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나눠 준 선물 하이타니 겐지로의 시골 이야기 3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김종도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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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80



계급사회를 부채질하는 학교교육

― 하늘이 나눠 준 선물

 하이타니 겐지로 글

 김종도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양철북 펴냄, 2005.5.9.



  배우고 가르치는 곳을 가리켜 ‘학교’라고 합니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서로 배우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배우고 가르치는 구실을 거의 안 합니다. 아이들 앞에 교과서를 놓은 뒤, 이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을 시험문제로 바꾸어서 점수따기를 시킵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삶을 배우거나 사랑을 배우거나 꿈을 배우지 않습니다. 오직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을 시험문제로 바꾸어서 외웁니다.


  학교 바깥을 보면 학원이 아주 많습니다.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치는 지식을 시험문제로 더 잘 맞힐 수 있도록 이끄는 데가 학원입니다. 이러다 보니, 학교를 다니는 아이는 너나 할 것 없이 고달픕니다. 시험점수가 안 나오는 아이도 고달프고, 시험점수가 잘 나오는 아이도 고단합니다. 한쪽에서는 점수가 더 올라가지 못해서 고달프고, 한쪽에서는 점수가 더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고단합니다.


  이 같은 학교 얼거리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이러한 얼거리를 잘 아는 사람도 참 많은데, 막상 이 얼거리는 달라지거나 바뀌거나 바로잡히지 않습니다. 그저 이 얼거리가 그대로 흐릅니다. 시험점수에 따라 학교를 등급으로 매기고, 이 등급에 따라 사람한테 계급을 매깁니다.



.. “다카유키, 벼포기를 그렇게 쥐면 안 돼. 잘못하면 낫에 손가락을 벨 수도 있어.” 다케조 아줌마가 다급하게 말하며 낫질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벼포기를 쥘 때 나는 엄지손가락이 밑을 보게 쥐었는데, 아줌마는 엄지손가락이 위를 보게 쥐라고 했다 … 나는 벼를 베면서 생각했다.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농사를 짓느라 고생한 농부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아. 나는 지금껏 돈은 참 편리한 것라고 생각했어. 뭐든지 살 수 있으니까 ..  (14, 20쪽)



  학교교육은 계급사회를 부채질합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삶과 사랑과 꿈을 안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삶과 사랑과 꿈을 가르친다면, 계급사회를 부채질할 수 없습니다. 삶과 사랑과 꿈은 계급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삶이요 사랑이요 꿈입니다. 삶을 가르치는데, 누가 높고 낮겠습니까. 사랑을 가르치니, 서로 어깨동무를 할 테지요. 꿈을 가르치면, 다 함께 즐겁게 놀고 일하는 마을로 나아갑니다.


  오직 교과서를 앞에 놓고 시험점수로 아이들을 등급으로 매기는 학교인 탓에, 이러한 학교를 다니는 아이는 어릴 적부터 신분과 계급과 등급 따위에 길듭니다. 낮은 등급이면 낮은 등급대로 아프고, 높은 등급이어도 높은 등급대로 아파요. 서로 돕거나 아끼는 길보다는, 내 한몸 버티는 일로도 벅찹니다.



.. 아빠는 도시에는 유혹이 많다고 했다. 후타한테 돈을 주면서 사흘만 이곳에 있으라고 하면, 후타는 너무 많이 먹어서 씨름 선수처럼 뚱뚱해져 버릴 거다 … 마을 사람들은 곧잘 우리더러 이런 쓸쓸한 곳에는 왜 왔냐고 하지만, 정작 쓸쓸해하는 마을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다 … “늘 하는 말이지만, 먹거리는 모두 생명이야. 그런데 도시 사람들은 인간의 노동과 지혜까지도 죄다 돈으로 사 버린단다. 그러고는 값비싼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남기지.” ..  (35, 52, 94쪽)



  하이타니 겐지로 님이 쓴 《하늘이 나눠 준 선물》(양철북,2005)을 읽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어린이문학입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등급을 매기는 삶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얼크러지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래, 도시를 떠나자!’ 하고 씩씩하게 외칠 어른이나 아이는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구나, 도시에서 살아도 삶을 제대로 배워서 알아야겠구나!’ 하고 기쁘게 무릎을 칠 어른이나 아이는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러게 말이야, 날마다 먹는 밥이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나한테 오는지 여태 생각한 적이 없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제부터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겠노라 다짐하는 어른이나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궁금합니다.



.. “요즘은 어디나 농약을 쓰기 때문에 우렁이나 미꾸라지를 볼 수 있는 곳은 이런 산 속의 연못밖에 없단다. 아빠 어릴 때는 논바닥이 우렁이나 미꾸라지 천지였는데, 이제는 너무 귀해.” … 나는 선뜻 대답했다. 물고기를 죽이는 건 싫고, 밭에서 채소를 뽑아 오는 건 아무렇지 않은 이유는 뭘까? 아빠 말처럼 모두 다 생명인데 ..  (87, 91쪽)



  아이한테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사서 안기는 어버이는 아주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문제집이나 참고서는 ‘참된 지식’을 하나도 안 다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 즐겁게 익혀서 아름답게 헤아릴 ‘올바른 슬기’는 문제집이나 참고서에 한 줄로도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문제집이나 참고서는 시험점수를 더 잘 받으라고 만든 종이꾸러미입니다. 이런 종이꾸러미는 책조차 아닙니다. 학교교육이 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계급사회로 나아가도록 부채질하는 종이꾸러미가 문제집이나 참고서입니다.


  어버이라 한다면,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사 주지 말고, 텃밭을 지어야 합니다. 아이한테 텃밭 한쪽에 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땅뙈기를 마련해야 합니다. 마당이 있는 집을 장만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리 넓지 않아도, 두 발로 흙을 밟고 두 손으로 흙을 만지면서 풀과 꽃과 나무를 아끼는 마음을 아이가 손수 기르도록 이끌 때에 비로소 ‘어버이’가 됩니다.



.. “도시 사람들은 새빨갛게 익은 맛있는 딸기를 돈을 주고 살 뿐이야. 딸기를 모종 때부터 키우면서 딸기와 친하게 지낸 즐거운 기억은 돈으로 살 수 없어.” … “요즘 세상에는 먹을 게 어찌나 많은지, 마당에 감이 열려도 비파가 익어도 요즘 시골 아이들은 거들떠보지 않아요.” ..  (149∼150, 154쪽)



  아이는 아이답게 뛰놀 때에 아이입니다. 어른은 어른답게 일할 때에 어른입니다. 교과서를 앞에 놓고 시험점수를 잘 따는 아이는 아이가 아닙니다. 돈만 잘 벌어서 아이한테 이것저것 사다 줄 수 있는 어른은 어른이 아닙니다. 함께 삶을 짓는 아이와 어른이 되어야 하고, 함께 사랑과 꿈을 가꿀 수 있는 아이와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철이 들어 슬기롭게 삶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배우고 왜 가르칠까요? 오롯이 우뚝 서서 이웃과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이끌려고 배우면서 가르칩니다. 사람이 되는 길로 나아가도록 하는 학교여야 합니다. 졸업장을 낳는 학교가 아니라, 신분과 계급을 만드는 학교가 아니라,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꿈을 노래하면서 이야기하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이 나눠 준 선물》은 참 예쁜 책입니다. 어른은 하늘이 나눠 준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채야 하고, 아이는 하늘이 나눠 준 선물을 받아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4348.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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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이 있던 마을 - 신정판
권정생 지음, 홍성담 그림 / 분도출판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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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79



흙을 닮은 아이들은 어디에

― 초가집이 있던 마을

 권정생 글

 분도출판사 펴냄, 1985.7.1.



