있기에 ‘가산점’ 받을 일이 없어요. 어느 모로 보면, 대학생더러 굳이 ‘졸업장 내려놓기’를 안 바라도 될 만합니다.


  그러나, 나는 대학생들 누구나 졸업장을 내려놓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어요. 이를테면, 《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에 나오는 어른 일곱 사람을 만날 적에도 그런데요, 한홍구 님이나 홍세화 님이 어느 대학교를 나오건 안 나오건 대수롭지 않아요. 이들 어른 가운데 누군가가 어느 대학교에서 대학생을 가르치건 말건 대수롭지 않아요. 더 이름나다는 대학교를 나왔기에 더 어른스러울까요. 더 이름나다는 대학교에서 대학생을 가르치기에 더 이야기를 들을 만할까요.


.. 조선 시대에는 태어나자마자 신분이 규정되었다면, 지금은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할 시점에 신분이 규정되는 사회인 거죠 … 교육은 결국 경제·문화·교육 자본을 가진 이들이 그것을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것을 합리화시킨다는 것입니다 ..  (홍세화/40, 51쪽)


  오늘날 이 나라 대학생들은 스스로 말할 자리가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이 나라 대학생들은 둘레 어른한테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자리 또한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대학생이 되기까지,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찬찬히 당신들 삶을 들려주는 일이 몹시 드뭅니다. 이웃 아주머니나 아저씨한테서 당신 삶을 듣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학교에 간들, 어린이집부터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는 사이, 어느 교사가 당신 삶을 학생들 앞에서 조곤조곤 아름다이 들려줄까요. 시험성적과 교과서 이야기를 빼고, 삶과 꿈과 사랑을 어여삐 들려주는 ‘어른’은 ‘대학생이 된 아이들’ 둘레에 얼마나 있을까요.


  대학생들이 스스로 졸업장을 내려놓고 둘레 어른들하고 이야기꽃을 피우면 참 좋으리라 생각해요. 길에서 붕어빵 하나 사먹으면서 붕어빵 아줌마나 아저씨하고도 이야기꽃을 피우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면서, 기차 일꾼이나 버스 일꾼하고 방긋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날마다 먹는 밥을 누가 일구는가를 생각하면서, 봄에든 여름에든 가을에든, 시골일을 거들러 며칠이나마 ‘두레(농촌봉사활동이 아닌 두레)’를 가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삶과 흙과 해와 물과 풀과 바람을 느낀다면 몹시 좋으리라 생각해요.


  그러고는, 대학생 스스로 이녁 마음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지요. 마음속에 깃든 ‘내 빛줄기’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지요.


.. 자, 국가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군대와 정권이 국가의 실체인가요? 아니면 큰 욕심 없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국가의 실체인가요 … 지금 이 사회는 자기 본분에 충실했다고 해서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 (독도가) 한국 땅이냐 일본 땅이냐를 구분하기 이전에 한국이, 일본이 누구의 땅이냐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  (김규항/65, 74, 78쪽)


  더 많이 아는 일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더 적게 아는 일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참답게 알면서 참답게 살아가면 즐겁습니다. 착하게 알면서 착하게 살아가면 즐겁습니다. 아름답게 알면서 아름답게 살아가면 즐겁습니다.


  이 땅 대학생뿐 아니라 ‘대학생 아닌 젊은이’ 누구나, 참답고 착하며 아름답게 생각하고 살아갈 때에 가장 빛나면서 스스로 즐거우리라 느껴요.


.. 우리 사회는 가부장적인 데다가 이상하기까지 한 사회죠 ..  (강신주/99쪽)


  일삯을 더 주는 데에서 일하기에 즐거우리라 느끼지 않아요. 공무원 뽑는 시험이나 사법고시 같은 시험에 붙는대서 즐거우리라 느끼지 않아요. 스스로 ‘젊은 대학생 삶’을 밝히는 길을 걸어갈 때에 즐거우리라 느껴요. 돈을 삼백오십만 원 받기에 더 즐겁지 않아요. 돈을 삼백사십만 원 받아도 되고, 삼백이십만 원 받아도 되며, 삼백만 원 받아도 돼요. 이백구십만 원도 되며, 이백팔십만 원도, 이백만 원도 되지요. 그러니까, 일삯으로 다달이 구십만 원을 받든 팔십팔만 원을 받든 아랑곳할 까닭이 없어요. 스스로 얼마나 즐거운 꿈을 꾸면서 아름답게 사랑하는 삶인가를 생각할 수 있으면 돼요. 꿈과 사랑이 없이 돈을 벌거나, 이름값을 얻거나, 권력을 누리는 일이 나한테 참으로 즐거울 만할까요.


  저 금강산이나 백두산이나 한라산이나 지리산을 단숨에 올라야 즐거울까요. 헬리콥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가로질러야 즐거울까요. 한겨울에 천천히 오르다가 그예 오백 미터쯤 오르고 더는 못 올라도 즐겁습니다. 스스로 바라보는 삶이 있고, 스스로 누리는 삶이 있을 때에 즐겁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꼭 열 숟가락을 채워야 즐겁지 않아요. 한 숟가락을 덜어도 즐거워요. 두세 숟가락을 던 다음, 내 숟가질을 ‘조금 적게 푸면’서 숫자로 열 차례를 맞추어도 즐거워요. 때로는 한 끼니쯤 슬그머니 거를 수 있어요.


  두 아이와 살아가며 이런 일은 흔히 겪거든요. 아이들 데리고 바깥으로 나들이를 나왔는데 물이나 먹을거리가 얼마 없으면, 이 몫을 아이들한테 줍니다. 어버이가 이 몫을 누리지 않아요. 어버이는 아이들이 얼마 없는 이 몫을 누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배가 불러요.


