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준 시선집
박남준 지음 / 펄북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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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07


새끼들허고 송편이나 해서 먹는지
― 박남준 시선집
 박남준 글 
 펄북스 펴냄, 2017.8.30. 1만 원


섣달그믐 대목장날
푸줏간도 큰 상점도 먼발치로 구경하고
사과며 동태 둬마리 대목장을 봐오시네
집에 다들 있는 것들인디 돈 들일 것 있느냐고
못난 아들 눈치 보며
두부전 명태전을 부치신다
큰형이 내려오면 맛보이신다고
땅속에 묻어뒀던 감을 내어 오시고
밤도 내어 오신다 배도 내어 오신다
형님의 방에는 뜨끈뜨끈 불이 지펴지고
이불홑청도 빨아서 곱게 풀을 멕이셨다
이번 설에는 내려 오것제
토방 앞 처마 끝에 불 걸어 밝히시고
오는 잠 쫓으시며 떡대를 곱게 써신다
늬 형은 떡국을 참 잘 먹었어야
지나는 바람 소리
개 짖는 소리에 가는 귀 세우시며
게 누구여, 아범이냐
못난 것 같으니라고
에미가 언제 돈보따리 싸들고 오길 바랬나
일 년에 몇 번 있는 것도 아니고
설날에 다들 모여
떡국이나 한 그릇 허자고 했더니
새끼들허고 떡국이나 해 먹고 있는지 (떡국 한 그릇)


  시선집을 읽습니다. 《박남준 시선집》(펄북스, 2017)은 시를 쓰는 박남준 님이 그동안 길어올린 노래를 둘레 벗님이 가리고 추려서 엮은 책입니다. 시집도 시집이지만, 그 시집 가운데 더 사랑해 주면 좋으리라 여기는 노래를 찬찬히 갈무리한 책입니다.

  이 가을에 한가위를 둘러싸면서 어느 시보다 ‘떡국 한 그릇’을 다룬 노래를 읽어 봅니다. 아마 시인네 어머니일까요, “늬 형은 떡국을 참 잘 먹었어야” 하고 읊는 어머니는 “못난 것 같으니라고” 한 마디를 털어놓습니다. “에미가 언제 돈보따리 싸들고 오길 바랬나” 하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거든요.

  아이들이 제금을 나서 저마다 제 뜻을 펴고 살 적에는 ‘뜻을 이루기’를 바랄 뿐입니다. 뜻을 이룬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릴 적부터 품은 뜻을 이루는 삶이란 돈만 많이 버는 삶이 아니에요. 걸어가려는 길을 씩씩하게 걸어갈 적에 뜻을 이루어요. 즐겁게 웃고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를 지을 수 있을 적에 뜻을 이룬다고 할 수 있어요.


개울물 소리 저리 시리도록 푸르른가
동지 까만 밤 부쩍이나 귀는 밝아져서
산 아랫마을 뉘 집 개가 짖는다 먼 장닭이 운다
눈이 오는가 누가 오는가 (동지 밤)


  설날에 어머니한테 찾아가지 못하는 아이를 두고서 “새끼들허고 떡국이나 해 먹고 있는지” 하고 근심을 하는 마음을 읽습니다. 한가위를 앞두고는 “새끼들허고 송편이나 해 먹는지” 하고 걱정을 하는 마음이 되겠지요. 여느 때에는 여느 때대로 밥술 넉넉히 뜨면서 식구들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가 하는 대목에 마음이 쓰일 테고요.

  어버이 마음은 아이 마음하고도 같습니다. 어버이는 다 큰 아이들이 돈만 많이 벌기보다는 착하면서 참되고 고운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요. 다 큰 아이들이 새롭게 어른이 되어 낳은 아이들한테 즐거운 사랑을 물려주면서 살림을 짓기를 바랍니다.

