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11. ‘각하·영부인’, ‘여사·씨’, ‘님’


  우리가 쓰는 말은 우리 삶을 나타냅니다. 아름답게 잘 쓰는 말이 넘실거린다면 우리 삶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거칠거나 딱딱한 말이 넘실거린다면 우리 삶이 거칠거나 딱딱하다는 뜻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이나 일본 말씨가 흘러넘쳤고, 신분이나 계급으로 삶을 가르던 조선 사회에서는 ‘여느 사람들 말’하고 ‘권력자와 지식인 말’이 뚜렷하게 갈렸어요.

  한국 사회를 살피면 해방 뒤로 민주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독재가 판쳤어요. 열 해 즈음 독재가 판치던 자리에는 군사독재가 치고 들어왔습니다. 군사독재는 스무 해가 지나고 서른 해가 가깝도록 우리 사회를 옭아매거나 짓밟았습니다. 드디어 군사독재에서 풀려났구나 싶었어도 민주 사회에 이르지 못했고, 살짝 민주 사회를 맛본다 싶더니 다시 예전처럼 권위로 윽박지르는 사회를 보내야 했어요.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마음 놓고 말할 자유’라든지 ‘독재자·권력자 눈치를 안 보고 글쓸 권리’를 누린 햇수는 아직 열 해조차 안 된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눈여겨보아야지 싶어요. 더군다나 한국 사회는 신분제 얼거리를 일제강점기 힘에 짓눌린 채 마감하고는 제국주의 서슬에 파묻혀 서른 해 남짓 보내야 했지요. 이런 서슬이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군사독재가 이어졌어요.

  이러한 사회 흐름을 엿본다면, 조선 사회에서는 ‘한문을 앞세운 글’이 ‘여느 사람들이 수수하게 쓰던 말’을 짓밟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하고 일본 한자말’이 ‘여느 사람들이 수수하게 쓰던 말’을 짓밟았는데, 해방 뒤에도 오랫동안 ‘조선 사회에서 중국을 섬기던 한자말’에다가 ‘일제강점기 일본 한자말’이 득시글거렸어요.

  한겨레신문은 1988년에 한글만 쓰기를 하고, 중앙일보는 1995년부터 한글만 쓰기를 합니다. 신문에서 ‘한글 쓰기’를 한 발자국도 대단히 짧아요. 이제 인터넷이나 신문이나 책이나 교과서에서 한자를 찾아보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어쩌다가 한 번쯤 드러날 뿐, 한자를 쓸 일이 없어요. 외려 영어를 아무 데에나 마구 쓰지요.

  한국 사회는 한국사람 스스로 새롭게 세우거나 일으킨 물결이 아직 매우 얕습니다. 한국사람이 스스로 말을 세운다거나 일으킨 적은 거의 없다시피 해요. 이러다 보니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이 뒤죽박죽이기 일쑤입니다. 첫째 중국 한자말이 있고, 둘째 일본 한자말이 있으며, 셋째 중국·일본 한자말 사이에서 불거진 한국 한자말이 있는데다가, 일본 말씨하고 번역 말씨가 있고, 여기에 영어가 있지요. 한국말은 여기에 치이고 저기에 밀리며 제자리를 아직 못 찾습니다.

  사람을 가리키는 자리에서 쓰는 ‘부름말(호칭)’도 아직 제자리를 못 찾아요. 여러 가지 부름말은 한국 사회에서 너무 빠르게 생겼다가 너무 빠르게 사라집니다. ‘각하’라는 한자 부름말은 기껏 쉰 해 즈음 무시무시하게 쓰이다가 이제는 아주 저물어 버립니다. ‘영부인·여사’ 같은 한자 부름말을 한국사람이 쓴 지도 얼마 안 됩니다. 처음에 이런 한자 부름말을 쓴 사람이 드물기도 했고, 친척이나 친구 사이에 쓸 부름말을 거의 모두 조선 사회 한자에서 따오려고 하다 보니, 부름말이 너무 어렵다고 느끼는 분이 많고, 앞으로 서른 해나 쉰 해쯤 뒤에는 웬만한 부름말은 모두 바뀔 수 있으리라 봅니다.


(표준국어대사전,2017)
영부인(令夫人) :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
여사(女史) : 1. 결혼한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 2.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 3. [역사] 고대 중국에서, 후궁을 섬기어 기록과 문서를 맡아보던 여관(女官)
씨(氏) : 1. 같은 성(姓)의 계통을 표시하는 말 2.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 공식적·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가 아닌 한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로,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 3.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삼인칭 대명사. 주로 글에서 쓰는데, 앞에서 성명을 이미 밝힌 경우에 쓸 수 있다
 :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씨’보다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서로 어떤 부름말을 썼을까요? 옛 조선이나 부여에서는 서로 어떤 부름말을 썼을까요? 5000해를 더 지나서 1만 해 앞서는 어떤 부름말을 썼을까요?

  오랜 부름말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는 굳이 오랜 부름말을 찾아내거나 알아내어 쓰기보다는, 우리 입이나 눈이나 귀나 손에 익숙하면서 으레 잊은 아름다운 부름말을 새삼스레 돌아볼 수 있으면 한결 나을 만하지 싶어요.