  흙을 가꾸어 살던 사람은 흙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흙을 가꾸면서 흙으로 집을 지은 사람은 흙에서 나는 풀을 거두어 옷을 지었습니다. 흙을 가꾸면서 집과 옷을 지은 사람은 밥도 흙에서 지었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지구별 어디에서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흙을 보금자리로 삼고, 흙을 밥과 옷으로 삼으며, 흙을 벗과 이웃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흙은 보금자리도 아니요, 밥도 옷도 아닙니다. 한국뿐 아니라 지구별 어디를 가든 흙은 아무것이 아닙니다. 흙으로 짓는 집이 아닌 시멘트로 짓는 집이 되고, 흙으로 얻는 밥과 옷이 아닌, 석유로 만드는 밥과 옷이 됩니다.


  게다가 한국 곳곳에 군부대가 또아리를 틉니다. 군부대 언저리는 지뢰밭이 되고, 남녘과 북녘을 가르는 자리에 길디길게 쇠가시그물이 뿌리내립니다. 젊은이는 총을 쏘고 칼을 부리며 주먹을 휘두릅니다.



.. “팔을 내리거라.” 가까이 온 선생님이 부드럽게 말했다. 둘은 팔을 내렸다. 유종은 콧등이 찡해졌다. “앞으로는 싸움 같은 것 하면 못 쓴다.” “예.” “둘이서 손 붙잡아라.” 둘은 잠자코 문식은 오른 유종은 왼손을 꼭 잡았다. “배고프니까 어서 집에 돌아가거라.” 유종은 코를 훌쩍 들이키곤 고개를 꾸벅하며 절을 했다. 문식이도 꾸벅했다. 유종은 먼저 4학년 교실로 달려갔다. “싱야, 인제 집에 간데이.” 유준이 얼른 가까이 다가갔다. “놀지 말고 쌔기 가야 된대이.” “응.” “중들 거랑물에 수제비 뜨만 안 된대이.” “응.” “씨름하고 놀지 마래이.” “응.” “보리깜비기 따먹지 마래이.” “응.” “군딩이 똑바로 쫄곧게 뛰어가아래이.” “응.” “펏떡 가아라.” 유종은 가까스로 풀려나자 측백나무 울타리 옆으로 빠져나가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종아야, 같이 가자.” 뒤에서 문식이 책보를 허리에 동여매며 따라가고 있었다 ..  (19∼20쪽)



  요즈음은 코를 훌쩍이는 아이를 못 만납니다. 코를 훌쩍이면서 볼이 빨갛게 얼어붙도록 바깥에서 뛰노는 아이를 못 만납니다. 여름에 땀으로 범벅이 되면서 햇볕에 얼굴과 살갗이 흙빛처럼 까무잡잡하게 타는 아이를 못 만납니다. 실컷 뛰놀면서 땀냄새가 시큼한 아이를 못 만납니다.


  그리고, 코를 훌쩍이는 어른도, 겨울에 볼이 빨갛게 얼어붙거나 여름에 땀냄새가 시큼하도록 흙내음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는 어른도 좀처럼 못 만납니다.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은 기름 냄새와 기계 냄새가 몸에 뱁니다. 아직 시골에 남아서 흙을 만지는 사람은 일이 고되어 으레 술잔을 들이켜니, 흙내음이나 땀내음보다는 술내음이 짙고, 담배내음에 접니다.


  더군다나 무와 배추와 시금치를 비롯한 몇 가지 남새가 아니고는 딱히 건사하지 않는 흐름입니다. 온갖 들풀을 들나물이나 들밥으로 삼지 않는 흐름입니다. 도시에서는 아예 엄두를 낼 수 없고, 시골에서는 몇 가지 남새가 아니면 뽑아서 없애거나 약을 쳐서 죽여야 하는 몹쓸 것으로 삼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흙내음을 잃으면서 풀내음을 잃습니다. 어른들이 흙을 만지면서 남새를 거두더라도 흙을 가꾸는 삶이 아니라, 흙에서 ‘농산물’을 더 많이 뽑아내려는 몸짓이니, 손에 흙이 묻었어도 흙내와는 동떨어지고 풀내하고도 동떨어집니다. 논둑과 밭둑은 농약밭이요. 빈터나 풀밭도 농약구덩이입니다. 그나마 시골에 몇몇 아이들이 남았다 하더라도, 이 아이들은 풀밭에서 뒹굴지 못합니다. 풀밭에서 뒹굴지 못할 뿐 아니라, 풀밭에 앉을 수 없고, 느긋하게 앉아서 쉴 풀밭조차 거의 자취를 감춥니다.



.. “선생님, 용서해 주이소. 송아지 제발 살리 주이소.” “건방진 자식! 송아지 안 버리면 총살이야!” 헌병은 총구멍을 유준네 아버지 가슴 앞에 들이댄다. 아직도 새파란 청년이다. 전쟁마당에선 어른 아이도 없다. 사느냐 죽느냐 오직 하나만을 택할 뿐이다. 유준네 아버지는 송아지 고삐를 놓았다. 헌병이 송아지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음매애애…….” 송아지는 울면서 어둠 속 언덕 밑으로 굴러 내려갔다 ..  (64∼65쪽)



  흙을 먹는 삶이 아니라, 농약과 비료를 먹는 삶입니다. 흙에서 얻는 곡식과 열매가 아니라, 비료와 농약으로 뒤섞인 흙에서 억지로 끄집어내는 ‘농산물’입니다. 시골지기부터 스스로 손과 몸에서 흙내와 풀내를 잃으니, 시골아이도 흙내와 풀내하고 동떨어집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는 어른은 두말할 것 없이 흙내와 풀내를 모릅니다. 도시에서 아무리 유기농이나 친환경을 먹는다 하더라도 흙내나 풀내를 알지 못합니다. 도시에서는 ‘몸에 좋은 것’을 찾기는 하지만, 몸을 살리는 흙을 찾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합니다. 몸에 좋은 밥이 나오려면, 흙이 좋아야 하고, 흙이 좋으려면 풀이 좋아야 하며, 풀이 좋으려면 숲이 좋아야 하고, 숲이 좋으려면, 사람이 사랑과 꿈으로 좋은 숨결이어야 하는 줄 헤아리지 못합니다.


