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집 외딴 다락방에서 동화는 내 친구 38
필리파 피어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논장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15



사랑 가득한 숨결이라면 두려움이 없지

― 외딴 집 외딴 다락방에서

 필리파 피어스 글

 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펴냄, 2005.7.25. 7000원



  온누리에는 수많은 목숨이 있습니다. 지구라는 별에 깃든 사람 숫자는 수십 억에 이릅니다. 사람이 아닌 다른 목숨은 이루 셀 수 없도록 많습니다. 이를테면, 바다에 물고기나 조개가 몇 마리 있는지 아무도 셀 수 없습니다. 새나 벌이나 나비가 몇 마리가 되는지 아무도 셀 수 없습니다. 개미 숫자를 셀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작은 풀벌레가 모두 몇 마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나무 숫자도, 풀포기 숫자도, 씨앗 숫자도 참말 아무도 알지 못해요.


  그렇지만 우리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어요. 지구라고 하는 작은 별에 있는 수많은 목숨은 서로 아끼고 보살피고 지켜보고 어깨동무하려고 이곳에 모인 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다치게 하거나 아프게 하거나 괴롭히려고 이 별에 모여서 살지 않습니다.



이모할머니가 에마에게 말했어요. “마음에 든다니 참 다행이구나. 이 방은 어린 여자 아이가 쓰던 방이란다. 바로 우리 딸이 쓰던 방이지.” 이모할머니는 후유 하고 한숨을 쉬었어요. “아, 애니가 정말 보고 싶구나!” (8쪽)




  필리파 피어스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외딴 집 외딴 다락방에서》(논장,2005)를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외딴 집에 있는 외딴 다락방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린이문학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어린이는 여름을 맞이해서 학교가 방학을 했기에, 온 식구가 시골마실을 합니다. 바다하고 맞닿은 시골에 있는 친척 집에 가지요. 그런데 이 친척 집이 ‘외딴 집’입니다. 마을하고 제법 떨어진 집이에요. 다락방도 외딴 집에서는 외딴 자리에 있는 방이라고 할 만합니다.


  방학에 여름을 한껏 누리려고 시골집을 찾아간 아이로서는 시골살이도 낯설고 외딴 집에 외딴 방은 그야말로 낯설 만할 테지요. 집도 사람도 많고 자동차도 많아서 북새통인 도시에서만 지내다가 사람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는 외딴 집에서 밤잠을 이루기는 어려울 수 있겠지요.



이모할머니가 다시 씩씩하게 말했어요. “전등 스위치는 여기 있단다. 깜깜한 데서는 찾기 힘드니까, 지금 잘 봐 둬라. 하지만 일단 잠자리에 들면 불을 켜고 싶지 않을 게다. 이 방에 있다 보면 아늑할 테니까. 애니는 늘 아늑하다고 했지. 이 방을 무척 좋아했는데.” (18쪽)



  밤에 혼자 자면 무서울까요? 무섭다고 여기면 무섭고, 무서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무섭습니다. 누가 저기에 있구나 하고 여기면 누가 저기에 있다는 생각에 그저 무섭습니다. 저기에 아무도 없다고 여기면 저기에는 그야말로 아무도 없기에 무서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에는 온갖 넋이 떠돌아다닌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아쉬움을 남긴 채 죽은 넋이 떠돌 만하고, 슬픔과 괴로움에 저미다가 아프게 죽은 넋이 떠돌 만해요. 터무니없이 삶을 내려놓아야 하던 넋이 떠돌 만하고,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풀지 못한 넋이 떠돌 만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넋을 귀신이라고도 합니다. 귀신이 우리를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까 봐 걱정하기도 해요. 그러면 귀신은 사람을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 수 있을까요? 귀신 때문에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삶을 하나도 못 누리고 벌벌 떨면서 살아야 할까요?




그래요. 에마 짐작이 맞았어요. 바람 때문에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유리창에 철썩철썩 부딪혀요. 바로 그 소리가 마치 누군가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렸던 거예요. 에마는 다시 침대에 누웠어요. 그러고는 누군가가 빤히 바라보는 듯한 느낌도 까맣게 잊어버렸죠. 에마는 곧 잠이 들었어요. (23쪽)



  《외딴 집 외딴 다락방에서》에 나오는 어린이 에마는 씩씩합니다. 아니, 씩씩하기는 해도 때때로 섬찟섬찟 놀랍니다. 그렇지만, 놀라다가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생각을 기울입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뒤에 살펴봅니다. 뭔가 있음직한 낌새를 느낄 적에도 이리저리 살핀 끝에 마음을 포옥 놓고 새근새근 잠듭니다.


  이러던 어느 날, 에마는 고양이 한 마리를 봅니다. 외딴 곳에 있는 외딴 집에서도 외딴 다락방은 에마네 이모가 지내던 방이었고, 이모는 이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산다고 해요. 이모는 죽지 않았고, 외딴 집에서 아주 먼 데에서 도란도란 산다고 합니다. 그나저나 고양이는 왜 에마 앞에 나타났을까요?




에마는 나지막이 속삭였어요. “천둥이나 번개 같은 거 무서워하지 마. 내가 지켜 줄게.” 노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에마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았어요. 에마는 고양이한테 더 마음 쓰지 않았어요. 에마는 다시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어요. (48쪽)



  외딴 집에는 고양이가 없다고 합니다. 예전에 에마네 이모가 이 집에서 살던 무렵에는 고양이가 있었다고 해요. 이모가 아끼던 고양이는 늘 이모하고 함께 밤잠을 이루었다니까, 고양이는 틀림없이 에마네 이모가 그리워서 외딴 다락방에 찾아왔을 테지요. 아니, 고양이는 몸을 내려놓고 죽은 넋이 되었어도 언제까지나 이 외딴 다락방에 머물면서 ‘어른이 된 이모’가 다시 다락방으로 찾아와서 저를 만나고 아껴 주기를 바랐을는지 모릅니다.