.. 이것을 ‘인내천(人乃天)’이라 하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입니다. 내 속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한울님, 즉 신이고 그것이 나의 본질이니, 나와 신이 같다는 거죠. 이렇게 떳떳한 생각이 어디 있겠어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당당해지고, 꿀리는 것 하나 없이 의연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나만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내 이웃도 그러합니다. 남의 마음속에도 신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 남을 하느님 모시듯 모십니다 ..  (오강남/213쪽)


  《내가 나일 때 가장 빛난다》를 빚은 중앙대학교 학생들이 앞으로 다음 책 하나 새롭게 빚을 수 있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집에서 아기를 낳고 예쁘게 사랑하는 여느 어머니, 집에서 아이들 천기저귀를 빨래하며 집일을 돌보는 여느 아버지, 시골에서 나락 심고 마늘 심으며 고구마 심는 여느 할머니,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으며 김을 훑는 여느 할아버지, 작은 가게이든 커다란 마트이든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여느 아주머니, 시외버스를 모는 여느 아저씨, 대학교에서 청소를 하는 여느 사람들, 인문사회과학책방이나 헌책방에서 일하는 사람들, …… 대학생 둘레에서 ‘졸업장’하고는 아무런 끈도 줄도 닿지 않으면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조곤조곤 주고받는 이야기로 예쁜 책 하나 빚을 수 있으면 어떨까 싶어요. 부디, 맑게 흐르며 맑게 빛나는 냇물이 되어 들판과 숲과 바다를 맑게 적시는 젊은이로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요. (4345.9.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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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언 이야기 -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한 시간 높새바람 10
리언 월터 틸리지.수전 엘 로스 지음, 배경내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에서 삶자리 찾으려는 사람들
 [어린이책 읽는 삶 23] 리언 월터 틸리지, 《리언 이야기》(바람의아이들,2006)

 


- 책이름 : 리언 이야기
- 글 : 리언 월터 틸리지
- 그림 : 수잔 엘 로스
- 옮긴이 : 배경내
- 펴낸곳 : 바람의아이들 (2006.4.1.)
- 책값 : 6800원

 


  서양이라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아메리카라는 땅을 총칼을 앞세워 빼앗은 뒤, 이 널따란 땅을 일구려고 노예를 떠올렸습니다. 서양은 일찍부터 노예제도를 부렸거든요. 서로서로 총칼을 앞세워 싸움을 벌이면서, 싸움에서 이긴 쪽은 싸움에서 진 쪽을 마음껏 죽이거나 괴롭히거나 노예로 삼았어요. 서양나라 사람들은 싸움에서 지면 죽거나 노예가 되는 줄 느끼며, 이웃나라보다 힘이 더 세지거나 무기를 잘 갖추자고 생각했습니다.


  서양나라 사람은 아메리카를 북쪽과 남쪽 모두 거머쥘 만합니다. 왜냐하면 평화가 아닌 전쟁을 생각했고, 평화 아닌 전쟁으로 돈과 힘과 이름을 거머쥐려 했어요. 오늘날에도 서양나라 사람은 전쟁을 생각하고, 전쟁을 앞세웁니다. 전쟁 아닌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나,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쥔 이들은 으레 전쟁으로 권력을 지키려 합니다.


  서양나라 사람은 일찍부터 아프리카 사람을 노예처럼 사로잡아 부렸습니다. 곧, 아메리카를 서양으로서는 ‘새터’로 삼아 흙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마련하려 할 때에, 아프리카 사람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부려야겠다고 생각했겠지요.


.. 어릴 적엔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는 왜 까만 피부를 갖고 태어난 거지, 하며 내 피부색을 저주하곤 했었단다. 그 시절엔 백인들이 우릴 ‘흑인’이라고 부르지 않았어. ‘소수자’라고 부르지도 않았지. 대신 ‘유색인’ 또는 ‘껌둥이’라고 불렀지 … 그 시절엔 흑인이 교육을 받아 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거든. 흑인들은 은행이나 상점에서 일할 수가 없었어.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말이야 ..  (9, 16쪽)


  돈과 이름과 힘으로 누군가를 부리거나 짓밟는 흐름은 예나 이제나 늘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요즈음이라 해서 나아지거나 달라진 구석은 없다고 느낍니다. 사람들 눈에 안 뜨이도록 감추어서 그렇고, 사람들 스스로 깨달으려 안 하니 못 깨달아서 그렇습니다. 서양나라 재벌과 정치행정은 바로 아프리카나 아시아나 남아메리카 사람들 품을 헐값으로 부리며 돈이며 이름이며 힘이며 쌓아올립니다. 축구공만 아시아 가난한 나라 아이들을 부리며 꿰매게 하겠습니까. 배구공은 누가 꿰맬까요. 야구공은 어떻게 꿰맬까요. 솜과 천은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까요. 커피와 카카오는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까요.


  누구나 제 먹을거리를 스스로 흙을 일구거나 숲에서 얻지 않는다면, 평화는 사라지고 전쟁이 찾아듭니다. 누구나 제 먹을거리를 몸소 일구거나 얻지 않는다면, 오직 돈을 벌어들여 돈으로 먹을거리를 바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돈을 벌어 먹을거리 바꾸는 일이 평화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돈을 버는 일자리는 얼마나 평화로울까요. 교사가 되거나 공무원이 되거나 회사원이 되는 길은 얼마나 평화를 아끼거나 사랑하는 삶이 될까요. 돈을 버는 자리에 서면서 얼마나 슬기롭거나 아름답거나 참다운 꿈을 꿀까요.


