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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힘 문학동네 동시집 21
김용택 지음, 이경석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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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25

 


할머니는 시골에서
― 할머니의 힘
 김용택 글
 이경석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2.5.4.

 


  인천에서 살며 골목마실을 할 적에 언제나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골목집 어디에서나 할머니는 골목밭을 일굽니다. 골목동네 어디에서나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골목꽃을 보듬고 골목나무를 쓰다듬습니다. 할머니는 시골에서 살아도 시골내음을 물씬 풍기고, 할머니는 도시에서 살아도 시골빛을 듬뿍 길어올리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 이웃집 할아버지는 / 혼자 산다. / 소 키운다. / 지게 지고 나무해 오고 / 지게 지고 / 풀 베어 온다. / 불 때서 소죽 끓이고 / 콩 타작도 혼자 하고 / 고추도 혼자 딴다 ..  (할아버지와 소)


  할머니는 언제부터인가 할머니입니다. 한 번 할머니가 되면 한결같이 할머니입니다. 예순 살부터 할머니이든, 일흔 살부터 할머니이든, 또는 쉰 살부터 할머니이든, 앞으로 여든과 아흔에도 할머니요, 백에도 백열이나 백스물에도 할머니입니다.


  할머니이기 앞서는 어머니입니다. 우리 어머니요 이웃 어머님입니다.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어머니가 아니라 할 테지만, 어머니 자리에 있건 아주머니 자리에 있건 모두 어머니와 같다고 느껴요. 뭇 목숨을 따스하게 품고, 뭇 아이들을 포근하게 감싸며, 뭇 살림을 정갈하게 갈무리합니다.


  할아버지는 어떤 손길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할아버지도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따스한 품이고 포근한 눈길이며 정갈한 손길이리라 생각해요.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이기 앞서 아버지이고 아저씨일 적에도 언제나 따스함과 포근함과 정갈함을 넉넉히 나누며 살았으리라 생각해요.


.. 오늘 저녁 할머니 혼자 자겠지. / 텔레비전 틀어 놓고 혼자 자겠지 ..  (수학여행)


  시골에서 살아가는 할아버지는 예순에도 일흔에도 여든에도 똑같이 새벽을 맞이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할아버지는 즐겁게 일하고 느긋하게 쉽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할아버지는 기운차게 일하고 두 다리 뻗으며 잠들며, 가끔 술 한 잔을 기울이면서 밤바람과 밤별을 노래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할아버지는 어떤 빛이 될까요. 예순이나 예순다섯 언저리에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해야 한다면, 도시에서 할아버지는 어떤 숨결이 될까요. 정년퇴직을 하고서 연금으로 끝삶을 누린다면 할아버지는 어떤 나날을 누릴까요.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일자리를 찾아서 아둥바둥해야 한다면 할아버지는 어떤 노래를 부를 만할까요.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듯이 아침저녁으로 흙을 만지면서 새 숨결을 얻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을 마시듯이 아침저녁으로 풀을 쓰다듬으면서 새 이야기를 얻습니다.


  흙에서 나무가 자랍니다. 나무에서 꽃이 핍니다. 꽃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풀에서 잎이 돋고, 잎에서 푸른 내음이 퍼지며, 푸른 내음에서 이야기밥이 열립니다.


.. 귀뚜라미가 울면은 / 가을 오고요 // 부엉이가 울면은 / 겨울 오고요 / 우리 아기 울면은 / 엄마가 달려오지요 ..  (울면 온다)


  김용택 님이 쓴 동시를 그러모은 《할머니의 힘》(문학동네,2012)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김용택 님은 곧 일흔 문턱을 넘습니다. 할배 나이입니다. 그렇지만 시골에서 살아가는 김용택 님은 할배가 아니라고 해요. 왜냐하면, 어느 시골마을에서든 고작 일흔 나이는 ‘젊은이’입니다. 일흔 나이인 할배가 마을에서 ‘청년회장’을 해요.


  할배이지만 할배라 할 수 없는 자리에 서는 시인 김용택 님이 시골마을에서 할매를 만납니다. 할매는 할매요, 김용택 님은 할배가 아닙니다. 할매는 할매이고, 김용택 님은 시골마을에서 아직도 ‘젊은이’이거나 ‘아이’입니다. 그래서 김용택 님은 할매들 사이에서 젊은이나 아이로서 이야기를 귀여겨듣습니다. 할매가 들려주는 노래를 조곤조곤 듣습니다.


