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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는 학교가 싫다 ㅣ 난 책읽기가 좋아
준비에브 브리작 글, 미셸 게 그림, 김경온 옮김 / 비룡소 / 1997년 7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13
꾸지람만 듣는 학교에 누가 가고 싶을까
― 올가는 학교가 싫다
준비에브 브리작 글
미셸 게 그림
김경온 옮김
비룡소 펴냄, 1997.7.11. 6500원
우리 집 큰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서 할 만한 것이 없어서 학교에 보내지 않기도 했고, 큰아이는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가기도 합니다. 흔히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고 하지만 아이한테 함부로 ‘의무’를 들이밀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학교에서는 교과서로만 가르치고, 교과서 지식으로 시험을 치르며, 교과서 지식으로 시험을 치르는 점수에 맞추어 대학 줄세우기를 시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들이 ‘집짓기’를 배울 수 있다면 기쁘게 학교에 보낼 만합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옷짓기’를 익힐 수 있다면 즐겁게 학교에 보낼 만하지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밥짓기’를 지켜보면서 손수 할 수 있으면 그야말로 신나게 학교에 보낼 만해요.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오직 ‘교과 수업’과 ‘학습 활동’뿐입니다.
올가 물건은 한 번씩 태엽을 감을 때마다 ‘음메’ 하고 우는 젖소 인형, 일곱 식구 트럼프 놀이, 면이 아홉 개인 주사위, 타고 남은 성냥개비들, 상자를 열면 갑자기 튀어 나오는 꼬마 도깨비, 박하껌 두 개, 유아원에 다닐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남자 친구 살뱅과 함께 파리잡이 끈끈이를 만들려고 둔 투명 테이프 등이었다. (8쪽)
준비에브 브리작 님이 글을 쓰고, 미셸 게 님이 그림을 그린 어린이책 《올가는 학교가 싫다》(비룡소,1997)를 읽습니다. 《올가는 학교가 싫다》에 나오는 ‘올가’라는 아이는 학교에 처음 들어간 아이로구나 싶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아이가 몇 살부터 학교에 들어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는 일고여덟 살로 보입니다. 이 아이는 앞으로 ‘문방구 가게 임자’가 되려는 꿈을 꿉니다. 그래서 언제나 제 가방에 온갖 장난감을 챙깁니다. 문방구 가게 임자가 되려면 온갖 장난감을 다룰 줄 알고, 만들기도 해야 하며, 잘 알아야 하거든요. 그러니 올가는 교과서나 공책이나 다른 것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에만 온마음을 쏟습니다.
올가는 엄마에게 공책을 한 권 내밀었다. “선생님이 여기다가 뭐라고 써 주셨는데, 뭔지 모르겠어. 나는 읽을 줄 모르잖아. 엄마, 나는 책읽기를 배우고 싶지도 않아.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꼭 읽을 줄 알아야만 되는 건 아니잖아.” (12쪽)
이야기책을 가만히 읽으면, 올가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올가한테 거의 아무런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이하고 이야기를 거의 안 하고, 아이가 하는 말을 아이 어머니도 아버지도 거의 안 듣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바빠서 안 들을 뿐 아니라, 이내 잊습니다. 아이 아버지는 바깥일, 그러니까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는 일만 하느라 바빠서 아이 얼굴을 볼 틈도 없습니다.
책을 읽다가 빙그레 웃습니다. 아니, 한국만 이런 모습이 아니네 하고. 프랑스라는 나라에서도 이러네 하고.
게다가 학교에서도 올가는 고단합니다. 올가가 다니는 학급을 맡은 교사는 올가하고 말을 제대로 섞지 않습니다. 그저 올가 가방에 있는 장난감을 아무 말 없이 몽땅 빼앗을 뿐입니다. 장난감만 챙긴다고 해서 아이를 윽박지르고 큰 소리로 꾸짖을 뿐입니다. 아이한테 왜 이런 장난감을 챙기느냐고 차분히 묻지 못하는 교사요, 아이한테 부드럽거나 따스한 말로 ‘학교에서 무엇을 하면서 즐거운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는 교사입니다.