.. 그때 우리 집엔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었단다. 그래서 우린 저녁을 먹고 난 뒤나 휴식 시간이 되면, 불가에 둘러앉아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단다 … 우리에게는, 누구 옆에 앉는지 누구 곁에서 사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어. 정문으로 다닐 수 있는지 없는지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어.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이 자유와 민주의 땅, 미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결정하는 게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였어 ..  (22, 96쪽)


  리언 월터 틸리지라는 분이 들려준 이야기를 담은 어린이책 《리언 이야기》(바람의아이들,2006)를 읽습니다. 미국땅에 노예로 사로잡혀야 했던 할머니 할아버지를 둔 어린 리언이 자라나는 동안 노예제도가 사라졌다 하고, 리언 같은 어린이를 비롯해 숱한 ‘까망둥이 사람들’한테 자유와 평등이 주어졌다 합니다. 다만, 이 자유와 평등은 평화롭게 싸우며 스스로 얻었다고 해요.


  참말, 자유와 평등과 평화는 ‘싸워야 얻는다’고들 말하는데, 사회나 정치나 경제나 문화가 모두 ‘민주주의도 아니’요 ‘자유민주주의는 더더구나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싸워야 얻을 수 있구나 싶어요. 아니면,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싸우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지 몰라요. 곧, 민주주의는 하나도 안 좋은 제도라 할는지 모르지요. 자유도 평등도 평화도 아주 마땅히 누구나 골고루 누리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라, 서로서로 싸워야 겨우 자유나 민주나 평화를 누린다면, 이런 제도는 하나도 올바르지 않아요.


  푸대접이 없고 따돌림이나 괴롭힘이 없어야지요. 겉모습이나 돈이나 이름값 따위로 어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밟고 오르는 일이 없어야지요. 아름다운 사랑이나 꿈을 싸워서 얻어야 한다면, 싸우지 않고서는 거머쥘 수 없다면, 이러한 곳은 사람들이 살 터, 곧 삶터가 아니라 싸움터일밖에 없다고 느껴요. 사람들이 살 곳은 ‘삶터’여야지 ‘싸움터’에서는 살아가지 말아야 한다고 느껴요.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옛날 같은 노예제도는 사라졌다지만, 새로운 오늘날은 외려 더 뿌리깊고 단단하며 무서운 계급제도라 할 수 있어요. 겉보기로는 채찍이나 총칼로 윽박지르지 않으나, 속보기로는 돈줄을 꽉 움켜쥐며 괴롭히거나 짓밟거나 따돌려요. 참 무시무시하다 할 텐데, 이렇게 무시무시한 나라 미국에서 사람들이 왜 살아야 하나 궁금해요. ‘까망둥이 사람들’은 미국땅에서 평화로운 행진을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모두 함께 ‘평화롭게 미국을 떠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 무더운 여름철에 일을 하다 보면, 존슨 씨네 아이들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는지 궁금해졌단다. 존슨 씨 댁에는 나랑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이 있었어. 우리가 들에서 일을 하고 있는 동안, 그 아이들은 호두나무 그늘 아래 앉아 레모네이드를 마셨단다 … 학교에서 우리 집까지는 6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지만, 매일 그 길을 걸어다녀야 했어. 어떤 아이들은 우리 집보다 더 먼 곳에 살았는데도 매일같이 걸어다녔지. 백인 아이들은 학교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말이야. 아침에 학교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살을 에이는 추위를 견디며 숲속에 들어가 장작을 패는 거였어 ..  (29, 35쪽)


  까망둥이 사람들이 미국을 떠나 고향나라로 돌아가면 참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프리카를 서양나라 구호품이나 자원봉사나 무슨무슨 원조기금으로 도우려 하지 말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사로잡혀 다른 데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제 삶터를 제 손으로 씩씩하게 일굴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나라는 시커먼 꼼수를 써서 아프리카 나라들끼리 전쟁을 벌이도록 부추겨요. 나라 스스로 내전을 벌이고 쿠테타가 일어나도록 뒤에서 못된 짓을 해요. 모두들 이녁한테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삶을 헤아리며 이녁 삶자리가 꿈자리가 되도록 가꾸어야지 싶어요. 돈을 벌 일자리가 아니라 사랑을 나눌 사랑자리를 돌봐야지 싶어요.


.. “저 애한테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그 아이가 대답했어. “실례한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그 아이 아버지는 아들의 뺨을 때리더니 이렇게 말하더구나. “두 번 다시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마라. 앞으로 절대 껌둥이들한테 실례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돼. 검둥이가 네가 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서 있을 때는 발로 차면 되는 거야.” 그러면서 그 아이에게 나를 발로 차라고 시켰단다 ..  (76∼77쪽)


  나는 생각해요. 자유는 싸워서 얻지 않아요. 스스로 자유일 때에 자유를 얻어요. 평등과 평화 또한 싸워서 얻을 수 없어요. 스스로 평등이요 평화일 때에 평등과 평화를 누려요.