  에마는 ‘고양이’를 보았다기보다 ‘고양이 넋’을 본 셈이고, 에마는 고양이를 살살 달래면서 함께 밤잠을 이루었다기보다 외로운 고양이 넋을 살살 달래면서 이 넋이 고요히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고 할 만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일을 겪을 수도 있고 못 겪을 수도 있는데, 우리는 누군가를 남다르게 만나면서 너른 사랑이 되곤 합니다. 오직 너그럽고 따사로운 품이 되어 누군가를 마주하면서 너른 사랑이 되지요.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너른 사랑으로 모든 숨결을 어루만질 수 있어요. 코앞에 있는 동무나 이웃이나 한식구를 따사로이 어루만질 수 있고, 우리 곁을 떠난 모든 넋을 애틋하게 여기면서 너그러운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습니다.


  너른 사랑이기에 고양이 넋도 달랩니다. 너른 사랑일 때에 숲이며 바다며 바람이며 흙이며 작은 벌레와 짐승이며 모두 달랩니다.


  사랑이라는 마음이라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마음 가득 사랑이라면 두려울 일이 없습니다. 사랑이기에 넉넉히 안고, 사랑이기에 따스히 보살핍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모두 사랑이라면 두 손에 따스한 기운을 담아 가만히 서로 안아 주겠지요. 우리가 스스로 사랑이 아닐 적에는 두려움에 떨면서 총이나 칼 따위를 쥐고 두리번두리번 흘겨보거나 노려보겠지요. 사랑으로 고운 숨결이기에 기쁜 하루를 맞이합니다. 사랑으로 맑은 넋이기에 새롭게 웃으면서 노래합니다. 시골마을 외딴 집 외딴 다락방에서 여러 날 묵으며 한여름을 보낸 아이는 ‘이모는 없는’ 이모할머니네 집을 떠나면서 마음에 새로운 이야기를 한 자락 품습니다. 뭔가 새롭게 따스해진 손길이 되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4348.10.13.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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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 수집가 난 책읽기가 좋아
마리 데플레솅 지음, 김민정 옮김, 카타리나 발크스 그림 / 비룡소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14



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모으고 꿈을 갈무리하지

― 나는 사랑 수집가

 마리 데플레솅 글

 카타리나 발크스 그림

 김민정 옮김

 비룡소 펴냄, 1997.7.11. 6500원



  곰곰이 돌아보면 나는 늘 무엇이든 모읍니다. 어릴 적에 놀면서 돌을 모은다든지 모래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우리 마을 모래를 모은다든지, 바닷가 모래를 모은다든지, 새로운 시골에서 본 모래를 모으기도 합니다. 어른들이 태우고 버린 담배꽁초에 남은 무늬를 모으기도 하고, 병뚜껑을 모으기도 합니다. 껌종이를 모은다거나 과자봉지를 모으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모으는 것을 바라보는 어른들은 으레 “그거 쓰레기잖아!” 하고 한마디를 하지요. 그래요. 어른들 말마따나 아이들이 모으는 것은 쓰레기라고 할 만합니다. 어른들로서는 왜 저런 쓰레기를 아이들이 저토록 좋아해서 달라붙는가 하고 궁금해 할 만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아야지요. 어른 눈길이 아닌 아이 눈길로 생각해 보아야지요. 어른 눈높이로 바라보지 말고, 아이 눈높이로 바라보아야지요.



아빠는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어요. “그래, 병뚜껑이나 열심히 모으렴. 아무래도 넌 우표 수집을 하기엔 너무 어린 것 같구나.” 나는 기분이 나빴어요. 아빠가 나를 우습게 보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대꾸해 드렸죠. “아세요? 아빠는 병뚜껑 수집하기엔 너무 늙었다는 거?” (11쪽)



  마리 데플레솅 님이 글을 쓰고, 카타리나 발크스 님이 그림을 그린 어린이책 《나는 사랑 수집가》(비룡소,1997)를 가만히 읽습니다. 프랑스에서 날아온 이 작은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는 ‘모으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무엇이든 모으고자 합니다.


  왜 모을까요? 왜 자꾸 이것저것 모으려고 할까요?


  아이로서는 이것도 저것도 새롭습니다. 언제나 무엇이든 새롭습니다. 새롭기 때문에 주머니에 넣고, 새롭기 때문에 알뜰히 건사하며, 새롭기 때문에 흐뭇하게 웃으면서 바라봅니다. 모으고 또 모으며 다시 모으려는 마음에는 ‘새로운 즐거움을 북돋우는 기운’이 있습니다.



점심시간에 나는 빅투아르랑 셀레스트랑 같이 놀았어요. 둘 다 내 애인이에요. 처음엔 셀레스트랑 사랑에 빠졌는데, 나중에 빅투아르하고도 사랑하는 사이가 됐지요. 그래서 둘 다 안아 줘야 해요. 물론 빅투아르랑 셀레스트도 나를 안아 주지요. 그리고 그 둘도 친구이기 때문에 서로 끌어안아요. 그래서 우린 셋이서 안고 논답니다. (20쪽)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가 모으려는 것을 바라보는 어머니하고 아버지는 늘 못마땅합니다. 아이가 ‘쓰레기’만 모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참말 아이는 ‘쓰레기’만 모은다고 할 만해요. 그러나, 아이가 모으는 것을 찬찬히 건사하고 곱게 보듬으면 ‘쓰레기’ 아닌 ‘살림살이’로 바뀝니다. 병뚜껑이든 종잇조각이든 차근차근 건사하면서 곱게 갈무리하면 아주 멋진 ‘이야기밭’이 되어요.