  아이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아이들은 밥 한 그릇 배불리 먹고 신나게 뛰놀 수 있으면 좋아요. 까르르 웃고 개구지게 뛰고 달릴 수 있으면 좋지요. 아이들은 자가용을 달려 어디 대단한 놀이공원에 가기를 바라지 않아요. 뭔가 값비싸거나 값진 장난감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어머니 아버지하고 눈을 맞추면서 소꿉놀이를 하거나 한 손씩 맞잡고서 나들이를 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겨우 해가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리네
내미는 해 노루꽁지만 하다
소한 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랫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썩버썩 뼈를 곧추세운다 (겨울 풍경)


  한가위에 설에 서로 한 자리에 모입니다. 한가위나 설이 아니어도 틈틈이 한 자리에 마주앉습니다. 맛난 밥을 먹거나 으리으리한 잔칫밥을 먹을 뜻이 아닙니다. 서로 즐거이 잘 사는가 궁금한 마음을 나누려고 모입니다. 서로 오붓하게 둘러앉아서 그야말로 이야기꽃 이야기잔치 이야기마당을 누리려고 마주앉습니다.

  겨울날 빨래하는 이야기가 밥상에 오를 만합니다. 아기를 낳아 돌보면서 빨래하느라 얼마나 등허리가 휘었는가 하는 이야기가 밥상에 오를 만하지요. 뒤집고 기고 서고 걷고 달리면서 활짝 웃음을 짓는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흐름을 지켜본 이야기가 밥상에 오를 만하고요.


굽이굽이 휘돌지 않는 강물이 어찌
노래하는 여울에 이를 수 있는가
부를 수 있겠는가 (마음의 북극성)


  《박남준 시선집》 한 권을 읽으면서 달빛하고 별빛을 어림합니다. 보름달은 한가위를 앞두고 얼마나 밝을까 하고 어림합니다. 눈부시게 밝은 보름달 곁에서 별빛은 또 얼마나 반짝거릴까 하고 어림합니다.

  아이들하고 마을 어귀 빨래터를 치웁니다. 아이들은 빨래터를 다 치우고서 물놀이를 합니다. 가을이 깊으나 낮에는 볕이 퍽 뜨겁습니다. 물놀이를 할 만합니다. 함께 빨래터를 치운 저는 빨래터 담벼락에 걸터앉아서 시집을 읽습니다.

  시집에 흐르는 “굽이굽이 휘도는 물줄기”를 그려 봅니다. 여름에 마르지 않고 겨울에 얼지 않는 마을 빨래터 물줄기를 나란히 그려 봅니다. 노래하는 여울이 되는 물줄기를 그려 보고, 노래하며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물놀이를 즐기는 마을 빨래터를 새삼스레 그려 봅니다.

  이 가을 한가위에 집집마다 아이들하고 오붓하게 송편을 빚어서 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다가와 설날이 다시금 찾아오면, 설날에는 집집마다 떡국 끓이는 구수한 냄새가 퍼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7.10.1.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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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 시집선 2
조인선 지음 / 삼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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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99



소를 키우면서 쓴 노래, 아이한테서 배운 노래

― 시

 조인선 글

 삼인 펴냄, 2016.5.15. 8000원



  여기 소를 치는 아재가 있습니다. 소치기 아재일 텐데, 소를 치는 아재는 소를 먹이고 소를 돌보다가 소를 내다 팔며 살림을 꾸리는 동안 시를 쓴다고 합니다. 소치기 아재한테 소는 살림을 꾸리는 바탕이면서 시를 짓는 발판이 됩니다. 그렇다면 소치기 아재한테는 ‘시란 소’ 또는 ‘소란 시’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이슬이 오고

메뚜기가 앉아 있고

개구리가 뱀이 아이들이 나왔다

내가 보이고 성난 아버지와 무덤 속 조상들이 보였다

그렇게 막막한 세월이 선명해지자

풀을 베어 소에게 먹였다 (풀)



  우리 집 뒤꼍에는 무화과나무가 있습니다. 한 그루인지 여러 그루인지 알 길이 없으나, 이 무화과나무는 새 가지를 죽죽 뻗으면서 씩씩하게 자랍니다. 해마다 무화과알을 잔뜩 베풉니다.