  돈을 벌어서 살림살이 나아지기를 꾀하니 돈을 벌 일자리를 찾아 모두들 도시로 떠나고 미국으로 가겠지요. 학력을 얻어서 돈을 잘 벌 일자리를 바라기에 모두들 도시로 떠나고 미국으로 가겠지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이들한테는 학력도 권력도 무슨무슨 감투도 부질없어요. 대통령이 들판에 서면 멸구와 피가 사라지겠습니까. 군인이 총을 들고 밭뙈기에서 윽박지르면 벌레가 사라지겠습니까. 지식인이 책을 쓰고 논문을 쓰며 신문기사를 쓰면 나락이 쑥쑥 자랄까요. 오직 흙을 사랑하는 손길만이 흙을 북돋웁니다. 오직 나무를 아끼는 손길만이 맛난 능금이랑 배랑 복숭아를 얻습니다. 오직 풀을 보살피는 손길만이 나락도 푸성귀도 보리도 옥수수도 살가이 일굽니다.


  생각을 스스로 연 사람들이 스스로 미국을 떠나면 좋겠어요. 마음을 스스로 연 사람들이 스스로 도시를 떠나면 좋겠어요. 저마다 가장 사랑스러운 삶터를 찾고, 누구나 가장 꿈같은 삶자리를 헤아리면서 누리기를 빌어요. (4345.9.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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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
최수연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아이들은 오직 삶을 배웁니다
 [책읽기 삶읽기 106] 최수연, 《산동네 공부방》(책으로여는세상,2009)

 


  아이들은 오직 삶을 배웁니다. 아이들 누구나 삶 아닌 다른 무엇을 배우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삶을 가르칩니다. 어른들 누구나 삶 아닌 다른 무엇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슬기롭게 살아가는 어버이는 슬기롭게 일구는 삶을 물려줍니다. 돈에 얽매인 어버이는 아이들 또한 돈에 얽매인 채 살아가도록 이끕니다.


  도시에 있는 학교는 아이들이 도시에 남아 도시 회사원이나 노동자가 되도록 가르칩니다. 시골에 있는 학교는 아이들이 하루 빨리 시골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 회사원이나 노동자가 되도록 가르칩니다. 곧, 도시나 시골이나 똑같이,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노동자 되어 ‘월급을 받을 때’가 되어야 ‘축하할’ 일이 됩니다. 커다란 도시에 있는 이름난 회사나 공공기관에 일자리 얻어 들어가면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학교 앞문에 걸개천이 걸립니다. 학교에서는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조그마한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살아가거나 바다에서 고기를 낚는 아이가 되면,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는 쳐다보지 않습니다.


.. 공부방을 하든 탁아방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그 동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앉아 잠시 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참으로 삭막해 보였다. ‘산’동네인데도 정작 사람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작은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 아이들은 신문에 실릴 만한 내용을 직접 정하고, 취재 일정과 편집 계획까지 스스로 세웠다. 그리고 학교 수업이 끝난 뒤 공부방에서 빌려준 카메라를 메고 그달의 기삿거리를 찾아 파출소며 동사무소, 소방소, 각종 종교단체까지 찾아가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했다. 아이들은 마치 진짜 신문기자가 된 듯 진지하게 취재를 했고, 그 과정을 너무나 재미있어 했다. 취재를 끝낸 뒤 아이들은 기사를 쓰고, 기사에 어울리는 그림까지 그려 넣는 등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온갖 기량을 모아 신문을 만들어 갔다 ..  (32, 36, 138∼139쪽)


  오늘날 학교에서는 꿈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럴밖에 없는 까닭이, 오늘날 학교에서 교사를 맡는 이들 또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지식만 배우거나 쌓았어요. 교사들 또한 교사가 되기까지 ‘꿈을 키우는 삶’이 아니라 ‘교사가 되어 월급을 받는 일자리를 얻’도록 땀을 흘렸어요.


  교사가 하는 일이란 ‘교과서 진도를 나가’거나 ‘대입시험 문제를 잘 맞히도록 하나하나 뽑아내는’ 일이에요. 교사는 아이들 앞에서 ‘꿈을 꾸는 삶’을 몸소 보여줄 수 없는 얼거리예요. 교사 스스로 꿈을 안 품기도 하지만, 꿈을 품은 교사조차 아이들 앞에서 섣불리 꿈을 보여주지 못해요.


  아이들은 유아원과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거치면서 ‘꿈을 잃는 길’을 걸어요. 유아원도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더 빨리 영어를 가르치고 더 많이 지식을 쌓도록 애쓸 뿐, 정작 아이들이 온삶을 누리며 꿈을 이루도록 하려는 데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셔요. 아이들한테 ‘자연 그림책’이나 ‘세밀화 그림책’을 손에 쥐어 주거나 읽히지만, 막상 아이들이 누릴 숲이 어린이집 언저리에 없어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지만, 참말 여느 살림집 둘레에 아이와 어른이 다 함께 뒹굴 숲이 없어요.


  숲에서 나무를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그늘을 느끼고 잎과 꽃과 열매를 보지 않고서, 나무도감만 들여다보면 무얼 하나요. 나무도감이나 꽃도감이나 나비도감을 보면서 나무랑 꽃이랑 나비 이름은 훤히 꿰뚫는다지만, 아이를 둘러싼 마을이나 학교 어디에도 동백나무이든 배나무이든 복숭아나무이든 이팝나무이든 느티나무이든 없는걸요.


  어린이는 뽀로로 만화를 볼밖에 없어요. 푸름이는 연예인과 가수 얼굴을 볼밖에 없어요. 어른은 연속극과 영화에 나오는 배우를 볼밖에 없어요. 꿈을 보지 않는 어른이기에 꿈을 느끼지 못하고, 꿈과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어른이기에, 아이들이 꿈을 껴안으며 살아가도록 돕지 못해요.