  왜 그러할까요? 왜 ‘쓰레기를 모아’도 이야기밭이 될까요? 어느 한쪽 눈길로는 쓰레기일 테지만, 다른 한쪽 눈길로는 ‘이것을 만나면서 누린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자를 먹으면서 나눈 하루가 즐거웠기에 과자봉지를 남겨서 어느 하루 즐거운 이야기를 되돌아봅니다. 저 과자를 먹으면서 함께 있던 동무가 반가웠으니 과자봉지를 건사해서 그날 함께 있던 동무를 떠올립니다.


  나무젓가락 하나에도 이야기가 깃들어요. 머리핀 하나에도, 조약돌 하나에도, 다 닳은 볼펜 한 자루에도, 몽당연필에도, 토막난 지우개에도 모두 다 다른 이야기가 깃듭니다.



내 말에 엄마는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어요. “뭐? 사랑을 수집하겠다고?” 엄마는 썩 예쁘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지요. 하지만 나는 화를 내지 않았어요. 그래도 이번에는 엄마가 내 말을 귀담아들어 주었으니까요. (31쪽)



  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모으고 꿈을 갈무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모으면서 삶을 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언제나 꿈을 갈무리하면서 새 하루를 맞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몸하고 마음이 함께 자라요. 그래서 옷이 이내 안 맞습니다. 작아서 못 입는 옷은 ‘쓰레기’로 여겨 그냥 버릴 수 있습니다. 작아서 못 입는 옷을 이웃이나 동무한테 주어 ‘물려입기’를 할 수 있습니다. 작어서 못 입는 옷을 알뜰히 건사해서 두고두고 모시면 ‘이 작은 옷을 입고 뛰놀던 나날을 그리는 이야기밭’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얘,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니?” 엄마는 한참 만에 말을 꺼냈어요. 그러자 형이 말을 받았지요. “아니에요. 말짱해요. 얼마나 똑똑한 녀석인데요. 그저 자기가 이 세상 모든 여자들과 사랑에 빠질 수 없다는 걸 막 깨달았을 뿐이에요. 그걸 가지고 웃기다고 생각하시면 안 되죠.” (48쪽)



  이야기책 《나는 사랑 수집가》에 나오는 아이는 마지막으로 ‘사랑 모으기’를 생각합니다. 사랑을 모으기로 하면 어머니나 아버지는 걱정을 안 할 테고, 어머니나 아버지가 ‘내가 모은 것’을 버릴 수도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아이는 아직 잘 모릅니다. 아직 열 살이 채 안 된 아이로서는 아직 잘 모를 만합니다. ‘사랑 모으기’는 모든 사람을 내 옆에 두면서 언제라도 ‘내가 쳐다보고 싶을 때에 쳐다보는 인형’이 아닌 줄 아직 잘 모를 만하지요.


  ‘사랑 모으기’는 ‘사람을 수집품처럼 창고에 차곡차곡 쟁이는 몸짓’이 아닙니다. ‘사랑 모으기’는 오직 마음으로 깊이 아끼고 돌보는 숨결이 되어 너그럽고 따사로운 손길로 어깨동무를 하는 몸짓입니다.


  가시내가 머스마를 사랑할 수 있고, 머스마가 머스마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저보다 더 어린 아이를 사랑할 수 있고, 어른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나무를 사랑할 수 있고, 나무가 숲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바람을 사랑할 수 있고, 바람은 자전거를 사랑할 수 있어요.


  사랑은 바로 사랑 그대로 흐르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언제나 그대로 지켜보면서 흐뭇하게 웃기에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일구는 삶을 누리기에 아름답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서 ‘사랑 모으기’를 신나게 해 볼까요. 4348.10.9.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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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는 학교가 싫다 난 책읽기가 좋아
준비에브 브리작 글, 미셸 게 그림, 김경온 옮김 / 비룡소 / 1997년 7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13



꾸지람만 듣는 학교에 누가 가고 싶을까

― 올가는 학교가 싫다

 준비에브 브리작 글

 미셸 게 그림

 김경온 옮김

 비룡소 펴냄, 1997.7.11. 6500원



  우리 집 큰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서 할 만한 것이 없어서 학교에 보내지 않기도 했고, 큰아이는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가기도 합니다. 흔히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고 하지만 아이한테 함부로 ‘의무’를 들이밀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학교에서는 교과서로만 가르치고, 교과서 지식으로 시험을 치르며, 교과서 지식으로 시험을 치르는 점수에 맞추어 대학 줄세우기를 시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들이 ‘집짓기’를 배울 수 있다면 기쁘게 학교에 보낼 만합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옷짓기’를 익힐 수 있다면 즐겁게 학교에 보낼 만하지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밥짓기’를 지켜보면서 손수 할 수 있으면 그야말로 신나게 학교에 보낼 만해요.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오직 ‘교과 수업’과 ‘학습 활동’뿐입니다.



올가 물건은 한 번씩 태엽을 감을 때마다 ‘음메’ 하고 우는 젖소 인형, 일곱 식구 트럼프 놀이, 면이 아홉 개인 주사위, 타고 남은 성냥개비들, 상자를 열면 갑자기 튀어 나오는 꼬마 도깨비, 박하껌 두 개, 유아원에 다닐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남자 친구 살뱅과 함께 파리잡이 끈끈이를 만들려고 둔 투명 테이프 등이었다. (8쪽)



  준비에브 브리작 님이 글을 쓰고, 미셸 게 님이 그림을 그린 어린이책 《올가는 학교가 싫다》(비룡소,1997)를 읽습니다. 《올가는 학교가 싫다》에 나오는 ‘올가’라는 아이는 학교에 처음 들어간 아이로구나 싶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아이가 몇 살부터 학교에 들어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는 일고여덟 살로 보입니다. 이 아이는 앞으로 ‘문방구 가게 임자’가 되려는 꿈을 꿉니다. 그래서 언제나 제 가방에 온갖 장난감을 챙깁니다. 문방구 가게 임자가 되려면 온갖 장난감을 다룰 줄 알고, 만들기도 해야 하며, 잘 알아야 하거든요. 그러니 올가는 교과서나 공책이나 다른 것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에만 온마음을 쏟습니다.