  우리 집 나무가 없던 지난날에는, 그러니까 무화과나무 같은 나무 한 그루 없이 도시에서 좁다란 겹겹집 한 층을 얻어서 지낼 적에는 나무 한살이를 몰랐습니다. 더욱이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알이 어떻게 맺는지 몰랐고, 이 무화과알을 사람뿐 아니라 벌이며 나비이며 풀벌레이며 딱정벌레이며, 게다가 파리랑 모기까지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몰랐어요.


  우리 집 무화과나무가 없던 지난날에는 나무 열매는 새가 더러 나누어 먹는다고, 때로는 멧짐승이 나누어 먹는다고 여겼어요. 우리 집 나무를 곁에 두면서 이 나무를 늘 바라보니, 나무를 둘러싼 너른 이웃과 살림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느낍니다.


  다른 분도 저희하고 마찬가지가 되리라 생각하는데, 마당이나 뒤꼍에 나무 몇 그루를 돌본다면 이 나무를 늘 바라보면서 이 나무하고 얽힌 이야기를 둘레에 조곤조곤 들려주기 마련이에요. 시를 쓴다면 바로 ‘우리 집 나무’ 이야기를 쓸 테고, 이 나무 가운데 무화과나무를 가만히 지켜본다면 ‘무화과나무’하고 얽힌 이야기를 가만가만 쓸 테지요.



선거가 끝나자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래도

나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고 아내와 아이들은 거기에다 웃으며 방울들을 달았다

드라마 속 사랑은 여전히 돈지랄이었고 걸그룹의 자태는 아슬아슬하게 매혹적이었다

뉴스는 사람들이 몰라도 될 것들만 보여주었고 (그날 이후)



  시집 《시》(삼인 펴냄,2016)를 읽으면서 시 한 자락을 둘러싼 이야기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책이름부터 더도 덜도 아닌 “시” 한 마디인 시집을 읽으면서, 소치기 아재한테는 언제나 소가 시일 뿐 아니라, 바로 이 소한테서 숱한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하루가 흐른다고 느껴요. 이 시집을 읽으면서 시를 헤아리는 우리로서는 우리가 저마다 다른 곳에서 저마다 다른 삶을 짓는 마음으로 시를 받아들이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책 살 돈으로 그 짓을 하고

자유와 해방을 외쳤다

간신히 졸업하고 폐인이 됐다

시를 쓰고 또 썼다

소도 키웠다

마흔이 가까워

아내를 만나기 전 배운 베트남 첫 말은

안녕이었다 (청춘)



  시집 《소》를 써낸 아재한테는 베트남에서 온 곁님이 있고, 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고 해요. 이러한 집살림도 고스란히 시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열한 살 된 딸아이가 문득 아버지한테 여쭌 말 한 마디가 새롭게 시로 일어나요.

  그러니까 시란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란 삶’이면서 ‘삶이란 시’라고 할까요. 여기에 ‘시란 사랑’이면서 ‘사랑이란 시’라고 할 만하지 싶어요.


  스스로 사랑하는 삶이 시로 태어납니다. 스스로 시로 쓰고픈 이야기가 언제나 사랑스러운 삶으로 흐릅니다. 사랑하는 곁님을 둘러싼 이야기가 시로 거듭나고, 이 시를 되새기면서 삶을 새롭게 가꾸어요. 사랑하는 아이하고 주고받은 이야기가 시로 피어나며, 이 시를 곱새기면서 삶을 싱그럽게 짓습니다.



차를 몰고 가는데 이제 열한 살 된 딸아이가 물었습니다


아빠, 돈이 중요해? 동물이 중요해?


둘 다 중요하지


아빠, 사람이 없으면 돈도 필요없잖아 (철학)



  열한 살 딸아이는 아버지한테 삶을 물었습니다. 사랑도 함께 물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함께 물어요. 아버지는 열한 살 딸아이가 묻는 말에 제대로 대꾸를 못한 채 얼버무리지만, 아이는 똑부러지게 말하지요. 이러는 동안 아버지는 아이한테서 시를 배웁니다. 따로 스승을 두어서 시를 잘 쓴다기보다, 곁에 사랑스러운 숨결이 있기에 이 사랑스러운 숨결이 문득 건네는 이야기를 받아서 시를 조용히 씁니다.