.. “너, 이놈의 자식, 뭐하는 짓이야!” 그래도 순길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던 순길이 아버지는 내가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순길이를 때리려고 했다. 그때 순길이가 한마디 했다. “아빠, 엄마랑 계속 싸우면 나는 이렇게 될 겁니더!” … “오늘은 행길이 어머니와 영생이 어머니, 죽기 어머니는 글자를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무슨 글자부터 써 볼까요? 글을 몰라 그동안 답답했지요? 영생이 어머니부터 말씀해 보세요.” “내 이름 석 자 써 보는 기 소원이라요.” “맞아요, 이름 석 자라도 쓰모 원이 없겄어요.” … “큰이모, 파 없어요? 풋고추는요? 달걀은요?” 그럴 때마다 나는 구박 아닌 구박을 했다. “그냥 먹어!” “이왕 먹는 건데 잘해 먹어야지요. 아∼아, 내가 할 테니까 큰이모는 걱정 마쇼.” 말도 늘 짧았다. 그래서 공부방 선배들한테서 잔소리를 많이 듣기도 했다. “니는 할매 나이가 몇 갠데 반말 찍찍 하고 있노?” “아 행님, 정답고 좋잖아예!” ..  (103, 165, 243∼244쪽)


  최수연 님이 빚은 《산동네 공부방》(책으로여는세상,2009)을 읽습니다. 최수연 님은 부산 달동네에서 공부방 교사로 일합니다. 즐겁게 일하고, 씩씩하게 일하며, 사랑스레 일합니다. 다만, 최수연 님이라고 뾰족하게 수가 나지는 않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도시에서 이런저런 일자리를 얻기까지 공부방지기나 마을지기 구실을 하며 곁에서 어깨를 토닥일 수 있을 뿐입니다. 달동네에서 시원스러운 작은 샘터지기 노릇을 할 수 있으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톱니바퀴에 맞물리듯 머리와 마음이 굳어지도록 흐르는 일을 막거나 거스르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달동네 공부방은 도시에 있는 조그마한 숲일 테지요. 모두들 악다구니를 쓰고 쳇바퀴에 톱니바퀴에 올가미에 허덕이지만, 이 슬프고 고단한 삶에 새힘을 북돋우는 맑은 샘물 한 그릇 떠서 내미는 조그마한 숲일 테지요.


  사람은 지나치게 많고, 샘가는 아주 조그맣습니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는 끝없이 넓으며, 샘터는 아주 조그맣습니다. 밥 한 그릇과 물 한 사발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하고 나눌 수 있을까요. 밥 한 숟가락과 국 한 숟가락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밥 한 그릇을 마련해서 나누려 하기에, 이 밥 한 그릇이 백 그릇으로 가지를 뻗고 만 그릇으로 뿌리를 내리리라 믿어요. 물 한 사발 길어올려 나누려 하기에, 이 물 한 사발이 백 사발로 늘어나고 만 사발로 샘솟으리라 믿어요.


  아이들은 오직 삶을 배웁니다. 삶을 배우는 아이들 앞에서 삶을 보여주고 삶을 누리며 삶을 사랑하는 하루를 빛낸다면, 조그마한 숲은 커다란 도시를 살찌울 수 있어요. 삶을 아끼고 삶을 노래하며 삶을 좋아하는 손길과 마음결과 꿈씨가 얼크러지면서, 조그마한 숲살림이 커다란 나라살림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회사원과 공무원만 기르는 모든 학교가 문을 닫기를 빌어요. 사람을 가르치고 사랑을 노래하는 조그마한 숲이 차츰 늘어나기를 빌어요. 전쟁과 경쟁으로 치닫는 모든 학교가 사라지기를 빌어요. 사람을 배우고 사랑을 주고받는 조그마한 숲이 활짝 피어날 수 있기를 빌어요. (4345.9.13.나무.ㅎㄲㅅㄱ)

 


― 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 (최수연 글,책으로여는세상 펴냄,2009.2.23./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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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의 신기한 여행 1 - 클래식 라이브러리 1
셀마 라게를뢰프 지음, 배인섭 옮김 / 오즈북스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꿈을 꾸기에 꿈을 이루는 삶
 [어린이책 읽는 삶 24] 셀마 라게를뢰프, 《닐스의 신기한 여행 (1)》(오즈북스,2006)

 


- 책이름 : 닐스의 신기한 여행 1
- 글 : 셀마 라게를뢰프
- 옮긴이 : 배인섭
- 펴낸곳 : 오즈북스 (2006.10.30.)
- 책값 : 9000원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을 꾸면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꿈을 꾸는 그 자리에서 꿈을 이루고, 누군가는 꿈을 이루기까지 퍽 오랜 나날을 들입니다. 꿈을 꾸는 사람은 꿈을 이루지만, 꿈을 안 꾸는 사람은 꿈을 안 이룹니다.


  꿈을 꿀 때에는 가장 맑으며 가장 빛나는 넋이어야 합니다. 가장 환한 사랑으로 살아가며 가장 너른 믿음으로 지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면서 믿고,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고운 사랑은 꿈을 이루도록 이끄는 밑거름이요, 너른 믿음은 꿈을 즐기도록 북돋우는 밑바탕입니다.