올가는 엄마에게 공책을 한 권 내밀었다. “선생님이 여기다가 뭐라고 써 주셨는데, 뭔지 모르겠어. 나는 읽을 줄 모르잖아. 엄마, 나는 책읽기를 배우고 싶지도 않아.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꼭 읽을 줄 알아야만 되는 건 아니잖아.” (12쪽)



  이야기책을 가만히 읽으면, 올가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올가한테 거의 아무런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이하고 이야기를 거의 안 하고, 아이가 하는 말을 아이 어머니도 아버지도 거의 안 듣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바빠서 안 들을 뿐 아니라, 이내 잊습니다. 아이 아버지는 바깥일, 그러니까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는 일만 하느라 바빠서 아이 얼굴을 볼 틈도 없습니다.


  책을 읽다가 빙그레 웃습니다. 아니, 한국만 이런 모습이 아니네 하고. 프랑스라는 나라에서도 이러네 하고.


  게다가 학교에서도 올가는 고단합니다. 올가가 다니는 학급을 맡은 교사는 올가하고 말을 제대로 섞지 않습니다. 그저 올가 가방에 있는 장난감을 아무 말 없이 몽땅 빼앗을 뿐입니다. 장난감만 챙긴다고 해서 아이를 윽박지르고 큰 소리로 꾸짖을 뿐입니다. 아이한테 왜 이런 장난감을 챙기느냐고 차분히 묻지 못하는 교사요, 아이한테 부드럽거나 따스한 말로 ‘학교에서 무엇을 하면서 즐거운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는 교사입니다.



올가는 저녁마다 자그마한 깜짝쇼가 벌어지지 않는 게 너무 속상했다. 그러나 올가는 엄마가 더 이상 선물을 하지 않으니까 이젠 자기가 엄마에게 선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일은 전염되는 법이니까. (19쪽)


“엄마! 엄마는 왜 내 목걸이 선물을 받고서 그걸 목에 걸지 않는 거야? 엄마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게 아니야.” 올가는 뾰로통해졌다. (22쪽)



  모든 교사가 훌륭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교사가 훌륭할 수 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교사가 훌륭해야 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사라는 자리에 서려면 ‘교과서 수업 진도 나가기’가 아닌 ‘아이하고 눈을 마주치면서 아이 마음을 읽고 아이한테 무엇을 즐겁게 가르쳐서 이 아이가 아름답게 자라도록 도울 수 있는가’ 하는 대목을 먼저 차분히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훌륭한 교사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아침부터 저녁(이나 낮)까지 마주하는 어버이 같은 몫을 맡는 교사라면, 아이가 즐겁게 배울 수 있도록 북돋우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가정 연락장에는 날마다 선생님 편지가 씌어 있었다. 올가가 가지고 가는 수집품들은 뭐든지 다 압수당했고, 분명한 이유조차 모르면서 올가는 늘 야단맞았다. 그래서 올가는 늘 허둥거렸으며, 걸핏하면 소리 지르고 소란부터 떨곤 했다. (34쪽)



  이야기책을 덮고 한국 사회를 돌아봅니다. 지난날 한국 사회에서는 온갖 행정서류가 넘쳐서 학교에서 교사가 고달팠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인터넷으로 갖가지 ‘수행 결과 입력’을 해야 합니다. 교사는 교사라기보다 ‘서류 처리반’ 같은 얼거리요, 교사가 교사로서 아이들을 느긋하고 넉넉하게 마주하기 힘들도록 내모는 행정 얼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사는, 이 이름 그대로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선생도, 이 이름 그대로 아이보다 먼저 태어나서 삶을 누린 뒤 이 삶을 아이한테 보여주면서 이끄는 사람입니다.


  아이를 낳기만 한대서 어버이가 아닙니다. ‘낳은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면서 아낄 때에 비로소 어버이입니다. 아이를 낳았대서 어버이가 되지 않습니다. ‘낳은 아이’를 따사로이 아끼고 살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삶꽃을 가꿀 때에 비로소 어버이입니다.



올가와 실뱅은 여러 가지 놀이를 했다. 그리고 선생님놀이를 했다. 올가가 선생님을 했고, 실뱅이 학생들 모두를 맡았다. 학생들 중에는 올가사 소피처럼 착한 아이도 있었고, 오스카 패거리나 실뱅과 고티에처럼 못된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은 엄격했다. 그러면서도 공정했다. 선생님은 착한 아이들을 칭찬했고, 못된 아이들에게는 벌을 주었다. (53∼54쪽)



  아이들은 ‘공부’하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이 삶을 기쁘게 누리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공부해야 하는’ 목숨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놀고 튼튼하게 자라면서 마음껏 웃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하는 숨결입니다.


  꾸지람만 듣는 학교라면 아무도 안 가고 싶습니다. 재미있게 배우면서 즐겁게 꿈꿀 수 있는 학교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요. 윽박지르기만 하는 집이라면 이러한 집에서 살고픈 아이는 없을 테지요. 아무도 아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학교도 집도 모두 싫을 테지요.


  아이 아닌 어른으로서도 이와 똑같습니다. 꾸지람만 듣는 회사에 가고 싶은 어른이 있을까요.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으려 한다면 이러한 집에서 멀쩡하게 견딜 수 있는 어른이 있을까요. 아이들은 참고 참습니다. 아이들은 참고 참다가 ‘선생님놀이’나 ‘학교놀이’를 하면서 겨우 버팁니다.