.. 동생을 함부로 하면 / 할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한다. / 우리 집 강아지도 / 우리가 귀하게 대해 줘야 / 밖에 나가면 / 동네 사람들도 / 귀여워한다 ..  (싸워야 큰다)


  시집을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할배라 할 시인 아저씨가 시골마을 할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노래를 부르듯이 시를 써도 아름다운데, 스스로 시골마을 할배로서 새롭게 이야기를 지어서 나긋나긋 불러도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아직 시골에서는 할배다운 할배 자리가 아닌 만큼 이웃 할매 목소리를 노래로 담는 이야기도 사랑스러운데, 시골마을에서 시골빛을 가꾸면서 시골노래를 따사로우면서 포근하게 짓는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사랑스러우리라 느낍니다.


  이웃 이야기를 적바림할 때에도 노래이고, 내 이야기를 빚을 때에도 노래입니다. 살가운 이웃이 살아가는 예쁜 이야기를 적바림할 적에도 노래이며, 내 이야기를 펼쳐서 내 이웃이 내 이야기를 듣고 활짝 웃음을 지어도 노래입니다.


.. 해 뜨기 전에 / 일찍 일어나 밭매고 논매라고 / 논매 밭매 논매 밭매 운다. // 빨리빨리 일 추리라고 / 일추개 일추개 / 일추개 매미 운다 ..  (매미)


  봄꽃이 핍니다. 봄꽃이 저 보라고 핍니다. 봄꽃이 얼른 저 뜯어먹고 새봄에 새빛을 가슴에 담으라고 부릅니다. 봄꽃이 피는 나무마다 푸른 잎이 새로 돋습니다. 봄꽃으로 가득한 들과 숲이 푸른 빛깔로 물결칩니다.


  봄은 시골에서 태어납니다. 봄은 시골에서 무르익습니다. 봄은 시골에서 곱다시 피어납니다. 봄은 시골에서 도시로 퍼지고, 봄은 시골에서 지구별 골골샅샅 흐르면서 보드라운 햇살이 드리웁니다. 4347.4.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동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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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이긴 날 문학동네 동시집 1
김은영 지음, 박형진 그림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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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24

 


삶에서 살아나는 말
― 선생님을 이긴 날
 김은영 글
 박형진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08.3.11.

 


  만화책이나 그림책이나 만화영화를 보는 일곱 살 아이가 곧잘 묻습니다. “아버지, 왜 책이나 영화에서는 ‘아버지 어머니’라고 안 하고 ‘엄마 아빠’라고 해?” 이런 물음에 딱히 들려줄 말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아버지 어머니’라고 말할 줄 모르는 다른 어른들 넋을 섣불리 아이한테 알려줄 수 없습니다. ‘엄마 아빠’는 아기일 적에 쓰는 말이요, 아기 티를 벗고 씩씩한 어린이로 서면, 이때부터 ‘아버지 어머니(아배 어매/아바이 어무이)’로 이름을 고쳐서 쓸 노릇입니다. 말과 넋과 삶을 슬기롭게 헤아리면서 살림과 사랑과 꿈을 곱게 거느린다면, 이런 낱말 한 마디를 누구나 잘 다스리리라 생각해요. 지난날에는 누구나 이 대목을 바로잡았어요. 어느 마을에서나 어느 어른들이나 아이한테 말을 올바르고 슬기롭게 가르쳤습니다.


  말을 올바르고 슬기롭게 가르치는 삶이란, 생각과 마음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삶입니다. 생각과 마음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삶이란, 어른과 아이가 저마다 하루를 알차고 알맞게 가꾸면서 아름다운 빛을 누리는 나날입니다.


  우리 집 일곱 살 아이는 다시 말합니다. “책하고 영화에서 ‘아버지 어머니’라고 나오면 좋겠다.” 요즈음 일곱 살 아이는 책을 읽다가 ‘엄마’라 적힌 대목이 보이면 나한테 가지고 옵니다. 그러고는 “아버지, 여기 ‘엄마’를 ‘어머니’로 고쳐 주셔요.” 하고 말합니다. 아무래도 아이한테 자꾸 이 말이 보이니 눈에 걸리는구나 싶어요.


.. 엄마 여길 좀 봐요 / 꽃무늬가 참 예뻐요 ..  (고양이 발자국)


  시골에서 살면서 늘 생각합니다. 우리 식구는 시골에서 살아가니 우리 식구가 나누는 이야기는 ‘시골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식구는 텔레비전을 안 봅니다. 우리 식구는 신문을 안 읽습니다. 우리 식구가 주고받을 이야기는 ‘텔레비전과 신문하고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멧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늘 듣는 노랫소리인 만큼, 늘 멧새 노랫소리를 놓고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하루 내내 나무를 바라보고 풀을 마주합니다. 이웃을 만나건 동무를 만나건 언제나 나무랑 풀 이야기를 속삭입니다. 이웃이나 동무는 나무나 풀 이야기를 안 하고 싶을는지 모르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무와 풀을 살피는 이야기입니다. 나무를 쓰다듬고 풀을 뜯으며 나뭇잎에 맺힌 벌레 씨앗이랑 풀꽃이 피우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 눈과 비가 어울려 / 사이좋게 내려와요 ..  (진눈깨비)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꽃빛 묻어나는 이야기잔치입니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바다내음 깃든 이야기잔치입니다. 숲을 좋아하는 사람은 숲노래 그윽한 이야기잔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삶길을 걷습니다.