  돈은 어디에 쓸까요? 돈은 얼마나 써야 할까요? 돈을 얼마나 벌여야 할까요? 번 돈은 어떻게 쓰면 즐거울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 대목을 늘 잊는지 모릅니다. 아이를 잘 가르치고 싶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하지 않을 수 있어요. 아침 낮 저녁으로 아이하고 부대끼면서 모든 삶하고 살림을 즐거이 가르칠 수 있어요. 맛나거나 대단한 밥을 멋진 밥집에서 사다가 먹는다고 배부르지 않아요. 라면 한 그릇이라 하더라도 노래하면서 끓이고 웃음을 지으면서 먹으면 배부를 수 있어요.


  시를 쓰면서 사랑이 됩니다. 사랑으로 되살아나면서 시를 씁니다. 시를 쓰면서 씩씩한 사람 하나로 다시 섭니다. 씩씩한 사람 하나로 다시 서면서 새롭게 시를 씁니다. 2017.9.2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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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박수미 지음 / 자연과생태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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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86


시인이란 마을을 사랑하며 노래하는 사람
― 시인의 마을
 박수미 글·사진
 자연과생태 펴냄, 2017.9.15. 13800원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한자로 ‘詩 + 人’인 얼거리예요. 그런데 시라고 하는 글(이야기)을 쓴 사람은 이러한 한자가 없던 무렵에도 있습니다. 먼먼 옛날 한자라고 하는 글이 없던 때에 ‘시’라고 하는 글이나 이야기를 빚은 사람을 헤아려 봅니다. 그때 그 옛사람은 아마 ‘노래’를 읊었으리라 생각해요.

  가락을 입힌 말이기에 노래입니다. 말 한 마디가 마치 가락을 입은 듯해서 노래입니다. 노랫가락이라는 낱말이 있으니 ‘말가락’ 같은 낱말도 썼을 만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수십 년간 묵호를 오가며 그곳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긴 이동순 시인에게 묵호는 곧 묵호 사람들의 삶을 뜻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선은 늘 하늘로 솟은 산비탈 동네나 해 지기 전 항구에 모여 앉아 그물을 수리하는 어부들의 일상을 향한다. (13쪽)

오랜 전통을 지닌 마을은 누군가에겐 역사의 일부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고향이기도 하며, 또 누군가에겐 현재 사는 집이기도 하다. (83쪽)


  오늘날 노래는 무대에 서거나 방송에 나오거나 여러 악기가 곁에 있어야 부를 수 있다고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무대도 방송도 악기도 없이 얼마든지 노래할 수 있어요.

  어른들이 일을 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이 놀이를 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즐겁게 일하니 즐거운 노래예요. 즐거이 노니 즐거운 노래이지요. 고단하게 일할 적에는 고단함을 씻으려고 노래해요. 힘들게 일하거나 슬픈 날에는 힘듦도 슬픔도 털어내려고 노래합니다.

  반가운 벗을 만나 반가움을 노래해요. 신나는 일을 맞이하면서 신나는 기운을 노래하고요. 가을걷이를 하며 고마운 가을볕을 노래하고, 아기를 낳은 어버이가 아기한테 온사랑을 담아서 자장노래를 비롯한 사랑노래랑 살림노래를 고이 들려줍니다.


평생 혼자 살았지만 그에게는 친구가 많았다. 자주 흙집을 찾아오던 생쥐, 아기 종달새와 까마귀, 다람쥐, 메뚜기를 벗 삼아 그들과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들을 이야기로 때로는 시로 옮겼다. (68쪽)

시인은 땅을 일구듯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시를 썼다. 청년기에 접한 문학 전집은 소소한 비료일 뿐, 그가 일궈 낸 글들은 보다 단단한 땅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228쪽)


  박수미 님은 시인 한 사람이 나고 자랐거나 살아가는 마을에서 태어난 시를 찾아서 마실길을 나섭니다. 시 한 줄을 찾는 나그넷길(나그네가 떠나는 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나그넷길 이야기가 《시인의 마을》(자연과생태, 2017)이라는 책에 오롯이 흐릅니다.