  어른들이 바쁘지 않기를 빕니다. 어른들이 아이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빕니다. 어른들이 아이한테 기쁜 사랑을 아름답게 가르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0.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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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이의 과학 공부 - 열여섯 살 손녀와 물리학자 할아버지가 나누는 즐거운 과학 토크
장 마르크 레비 르블롱 지음, 문박엘리 옮김, 김희준 해제 / 휴머니스트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12



‘생각하는 과학’일 때에 아름답다

― 프랑스 아이의 과학 공부

 장마르크 레비르블롱 글

 문박엘리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2015.8.24. 1만 원



  몸을 크게 다친 적이 있는 사람은 다친 데가 다 낫기까지 어느 만큼 걸리는가를 알고, 몸을 크게 다치면서 여느 때하고는 사뭇 다른 삶을 압니다. 태어날 적부터 몸이 여리다든지 몸 한쪽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사람은 여린 몸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몸 한쪽을 마음대로 쓰지 못해서 못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압니다.


  몸을 다친 적이 없거나 몸 한쪽을 못 쓰는 일이 없는 사람은 몸을 다친 사람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할 테고, 몸 한쪽을 못 쓰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인가를 알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어렴풋이 헤아릴 수는 있을는지 몰라도 ‘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안다’고 할 수 없을 테지요.


  나는 스물사흗날 앞서 다친 오른무릎 때문에 벌써 스물사흗날째 제대로 못 걷습니다. 요즈음에는 제법 걷기도 하고 두 다리로 가만히 설 수 있기도 하지만, 한자리에서 삼십 분 즈음 서서 부엌일을 하면 이내 주저앉습니다. 아이들이 먹을 밥을 차리고 나면 함께 수저를 들 기운이 없어서 자리에 드러누워야 합니다.


  이제껏 겪지 못한 일을 겪으면서 곰곰이 돌아봅니다. 이웃이 아프거나 힘든 삶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테두리를 넓혀서 ‘서민을 안다’고 말하는 일이라든지 ‘가난하거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복지 정책’을 펴는 사람들은 무엇을 ‘안다’고 할 만한가 하고 돌아봅니다.



기구들로 실험하고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기구를 통해 관측한 결과와 얻어낸 영상을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거든. 바로 그때 우리 머리, 말하자면 생각하는 기구가 필요한 거야. 실험을 구상하고 도구를 만들 때 벌써 머리를 쓴 것처럼 말이지. (13쪽)


특히 젊은 연구자들은, 대규모 실험의 특정 부분에 대해서만 작업할 수밖에 없어서 자기가 거대한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처럼 느껴지는 게 불만이겠지. (16∼17쪽)



  장마르크 레비르블롱 님이 쓴 《프랑스 아이의 과학 공부》(휴머니스트,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은 할아버지가 손녀한테 들려주는 ‘이야기’ 얼거리로 과학을 밝히거나 다루는 청소년책입니다. ‘물리학자 할아버지’가 열여섯 살 손녀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는 학교에서 교사가 가르치는 교과서 지식하고는 좀 다르다고 할 만합니다. 무엇보다도 할아버지는 오직 한 사람한테만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학교에서 교사는 적어도 스무 아이나 서른 아이를 마주보면서 교과서 지식을 ‘진도 맞추기’에 따라서 들려주어야 한다면, 할아버지는 오직 이녁 손녀 눈높이에 맞추어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내겐 아주 큰 장점이 있다는 거야. 그 장점은 내가 오류를 범할 거라는 걸 미리 안다는 사실이지. (25쪽)


과학을 한다는 게 오로지 연구만 뜻하지는 않으니 다행이지 뭐냐. 그건, 모든 과학자에게 마찬가지일 텐데, 가르치는 것이고 설명하는 것이기도 해.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낼 뿐만 아니라 나누는 거야. (25∼26쪽)



  《프랑스 아이의 과학 공부》에서 다루는 ‘과학’은 자연과학일까요? 아무래도 물리학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과학이니까 자연과학이라 할 테지만, 이 책을 곰곰이 읽다 보면, ‘과학’은 ‘자연과학’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한국 사회를 돌아보아도 손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과학’이나 ‘인문사회과학’이라는 말을 흔히 써요.


  그러니까, 과학은 ‘실험실 과학’과 ‘생각하는 과학’ 두 가지가 있는 셈입니다. 실험실 과학은 기계나 기구를 써서 ‘숫자를 따지는 정보에 맞추어서 지켜보는’ 과학이라 할 수 있고, 생각하는 과학은 ‘어떤 틀과 얼거리를 먼저 세운 뒤에 이러한 틀과 얼거리가 얼마나 알맞거나 올바른가 하고 따지는’ 과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자도 ‘실험 물리학자’하고 ‘이론 물리학자’가 있지요.


  그런데, 실험 물리학자라고 해도 ‘생각 없는’ 과학은 할 수 없습니다. 실험을 하려면 ‘무엇을 실험하려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을 실험할는지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왜 실험하려는가를 생각하고, 무엇을 어떻게 실험하려는가를 생각합니다. 이러면서 무엇을 실험하는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네가 배우는 탈레스와 피타고라스의 정리들을 설계사와 목수와 측량사 들이 활용하지 않은 게 분명한데, 그건 그 장인들이 대개 노예였다는 단순 명료한 사실 때문이야. 그들은 노예라서 글을 읽을 줄 몰랐고, 남성 자유인에게만 허락되던 이론 지식에 접근할 수가 없었어. (38∼39쪽)


“그리스인들은 수학을 왜 했어요?” “생각하기 위해서!” (40쪽)


한 사람이 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사람은 아니라도 여러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거야! (47쪽)




  《프랑스 아이의 과학 공부》이라는 청소년 인문책 40쪽 첫머리에 나오는 말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옛 그리스 사람들은 “생각하려”고 수학을 했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중·고등학교 푸름이는 왜 수학을 할까요? 교과서로 가르치니까? 학교 수업이니까? 시험을 보아야 하니까? 대학입시를 치러야 하니까?