올가는 저녁마다 자그마한 깜짝쇼가 벌어지지 않는 게 너무 속상했다. 그러나 올가는 엄마가 더 이상 선물을 하지 않으니까 이젠 자기가 엄마에게 선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일은 전염되는 법이니까. (19쪽)
“엄마! 엄마는 왜 내 목걸이 선물을 받고서 그걸 목에 걸지 않는 거야? 엄마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게 아니야.” 올가는 뾰로통해졌다. (22쪽)
모든 교사가 훌륭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교사가 훌륭할 수 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교사가 훌륭해야 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사라는 자리에 서려면 ‘교과서 수업 진도 나가기’가 아닌 ‘아이하고 눈을 마주치면서 아이 마음을 읽고 아이한테 무엇을 즐겁게 가르쳐서 이 아이가 아름답게 자라도록 도울 수 있는가’ 하는 대목을 먼저 차분히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훌륭한 교사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아침부터 저녁(이나 낮)까지 마주하는 어버이 같은 몫을 맡는 교사라면, 아이가 즐겁게 배울 수 있도록 북돋우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가정 연락장에는 날마다 선생님 편지가 씌어 있었다. 올가가 가지고 가는 수집품들은 뭐든지 다 압수당했고, 분명한 이유조차 모르면서 올가는 늘 야단맞았다. 그래서 올가는 늘 허둥거렸으며, 걸핏하면 소리 지르고 소란부터 떨곤 했다. (34쪽)
이야기책을 덮고 한국 사회를 돌아봅니다. 지난날 한국 사회에서는 온갖 행정서류가 넘쳐서 학교에서 교사가 고달팠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인터넷으로 갖가지 ‘수행 결과 입력’을 해야 합니다. 교사는 교사라기보다 ‘서류 처리반’ 같은 얼거리요, 교사가 교사로서 아이들을 느긋하고 넉넉하게 마주하기 힘들도록 내모는 행정 얼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사는, 이 이름 그대로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선생도, 이 이름 그대로 아이보다 먼저 태어나서 삶을 누린 뒤 이 삶을 아이한테 보여주면서 이끄는 사람입니다.
아이를 낳기만 한대서 어버이가 아닙니다. ‘낳은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면서 아낄 때에 비로소 어버이입니다. 아이를 낳았대서 어버이가 되지 않습니다. ‘낳은 아이’를 따사로이 아끼고 살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삶꽃을 가꿀 때에 비로소 어버이입니다.
올가와 실뱅은 여러 가지 놀이를 했다. 그리고 선생님놀이를 했다. 올가가 선생님을 했고, 실뱅이 학생들 모두를 맡았다. 학생들 중에는 올가사 소피처럼 착한 아이도 있었고, 오스카 패거리나 실뱅과 고티에처럼 못된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은 엄격했다. 그러면서도 공정했다. 선생님은 착한 아이들을 칭찬했고, 못된 아이들에게는 벌을 주었다. (53∼54쪽)
아이들은 ‘공부’하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이 삶을 기쁘게 누리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공부해야 하는’ 목숨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놀고 튼튼하게 자라면서 마음껏 웃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하는 숨결입니다.
꾸지람만 듣는 학교라면 아무도 안 가고 싶습니다. 재미있게 배우면서 즐겁게 꿈꿀 수 있는 학교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요. 윽박지르기만 하는 집이라면 이러한 집에서 살고픈 아이는 없을 테지요. 아무도 아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학교도 집도 모두 싫을 테지요.
아이 아닌 어른으로서도 이와 똑같습니다. 꾸지람만 듣는 회사에 가고 싶은 어른이 있을까요.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으려 한다면 이러한 집에서 멀쩡하게 견딜 수 있는 어른이 있을까요. 아이들은 참고 참습니다. 아이들은 참고 참다가 ‘선생님놀이’나 ‘학교놀이’를 하면서 겨우 버팁니다.
어른들이 바쁘지 않기를 빕니다. 어른들이 아이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빕니다. 어른들이 아이한테 기쁜 사랑을 아름답게 가르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0.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