  가만히 보면 시인은 마을로 찾아가고, 여러 마을을 나그네처럼 떠돌아요. 시인이 남긴 글 한 줄은 마을 이야기, 곧 ‘마을노래’이기도 하면서 ‘나그넷말(나그네가 남긴 말)’이기도 합니다.


통영 여행의 목적은 백석 시를 따라 걷는 것이었으므로 숙소를 잡은 강구안 주변을 기웃거리며 내내 걸어 다녔다. (149쪽)

다시 김영갑 선생의 사진을 떠올렸다. 사진으로도 그렇게 아름다운데 실제로 마주한 제주 풍광은 어땠을까. 그가 말한 삽시간의 황홀이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얻은 자유였을지, 그리고 그의 인생에 얼마나 긴 기다림이었을지 고작 40여 분 눈밭을 바라보다 산을 내려온 나로서는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267쪽)


  어제 시인 한 사람이 마을 한 곳을 사랑하며 남긴 글이 노래처럼 흘러 오늘 우리가 나들이를 떠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새롭게 걷는 이 마을 이 길에서 어제 흐르던 노래를 되새기면서 새롭게 이야기를 지을 수 있습니다. 어제 노래를 들으며 오늘 노래를 짓고, 이 오늘 노래는 앞으로 새로 태어나 자랄 아이들한테 참말 새노래가 되어 새롭게 이 땅을 가꾸는 바탕이나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시인의 마을》은 이동순, 함민복, 권정생, 한하운, 이성부, 백석, 박노해, 서정주, 김용택, 이중섭·김영갑, 이렇게 여러 사람 발자국을 좇으면서 나그네처럼 골골샅샅 누빕니다. 어느 모로 보면 아무개는 시인이 아니라 할 수 있고, 또 누구는 시집이 몇 권 없다고 여길 수 있어요.

  그렇지만 이중섭 님이 빚은 그림은 그냥 그림이 아닌 노래를 닮은 그림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김영갑 님이 찍은 사진은 그냥 사진이 아닌 노래하고 같은 사진이라고 느낄 수 있어요. 살림노래를 그림에 담아요. 바람노래를 사진에 옮겨요. 사랑노래를 그림으로 빚지요. 꿈노래를 사진으로 찰칵 아로새깁니다.


시란, 시인이 그리는 마음의 지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7쪽)


  마음에 길을 그립니다. 마음에 바람이 지나갈 길을 그립니다. 마음에 사랑이라는 바람이 지나갈 길을 그립니다. 마음에 서로 사랑하며 짓는 보금자리가 앞으로 지나갈 길을 그립니다. 마음에 서로 사랑하며 짓는 보금자리가 깃든 마을이며 숲이 앞으로 지나갈 길에 태어나 자랄 어여쁜 아이들이 노래하는 길을 그립니다.

  노래 한 가락을 부르며 나그네가 됩니다. 노래 두 가락을 부르며 살림지기가 됩니다. 노래 석 가락을 부르며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 넉 가락을 부르며 오늘 이 땅에서 활짝 웃음짓는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될 수 있어요. 우리는 모두 노래지기가 될 수 있어요. 우리는 모두 삶을 사랑하며 노래하는 고운 숨결이 될 수 있습니다. 2017.9.22.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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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걸렸어 시 읽는 어린이 85
박해경 지음, 유진희 그림 / 청개구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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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91


토끼춤 추는 아빠 곁에서 시무룩한 까닭은?
― 딱 걸렸어
 박해경 글
 유진희 그림
 청개구리 펴냄, 2017.7.31. 10500원


긴 겨울잠을
자면서도
늦지 않고
빠르지 않게

딱 맞춰
일어날 수 있는
개구리들의
알람시계 (경칩)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새벽이나 아침을 맞이하는 아이는 마음속에 새노래를 담습니다.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저녁이나 밤을 맞이하는 아이는 꿈결에 풀벌레노래를 품습니다.