  자연과학하고 인문과학이라 말하듯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수업은 ‘과학’입니다. 수학과 물리·화학·생물만 과학이 아니라, 국어와 영어와 역사와 철학도 모두 과학입니다. 모든 수업은 과학이고, 모든 가르침은 과학입니다. 그리고, 모든 수업과 가르침이 과학이듯이, 모든 수업과 가르침은 굳이 과학이라는 틀에 가두지 않아도 돼요. 모든 수업과 가르침은 바로 ‘생각’을 하도록 이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학을 하는 까닭뿐 아니라, 자연과학이나 실험실 과학을 하는 까닭도 생각을 하도록 북돋우려는 뜻입니다. 첨단과학이 나와서 첨단기기를 만드는 까닭도 생각을 키우거나 가꾸려는 뜻입니다. 생각을 펼치지 않는다면 과학이 아니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과학이 아닌 셈입니다.



과학자도 자기 자신의 인품과 문화적 교양과 철학 견해와 심리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65쪽)


늘 새로운 우주의 면모를 발견한다는 건 정말 멋지거든. 그런데 이런 새로움이 더 멀거나 더 작은 대상을 연구할 때만 드러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우리 세계는 여전히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단다. (68쪽)


대개는 너희 선생님들도 그런 설명을 듣지 못했어! 암튼 이제 주저하지 말고 선생님께 그 말들이 언제 어디서 왔는지를 여쭤 봐. 만약 선생님이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분명히 그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네가 한 질문에 대해 고마워할 거야. (76쪽)



  과학자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정치권력자가 큰돈을 대면서 전쟁무기를 만들라고 시키면 과학자는 이 말대로 따르겠지요. 큰 부자가 큰돈을 대면서 이녁 잇속을 채우려는 기계나 기구나 기기를 만들라고 시키면 과학자는 또 이 말대로 따를 테고요.


  생각을 하지 않는 과학자는 자연과학이든 실험실 과학이든, 아주 무시무시하고 무서우며 모진 자리에 함부로 쓰는 일에 몸을 바치고 맙니다. 생각을 하는 과학자일 때라야 비로소 ‘실험’이나 ‘이론’을 함부로 펼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전쟁무기를 만들어 낸 사람은 바로 과학자입니다. 모든 전쟁무기가 일으킨 전쟁을 떠올린다면, 과학자야말로 이 지구별에 끔찍한 전쟁을 끌어들인 ‘바보’이자 ‘멍텅구리’라고까지 할 만합니다. 다만, ‘생각 없는 과학자’가 끌어들인 전쟁이라고 해야겠지요.


  이리하여, 과학자뿐 아니라 정치 지도자도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정치 지도자는 무슨 짓을 할까요? 독재를 하고 전쟁을 일으키려 하며 사회와 문화와 교육 모두 꽁꽁 억누르거나 짓밟는 바보짓을 하고야 맙니다.



연구를 시작할 때 제기한 질문들 대부분은 난관에 부딪히기 마련이고, 질문이 너무 복잡하거나 잘못 제기되어서 답이 없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다시, 또다시 그 질문이 목적지에 닿는 길로 나아갈 때까지 질문을 거듭 손질해야 해. (91쪽)


여러 직업을 수행하고 개인 생활을 꾸려 가는 데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많은 물건이 과학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라. 게다가 어떤 면에서 보면, 인류가 만들어 쓰는 물건들 중 대부분이 정말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어. (95쪽)



  학교가 맡은 몫은 ‘가르침’입니다. 다만, 그냥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닙니다. 슬기롭게 생각하도록 이끌면서 가르칠 노릇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처럼 오직 입시지옥으로 치달아 대학바라기로 내모는 학교가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어린이와 푸름이 모두 스스로 슬기롭게 생각해서 아름답게 삶을 짓는 길을 북돋우는 학교여야 합니다.


  자연과학도 아이들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이끌어야 하고, 인문과학도 아이들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면서 즐거운 삶을 빚는 길로 펼치도록 해야지요. 남을 괴롭힌다거나 이웃을 밟고 올라서는 ‘못난 생각’이나 ‘어리석은 생각’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핵 개발의 ‘성공’으로 과학과 기술의 결합이 강화되었다는 걸 네가 알아 두면 좋겠구나. 이때부터 과학적 발견을 기다렸다가 응용하기보다는 응용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하도록 연구의 방향을 이끌고 고무하게 된 거야. 군대와 기업이 과학 연구에 많은 자본을 대어 군사력을 키우고 시장에 첨단 기술 제품을 공급하지. 과학은 점점 더 많은 돈을 받고 연구자는 점점 더 늘어나서 더 크고 복잡한 장치를 만들고 ……. (105쪽)



  《프랑스 아이의 과학 공부》라는 책은 ‘과학 공부’가 무엇인가를 넓고 깊게 다룹니다. 교과서를 외우기만 해서는 되는 일이 공부가 아닌 줄 알려줍니다. 첨단 제품이나 기술로 뻗기만 하는 일이 과학이 아닌 줄 알려줍니다.


  그나저나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쉽다면, 물리학자 할아버지가 과학을 손녀한테 들려주는데 양자물리학은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모두 고전물리학 테두리에서 과학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고전물리학 테두리에서 과학을 이야기하더라도, 과학이 ‘실험실 기계 다루기’로 좁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대목을 잘 보여줍니다. 과학은 바로 삶을 가꾸는 수많은 길 가운데 하나라는 대목을 잘 보여주지요. 그리고, 집에서 빵을 굽거나 밥을 짓는 일부터 수많은 살림살이와 사람살이는 ‘과학이 처음부터 끼어들지 않았’어도 아주 오랫동안 지구별 모든 삶과 문화를 아름답게 가꾸어 왔다는 대목까지 잘 보여줍니다.


