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군내버스에서 읽은 책 2017.10.24.


공문서 손질하는 일을 한창 하다가 택배를 받는다. 아니, 공문서 손질하는 일을 살짝 멈추고서 밥을 지었고, 빨래를 했다. 마당에 빨래를 널다가 택배를 받았다. 옳거니 책이 왔구나.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이 한 상자 왔다. 이 따끈따끈한 책을 먼저 곁님한테 한 권 주고, 오늘은 우체국에 다녀오자고 생각한다. 우체국에 가기 앞서까지 오늘 몫 공문서 손질을 눈썹이 휘날리도록 했다. 이동안 난데없이 벼락이 치고 비바람이 몰려왔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면서 빨래를 걷자고 하지만, “아버지 바빠. 너희들이 해.” 하는 말만 남겼다. 드디어 15시를 앞두고 일을 마쳤고, 아이들이 빨래를 거두어 놓은 품새를 갈무리하고, 평상을 새로 덮는다. ‘우리 아이들아, 언제나 아버지가 모든 집일을 다 해 준다고 생각하지 말자. 빨래 걷는 일쯤 대수롭지 않단다. 그냥 너희가 해도 돼.’ 《겹말 사전》 열세 권을 가방에 챙긴다. 열세 권으로도 가방이 꽤 묵직하다. 큰아이한테 우체국에서 택배 종이에 우리 주소 적는 심부름을 맡기려고 같이 가자고 부른다. 군내버스에서 노래를 들으며 시집을 편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라는 이병률 님 시집. 바다가 잘 있다는, 시인 아재가 이럭저럭 잘 있다는, 그리운 사람도 헤어진 사람도 이냥저냥 잘 있다는, 이리하여 시집도 이러구러 잘 나왔다는 …… 이야기를 읽는데 살짝 따분했다. 내 눈에는 ‘이파리를 가지고 있어요’라든지 ‘가정하에’라든지 ‘바람이 만들어지는’이라든지 ‘한 줄 위에 나란히 이불로 널려’ 같은 얄궂은 말씨가 자꾸 걸린다. 생각해 보면 요즘 시나 소설을 쓰는 분들 가운데 얄궂지 않고 정갈한 말씨를 쓰는 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얄궂은 말씨가 외려 한국 말씨라고 여겨야 할 노릇인가 하고도 생각해 본다. 얄궂은데 얄궂은 줄 모르면서 누구나 흔히 쓰니까 말이다. 교과서하고 사전조차도 얄궂은 말씨를 털어낼 낌새가 거의 안 보이니 시인이나 소설가나 지식인을 탓하기도 어렵다. 그나저나 우리 새로운 책을 이웃님한테 부치려고 열세 권이나 챙겨서 우체국으로 나왔는데, 막상 우체국에서 가방을 여니 ‘주소 공책’을 집에 놓고 왔다. 참 바보스러운 짓을 했다고 뉘우치면서, 얼른 여러 이웃님한테 쪽글을 보내서 주소를 알려 주십사 하고 여쭌다. 종이봉투에 책을 싸자니 테이프로 친친 감아야 해서 손이 많이 간다. 누리책방이든 출판사이든 요새는 비닐뽁뽁이봉투에 책을 넣는 까닭을 알겠다. 날마다 꽤 많이 손수 싸서 부치려면 종이봉투에 책을 싸서 보내는 일이란 아무래도 바보짓이지 싶다. 큰아이가 배고프다며 닭고기를 먹자 한다. 심부름하느라 애썼지? 읍내에서 저자마실을 한 바퀴 돌고서 튀김닭집에 들어간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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