  아침에 새노래가 아닌 다른 소리를 듣는다면, 아이는 이 다른 소리를 마음에 담겠지요. 승강기가 아파트에서 오르내리는 소리라든지, 자동차가 시동을 걸며 달리는 소리 말이지요. 저녁이나 밤에도 이와 같아요. 자동차나 승강기 소리라든지, 어른들이 손에 전화기를 들고 조잘거리는 소리를 듣는 아이는 이러한 소리를 마음에 담습니다.


재개발 공사에 밀려
정든 이웃들은
모두 떠나고
갈 곳 없어 남아 있는
할머니와 지우,

점점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굴착기 소리.

학교에 쓰지 못한
장래희망란에 
써보는
“아파트 주인!” (장래희망)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꿈을 꿀 만할까요? 오늘 이곳에서 아이들은 ‘장래희망’이나 ‘직업’이 아닌 어떤 꿈을 품을 만할까요?

  요즈음 서울을 비롯한 나라 곳곳에 마을책방이 자그맣게 문을 열어요. 이런 마을책방을 겪거나 본 적이 드문 나이 있는 어른들로서는 저 작은 마을책방으로 돈을 어떻게 버느냐고 지레 걱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마을책방을 연 앳되거나 싱그러운 젊은이는 틀림없이 아이였을 때부터 꿈으로 품은 일이었지 싶어요. 스스로 새롭게 길을 열려는 마음이면서, 스스로 힘차게 길을 닦아 보려는 마음이기에 자그맣게 마을에서 즐거움을 지필 만하지 싶습니다.

  가만히 본다면 우리가 이 땅을 조금 더 민주와 자유와 평화와 평등으로 갈고닦는 어른으로 살아간다면, 오늘 이곳에서 아이로 자라는 고운 숨결은 앞으로 새로운 꿈을 품을 만하구나 싶어요. 앞으로 아이들이 꿈을 품을 수 있도록 어른으로서 온힘을 다할 노릇이지 싶습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을 팔았다.

엄마, 아빠는
비싸게 팔았다고
토끼춤을 추고
나비춤도 추었다.

새로운 동네
새로운 집
새로운 학교로 왔다.
엄마, 아빠 방,
오빠 방, 내 방 따로따로
있다고 좋아한다.

정든 친구
정든 놀이터
모두 사라진
나는 보이지 않는지! (나는 보이지 않는지)


  보육교사로 일하는 박해경 님이 빚은 《딱 걸렸어》(청개구리, 2017)라는 동시집을 읽으면서 어른이 아이를 돌보는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아이들이 이 땅을 사랑하기를 바라면서 쓴 동시에는 참말로 사랑스러운 손길이 흐릅니다. 아이들이 갑갑하거나 고단한 사회에서 주눅이 들더라도 부디 기운을 꺾지 말고 꿈을 품기를 바라는 따사로운 눈길이 함께 흐르고요.

  마음을 읽는다고 할 적에는 눈높이를 맞추며 어깨동무를 한다는 뜻이지 싶어요. 어른 사이에서도, 어른하고 아이 사이에서도, 여기에 사람하고 개구리나 사람하고 멧새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어깨동무를 할 수 있어요.

  울타리를 걷어내려는 몸짓이기에 어깨동무를 합니다. 울타리가 아닌 너른 마당에서 함께 놀고 일하고 어울리고 춤추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기에 어깨동무를 해요.


‘날씨 억수로 춥대이
내 강아지
밥 마니 무꼬 옷 마니 입꼬
학교에 가거레이’

한글을 배우고
세상이 밝아졌다는
우리 할머니가 보낸 문자 (등불)


  낳은 아이가 사랑스럽습니다. 낳지 않았어도 둘레에 있는 아이가 사랑스럽습니다. 우리 아이도 이웃 아이도 모두 이 땅을 새롭게 일굴 당차고 힘찬 넋으로 자랄 테니, 그야말로 아름답습니다.