  이 책이 들려주는 가장 크고 뜻있는 대목이라면 바로 ‘열여섯 살 손녀한테’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는 삶이 얼마나 즐거운 꿈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쉽고 따사로이 짚어서 알려주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알려고 하기에 과학이 태어나고, 새롭게 알되 슬기롭게 알려고 하기에 과학이 태어납니다. 새로우면서 슬기롭게 알되 아름답게 알려고 하기에 과학이 자라고, 새로움과 슬기로움과 아름다움에 사랑스러움을 함께 껴안기에 과학이 튼튼하게 섭니다. 한국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어른들 모두, 또 한국에서 정치와 경제와 문화를 펼치는 어른들 누구나, 아름답게 생각하고 슬기롭게 생각하는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9.2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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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아직 새였을 때 시공 청소년 문학 10
마르야레나 렘브케 지음, 김영진 옮김 / 시공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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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11



큰 기쁨을 주려고 태어난 아이

― 돌이 아직 새였을 때

 마르야레나 렘브케 글

 김영진 옮김

 시공사 펴냄, 2006.8.1. 7500원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튼튼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 기쁩니다. 아이들은 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프지 않고 튼튼하게 자라기만 하면 됩니다. 짐을 잘 날라야 하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일을 거뜬히 해내야 하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시험성적이 잘 나와야 하는 아이들이 아니고, 학교 공부를 잘 해야 하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잘생기거나 키가 커야 하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그저 아이로서 바로 이곳에서 튼튼하게 함께 살기만 하면 됩니다.


  아이가 아플 적에 어버이는 아이한테 무엇을 바랄까요? 아픈 아이 앞에서 대학입시가 며칠 남았다는 말을 읊을까요? 아픈 아이 앞에서 곧 시험인데 어떡하느냐고 푸념을 할까요?


  아이는 그저 아이라는 숨결이기 때문에 사랑스럽습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오직 아이라는 숨결로 튼튼하게 이 땅에서 자라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이답게 웃고, 아이답게 노래하며, 아이답게 놀면서, 언제나 씩씩한 넋으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때에 비로소 어버이입니다.



우리는 페카를 사랑했다. 그리고 페카는 우리를 사랑했다. 하지만 페카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페카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문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다 사랑했다. 우리 집에 손님이 오면 페카는 손님 앞에 앉아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요.” (14쪽)


“내가 진짜 진짜 사랑하는 것은 새랑 돌이야. 왜냐하면 돌도 옛날엔 새였거든.” (15쪽)



  마르야레나 렘브케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돌이 아직 새였을 때》(시공사,2006)를 읽습니다. 글쓴이 마르야레나 렘브케 님은 핀란드에서 나고 자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동화책 《돌이 아직 새였을 때》에 나오는 사람들도 핀란드사람이에요.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핀란드 교육 배우기’가 뜨거운 바람처럼 부는데, 1998년에 나온 이 동화책을 빌어서 헤아리면, 이무렵에도 핀란드 아이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습니다. 몸이 여리고 아픈 아이는 동무들한테 놀림을 받아요.



우리가 야단치면 페카는 천역덕스럽게 대답했다. “나 때문에 걱정할 필요 없어. 누나랑 형들이 날 못 찾으면 난 그냥 아무 돌에나 앉아서 그 돌이 새가 될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러면 집까지 날아갈 수 있으니까.” (18쪽)


페카는 벌써 학교에서 와 있었다. 내가 물었다. “어땠니?” 페카의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노인네처럼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날 사랑하는지 잘 모르겠어.” (20쪽)



  태어날 적부터 몸이 많이 아팠다고 하는 ‘페카’라는 아이는 처음 학교에 다녀온 날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립니다. 이 아이는 무엇을 했을까요? 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른 수많은 아이들하고 참말 ‘다를’ 뿐입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튼튼하게 달리지 못하는 몸이요, 어릴 적부터 수없이 수술대에 오르느라 몸이 몹시 여립니다. 그런데 마음은 매우 부드럽고 따스합니다. 어느 누구도 미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만 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풀과 나무도 함께 사랑하고, 돌과 모래도 사랑합니다. 사랑하지 않을 것이란 없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웃고 노래하는 페카라는 아이라고 해요.


  할머니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말합니다. 이 아이는 우리 모두한테 큰 기쁨을 주려고 태어났다고. 페카네 형과 누나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말을 가만히 듣습니다. 페카네 형제도, 또 페카네 어머니와 아버지도 할머니가 들려주는 말을 곰곰이 듣습니다. 참말 모두 한마음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고, 열 발가락을 깨물어도 안 아픈 발가락이 없습니다. 아니, 바늘로 팔뚝을 찔러도 아프고, 손가락으로 귀를 잡아당겨도 아파요. 머리카락 한 올을 잡아당겨 뽑아도 아프지요.



할머니가 말했다. “그거야 나중에 두고 보면 알 테지. 어쨌거나 지금은 우리한테 이렇게 큰 기쁨을 주려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구나.” (33쪽)


“대체 누가 그랬지? 페카를 우물에 밀어넣은 사람이 누구니?” 아이들은 모두 도리질만 쳤다. 페카를 민 아이는 감히 잘못을 고백할 용기가 없고, 다른 아이들은 정말로 누가 그랬는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39쪽)



  《돌이 아직 새였을 때》에 나오는 페카네 집은 몹시 가난합니다. 페카네 큰형은 핀란드하고 이웃한 스웨덴으로 건너가서 ‘이주노동자’로 일합니다. 꽤 많은 핀란드사람은 스웨덴으로 건너가서 이주노동자로 산다고 해요. 페카네 아버지도 페카한테 들이는 병원삯이 매우 커서 자꾸 빚을 지느라 고향나라를 떠나기로 다짐합니다. 핀란드에서 버는 돈으로는 도무지 살림을 꾸릴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페카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스웨덴이 아닌 캐나다까지 건너가기로 합니다. 어렵디어렵게 이민 서류를 떼고, 집을 팔아서 빚을 갚습니다. 그런데, 이민 서류를 모두 떼고, 이민을 떠날 날이 코앞에 닥쳤는데, 그만 페카가 다시 아픕니다.