  흙을 닮는 아이가 자랄 수 없는 요즈음 얼거리입니다. 사회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 모두 흙을 등집니다. 마을과 학교에서도 흙을 안 가르치고, 교과서는 흙을 아예 못 가르칩니다. 직업훈련이나 입시교육에서도 흙은 아예 모르쇠입니다. 대학교를 마쳤건 대학원을 다녔건 나라밖에서 배우고 돌아왔건, 흙을 슬기롭게 다루거나 건사하는 아름다운 넋인 사람을 만나기 몹시 어렵습니다. 시골에서 살겠노라 도시를 떠나더라도, 흙을 손수 아끼고 배우고 돌보고 사랑하려는 넋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흙을 모르는 어른이 아이를 낳으면, 아이는 무엇을 보고 배울까요. 흙을 알려고 하지 않는 어른이 아이를 낳아 학교에 보내면, 아이는 무엇을 보고 배울까요. 흙을 살피지 않고 찾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는 어른이 아이를 낳아 학원에 넣거나 책을 사다 읽히면, 아이는 무엇을 보고 배울까요.



.. 단 위의 교장 선생님도 하던 말을 중간에서 그만두고 잠시 기다리다가 내려왔다. “얘야, 왜 우니? 왜 우니?” 우화자 선생님은 눈물이 뒤범벅이 된 학분이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면서 달래지만 학분이 울음소리는 더 커지기만 한다. “선생님요, 학분이네 아부지랑 어매캉 폭탄 맞아 죽었삐렀니더.” 5학년 줄에서 구경하던 같은 원호동에 살고 있는 순용이가 무뚝뚝하게 가르쳐 줬다. “어머나!” 우화자 선생님의 낯빛이 하얗게 질린다. “방안에서 자다가 폭탄이 떨어져 납따그래졌뿌랬니더.” 종찬이가 말해 놓고 찔끔했다. “납따그래졌뿌랬니더”가 아무래도 좋은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  (125쪽)



  권정생 님이 쓴 《초가집이 있언 마을》(분도출판사,1985)을 읽습니다. ‘초가집’이란 ‘풀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부터 시골지기는 누구나 ‘풀집’이나 ‘흙집’에서 살았습니다. 풀과 흙과 나무로 집을 지었으니, 풀집이요 흙집이며 나무집입니다. 다만, 지난날 시골사람은 굳이 풀집이니 흙집이니 나무집이니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부터 모든 집은 그저 ‘집’입니다. 사회와 문화와 경제와 정치가 달라졌다고 하는 오늘날이 되어서야 ‘시멘트집’ 때문에 따로 ‘풀집’이니 ‘흙집’이니 하고 가르는데, 그나마 이렇게 집살이를 가르는 이들은 지식인이다 보니, 여느 시골자락에서 수수하게 살던 사람이 나누던 낱말을 안 쓰고, 한자를 빌어 ‘초가’이니 ‘초가집’이니 하고 읊습니다.



.. “내사 소련 탱크도 싫제만 미국 비행기도 싫다. 우리 학교 다 때리부신 거는 미국 비행기다. 너그는 미국 비행기가 우리 땅 다 때려뿌샤도 너그만 살아나마 된다꼬 했제? 응, 그랬제?!” ..  (133쪽)



  흙에서 자라는 풀이 열매를 맺어 밥을 얻습니다. 벼알도 보리알도 수수알도 모두 풀알입니다. 풀알은 흙에 뿌리를 내려서 자랍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나 흙을 먹는 삶입니다. 소고기를 먹든 돼지고기를 먹든,이 아이들도 흙에서 자란 풀을 먹으니,풀밥이든 고기밥이든 모든 밥은 흙밥인 셈입니다.


  흙에 뿌리를 내리면서 자란 풀을 베어 지붕에 얹습니다. 흙에 뿌리를 박으면서 오래오래 살던 나무를 베어 기둥으로 삼습니다. 흙이 있어야 집을 짓습니다. 바닥과 벽을 흙으로 대기에 흙집이 아니라, 모든 풀과 나무가 흙에서 자라니, 지구별 어디에서나 집을 짓는다고 하면 흙집이었습니다.


  흙에서 자란 풀에서 실을 얻습니다. 흙에서 자란 풀에서 솜을 얻습니다. 우리가 입는 모든 옷은 흙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낡고 닳아 더는 못 입는 옷은 두엄더미에 놓아 다시 흙으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흙을 먹으면서 흙을 낳고, 사람들 누구나 흙을 누리면서 흙을 가꿉니다. 사람들 모두 흙을 아끼면서 흙을 사랑합니다.



.. “인기야, 아부지 이바구 잘 듣거래이.” “예, 들음시더.” 다섯 살짜리 인기는 아버지를 닮아 무척 똑똑한 아이였다. “니는 내중에 커서 뭐 될래?” “아부지 되니더.” “아부지 되는 거 말고는?” “국군!” “그건 안 돼.” “그라마 인민군!” “그것도 안 돼.” “그라마…… 그라마 대통령!” “그것도 안 돼.” “…….” 인기는 시무룩하게 할 말이 없어졌다. “인기는 사람을 쥑이는 나쁜 놈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인기를 쥑이려는 사람을 마주 서서 싸워도 안 된다.” “그라마 달라빼락꼬?” “아니다. 용감히 서서 죽어 주는 거다.” “무섭다아.” “당당하게 죽어 주는 사람이 가장 용감한 사람이다.” ..  (235∼237쪽)



  권정생 님은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여느 시골자락에서 아이들이 서로 어떻게 어울리면서 자랐는지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흙을 닮은 아이들이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자라면서 이웃과 동무를 어떻게 사귀는지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이고 꿈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지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하는 금긋기는 부질없습니다. 네가 잘못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하고 따지는 일은 덧없습니다. 네가 잘못했으면 너는 언제까지나 주눅이 든 채 고개를 숙여야 하지 않습니다. 네가 잘못했으면 내가 너를 타이르고 따스히 안을 노릇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내가 잘못할 적에 너는 어떻게 하는가요? 너는 나를 타이르면서 따스히 안을 테지요.


  미움은 미움을 낳을 뿐이기에, 잘못한 한쪽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기에, 잘잘못을 가리지 말고 서로 즐거이 어깨동무할 길을 생각해야지요.



.. 하느님, 네 부모를 공경하란 말씀은 집안에서만 공경하란 말씀입니까? 아니면 시장에서나 전장(싸움터)에서나 부모라면 어디서나 공경하란 말씀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하셨지만, 전쟁터에서는 사람을 죽여도 무방한 것인지요 ..  (299쪽)



  《초가집이 있던 마을》에 나오는 금동이네 어머니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간 분이지만 이웃을 헤아릴 줄 알고, 이녁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요. 거지처럼 집도 없이 떠돌며 밥을 얻어먹는 솔송이네를 보며 “우리도 피난 가서 똑같이 있지 않았느냐”며 “조금이라도 도울 생각을 하라”고 아이한테 가르칩니다. 아이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여태 제가 잘못 생각한 줄 깨닫고 바로 마음을 고쳐먹어요.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콩 한쪽을 나누는 우리네 첫마음이거든요. 대통령이 첫마음을 잃었다고도 말하지만, 가만히 헤아려 보면 누구보다 바로 우리부터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첫마음’을 잃거나 놓치지 싶어요. 끔찍한 식민지살이를 거치고 전쟁을 거치고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우리 마음부터 차갑거나 딱딱하게 굳어 버렸지 싶어요.