..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을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다만 아버지와는 다른 걱정을 했다. 어머니의 걱정은 아이가 너무 거칠고 버릇이 없는데다가, 동물들에게 냉혹하고, 사람들에게 못되게 군다는 것이었다. “아, 신께서 아이의 나쁜 마음을 몰아내고 다른 마음을 선물해 주셨으면!” … “내 뿔 위에 올라타고 놀아 보게 해 줄게.” “와 보라니까, 와 보라고. 네가 던진 나막신으로 등을 맞았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너도 한 번 제대로 맛봐야지!” … “그 수많은 못돼 먹은 일들에 대해서 단단히 보상을 해 줄 테니까. 너를 걱정하면서 네 엄마가 숱하게 흘렸던 눈물에 대해서도.” ..  (19∼20, 33쪽)


  이른새벽에 누런쌀을 씻어 불립니다. 이른새벽에 누런쌀을 씻어 불려야 비로소 아침밥을 지을 수 있습니다. 흰쌀이라면 몇 차례 스윽스윽 씻고 나서 곧바로 물을 맞추고 안칠 수 있겠지요. 누런쌀은 잘 불 때까지 제법 기다려야 합니다. 일찌감치 하루를 열며 식구들 맛나게 먹을 밥을 생각해야 합니다.


  쌀을 씻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새벽마다 쌀을 씻는가 하고. 나는 왜 날마다 식구들 밥을 차리고 집일을 도맡는가 하고.


  엊저녁 미룬 설거지를 마칩니다. 오늘 할 빨래가 얼마쯤 되는가 가늠합니다. 이러는 동안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나는 어린 나날부터 ‘집일을 즐겁게 도맡으며 살림을 꾸리는 아버지’로 살고 싶다는 꿈을 꾸었어요. 내 둘레 어른들 누구나 어머니나 아줌마한테만 모든 집일을 맡기는 아버지나 아저씨였어요. 내 또래 또한 가시내가 집일을 해야 하고 사내는 집일을 안 건드려야 하는 줄 여겼어요. 사촌동생들은 사내이고 가시내이고 아예 집일을 모를 뿐더러 하지 않았어요.


  나는 이 모습이 도무지 말이 안 된다고 느꼈어요. 집일을 안 하거나 부엌일하고 등을 지는 사내라면 사내 구실을 못 하는 셈이라고, 아니 사람 구실을 안 하는 셈이라고 느꼈어요. 사내라면, 또 가시내라면, 아니 사람이라면, 스스로 먹고 입고 잠자는 모든 것을 스스로 가누거나 꾸릴 수 있어야 한다고 느꼈어요.


.. 닐스는 밝은 녹색의 사각형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그것은 지난해 가을 파종한 호밀밭이었다. 겨울 동안 눈에 덮인 채로 녹색으로 자라난 것이었다 … 닐스는 스코네에 대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았던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이날 단 하루 만에 볼 수 있었다 … 작은 다람쥐도 자기 집에서 도토리를 꺼내서는 가지 위에 앉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찌르레기가 수염뿌리를 물고 날아갔고, 검은방울새는 나무 꼭대기에서 노래했다. 그때 닐스는 해가 이 모든 작은 생명체들에게 말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깨어나라, 그리고 너희들의 집에서 나와라. 내가 여기 왔다.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39, 42, 66쪽)


  꿈이란 스스로 꾸는 대로 이룹니다.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꿈이든, 스스로 슬프다고 여기는 꿈이든, 스스로 즐겁다고 여기는 꿈이든, 스스로 아프다고 여기는 꿈이든, 스스로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고 마음에 살포시 품으면, 이 꿈은 어느 날 천천히 이루어집니다.


  꿈을 품는 사람은 스스로 품는 꿈이 어느 길로 나아가는가를 언제나 돌아봅니다. 꿈을 품는 사람은 꿈이 이루어질 길을 씩씩하게 걸어갑니다. 살아가며 하나둘 깨닫는데, 꿈이 있기에 사람들 누구나 목숨을 이어요. 꿈을 생각하기에 오늘 하루 새롭게 맞이해요. 꿈을 천천히 이루기에 내 삶은 내가 마음에 담은 모양대로 가만히 빛을 내요.


  셀마 라게를뢰프 님이 쓴 《닐스의 신기한 여행》(오즈북스,2006) 첫째 권을 읽으며 낱낱이 느낍니다. 이 이야기책에 나오는 ‘닐스’는 스스로 하찮다고 생각합니다. 닐스는 스스로 이녁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벗어나 집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못난 짓을 일삼는 닐스는 스스로 참 못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꿈대로 이루어집니다. 집요정을 괴롭히다가 바야흐로 ‘집요정처럼 자그마한 사람’으로 바뀌어요. 흰거위랑 집을 떠나 멀리멀리 하늘을 날면서 온누리를 떠돌아요.


.. 기러기들은 길들여진 기러기들이 자기들의 말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게 하려고 아래로 내려가 소리쳤다. “함께 가자. 그러면 너희들도 날고 헤엄치는 법을 배우고 싶어질 거야.” 그러나 길들여진 기러기들은 오히려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몇 마디 중얼거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기러기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자꾸만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배고프고 추울 것이다, 당연하다. 닐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신에 일하지 않아도 되고, 공부를 할 필요도 없었다 … 닐스는 자신이 앞으로 보게 될 모든 것들과 경험하게 될 모든 모험들을 하나하나 그려 보았다. ‘집에서 일이나 하면서 이런저런 욕이나 먹는 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아, 기러기들의 여행에 함께할 수 있다면, 그러면 내 몸이 변한 것이 하나도 괴롭지 않을 텐데!’ ..  (43, 93, 94쪽)


  세 권으로 나누어 옮겨진 《닐스의 신기한 여행》 첫째 권에서 닐스는 아직 ‘스스로 꿈꾸었기에 이루어진 삶’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다만, 닐스한테 찾아온 ‘집요정처럼 자그마한 사람’이 된 삶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닐스는 스스로 이러한 삶을 누려야 한다고 받아들입니다. 닐스는 스스로 이렇게 살며 무언가 새롭게 배워야 한다고 받아들입니다.