  벌써 집을 팔았으니 더는 이 집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페카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낡고 오래된 시골집을 가까스로 장만합니다. 아픈 아이를 이끌고 먼 바닷길을 건널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픈 아이를 다스릴 수 있는 조용하고 깨끗한 시골집이야말로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깁니다. 페카네 형제도 새로운 터로 옮겨서 지내는 생각을 모두 접고, 어리고 여리며 아픈 동생한테 마음을 쓰면서 따스하게 돌보는 일을 생각합니다.



마티 오빠가 압력솥이 얼마나 간편한지와 무엇보다도 얼마나 빨리 요리가 되는지 설명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내저으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물었다. “대체 왜 요리를 빨리 해야 하는 건데? 난 요리할 시간이 많단 말이다.” (75쪽)


아빠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집, 가구, 낚시, 책 같은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야. 페카가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날들을 생각해 보렴.” (87쪽)



  우리 집 아이들은 아픈 일이 거의 없습니다. 아프지 않고 잘 뛰어노니 얼마나 대견하면서 고마운지 모릅니다. 갓 태어났을 적에 아토피로 괴로웠고, 미끄러져서 이마가 찢어지기도 했으며, 감기가 들어 며칠 앓아누운 적이 있는데, 이럴 때마다 ‘아이들이 아프지 말고 내가 아프’면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디 이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더욱 튼튼하게 자라기를 바랐습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나들이를 하다가 자전거가 뭘 잘못 밟거나 구멍에 바퀴가 빠져서 자빠질 적에는 으레 내 몸을 던져서 아이들이 안 다치도록 합니다.



“꿈꾸는 것도 생각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꿈은 슬프지 않아.” (115쪽)


“돼지들이 날아갈 때 몸뚱이는 안 가져갈 거야. 그냥 자기들의 조그만 영혼만 가지고 갈걸. 몬트리올(돼지 이름)은 제 몸뚱이가 더 이상 필요없어서 우리한테 남겨 놓고 간 거야. 우리 앞에 놓인 이 맛있는 고기는 그저 추억일 뿐이라고. 돼지들은 정말 멋진 동물이야!” (118쪽)



  눈으로 꽃을 바라봅니다. 마음으로 사랑을 바라봅니다. 손으로 꽃잎을 쓰다듬습니다. 생각으로 사랑을 가꿉니다.


  몸이 튼튼한 아이들은 신나게 뛰노느라 바쁩니다. 몸이 튼튼한 아이들은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늘 듣습니다. 몸이 여리거나 아픈 아이들은 자꾸 드러눕거나 앓아눕습니다. 눕지 않더라도 몸을 많이 움직이지 못하고, 으레 조용히 앉아서 생각에 젖습니다. 몸이 여리거나 아픈 아이들은 조용히 생각에 젖거나 앓아눕는 동안 마음으로 수많은 삶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습니다.


  《돌이 아직 새였을 때》에 나오는 페카도 마음으로 마음을 읽어요. 고기가 되어 몸은 이곳에 남기고 마음은 벌써 날개를 달고 하늘로 훨훨 날아간 돼지를 읽습니다. 새가 되는 돌을 읽고, 돌이 되는 새를 읽어요. 머잖아 페카도 ‘무거운 몸’은 이 땅에 내려놓은 채 ‘홀가분한 넋’으로 하늘을 훨훨 날면서 온누리를 마음껏 누비겠지요.



“또 만나, 누나!” 나는 페카를 꼭 끌어안았다. 페카가 말을 이었다. “다시 볼 거니까 또 만나자고 인사하는 거야. 내가 죽을까 봐 겁낼 필요 없어. 누나, 내 생각에 난 절대 안 죽을 것 같거든. 난 돌이 됐다가 새로 변할 거야. 밤이 돼서 달이 뜨고 그래서 슬픈 생각이 들면 지금 내가 한 말을 기억해. 그리고 혹시 돌에 맞더라도 겁먹지 마. 그건 막 새가 되려는 돌일지도 모르니까.” (127쪽)



  큰 기쁨을 주려고 태어나는 아이입니다. 오늘 이곳에서 두 아이 어버이로 사는 나 또한 우리 어버이한테 큰 기쁨을 주려고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우리 어버이도 두 분이 처음 태어나실 적에는 두 분 어버이한테 큰 기쁨을 주려고 태어난 아이였어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처음에 큰 기쁨을 주면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언제나 큰 기쁨을 주면서 이 땅에 아름다운 노래를 터뜨렸어요. 그러니, 동화책에 나오는 페카가 아니더라도 온누리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없기 마련입니다. 흙 한 줌도 사랑을 할밖에 없고, 풀잎 한 포기도 사랑을 할밖에 없어요.


  너와 내가 모두 ‘아이로 태어나 사랑을 베푼 숨결’인 줄 깨닫는다면 지구별은 아름답게 거듭나리라 봅니다. 나도 너도 모두 ‘아이로 태어나 기쁨을 퍼뜨린 넋’인 줄 알아차린다면 모든 차별과 전쟁과 따돌림을 걷어내고 평화와 사랑과 평등이 이 땅에 가득하도록 힘쓰리라 봅니다. 돌이 아직 새였을 때 이 별에는 오직 사랑이 있습니다. 돌이 돌로 머물 적에도 이 별에는 언제나 꿈이 흐릅니다. 4348.9.1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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