  아직도 이 땅 곳곳에 많이 남은 전쟁 자국과 군사독재 생채기입니다. 아직도 풀릴 길 까마득한 이라크 파병 같은 군부대 골칫거리입니다. 전쟁은 이 땅에서 일어난 쓸쓸하고 슬픈 자국으로도 넉넉해요. 이라크이든 팔레스타인이든 또 어느 나라에서든 전쟁이란 발을 붙이지 못해야 해요. 《초가집이 있던 마을》에 나오는 수수한 시골자락 여느 사람들 마음 그대로 살아갈 수 있을 때에 사랑스럽고 따스해요. 미움도 모르고 괴로움도 모르며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삶으로 하루를 지을 ㅈ거에 아름답고 기뻐요.



.. 금동이는 꺼림했다. 하필이면 종갑이네 빈집에 거지가 와서 살다니, 자꾸만 못마땅했다. “어매, 걸버생이가 종갑이네 집 다 때려부스마 어야노?” “뭐락카노? 걸버생이가 어딨노. 그런 말 하마 못씬다. 사람은 살다 보마 오만가지 풍파 다 겪는 거다. 밥 얻어먹는다고 다 걸버생이가 아니다. 종갑이네 집은 비어 두는 것보다 사람이 살면 집간수 더 잘된다.” 달래골댁은 금동이를 나무랐다. “그라마, 모두 걸버생이락꼬 찌지고 뽁든걸.” “다들 몰라서 그렇제. 너그도 지난해 피난가서 바가지 들고 밥 얻으러 간 것 잊았뿌렸나?” “…….” 금동이는 뜨끔했다. 과연 솔송이네도 난리통에 어려운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  (187∼188쪽)



  대포 한 자루를 만들지 말고 쟁기 한 자루를 지을 수 있기를 빕니다. 탱크나 전투기 한 대를 만들지 말고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장을 지을 수 있기를 빕니다. 참말 이 나라를 지키려 한다면 전쟁무기가 아닌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숲을 가꿀 수 있기를 빕니다.


  전쟁무기는 전쟁을 부르는 수렁입니다. 쟁기와 낫과 호미는 삶을 부르는 연장입니다. 졸업장과 자격증은 자꾸 계급과 차별을 부르고 맙니다. 웃음과 춤을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찾아야 합니다. 사랑과 꿈을 부를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야 합니다. 서로 아끼고 도우면서 별빛과 햇빛을 가득 누리는 삶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흙을 닮아요. 우리 모두 하늘을 닮아요. 우리 모두 꽃을 닮아요. 우리 모두 나무를 닮아요. 우리 모두 숲을 닮아요. 우리 모두 사랑이 되어 고운 사람으로 거듭나요. 4348.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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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초콜릿 봄나무 문학선
샐리 그린들리 지음, 정미영 옮김, 문신기 그림 / 봄나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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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78


 

‘나쁜 경제개발’에 사로잡힌 한국

― 나쁜 초콜릿

 샐리 그랜들리 글

 정미영 옮김

 봄나무 펴냄, 2012.1.25.



  옛사람이 나무를 살뜰히 아낀 마음을 헤아립니다. 옛사람이 나무로 집을 지은 마음을 돌아봅니다. 옛사람이 집과 마을에 숲정이를 두고, 집과 마을은 언제나 숲 옆에 마련한 마음을 되새깁니다.


  잘 자란 나무를 보면 곧게 줄기를 올리고 가지를 뻗습니다. 잘 자란 나무는 이백 해나 삼백 해를 묵으면, 또는 오백 해나 즈믄 해를 묵으면, 고맙게 베어서 기쁘게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잘 자라지 못한 나무는 집을 지을 적에 못 씁니다. 잘 자라지 못한 나무는 장작으로 패서 땔감으로는 쓸 테지요. 그러나, 잘 자라지 못한 나무는 장작으로 패기에도 수월하지 않아요. 잘 자란 나무여야 기둥으로도 삼고 장작으로도 삼습니다.



.. 누군가가 파스칼에게 커서 하고 싶은 일을 물을 때면, 파스칼은 집 짓는 사람이나 기술자처럼 손 쓰는 일을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 파스칼에겐 전쟁이 너무 먼일처럼 여겨졌다. 이 마을에선 동네 사람들이 모두 친구거나 어떤 식으로든 서로 얽혀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  (18, 22∼23쪽)



  오늘날 사회를 보면,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나무를 안 아낍니다. 나무가 곧게 잘 자라도록 하는 사람이 무척 드뭅니다. 나뭇가지를 휘거나 나뭇줄기를 뭉텅뭉텅 자르기 일쑤입니다. 이른바 ‘조경’이나 ‘원예’나 ‘분재’라는 이름을 빌어, 나무가 나무답지 못하게 손을 씁니다.


  곰곰이 보면, 조경이나 원예나 분재를 하면, 이 나무는 집을 짓는 자리에서 못 쓸 뿐 아니라, 장작으로 쓸 수도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멋스러울는지 모르지만, 동물원에 갇힌 짐승과 같구나 싶습니다.

  나무를 왜 심을까요. 나무를 왜 곁에 둘까요. 나무를 왜 바라볼까요. 나무가 왜 있어야 할까요. 나무는 사람 곁에서 무슨 구실을 하나요.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은 어떻게 사나요.



.. 파스칼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데 넌더리가 났다. 괴롭힘을 당하고, 멸시를 받고, 홀대받고, 위협을 당하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 올리비에가 소리쳤다. “파스칼, 어서 가야 해. 저들이 우리도 죽일 거야.” 파스칼이 울부짖었다. “아빠!” … 하루하루를 그냥 터벅터벅 걸어왔다. 하지만 이젠 파스칼 안의 무언가가 일깨워지고 있었다. 마지못해 시키는 일을 하면서 귀한 세월을 헛되이 흘려보내는 멍청한 짓을 되풀이하진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  (40, 88∼89, 149쪽)



  한국사람이 나무를 쓸 적에는 으레 다른 나라에서 나무를 사들입니다. 한국에서 스스로 씨앗을 퍼뜨려 스스로 자란 나무를 얻어서 쓰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곧고 아름답게 자라는 나무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나날이 숲이 사라지고, 그나마 있는 숲도 공무원이 자꾸 솎아내기를 한다면서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나무로 짓는 집은 나무가 자란 나이만큼 튼튼히 섭니다. 나무로 짓는 집은 나무가 자란 나이가 지나면 허물어 장작으로 쓰거나 다른 자리에 씁니다. 이러면서 다른 나무를 베어 집을 짓습니다. 나무로 지은 집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면서 흙을 가꿉니다.