  이리하여 닐스한테는 새로운 삶이 펼쳐집니다. 이제껏 짐승들을 괴롭히거나 들볶던 짓이 어떠한 바보짓인가를 몸소 느낍니다. 짐승과 벌레와 풀과 해와 바람과 구름이 들려주는 속삭임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람쥐하고도 여우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기러기나 황새나 거위 등에 업힌 채 하늘을 날아다니며 지구별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이웃과 동무와 어버이를 새로운 눈으로 마주합니다.


  아, 그래요. 닐스는 ‘어른이 되고’ 싶었군요. 닐스는 철부지 어린이에서 벗어나, 바야흐로 씩씩하며 아름다운 어른이 되고 싶었군요. 날마다 개구진 짓으로 말썽을 부리는 바보가 아닌, 언제나 맑게 웃고 환하게 노래하는 아름다운 어른이 되고 싶었군요.


  맑게 웃는 삶을 누리고 싶기에 기러기들과 먼 길을 돌아다니며 ‘맑음’과 ‘웃음’이 무엇인가를 몸소 겪습니다. 환하게 노래하는 아름다움을 빛내고 싶기에 여러 들짐승을 도와주면서 ‘환함’과 ‘노래’가 무엇이요, ‘아름다움’을 어떻게 읽는가를 몸소 익힙니다.


.. (기러기 우두머리) 아카가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다람쥐, 토끼, 피리새, 박새, 딱따구리, 종달새 같은 숲과 들판의 작은 동물들과 친하게 지내도록 해 봐. 그들과 친구가 되면 위험을 미리 알려주고, 숨을 곳을 일러 주고, 아주 위급한 경우에는 너를 보호해 주려고 함께 힘을 합칠 거야.” … 처음 쿨라베리에 온 모든 동물들은 왜 이 축제를 두루미 대무도회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춤에는 야성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달콤한 동경이 감정을 일깨웠다. 이 순간 싸움을 생각하는 동물은 하나도 없었다 … ‘어떻게 아카, 이크시, 카크시, 그리고 모르텐 같은 새들에게, 그리고 또 다른 새들에게 총을 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정말 아무 생각도 없단 말인가?’ ..  (96, 137, 185쪽)


  닐스한테는 마땅한 스승이 아직 없었습니다. 뭐랄까, 닐스한테는 좋은 동무조차 아직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닐스는 닐스 스스로 마땅한 스승이 되지 않았고, 닐스는 닐스 스스로 좋은 동무가 되지 않았어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스승이 되고 스스로 동무가 돼요. 어버이는 아이한테 삶을 가르치는 스승이면서 아이와 함께 노는 동무예요. 아이는 어버이한테 사랑을 가르치는 스승이면서 어버이와 함께 노는 동무예요. 그런데 닐스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닐스 스스로도, 또 닐스 어버이도, 또 닐스 둘레 동무들도, 서로서로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모두들 삶을 슬기롭게 바라보지 못했어요. 모두들 삶을 사랑스레 껴안지 않았어요. 모두들 삶을 꾸밈없이 마주하지 못했어요. 모두들 삶을 아름답게 어깨동무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닐스는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닐스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새로운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닐스는 꿈을 꾸어야 했고, 꿈을 누려야 했으며, 꿈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 “한 번이라도 저녁에 덤불 속에서 들려오는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으면서 여기 암벽가에 앉아 저기 저 너머 칼마르 해협을 바라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섬이 다른 섬들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생겨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 “그렇다고 너희들이나 농부들도 어쩌지 못했던 그 여우들을 설마 나처럼 작고 힘없는 꼬마가 물리쳐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작고 똑똑한 이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 숫양이 대답했다 … ‘좋아, 이제 너를 도울 수 있는 것은 너 자신뿐이야, 닐스 홀게르손!’ 닐스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제 네가 야생의 세계에서 보낸 몇 주일 동안 무언가 배웠다는 것을 증명해 봐야 해.’ ..  (208, 227, 271쪽)


  내가 꿈을 꾸는 어버이일 때에 아이들도 꿈을 꾸는 아이들로 살아갑니다. 내가 좋은 사랑을 빚는 어버이일 때에 아이들도 좋은 사랑을 빚는 아이들로 살아갑니다. 내가 곱게 노래하는 어버이일 때에 아이들도 곱게 노래하는 아이들로 살아가요.


  내가 스스로 울타리에 갇힌 바보짓을 한다면, 아이들도 제 어버이한테서 울타리에 갇힌 바보짓을 물려받습니다. 내가 스스로 쳇바퀴를 맴도는 얼간이 꼴을 한다면, 아이들도 제 어버이한테서 쳇바퀴를 맴도는 얼간이 꼴을 이어받습니다.


  환히 웃으며 부엌일을 하는 어버이 곁에서 아이들은 환히 웃으며 부엌일을 하는 즐거움을 천천히 물려받습니다. 신나게 노래하며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는 어버이 곁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노래하며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는 재미를 찬찬히 이어받습니다.


  어버이가 스스로 빛을 나누는 삶을 누릴 때에, 아이들은 이 빛이 참으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가 스스로 사랑을 빚는 삶을 누릴 때에, 아이들은 이 사랑이 더없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가 스스로 꿈을 기쁘게 이루는 삶을 누릴 때에, 아이들은 바야흐로 이 꿈을 꾸면서 아이 깜냥껏 새로운 삶을 엽니다.