  서울과 수도권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린 까닭은, 사람들 스스로 서울과 수도권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에요. 이녁이 그곳에서 가장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좋거나 나쁜 것은 없습니다. 옳거나 그른 것은 없습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누군가는 작은 들꽃을 밟으면서 밟은 줄 못 느껴요. 누군가는 풀밭을 자가용으로 밟으면서 밟은 줄 알아차리지 않아요.


  나는 아주 먼 데에 섰어도 느티나무에 새잎이 복복 돋으며 올망졸망 푸른 빛으로 바뀌는 모습을 알아차립니다. 버들잎이 돋는다든지, 초피꽃이 핀다든지, 모과꽃망울이 커진다든지, 매화꽃차례가 하나둘 떨어진다든지, 모두 알아보거나 알아챕니다. 다른 누군가는 겉모습만 보고도 자동차 이름을 훤히 꿸 테지요. 다른 누군가는 차림새만 보고도 저이가 입은 옷이 얼마짜리인지 알아맞추겠지요.


.. 고향 떠나 / 잘 산다는 사람은 / 아무도 / 아직 안 돌아왔어요 ..  (고향 찾는 사람들)


  김은영 님 동시집 《선생님을 이긴 날》(문학동네,2008)을 읽습니다. 무척 맛깔스러우면서 재미있게 쓴 동시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재미있게 놀지 못하면서 시험지옥과 학원지옥에 갇혀야 하는 오늘날 도시 아이들한테 김은영 님 동시집은 싱그러운 샘물과 같은 이야기잔치가 되리라 느낍니다.


  참말 그렇지요. 오늘날 아이들은 얼마나 고단한가요. 오늘날 아이들은 ‘제 집 마당에서 놀 수조차 없’어요.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아이들한테는 마당이 없거든요. 아파트 놀이터라 해서 느긋하게 놀 만한 데가 되지 못합니다. 가까운 공원조차 혼자 가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집에서 공원까지 가는 길에 자동차가 너무 많고 무시무시하게 달려요. 아이들 어버이는 아이만 달랑 공원에 보내기 두렵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공원에서도 마음껏 뛰놀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라고도 하고, 잔디밭에 농약을 듬뿍 뿌리기도 합니다. 공원에도 스쿠터나 오토바이가 싱싱 달립니다. 달릴 곳 없기에 공원을 달리는 자전거도 많습니다.


  개구지게 뛰놀지 못하는 아이들한테는 어떤 동시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학교와 학원에 갇힌 채 ‘예비 수험생’처럼 온갖 지식과 교과서와 학습지만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는 아이들한테는 어떤 동시가 삶밥이 될 만할까요.


.. ‘ㄹ’ 받침 한 글자 속에 / 자연이 들어 있구나 / 사람이 살아가는 데 / 소중한 것들이 들어 있구나 ..  (‘ㄹ’ 받침 한 글자)


  삶에서 살아나는 말입니다. 삶이 살아나지 않으면 말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말놀이를 하거나 말솜씨를 부린다고 해서 삶이 살아나지 않고 말도 살아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저마다 제 삶을 억누르는 고리를 끊거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왜 대학교에 가야 할까요? 아이들은 왜 중·고등학교에 가야 할까요? 아이들은 왜 초등학교에 다녀야 할까요? 대학교에 가야 하니 고등학교에 가나요? 고등학교에 가야 하니 중학교에 가나요? 중학교에 가야 하니 초등학교에 가나요? 초등학교는 아이한테 어떤 배움터이거나 삶터일까요?


  재미있고 맛깔스러운 동시를 살포시 내려놓을 수 있어도 ‘재미있’고 ‘맛깔스러우’리라 생각해요. 아이가 나아갈 삶과 어른이 걸어갈 길을 찬찬히 짚어도 재미있고 맛깔스러우리라 생각해요. 아이들이 스스로 사랑을 키우고, 어른들 또한 스스로 삶을 즐기며 신나게 뛰노는 빛을 그릴 수 있으면, 동시이든 어른시이든 아름다운 이야기가 노래처럼 흐르며 재미있고 맛깔스러운 깊이와 너비를 더하리라 생각해요. 4347.4.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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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장꽃 - 김환영 동시집
김환영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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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23

 


살아가며 노래하다
― 깜장꽃
 김환영 글
 창비 펴냄, 2010.11.25.