  이와 달리 시멘트로 짓는 집은 시멘트를 부어서 들인 겨를만큼 한 자리에 섭니다. 그리고, 시멘트집은 나중에 모조리 쓰레기로 바뀝니다. 억지로 뒤섞어 억지로 올린 시멘트집은 백 해조차 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쓰레기를 낳으면서 흙을 망가뜨립니다. 시멘트로 지은 집뿐 아니라 시멘트를 부어 닦은 길도 몽땅 쓰레기입니다. 아스팔트를 부어 닦은 길도 죄다 쓰레기입니다.



.. ‘내가 코조까지 신경 쓰진 않아도 돼. 코조도 스스로 자길 보살필 줄 알아야 해.’ 파스칼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친구만 여기 남겨 두고 떠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코조는 파스칼을 의지했고, 집에 남은 자기 형처럼 파스칼을 따랐다. 둘이선 많은 일을 함께 겪었고, 만약 파스칼이 없다면 코조는 돼지 마왕의 동쌀에 못 배겨 날 것이 분명했다 ..  (130∼131쪽)



  샐리 그랜들리 님이 쓴 《나쁜 초콜릿》(봄나무,2012)을 읽습니다. 이 책은 ‘나쁜 초콜릿’을 말하는 듯하면서도, 무엇이 나쁜지 따로 밝히거나 드러내지 않습니다. 카카오콩이 나는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이 얼마나 고달프거나 괴롭거나 아픈가 하는 이야기를 넌지시 보여줍니다. 카카오콩을 다루는 어른이 돈을 그러모으려고 어떤 짓을 하는지 가만히 보여줍니다.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돌보는 어버이와 어른은 틀림없이 있는데, 이와 함께 아이를 사랑으로 마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른인 이녁을 스스로 바보처럼 굴리는 어른도 제법 많습니다.



.. 반군을 잡는 것, 반군을 쫓는 것, 그것이 곧, 반군에게 총을 쏘는 것? “발사!” 그리고 지시가 이어졌다. “자, 뛰어. 달리면서 움직이는 건 닥치는 대로 쏴라. 저들이 죽거나 너희가 죽거나 둘 중 하나다.” 파스칼의 어깨에 투박한 손이 닿았고, 파스칼을 거의 넘어뜨리다시피 앞으로 밀쳤다 … 파스칼은 셉이 들려주는 말을 거의 믿지 않았다. 정신이 말똥말똥한 순간이면, 파스칼은 셉과 그 패거리가 벌이는 일의 목적을 의심했다. 파스칼은 여자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었다. 아이들의 울부짖음도 들었다. 그 사람들이 과연 반군의 가족일까? 반군은 자기들이 하려는 일의 명분이 가족의 목숨보다 소중하단 걸까 ..  (157, 168쪽)



  아프리카에 총이 있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아프리카뿐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과 중남미에도 총이 있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지구별 어디에도 ‘국경’이 있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이곳과 저곳이 이 나라와 저 나라로 갈려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대통령과 정치꾼이 있대서 나라가 갈려야 하지 않습니다. 군대와 전쟁무기가 있으니 나라가 나뉘어야 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거머쥔 어른이 하는 짓은 언제나 부질없습니다. 이들, 권력쟁이 어른은 총칼을 내세워 서로서로 바보가 됩니다. 서로서로 이웃이나 동무가 되지 않고, 서로서로 바보가 되지요. 내 나라가 더 세다고 우쭐거리고, 네 나라는 손쉽게 잡아먹을 만하다고 윽박지릅니다. 내 나라에 전쟁무기가 더 많다고 거들먹거리고, 네 나라는 가볍게 쳐들어갈 만하다고 으르렁거립니다.


  일본은 한국으로 여러 차례 쳐들어왔고, 한국도 일본으로 여러 차례 쳐들어갔습니다. 중국도 한국으로 여러 차례 쳐들어왔지만, 한국도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중국으로 여러 차례 쳐들어갔습니다.


  이런 짓을 왜 해야 했을까요. 이런 짓을 무슨 까닭으로 해야 했을까요. 정치권력자 몇몇 때문에 여느 시골사람이 왜 싸울아비가 되어 낯선 벌판에서 왜 피를 흘리며 죽어야 했을까요.



..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누가 알겠어? 그리고 무슨 상관이야? 이 트럭에서 내리기만 하면, 우리는 자유야. 하고싶은 걸 마음껏 할 자유!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설 자유!” “엉덩이가 얼얼해.” … 코조가 문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네가 꿈을 꾸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말했잖아.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넌 결코 희망을 버린 적이 없었어.” 파스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난 한때 희망을 버렸었어. 내가 악몽만을 꿨던 그 시간 동안 말이야.” ..  (222, 223쪽)



  모든 정치권력이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대통령과 정치꾼이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대재벌이나 다국적기업도 정치권력이고, 모든 군부대도 정치권력입니다. 모든 지식인도 정치권력입니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모든 어른은 정치권력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권력이 되면 어른과 아이가 따로 없이 바보짓으로 빠져듭니다. 사랑을 가슴에 품으면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사랑을 가슴에 품지 않으니 정치권력 바보짓에 얽매이고, 사랑을 가슴에 품을 때에 흙을 가꾸어 숲을 이루면서 마을살이를 북돋웁니다.


  ‘나쁜 초콜릿’은 아프리카에 있다면, 한국에서는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이라는 허울이 있었지요. 한국에서는 ‘나쁜 새마을운동’과 ‘나쁜 경제개발’이 춤을 추지요. 왜냐하면, 이런 운동과 저런 개발에는 오로지 ‘돈’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군사독재정권이 우리를 먹여살렸다는 거짓말을 일삼는 어른이 꽤 많은데, 사람은 ‘돈’으로 먹고살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먹고삽니다. 아니, 사람은 사랑이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람답게 삽니다.


  새마을운동이나 경제개발 따위는 아예 없던 지난날에 사람들은 서로 ‘이웃사촌’이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나 경제개발 따위는 하나도 모르던 지난날에 사람들은 서로 나누면서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을 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이나 경제개발 따위는 조금도 없던 지난날에 사람들은 언제나 노래하고 언제나 웃고 춤추면서 언제나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은 신문과 방송과 책과 스포츠와 영화와 섹스와 문학과 학교교육 따위를 낳았습니다. 자, 오늘날 이 한국 사회에서 즐겁게 웃으면서 아침에 일어나서 일터에 가는 어른은 몇이나 있는지요? 오늘날 이 한국 사회에서 즐겁게 웃으면서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서 동무들과 사이좋게 어우러지는 아이는 몇이나 있는지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어른도 아이도 웃음이나 노래나 춤이나 이야기가 아예 사라졌습니다. 꿈과 사랑이 하나도 없는 한국 사회입니다. 직업훈련과 대학입시만 있는 한국 사회입니다.