.. 닐스 홀게르손은 한 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이 도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특별하다는 것이었다. 뒷골목의 예쁜 집들도 보지 못했다. 검정색 담장과 하얀색 모퉁이, 그리고 번쩍이는 창틀 아래로 빨간 화분받침이 있는 자그마한 집들이었다. 울긋불긋 꽃들이 활짝 피어난 정원과 덩굴로 뒤덮여 있는 폐허의 놀라운 아름다움도 스쳐 지나고 말았다 … 부모들은 모두 이렇게도 간절하게 자기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닐스는 여태껏 그런 줄을 몰랐다. 아니, 아이들이 곁에 없다고, 자신의 삶이 끝난 것처럼 그렇게 살아간단 말인가! … “어디로 가고 있니? 어디로 가고 있니?” 기러기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책도 숙제도 없는 곳으로!” 닐스가 소리쳤다. “오, 우리도 데리고 가 줘! 우리도 데리고 가라고!” 아이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올해는 안 돼. 내년에 보자!” ..  (248, 307, 316쪽)


  가을비가 내립니다. 여러 날 잇달아 내리는 가을비는 나한테 가을비 노랫소리를 들려줍니다. 가을비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가을비 빛깔이 알록달록합니다.


  가을비를 마주하며 가을빛을 느끼는 나라면, 나를 어버이로 삼으며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가을빛을 느끼는 가슴을 물려받아 키웁니다. 가을비를 마주하며 가을빛을 안 느끼거나 못 느끼는 나라면, 나하고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은 빗소리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가을비가 지붕을 적십니다. 가을비가 도랑을 타고 흐릅니다. 가을비가 후박나무를 적십니다. 가을비가 들판을 덮습니다.


  가을비 맞은 잎사귀는 더 짙게 푸른 빛깔입니다. 가을비 내리는 하늘은 더 하얗고 더 파랗습니다. 가을비 찾아드는 날은 더 선선하고 서늘합니다. 가을비 노랫소리 굵어질수록 들새나 멧새나 풀벌레 노랫소리는 조용히 잦아듭니다.


  불현듯 봄비를 생각합니다. 여름비와 겨울비를 생각합니다. 철마다 다른 이 빗소리는 내 삶에 어떤 무늬로 아로새길까 궁금합니다. 날마다 다른 이 빗물결은 내 넋에 어떤 결로 스며들까 궁금합니다.


  가을비는 나한테 무엇을 가르치려고 찾아올까요. 나는 무엇을 배우고 싶어 가을비를 부를까요. 가을은 나한테 무엇을 보여주려고 찾아올까요.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싶어 가을을 부를까요.
  어버이는 아이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는가요. 아이는 어버이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는가요. 어버이는 아이를 어떤 목소리로 부르는가요. 아이는 어버이를 어떤 목소리로 부르는가요.


.. 나무들은 아직 완전히 초록색 옷을 차려입지 않았지만, 어디서나 파릇한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웅덩이마다 가득 물이 차올랐고, 웅덩이 가장자리에는 머위꽃이 활짝 피어났다 … 전혀 질서와 규칙이 없었지만 토끼들의 놀이는 숨이 가빠질 정도로 큰 흥분을 안겨 주었다. 이제 봄이 온 것이다. 재미와 기쁨이 다가오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온다. 곧 생명이 활짝 피어날 것이다 … 첫 번째 봄비가 대지를 후두둑 두드리는 순간, 나무와 초원 위의 모든 작은 새들은 기쁨의 지저귐을 토해 냈다 … 기러기들은 길고 좁다란 그 도시 위를 날아갔다. 여기서도 기러기들은 도시 밖의 교외 지역에서 그랬듯이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러나 도시 안으로 들어오니 한참 동안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멈추어 서서 기러기들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  (20, 132∼133, 139, 314쪽)


  꿈을 꾸기에 꿈을 이루는 삶을 생각합니다. 즐겁게 꿈을 꾸기에 즐겁게 이루는 삶을 생각합니다. 바보스레 꿈을 내팽개치기에 바보스레 삶을 내팽개치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어리석게 꿈을 짓밟기에 어리석게 삶을 짓밟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며 목숨을 잇는다 하는데, 밥이란 꿈이 깃든 먹을거리입니다. 밥이란 사랑이 담긴 먹을거리입니다. 꿈과 사랑이 깃들지 않은 밥을 먹을 때에는 ‘나이를 숫자로 늘릴’ 수는 있되, 삶을 빛내는 목숨을 아름다이 누릴 수는 없습니다. 아름답게 빛내는 삶을 누리려고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버는 나날입니다. 은행계좌 숫자를 늘리려고 돈을 버는 나날일 수 없습니다. 연금도 보험도 부질없습니다. 연금이 있어야 할 삶이라 생각하니까 연금을 부어야 합니다. 보험이 있어야 할 삶이라 생각하기에 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을 생각하는 삶이라면 사랑을 스스로 빚을 뿐 아니라, 내 둘레 벗님들이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꿈을 꾸는 삶이라면 꿈을 즐겁게 이룰 뿐 아니라, 내 좋은 살붙이들 모두 스스로 꿈을 즐겁게 꾸며 이루도록 북돋웁니다.


  닐스 홀게르손은 날마다 새로운 곳을 날아다니고 새로운 삶을 마주하면서 새로운 아이로 거듭납니다. 새로운 사랑을 빛내고, 새로운 믿음을 가꾸며, 새로운 생각을 갈고닦습니다. 《닐스의 신기한 여행》 첫째 권이 끝날 무렵, 닐스는 아주 놀랍도록 멋스러운 슬기 한 자락을 스스로 빚어 가슴으로 품습니다. (4345.9.1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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