 


  닷새 동안 바깥마실을 한 뒤 고흥 시골집으로 돌아옵니다. 시외버스가 서울을 떠날 적부터 들뜹니다. 이제 우리 집으로 가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즐겁습니다.


  서울을 떠나는 시외버스는 아파트하고 차츰 멀어집니다. 서울을 벗어난 시외버스는 아파트가 안 보이는 시골로 접어듭니다. 서울은 넓고 커다랗기에 한참 달려도 아파트와 건물이 끊이지 않기 일쑤이지만, 시골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는 매캐한 바람을 쐬고 서울에서 시골로 가는 버스는 싱그러운 바람을 먹습니다.


  서울과 멀어질수록 조용합니다. 서울과 떨어질수록 나무가 춤을 추고, 나무마다 새와 벌레가 깃들어 노래합니다. 서울에서는 사람들이 노래하지 않습니다. 서울에서는 기계가 소리를 내고, 텔레비전과 손전화 기계가 노래와 비슷한 소리를 냅니다.


  시골에서는 사람들이 노래할까요? 예전에는 시골에서 사람들이 노래했어요. 오늘날에는 시골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드물어요. 오늘날 시골에서 노래를 할 만한 사람은 다들 도시로 떠났고, 시골에 남은 이들은 텔레비전 연속극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경운기와 짐차 소리에 길들면서 스스로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골에는 노래가 흐릅니다. 경운기가 지나가고 난 뒤 고즈넉한 노래가 흐릅니다. 멧새와 풀벌레가 노래를 부릅니다. 개구리와 제비가 노래를 부릅니다. 시골사람이 스스로 노래를 잊었어도, 시골들과 시골숲에 사이좋게 노래를 부릅니다.


.. 집으로 들어오는 / 흙길 한가운데 / 질경이들이 새파랗다 ..  (질경이 도로)


  해 떨어진 깜깜한 저녁에 느즈막하게 시골집으로 들어섭니다. 고흥도 시골이지만, 우리 집은 고흥읍에서 한참 더 들어갑니다. 고흥읍에서 멀어지면서 창밖으로 별빛을 느낍니다. 군내버스에서건 택시에서건 별빛이 흐르는 밤하늘을 누리는 시골자락입니다. 택시를 얻어서 타건 군내버스를 잡아서 타건 풀벌레와 나무가 들려주는 노래를 듣는 시골마을입니다.


  우리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기지개를 켭니다. 맨 먼저, 문가 장미나무한테 인사합니다. 장미나무 곁 동백나무한테 인사합니다. 동백나무 곁 후박나무한테 인사합니다. 뒤꼍에 밤에도 하얗게 빛나는 매화나무한테 인사합니다. 흐드러진 매화꽃은 밤에 새삼스레 빛납니다. 옆밭 복숭아나무한테 인사하고, 우리 집 마당을 밝히는 풀한테 인사합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우리 이튿날 아침에 함께 놀아요.


  살며시 풀잎을 쓰다듬습니다. 가만히 나뭇가지를 어루만집니다. 밤새 포근한 기운이 집안에 감돕니다. 새로운 새벽과 아침에 멧새가 우리 집으로 찾아들어 노래를 들려줍니다. 마을고양이 몇 마리가 우리 집 옆밭에 앉아 해바라기를 합니다. 마을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 마당 한쪽 쑥밭에 앉아 해바라기를 합니다. 얘, 쑥밭에는 앉지 마렴. 우리 식구들 먹는 쑥이잖니.


.. 어둔 하늘 아래 / 어둔 산 // 어둔 산 아래 / 검은 숲 ..  (불빛)


  꽃을 바라보고 싶은 사람은 꽃을 바라봅니다.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꽃을 이야기합니다. 꽃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꽃내음이 풍기는 노래를 부릅니다.


  씨앗을 심고 싶은 사람은 씨앗을 심습니다. 씨앗을 심는 사람은 흙을 어루만집니다. 흙을 어루만지는 사람은 흙내음이 풍기는 손길로 밥을 짓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싶은 사람은 자전거를 탑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두 다리를 믿습니다. 두 다리를 믿는 사람은 자전거를 타듯이 씩씩하게 숲길을 걷고 멧길을 넘습니다.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싶으면 텔레비전을 바라봅니다. 할인매장에 가고 싶으면 할인매장에 갑니다. 자가용을 몰고 싶으면 자가용을 몹니다. 그러니까, 평화를 바라는 사람은 평화롭게 살아요.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나 사랑을 나누지요. 돈을 바라기에 돈과 얽힌 삶을 누리고, 삼월에 삼월꽃을 꿈꾸지 않으니 삼월이 되든 사월이 되든 오월이 되든 꽃이 어디에 얼마나 피었는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 비가 와요 / 단비가 내려요 ..  (병아리 열두 마리)


  우리 시골집 곳곳에 온갖 봄꽃이 핍니다. 아이들은 꽃을 밟기도 하고 꽃을 꺾기도 하며 꽃내음을 맡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꽃은 서로 동무입니다. 놀이동무이고 삶동무입니다.