  ‘나쁜 초콜릿’은 아프리카에 있습니다. 그러면, 한국에는 어떤 ‘나쁜 것’이 있습니까. 4348.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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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어떻게 키워요?
나카가와 치히로 지음, 홍성민 옮김 / 동쪽나라(=한민사)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59

 
이야기를 먹고 사랑스레 자란다
― 천사는 어떻게 키워요?
 나카가와 치히로 글·그림
 홍성민 옮김
 동쪽나라 펴냄, 2005.7.20.


  ‘이야기밥’이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이 낱말을 씁니다.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서로 나누는 밥과 같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밥 한 그릇이 몸을 살리듯이 이야기 한 타래가 마음을 살린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어른이나 아이 모두 이야기는 밥입니다. 아이는 어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먹고 마음을 살찌웁니다. 어른은 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먹고 사랑을 키웁니다. 아이는 먼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먹고 생각을 북돋웁니다. 어른은 동무와 이웃이 살가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먹고 꿈씨를 심습니다.


.. 사람들에게 물어 봐도 천사 키우는 법은 알 수 없었습니다 … 사치는 우선, 혼자서 이것저것 해 보기로 했습니다 ..  (14∼15쪽)


  이야기를 듣는 아이는 눈망울이 또랑또랑합니다. 눈빛을 밝혀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은 눈길이 따스합니다. 눈빛을 살려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이야기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이야기밥을 먹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머리로 지을 수 있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마음으로 엮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라 하더라도 즐겁습니다. 어떤 이야기라 하더라도 따사롭습니다.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여야 하지 않습니다. 책이나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여야 하지 않습니다. 풀을 뜯는 이야기도 되고, 꽃을 본 이야기도 되며, 나무를 쓰다듬은 이야기도 됩니다. 햇살을 바라본 이야기도 되고, 별을 노래하는 이야기도 되며, 냇물에 손을 담근 이야기도 됩니다. 개미집을 들여다본 이야기도 되고, 돌멩이를 손에 쥐고 흙바닥에 그림을 그린 이야기도 됩니다. 제비가 날아가며 노래하는 모습을 본 이야기도 되고, 구름이 흐르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밝히는 이야기도 됩니다.

  이야기는 언제나 내 마음에서 태어납니다. 내가 스스로 내 둘레를 따사롭게 바라볼 적에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내가 스스로 내 보금자리를 곱게 돌볼 적에 이야기가 자라납니다. 내가 스스로 내 곁님을 살가이 보듬을 적에 이야기가 피어납니다.


.. 그런데, 천사는 무엇을 먹을까요? 장미색 구름? 밤하늘의 별? 꽃에 있는 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서, 사치는 천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야기.” ..  (20∼21쪽)


  나카가와 치히로 님이 빚은 이야기책 《천사는 어떻게 키워요?》(동쪽나라,2005)를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천사를 키우는 아이’가 나오는 이야기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아이는 집에서 돌보는 ‘귀염둥이 짐승’이 없습니다. 다른 동무는 저마다 이런 짐승을 키우고 저런 짐승이 있다면서 자랑하는데, 오직 한 아이만 아무런 ‘귀염둥이 짐승’이 없습니다. 이러던 어느 날, 이 아이한테 천사가 찾아와요.

  아이는 천사를 키우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다만, 아이가 키운다고 해서 ‘키워질’ 천사는 아니지만, 아이는 천사가 먹고 입고 자는 여러 가지를 걱정하고 생각합니다. 천사는 아이더러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이야기’만 들려주면 된다고 말합니다.


.. “아하, 알았다. 책이나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를 좋아해. 특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을 때의 이야기를 좋아해.” ..  (27쪽)


  이야기를 밥으로 삼아서 먹는 천사는 ‘밥을 먹는’ 만큼 똥도 눕니다. 사람도 밥을 먹으면 똥을 누지요. 사람은 흙에서 나온 것을 밥으로 먹어서, 똥을 흙한테 돌려줍니다. 그러면 천사는? 천사는 이야기밥을 먹고는 별똥을 누어요. 천사가 먹은 밥은 별로 나와서 온누리를 밝히는 새로운 빛이 됩니다. 아이는 천사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이야기를 밥으로 주면서), 온누리를 밝히는 빛이 자라는 숨결을 키웁니다.


.. 천사는, 사치의 마음속으로 쑥, 하고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퍼냈습니다. 사치가 갖고 있던 마음의 작은 조각입니다.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아주 두근거렸을 뿐입니다 ..  (87쪽)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를 먹으면서 사랑스레 자랍니다. 아이만 자라지 않습니다. 어른도 날마다 자랍니다. 날마다 자라지 않는 사람은 죽음길을 걷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날마다 자라기 때문에 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자라는 사람은 아프지 않습니다. ‘아픔’이란 무엇인가 하면, 생채기나 앙금이나 응어리입니다. 날마다 자라지 못하기에 자꾸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파요. 자꾸 아프다 보니 몸과 마음에서 기운이 빠집니다. 몸과 마음에서 기운이 빠질 때마다 삶이 지겹거나 따분하거나 고됩니다. 이리하여 죽음길로 가지요.

  날마다 자라는 사람은 더러 앓습니다. ‘앓이’란 무엇인가 하면, 낡은 몸이나 마음을 내려놓고 새로운 몸이나 마음이 되려고 몸부림치면서 거듭나려는 몸짓입니다. 생채기나 앙금이나 응어리를 남기지 않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몸짓이에요.

  앓는 사람은 훌훌 털어내요. 아픈 사람은 늘 안고 살아요. 이야기밥은 우리를 살찌우고 살려요.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에 삶이 더욱 삶답게 빛나도록 북돋우는 셈이요, 나 스스로 내 삶을 따사로이 바라볼 적에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셈입니다.

  내 마음조각을 읽고, 네 마음조각을 읽습니다. 내 마음조각에 새기는 이야기를 찾고, 네 마음조각에 새길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자라면서 이 지구별에 따사로운 사랑이 흐르기를 바랍니다. 4348.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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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화 이야기 - 우리어린이 문학 02
이재복 지음 / 우리교육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77


 

삶을 살리는 이야기를 어린이한테

― 우리 동화 이야기

 이재복 글

 우리교육 펴냄, 2004.7.15.



  어린이가 즐기도록 지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참으로 오랜 나날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아서 이어옵니다. 지구별이 처음 태어난 뒤, 이 지구별에 사람이 살던 첫무렵부터 이야기가 함께 태어났으리라 느낍니다. 사람은 사람끼리 나누는 말로 이야기를 짓고, 나무는 나무끼리 주고받는 말로 이야기를 지으며, 풀벌레와 들짐승은 풀벌레와 들짐승끼리 나누는 말로 이야기를 짓습니다. 저마다 저희 삶결에 맞추어 이야기를 지어서 물려줍니다.