  아이는 늦깎이로 한글을 익힌 할머니한테서 투박한 손전화 쪽글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이는 할머니한테 신나게 쪽글을 띄워 주겠지요. 예전처럼 손으로 엽서에 이야기를 적어서 띄우지 않더라도, 손전화를 거쳐서 마음하고 마음이 만나요. 곁에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해도 따사롭고, 손전화를 사이에 놓고서 쪽글을 띄우고 받아도 따사롭습니다.


손짓으로 말해야
알아듣는 영식이

감나무 아래서
흙을 만지며 혼자 놀다
감꽃이 떨어지자
주워 귀에 꽂는다

감나무가 들려주는
노래 듣는지
하늘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다. (감꽃 이어폰)


  감나무 곁에서 감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모과나무 곁에서는 모과나무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은행나무나 밤나무 곁에서, 소나무나 느티나무 곁에서, 우리를 둘러싼 다 다른 수많은 나무 곁에서 나무가 오랜 나날을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저어새나 갈매기 이야기는 어떨까요? 노린재나 잠자리 이야기는 어떨까요? 지렁이나 지네 이야기는 어떨까요? 사마귀나 물방개 이야기는 어떨까요?

  우리를 둘러싼 이웃은 사람만 있지 않아요. 작은 풀도 이웃이요, 작은 벌레도 이웃입니다. 작은 이웃을 마주하면서 아낄 수 있을 적에 사람하고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더욱 싱그러이 아끼는 마음이 될 만하지 싶습니다.


벌과 나비는
맨발로 가볍게
이 꽃 저 꽃 옮겨 다녀요.

꽃이 다칠까 봐
신발 신지 않고서. (맨발로 가볍게)


  맨발로 가볍게 이 땅을 밟아 봐요. 맨발로 가볍게 바람을 타거나 구름을 타고 날아 봐요. 두 눈을 살며시 감고서 곁에 있는 동무하고 풀밭을 밟고 무지개를 밟아 봐요.

  함께 지을 꿈을 생각하고, 함께 가꿀 새로운 나라를 헤아려요. 동시 한 줄에 깃든 작은 목소리를 읽으면서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아이들하고 목숨들을 그립니다. 딱 알아보고 딱 느끼며 딱딱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치면서 춤을 춥니다. 2017.9.20.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동시비평/어린이문학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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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온 편지 삶창시선 49
김수열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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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05


보말죽 냄새가 고소한 시집
― 물에서 온 편지
 김수열 글
 삶창 펴냄, 2017.7.25. 9000원


  시 한 줄은 아주 가볍게 읽을 수 있습니다. 마음 가볍게 마주하면 술술 읽습니다. 우리는 평론을 하려고 시를 읽지 않기 때문에, 이웃마을에 사는 시인이 가만히 읊은 이야기를 찬찬히 읽으면서 이웃마을 살림살이를 헤아릴 만합니다.


출근길
허리 잘린 어린 국화
박카스병에 담아 책상 위에 놓으니
보라색 향기 교무실에 그윽하다 (예감)


  허리가 잘린 국화는 길바닥에 있습니다.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면 길바닥을 볼 까닭이 없고, 길바닥에서 갈 곳을 모른 채 쓰러진 국화 한 송이를 바라볼 수 없어요. 곁을 지켜볼 수 있기에 허리 잘린 어린 국화를 보고, 작은 들풀을 보며, 해마다 조금씩 줄기가 굵는 나무를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이 모든 작은 이웃살림을 글 한 줄로 담을 수 있습니다.

  멋들어진 말이 아니라 수수한 말로 빚는 이야기입니다. 돋보이는 말이 아니라 잔잔한 말로 일구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선 자리를 생각하면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자리를 알아보면서 말 한 마디를 건네다 보니 어느새 이야기가 피어나는 글이 바로 시가 된다고 느낍니다.