  꽃은 풀줄기가 내놓는 선물입니다. 풀줄기는 꽃이라는 선물을 내놓으면서 씨앗이라는 꿈을 톡톡 터뜨립니다. 풀씨는 바람과 빗물을 따라 곳곳에 퍼집니다. 사람이 애써 씨앗을 심어야 푸성귀를 거둘 수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먹는 풀은 무나 배추만이 아니에요. 질경이와 씀바귀도 사람이 먹어요. 꽃만 보는 유채가 아니라 줄기와 잎사귀와 꽃술까지 아삭아삭 먹는 풀밥입니다.


  김환영 님 동시집 《깜장꽃》(창비,2010)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바깥마실 마치고 고흥집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에서 읽으며 생각합니다. 김환영 님은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들어서며 살아가던 어느 날 시가 저절로 터져나왔다고 해요. 온갖 이야기가 샘솟고, 갖은 노래가 피어났다고 합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누구라도 시골에서 살아가면 노래를 부릅니다. 풀노래를 부르고 꽃노래를 불러요. 하늘노래와 냇물노래와 숲노래를 부르지요. 그러면, 도시에서 살면? 서울이나 부산에서 살면? 도시내기는 노래를 부를까요, 안 부를까요?


  서울내기도 노래를 부릅니다. 서울내기는 서울노래를 부릅니다. 시골내기는 시골노래를 불러요. 인천내기는 인천노래를 부르고, 강릉내기는 강릉노래를 부릅니다. 저마다 제 삶자락에서 노래를 불러요. 이 노래가 더 사랑스럽거나 저 노래가 더 얄딱구리하지 않습니다. 이 노래가 더 좋거나 저 노래가 더 얄궂지 않습니다.


  우리 삶은 언제나 노래입니다. 슬프면 슬픈 노래요 기쁘면 기쁜 노래입니다. 고단하면 고단한 노래요 웃으면 웃는 노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김환영 님은 언제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골로 갔기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언제나 노래를 불렀는데 그동안 스스로 노래인 줄 못 느꼈을 뿐이에요. 이제서야 조금 느긋한 마음과 몸가짐이 되어 노래를 들여다보는 셈이로구나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노래를 부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모두 노래를 부르듯이 밥을 지어서 먹습니다. 우리는 모두 노래와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고 들꽃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노래하는 넋이요, 노래로 삶을 짓는 숨결입니다. 4347.3.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동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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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창비시선 33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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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51

 


해님도 지구별을 좋아한다
―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도종환 글
 창비 펴냄, 2011.7.18.

 


  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는 재미있습니다. 도시에서는 새벽을 여는 배달 일꾼이 아니고는 이무렵에 일어나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새벽 한두 시부터 자전거에 신문을 그득 싣고 바지런히 골목을 누비며 신문을 돌리면 3분쯤 지날 무렵부터 땀이 흐릅니다. 삼십 분이 지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고, 한 시간이 지나면 땀내음이 멀리까지 퍼지면서 볼을 타고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집니다. 자칫 신문종이에 땀이 묻을까 봐 팔뚝으로 이마와 볼에 흐르는 땀을 훔칩니다. 신문을 쥐기 앞서 옷으로 땀을 닦습니다. 1990년대로 접어든 뒤부터 배달 오토바이가 차츰 퍼졌는데, 예전에는 으레 자전거나 두 다리로 신문을 돌렸어요. 두 시간쯤 신문을 돌리다 보면 손에 낀 실장갑까지 땀으로 옴팡 젖습니다. 세 시간쯤 신문을 돌리면 손에 묻은 땀을 옷에 닦아 신문을 넣자는 생각이 흐려집니다. 대문 안쪽에 놓인 신문에 엄지 자국이나 물기가 묻었다면, 이는 모두 배달 일꾼이 흘린 땀입니다.


.. 바람이 사소하게 불어도 흔들릴 풍치의 나날과 / 둘 다 연금도 퇴직금도 없이 견뎌야 할 불안한 / 노후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  (발치)


  시골에서 맞이하는 새벽 세 시는 아주 고요합니다. 멧새도 모두 잠든 때입니다. 여름으로 접어들면 개구리 노랫소리가 막바지에 이르는데, 여름날 새벽 네 시로 넘어설 즈음 개구리 노랫소리도 잦아듭니다. 그렇지만 풀벌레 노랫소리는 그대로 있어요. 시골에서 한여름 새벽 네 시 반 즈음부터 멧새 노랫소리가 퍼지고, 이제 풀벌레 노랫소리는 사라집니다. 멧새가 깨어나 돌아다닐 적에 풀벌레가 노래한다면, 멧새더러 나 잡아 드시오 하는 꼴이 될 테니까요.