  이야기를 물려받는 나무와 풀은 어미나무나 어미풀한테서 새로운 숨결을 이어받아서 한결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랍니다. 이야기를 물려받는 풀벌레와 들짐승은 이녁 어미한테서 새로운 숨결을 이어받아서 더욱 씩씩하고 튼튼하게 큽니다. 사람도 이녁 어버이한테서 새로운 숨결을 이어받아서 참으로 씩씩하고 튼튼하게 하루하루 뛰놀면서 철이 들지요.


  사람한테만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다. 지구별 모든 목숨한테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놓고 학자나 지식인은 ‘유전자’라는 다른 이름을 쓸 뿐입니다.



.. 우리는 여기서 방정환의 아동관, 교육관, 문학관을 읽을 수 있다. 방정환은 어떻게든지 선생의 자리에서 아이들보다 높은 자리에 서는 교육을 멀리 하고 있다. 방정환은 아이들보다 낮은 자리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읽고,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재미의 요구에 답하려 한다 … 방정환의 가슴에는 분명 일제시대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는 어린 목숨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방정환은 어린 목숨들이 내는 고통의 소리를 듣고 또 그 소리를 이야기에 담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다 ..  (71, 87쪽)



  먼먼 옛날부터 우리한테는 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제나 이야기가 있어서, 이야기는 꽃처럼 피고 씨앗을 맺습니다. 도란도란 어우러지는 보금자리에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이야기꽃은 환하고 맑아, 어버이와 아이 모두 웃음꽃을 짓습니다. 이야기는 웃음을 짓는데, 웃음은 다시 노래를 짓습니다. 이야기꽃은 웃음꽃이 되고, 웃음꽃은 노래꽃이 됩니다. 이리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잔치는 이야기잔치이고, 이야기잔치에서는 웃음잔치로 거듭나고, 웃음잔치는 다시 노래잔치로 자랍니다.


  들일을 하건 숲에서 나무를 하건, 언제나 이야기와 웃음과 노래가 함께 흐릅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건, 부엌에서 밥을 짓건, 마당에서 해바라기를 하건, 언제나 이야기와 웃음과 노래가 함께 얽힙니다. 짚신을 삼거나 메주를 띄울 적에도 이야기와 웃음과 노래가 나란히 흐릅니다. 잠을 자거나 고샅에서 놀거나 냇가에서 물을 길을 적에도 이야기와 웃음과 노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한겨레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겨레가 이야기와 웃음과 노래를 함께 누리면서 삽니다. 임금님 같은 사람이 없던 곳에서는 으레 이야기와 웃음과 노래입니다. 우두머리 따위는 없는 곳에서는 늘 이야기와 웃음과 노래가 퍼집니다.


  이야기로 말을 가르칩니다. 이야기로 말을 가르치는 동안 삶을 보여줍니다. 이야기로 말을 가르치는 동안 삶을 보여주면서 사랑이 피어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야기는 말이요 삶이며 사랑입니다. 말과 삶과 사랑이 되는 이야기는 우리 넋을 살찌웁니다. 지구별 모든 사람은 이야기를 빌어 아이한테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고, 이러한 숨결로 새로운 삶을 지었습니다.



.. 어린이문학은 어린이를 억누르고 있는 제도를 위해 봉사하는 문학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고통스럽게 하는 그런 온갖 삐뚤어진 관념에 저항하여 어린이들의 순수한 목숨보다 더 위에 서려는 제도와 싸우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한다 … 방정환은 순수하게 식민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다는 계몽의 요구를 간직하고 있었겠지만 그 계몽의 요구가 하나의 작품으로 될 때, 작품에는 작가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나 당시 역사 현실이 늘 문제가 되는 것이다 ..  (101, 110∼111쪽)



  이재복 님이 쓴 《우리 동화 이야기》(우리교육,2004)를 읽습니다. 이 책은 ‘어린이문학 평론’입니다. 방정환, 마해송, 현덕, 이원수, 손창섭, 이렇게 다섯 사람 어린이문학을 살피면서, 계급주의 어린이문학도 조금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다섯 사람 어린이문학을 골고루 살피기보다는 거의 방정환 한 사람 이야기를 살피는 흐름에서, 다른 네 사람 이야기와 계급주의 어린이문학 이야기는 가볍게 곁들이는 얼거리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재복 님은 ‘방정환 위인전’을 쓰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어린이문학이 ‘현대문학’ 모습으로 처음 드러난 발자국을 헤아리면서, 이러한 뿌리가 어떠한 흐름을 타고 오늘날에 이르는가 하는 대목을 밝히려고 하는 ‘어린이문학 평론’이 《우리 동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짜임새나 얼거리나 글을 살핀다면, “우리 동화 이야기”처럼 커다란 이름은 좀 안 어울립니다. ‘방정환을 중심으로 돌아보는 한국 어린이문학 초기 역사’쯤으로 이름을 붙여야 걸맞겠다고 할까요. 아무튼 다른 나라 동화는 다루지 않고 한국 동화만 다루니 “우리 동화” 이야기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 동화작가는 우선 자기 내면의 무의식 저 깊은 곳에서 살아가는 구원자를 불러내는, 구원자를 찾아 떠나는 험난한 타계 여행도 마다 하지 않는 샤만(상상력)으 힘이 필요하다. 내면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그 많은 나무며 풀이며, 새며 동물들과 이야기가 통하는 영혼의 힘을 간직한 목숨이 되어야 한다 … 이제는 문학의 논리가 운동성보다 상업성을 매개로 한 출판의 논리 쪽으로 급격하게 이동하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 비평가의 언어도 상업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출판의 논리와 관계되고, 판매에 영향을 미치는 대중의 요구와 연결되면서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건 권력의지를 드러내는 요소를 갖게 되었다 ..  (131, 155∼156쪽)



  삶을 살리는 이야기를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얼거리 가운데 하나가 ‘동화’입니다. 한국에서 글을 쓰는 지식인과 작가는 ‘동화’라는 한자말을 일본사람 입에서 빌어 쓰는데, 이런 ‘문학 전문 낱말’을 굳이 쓰지 않아도, 한겨레는 먼 옛날부터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요새는 ‘전래동화’라는 말도 쓰지만, ‘옛이야기’라는 이름으로 따로 가르지 않아도, 수천 해가 아닌 수만 해가 아닌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 해에 걸쳐서 지구별 모든 겨레는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며 살았습니다. 책이나 글이 없어도 입으로 이야기를 건사해서 마음에 담고 가슴에 새기도록 북돋았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아주 먼 옛날부터 지구별 모든 사람은 ‘이야기’만 있었지 ‘비평’이나 ‘평론’은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아이나 어른 누구도 딱히 ‘비평’이나 ‘평론’을 하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이야기를 더 짓거나, 이야기에 살을 더 붙일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지구별 모든 겨레가 ‘비평·평론’을 안 했을까요? 비평이나 평론을 할 까닭이 없으니까 안 하지요. ‘이야기’는 삶을 짓고 사랑을 가꾸며 꿈을 북돋웁니다. 지구별 모든 겨레는 아이가 삶과 사랑과 꿈을 건사하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이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버이도 스스로 삶과 사랑과 꿈을 건사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어버이와 아이 모두 오직 ‘이야기’를 즐기거나 나누거나 북돋우는 길을 걷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른문학 비평’과 ‘어린이문학 비평’이 따로 있으며, 대학교에서 이를 다루고, 논문이 꽤 많이 나오며, 문학비평을 하는 잡지가 따로 있기도 할 뿐 아니라, 이런 일만 깊이 파고들어서 하는 어른도 꽤 있습니다. 아무래도 현대 도시문명 사회가 되다 보니, ‘어린이문학 비평’을 따로 맡아서 해야 하는 사람도 나와야 할는지 모릅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어린이책’을 가려서 알려주는 몫을 누군가 해야 할 테니 비평과 평론이 있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더 헤아려 보셔요. 왜 아이들한테 ‘좋은 어린이책’을 가려서 알려주어야 할까요? 왜 아이들은 아무 책이나 보면 안 될까요? 왜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무 책이나 볼 수 있도록 ‘아름다운 어린이책’과 ‘사랑스러운 어린이책’을 지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왜 어른들은 어른들 스스로 ‘나쁜 책’과 ‘좋은 책’을 함께 만들면서, ‘좋은 책 가려서 알려주는 비평’과 ‘나쁜 책 뽑아서 밝히는 평론’을 굳이 할까요? 왜 바보짓을 하는 어른일까요?