예순 살짝 넘긴 며느리가 여든 훌쩍 넘긴 시어매한테 어무이, 나, 오도바이 멘허시험 볼라요 허락해주소 하니 그 시어매, 거 무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얼릉 가서 밭일이나 혀!
요번만큼은 뜻대로 허것소 그리 아소, 방바닥에 구부리고 앉아 떠듬떠듬 연필에 침 발라 공부를 허는데, 멀찌감치 앉아 시래기 손질하며 며느리 꼬라지 쏘아보던 시어매 몸뻬 차림으로 버스에 올라 읍내 나가 물어물어 안경집 찾아 만 원짜리 만지작거리다 만오천 원짜리 돋보기 사 들고 며느리 앞에 툭 던지며 허는 말, 거 눈에 뵈도 못 따는 기 멘허라는디 뵈도 않으믄서 워찌 멘헐 딴댜? 아나 멘허! (고부)


  제주서 제주사람으로서 제주말을 짓는 김수열 님이 들려주는 《물에서 온 편지》(삶창,2017)를 읽습니다. 물에서 온 글월을 읽는 시인은 뭍에서 오는 글월도 읽습니다. 바람한테서 오는 글월도, 구름이나 빗물한테서 오는 글월도 읽어요.

  여든 넘은 시어매한테서 이야기꽃으로 날아오는 글월을 읽고, 해짓골 올빼미 형한테서 이야기밭처럼 다가오는 글월을 읽어요. 먼발치에서 구경하는 글월이 아닌, 곁에서 물끄러미 마주하는 글월입니다.


해짓골 올빼미 형은
멜철 들어 물이 싸면 탑바리 원담에
족바지 들고 멜 거리레 갔다

이레 화르르륵 저레 다울리라
저레 화르르륵 이레 다울리라

작대기 들고 바당물 탕탕 치당보민
팔딱팔딱 족바지에 멜이 가득 (원담)


  시집 《물에서 온 편지》에 흐르는 이야기를 들려준 이웃님들 살림이란 노래하고 같지 싶습니다. 대중가수나 유행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아닌, 수수한 보금자리를 가꾸는 살림지기나 살림꾼으로서 나긋나긋 부르는 노래이지 싶어요.

  허리 잘린 국화를 주워서 새롭게 밝히는 손길이 노래입니다. 여든 넘은 시어매가 예순 넘은 며느리한테 안경 한 벌 마련해 주려고 부산스레 읍내를 누비는 발길이 노래입니다. 멜을 훑으러 족바지 들고 다녀오는 해짓골 올빼미 형 몸놀림이 노래입니다. 여기에 이 모든 살림살이를 살포시 안아서 글꽃이라는 숨결을 담아내니, 시집 한 권이란 노래책이 될 만하지 싶습니다.


보말이 보말이주, 보말을 뭐셴 고라?
고메기? 난 몰라, 우리 동네선 그자 보말 (보말죽)


  노란 꽃송이인 민들레를 ‘노란꽃’이라고만 해도 되고 ‘노랑둥이’라든지 ‘노랭이’나 ‘누렁이’라 해도 됩니다. 어떤 말을 붙여서 마주하든 따사로운 눈길이면 곱지요. 하얀 꽃송이인 민들레를 ‘흰꽃’이라고만 해도 되며 ‘하양둥이’라든지 ‘하양이’나 ‘허영이’라 해도 됩니다. 어떤 말로 불러서 맞이하든 넉넉한 손길이만 곱습니다.

  따사로운 눈길로 마주하기에 글월을 받습니다. 냇물도 글월을 띄우고, 골짜기도 글월을 띄워요. 종가시나무가 띄우는 글월을 받아 볼까요? 후박나무나 동백나무가 띄우는 글월을 받아 볼까요? 자귀나무나 가문비나무가 띄우는 글월을 받으면 어떨까요? 사마귀도 방아깨비도 우리한테 글월을 띄웁니다. 다만 우리가 이들 작은 이웃이 띄우는 글월을 못 알아챌 뿐입니다.

  작은 마을이나 작은 골목에서 살아가는 이웃도 늘 글월을 띄워요. 작은 연립주택이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이웃도 노상 글월을 띄우고요. 우리는 어떤 글월을 알아채면서 기꺼이 받는 삶일까요? 우리는 누구를 이웃으로 삼아서 글월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살림일까요? 제주에서 날아온 시집을 덮으니 보말죽 냄새가 고소하게 퍼집니다. 2017.9.12.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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