.. 나무야 네게 기댄다 / 오늘도 너무 많은 곳을 헤맸고 / 많은 이들 사이를 지나왔으나 / 기댈 사람은 없었다 ..  (나무에 기대어)


  어린 두 아이와 지내는 낮 세 시는 무척 고단합니다. 아이도 고단하고 어른도 고단합니다. 아침부터 신나게 놀던 아이는 낮 두 시 즈음부터 살짝 졸음이 찾아오고 낮 세 시에는 그예 졸음덩어리입니다. 낮잠을 자지 않으면 몸이 힘든 나머지 골부림이 하늘까지 닿아요.


  세 시 즈음에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달래어 토닥토닥 안고 자리에 눕히려 합니다. 일곱 살 큰아이는 낮잠을 안 자려고 끝까지 버티고, 네 살 작은아이는 이내 곯아떨어집니다. 작은아이를 재우려고 눕히고 토닥이다 보면 나도 작은아이 곁에서 곯아떨어지기 일쑤입니다. 이때 큰아이는 혼자 슬그머니 일어나서 만화책을 펼치거나 혼자 소꿉놀이를 합니다.


.. 내가 분꽃씨만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 거기 어머니와 꽃밭이 있었다 / 내가 아장아장 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 / 내 발걸음마다 채송화가 기우뚱거리며 따라왔고 / 무엇을 잡으려고 푸른 단풍잎 같은 손가락을 / 햇살 속에 내밀 때면 / 분꽃이 입을 열어 나팔소리를 들려주었다 ..  (꽃밭)


  봄이면 낮 다섯 시까지 빨래를 마당에 내놓을 수 있습니다. 겨울에는 낮 세 시를 지날 무렵 빨래를 집안으로 들입니다. 여름에는 낮 다섯 시를 지나고 여섯 시가 되어도 마당에 빨래를 내놓을 수 있습니다. 가을에는 낮 네 시까지 빨래를 마당에 내놓고, 다섯 시가 되기 앞서 집안으로 들여요.


  빨래는 시계를 살펴 내놓거나 들이지 않습니다. 햇볕을 살피고 바람을 느낍니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쬘 적에 빨래를 말립니다. 햇볕이 구름 뒤로 숨거나 멧등성이 너머로 사라지기 앞서 빨래를 걷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해와 바람을 살펴 때를 읽었어요. 해시계가 있어 시계가 아니라 해가 고스란히 시계입니다. 바람시계가 따로 있어 시계가 아니라 바람이 언제나 시계예요.


.. 폭발물 덩어리를 바닷가마다 세워놓고 저것을 녹색의 따뜻한 에너지라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이들은 스텔스 전폭기가 영변을 폭격하고 주전자 물이 다 끓기도 전에 대포동 미사일이 고리 원자로에 떨어져 사방 오십리 잿더미가고 방사능이 황사처럼 반도를 덮는 절멸의 날이 오면 어디에 잠자리를 정하고 어디서 어린 자식들을 키울 것인가 ..  (천변지이)


  도종환 님 시집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2011)를 읽습니다. 도종환 님 마음자리에 가장 애틋하게 다가오는 한때를 그리는 싯말을 읽습니다. 세 시는 어떤 때인지 그리고, 다섯 시는 어떤 하루인가 헤아립니다. 그러고 보니, 낮 세 시부터 다섯 시 사이는 사진을 찍기에 좋은 햇살이기도 합니다. 새벽 세 시부터 다섯 시 사이는 마음을 가다듬거나 글을 쓰거나 밥을 짓기에 좋은 때입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 글을 쓰면 맑은 마음이 되면서 무척 즐거워요. 예전에 새벽 세 시에 신문배달을 하면서 날마다 맑은 마음이 되었어요. 오늘 이 시골집에서 새벽 세 시에 아이들과 달콤하게 잠들다가 다섯 시 언저리에 일어나 조용히 아침밥 차리려고 부산을 떨면 새삼스레 마음이 맑습니다.


  그렇다고 새벽 여섯 시에 마음이 안 맑지 않습니다. 아침 여덟 시나 저녁 일곱 시에 마음이 안 맑을 까닭이 없습니다. 다만, 새벽과 낮에 맞이하는 세 시와 다섯 시 사이는 하루 가운데 가장 고요하면서 차분한 때가 아닐까 싶어요.