  《우리 동화 이야기》를 읽으면 ‘어린이문학 비평을 하는 어른’ 이야기가 제법 나옵니다. 이재복 님은 원종찬 님을 비판하면서 몇 가지 이야기를 적는데, 이 대목을 보면 ‘오늘날 어린이문학 비평’은 ‘상업주의 출판사와 문단권력’하고 이어진다고 적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어린이책’이 아니라 ‘나쁜 어린이책’을 펴내는 출판사하고 ‘어린이책을 널리 알리는 평론’을 쓰는 평론가하고 서로 손을 잡는다는 뜻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삶과 사랑과 꿈을 북돋우는 길을 가기보다는, 아이들한테 책을 팔아서 돈을 많이 벌려는 장사꾼 마음이 된다는 뜻입니다. 장사꾼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좋다고 할 수 없는 책’을 아이들한테 마구 팔거나 읽혀서 돈만 벌려는 어른들이 늘어난다는 뜻이요,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내몰고 아이들한테 삶과 사랑과 꿈하고는 등지도록 하면서 물질문명과 유행과 상업주의에 젖어들도록 떠밀면서 그야말로 어른들 스스로 바보짓을 한다는 뜻입니다.



.. 일제시대 계급주의 아동문학은 ‘민족해방’과 ‘계급모순으로부터 해방’, 이 두 방향으로 치열하게 열려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계급주의 아동문학가들에게 조금 쓴 소리가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은 ‘무엇을 쓸 것인가’는 뚜렷했지만 ‘어떻게 쓸 것인가’는 너무 어른의 자리에서 추상으로, 관념으로만 고민하였다 … 현덕은 아이들이 발딛고 살아가는 놀이공간으로 들어가 현덕은 이야기 안에 놀이리듬을 그대로 살려 놓았다 … 이원수는 〈바닷가의 소년들〉에서 한 연약한 아이의 모습을 통해 삶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는 정신의 뿌리는 결코 힘에 있지 않단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이원수는 동심의 내면에 ‘힘’이나 ‘이념’을 넘어 ‘목숨을 사랑하는 절대적인 자비의 정신’을 심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  (171, 198, 214, 215쪽)



  비평을 하려는 비평은 부질없습니다. 역사를 캐는 일이 덧없지는 않으나, 역사만 좇는 역사가 된다면 덧없기 마련입니다. ‘그리 좋지 않은 책’이고 ‘그리 아름답지 않은 어린이문학’이지만, 이러한 책이나 어린이문학을 ‘껍데기만 부풀려’서 내다팔도록 부추기는 ‘어린이문학 평론가’가 있다면, 이들을 나무랄 만하고, 이들을 나무라는 글도 널리 알려야 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야기를 지어서 아이한테 물려주는 몫이 우리 어른이 할 일인 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이한테 나누어 주는 ‘마음밥’이 바로 이야기이듯이, 어른이 서로 주고받는 비평이나 평론도 ‘마음밥’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비평이나 평론도 ‘이야기’가 되도록 써야 합니다. 딱딱하고 어설프며 얄궂은 번역 말투나 일본 말투가 아닌 한국말로 이야기를 쓰고(비평을 하고), 영어나 한자말을 잔뜩 섞어서 쓰는 논문 흉내쟁이가 아닌 한국말로 이야기를 쓰며(평론을 하며), 어른만 읽는 비평이나 평론이 아닌 어린이도 누구나 읽도록 이야기를 써야지 싶습니다.


  어린이문학을 비평한다는 글도 어른문학을 비평한다는 글 못지않게 재미없고 따분하며 알쏭달쏭합니다. 비평이나 평론이라고 하면 마치 ‘한자말과 영어를 뒤섞어서 번역 말투에다가 일본 말투로 어지럽혀’야 하는 줄 잘못 알기 때문입니다. ‘유식한 척하는 논문 글투’가 되어야 논문이 되거나 대학교수가 되는 줄 잘못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써야 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뿐입니다. 아이들한테 마음밥이 될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물려주면서, 어른들도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평이나 평론으로 서로 나무라거나 꾸짖기보다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업주의 출판사’에 돈 때문에 얽매이는 짓은 그만 고리를 뚝 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판사에서 보내는 보도자료에 기대지 말고, 또 출판사에 보도자료를 써 주는 일을 하지 말며, 문단권력 따위는 제발 만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린이한테 이야기를 물려주는 어른이 되어야지, 어린이를 볼모로 삼아 ‘책장사’와 ‘글장사’를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재복 님이 쓴 《우리 동화 이야기》는 한국사람이 빚은 이야기 몇 가지를 살피는 대목에서는 여러모로 돋보인다고 할 만하지만, 이러한 글이 이야기가 못 되고 비평이나 평론에 그치는 대목은 참으로 아쉽고, 스스로 ‘이야기가 되도록 글을 쓰지 못한 탓’에 현덕 문학이나 이원수 문학이나 손창섭 문학이나 마해송 문학도 한결 깊이 읽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살짝 겉훑는다고 할까요. 어린이문학을 펼친 어른은 ‘이야기’를 짓는 사람이었지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문학을 창작’해서 ‘문학상을 받’거나 ‘이름난 작가 행세’를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창작가’와 ‘문학상 수상작가’하고는 사뭇 다른 ‘이야기꾼’인 현덕이요 이원수요 손창섭이요 마해송이요 방정환입니다.


  이재복 님이 공부가 얕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공부만 너무 깊다는 소리입니다. 공부는 조금 내려놓고 어린이와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삶놀이를 누려 보시기를 빕니다. 그러면, ‘말에서도 힘이 빠지’고 ‘말마다 새로운 사랑과 꿈’이 슬기롭게 피어날 수 있습니다. 4347.12.3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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