.. 초록은 연두가 얼마나 예쁠까? / 모든 새끼들이 예쁜 크기와 보드라운 솜털과 / 동그란 머리와 반짝이는 눈 / 쉼 없이 재잘대는 부리를 지니고 있듯 / 갓 태어난 연두들도 그런 것을 지니고 있다 ..  (연두)


  나무도 겨울눈을 좋아합니다. 풀도 새싹을 좋아합니다. 할머니도 아기를 좋아합니다. 해님도 지구별을 좋아하고, 우주도 태양계를 좋아합니다. 나이든 이들은 나어린 이를 좋아하고, 스승은 새내기를 좋아해요. 겨우내 시든 풀잎은 봄에 새로 돋아 피어나는 꽃송이를 좋아합니다.


  시는 무르익은 마음으로 쓰기 마련인데, 무르익은 마음이란 풋풋하며 싱그러운 빛을 읽고 아끼는 넋이지 싶어요. 시는 튼튼히 뿌리내린 나무와 같은 숨결로 쓰기 마련인데, 튼튼히 뿌리내린 나무는 늘 새잎을 틔우고 새 가지를 뻗으면서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시를 씁니다. 새롭게 거듭나는 마음으로 시를 읽습니다. 봄을 맞이하는 즐거움으로 시를 씁니다. 겨울을 새삼스레 누리면서 고요히 쉬는 몸가짐으로 시를 읽습니다. 4347.3.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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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내용 창비시선 329
조정인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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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51

 


시와 꽃잎
― 장미의 내용
 조정인 글
 창비 펴냄, 2011.4.20.

 


  이틀 동안 봄비가 내립니다. 우리 집 뒤꼍 매화나무에는 아주 보드라운 꽃잎이 하나둘 벌어집니다. 아직 꽃망울이 조그마한 가지가 있고, 어느덧 활짝 꽃잎을 벌린 가지가 있습니다. 꽃망울이 터질 듯 말 듯한 가지가 있습니다. 모두 한 나무에서 뻗는 가지요, 다들 한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망울입니다.


  빗방울을 머금은 매화꽃잎을 살살 만집니다. 예쁘구나 곱구나 아름답구나 하고 말하면서 쓰다듬습니다. 사진으로 몇 장 담고, 눈으로 한참 들여다봅니다.


  해마다 봄이면 고운 꽃잎을 드리우는 매화나무는 아주 상냥하며 반가운 동무입니다. 매화나무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나무도 몹시 착하며 즐거운 동무입니다. 나무는 저마다 다른 잎사귀를 내놓고 꽃망울을 터뜨리며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는 저마다 씩씩하게 가지를 뻗고 줄기를 올리며 푸른 숨결을 나누어 줍니다.


..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 더 살았다 //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었다 ..  (문신)


  마당 한쪽에는 노랑붓꽃이 함께 살아갑니다. 노랑붓꽃은 알뿌리로 새 줄기를 곧게 뻗습니다. 사람이 손으로 시든 줄기를 툭툭 끊을 수 있지만, 굳이 사람이 시든 줄기를 끊지 않아도 됩니다. 새 줄기가 올라오면서 시든 줄기는 저절로 끊어집니다. 시든 줄기는 봄이 무르익으면서 어느새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고는 여름을 앞두고 살살 꽃망울 맺고 꽃봉오리 터집니다.


  노랑붓꽃은 꽃잎이 노랗게 빛납니다. 꽃을 보며 참 곱네 하는 소리로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한 해에 꽃이 달린 날은 얼마 안 되어요. 꽃을 보는 날은 짧고, 꽃이 없이 푸른 줄기만 달린 날이 훨씬 깁니다.


  가만히 보면, 다른 꽃도 이와 비슷해요. 꽃송이가 오래도록 달리는 일이 드뭅니다. 꽃이 피기까지 오래 걸리고, 꽃이 지고 나면 푸른 잎사귀로 지냅니다. 꽃이 지고 열매나 씨앗이 맺으면, 씨앗이 터지고 나서 천천히 시들어요. 이른봄부터 돋는 봄풀은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거의 다 말라서 죽어요.


.. 고양이가 쓰레기봉지를 뜯다가, 세워둔 트럭 밑으로 / 몸을 숨긴다 바닥에 라면발이 흘러나와 있다 어둠속 / 겁먹은 허기가 고개만 돌려 내 쪽을 살핀다 ..  (탁발)


  꽃을 보려고 꽃씨를 심는 사람이 많습니다. 꽃이 곱다며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꽃은 따로 꽃집에서 사고팔곤 합니다. 틀림없이 꽃은 곱습니다. 고운 꽃이 피는 목숨은 풀이나 나무입니다. 풀이나 나무는 고운 꽃을 피우면서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깁니다. 그러면, 풀이나 나무는 꽃을 피우려고 살아가는 목숨일까요. 풀이나 나무는 꽃을 피우고 씨앗을 남기는 보람 하나로 살아갈까요.


  나뭇잎은 으레 봄부터 가을까지 매달립니다. 늘푸른나무는 네 철 내내 잎사귀를 매답니다. 나무는 푸른 잎사귀가 있어 나무다움을 뽐냅니다. 풀 또한 푸른 잎이 있어 풀다움을 자랑해요.


.. 자귀나무 분홍꽃은 여름저녁 꽃 // 자는 거야? 눈 좀 떠봐 / 아파? // 나무는 대답 대신 느리게 꽃을 흘렸다 망막을 스치는 꽃술을 따라 ..  (어둠이 성의처럼 내려졌다)


  매화꽃이 피는 둘레에 제비꽃이 번집니다. 우리 집 쑥밭 한쪽에 제비꽃 네 송이가 한꺼번에 터집니다. 별꽃이나 봄까지꽃은 일찌감치 터졌습니다. 코딱지나물꽃도 고운 빛으로 함께 터졌고, 냉이꽃과 꽃마리꽃도 함께 터졌어요.


  이웃집 밭에는 유채꽃이 오릅니다. 우리 집 밭에도 갓꽃이 곧 피리라 생각합니다. 동백꽃이 흐드러진 데가 있으나, 우리 집처럼 동백꽃이 느즈막하게 흐드러지는 데가 있습니다. 다 같은 꽃이면서 다 다르게 피어나고, 다 다른 꽃이면서 다 같은 꽃내음으로 시골마을과 시골집을 포근히 감쌉니다.


  조정인 님 시집 《장미의 내용》(창비,2011)을 읽으며 꽃잎을 헤아립니다. 꽃잎마다 다 다른 이야기가 서리고, 꽃잎마다 다 다른 빛이 감돕니다. 같은 매화꽃이더라도 다 다른 가지에서 다 다른 곳을 바라보며 피어납니다. 어느 꽃은 해를 마주보고, 어느 꽃은 해와 등집니다. 어느 꽃은 위를 바라보고 어느 꽃은 아래를 바라봐요. 어느 꽃은 가지 끝에 매달리고, 어느 꽃은 줄기 가운데에 매달립니다.


.. 밥물이 끓는다 눈보라가 끓는다 능선이 솟는다 꽃잎으로 잦혀진다 ..  (어머니의 나무주걱)


  직박구리가 매화나무 끝에 앉습니다. 매화나무 굵은 가지도 아니고 퍽 가느다란 가지에 앉습니다. 참새나 딱새나 박새는 워낙 조그마한 새이니 가지 끝에 앉을 만하다지만, 직박구리는 꽤 큰 새인데 가지 끝에 잘 앉습니다.


  어느 날 보면, 까치나 까마귀도 매화나무 가지 끝에 앉아요. 큰 새가 앉으면 처음에는 낭창낭창 가지가 흔들리지만, 어느새 흔들림이 사라져요. 작은 새도 큰 새도 가지 끝에서 즐겁게 노래합니다.


  어떤 힘일까 궁금합니다. 어떤 몸일까 궁금합니다. 어떤 넋일는지 궁금합니다. 가느다란 가지 끝에 앉으면서 나뭇가지를 부러뜨리지 않는 새는 어떤 숨결로 나무를 사귀며 아낄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들이 읽고 쓰는 시는 어떤 숨결이 될까요. 가지를 낭창낭창 흔드는 노래일까요. 가는 가지 끝에서도 굵은 가지 한복판에서도 곱게 피어나는 노래일까요.


.. 집을 비운 이틀 사이 히아씬스 구근이 실뿌리를 내렸다 글라스 가득 빈집이 내쉰 숨의 자취가 얼키설키 들어섰다 ..  (히아씬스와 나와 네안데르탈인의 원반 던지기)


  집을 비우고 나서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뿌리에 실뿌리가 내리는지 안 내리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늘 집에 있더라도 마주하지 않으면 알뿌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집을 비우더라도 마음속으로 떠올리거나 그리면, 아하 오늘쯤 실뿌리가 퍼지겠네 하고 느낍니다. 늘 집에 있으면서 상냥하게 바라보고 따사롭게 보듬으면, 조그마한 알뿌리에 넉넉하게 사랑이 깃들면서 예쁜 싹이 틉니다.


  시 한 줄은 노래하면서 씁니다. 시 한 줄은 꽃잎처럼 피어납니다. 시 한 줄은 웃음꽃처럼 자랍니다. 시 한 줄은 사랑으로 맺는 씨앗 한 톨입니다. 4347.3.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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