  한국 사회가 아직 민주도 평등도 평화도 아닐 적에, 정치 권력자나 지도자는 ‘그들 권력자나 지도자’를 ‘여느 사람들’하고 갈라 놓으면서 ‘아주 높은 곳’에 있다는 뜻으로 ‘한자말’로 따로 부름말을 붙이려 했습니다. 이런 부름말이 바로 ‘각하·영부인’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제 조금이나마 더 민주하고 가깝게 가기를 바란다면, 여기에 평등과 평화를 퍼뜨리려는 길을 걸으려 한다면, 낡은 권위주의 부름말은 하나하나 살펴서 떨굴 만하지 싶어요.

  서양에서는 이런 부름말을 놓고 진작에 ‘갈무리가 끝났’어요. 한국에서는 이런 부름말을 놓고 아직 한 번도 제대로 ‘갈무리를 해 보자고 하는 이야기’조차 없었지요. 한때는 ‘조선 신분 사회 것’을 그대로 쓰려 했고, 한때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것’을 그대로 쓰려 했다가, 한때는 군사독재자가 멋대로 퍼뜨리려 하던 말을 써야 했습니다.


(문세영 조선어사전,1940)
영부인(令夫人) : 남의 안해의 존칭
여사(女史) : 1. 시문·서화에 재주가 있는 여자 2. 기혼녀의 성명 아래에 존재하여 쓰는 말
씨(氏) : 사람의 성 또는 이름 아래에 붙이어 존재를 표하는 말
님 : 남의 성명 또는 어떠한 명사에 붙이어 존경의 뜻을 표하는 말


  사회가 평등하면서 민주와 평화로 나아가려는 길이라면 ‘한자 부름말’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씨’를 알맞게 쓸 만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대통령 문재인 씨”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왜 “청소부 김씨”나 “노동자 박씨”나 “농사꾼 최씨”라고는 쓰면서 “대통령 문씨”라고는 못 쓸까요?

  대통령은 ‘사람을 밟고 올라선 사람’일까요? 가장 높은 권력자이니, 여느 사람들보다 우러러야 하는 말씨를 써야 할까요? 가장 높은 권력자를 나타내는 부름말은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있지 않나요?

 대통령 문재인 . 문재인 대통령
 농사꾼 김이박 . 김이박 농사꾼

  굳이 ‘씨’를 안 붙이고 “대통령 문재인”이나 “문재인 대통령”이라 하면 됩니다. 나중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라면 “문재인 씨”라고 수수하게 쓸 만할 테고요. 서울시장을 맡는 분은 “서울시장 박원순”이나 “박원순 서울시장”인데, 이분이 서울시장 일을 그만둔다면, 그때에는 “박원순 씨”가 되어야 할 테지요. 한국 사회가 민주와 평등과 평화로 나아간다면 말이지요.


(한글학회 큰사전,1947/1957)
영부인(令夫人) : 남의 부인을 높이어 일컫는 말
여사(女史) : 1. 여자 학자, 또는 여자 예술가 2. 시집간 여자를 높이는 말
씨(氏) : 사람의 성이나 또는 이름 밑에 붙이어 존대하는 뜻을 나타내는 말
 : 사람의 일컬음 밑에 붙이어 높임을 나타내는 말


  194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남북녘 여러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영부인·여사’는 남녘에서만 쓰는 부름말인 줄 알 수 있습니다. 북녘에서는 이런 부름말을 안 씁니다. 아무래도 북녘 사회는 좀 다르기 때문일 텐데, 우리가 흔히 쓰면서 우리가 흔히 잊는 아름다운 ‘높임 부름말’이 있다는 대목을 헤아려 보기를 바라요.

  바로 ‘님’이 있어요.

  ‘임금님’이라 하던 때에 쓰던 ‘님’입니다. 이웃 사이에서 ‘이웃님’이라고도 해요. 동무 사이에서 ‘동무님’이라고 하지요. ‘꽃님’이나 ‘풀님’이나 ‘별님’이나 ‘해님’처럼, 사람 아닌 것한테도 높이려는 뜻을 나타내 주지요.

  대통령 문재인 님
  총리 아베 님
  소설가 하루키 님
  시인 윤동주 님

  ‘대통령·총리·소설가·시인’ 같은 부름말이 있으면 이 부름말만 쓰면 되어요. 애써 뭔가 더 붙여 보고 싶다면 이때에는 ‘님’을 붙일 만합니다. 대통령하고 함께 살림을 짓는 곁님을 두고는 어떤 부름말을 쓰면 좋을까요?

  이때에는 “문재인 님”이라 하듯 “김정숙 님”이라 하면 됩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심상정 후보가 나오기도 했는데요, 심상정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심상정 후보 곁님을 두고는 “이승배 님”이라 하면 되어요.

  한국 사회는 부름말에서 남녀를 따로 가리지 않는다는 대목을 눈여겨보면 좋겠어요. ‘이이·저이·그이’나 ‘이분·저분·그분’은 남녀를 따로 안 가립니다. 남녀를 아우르는 부름말이에요.
  민주와 평등과 평화를 헤아리면서 새롭게 나아가려는 한국 사회라면, 이제 부름말 하나를 놓고 더 깊으면서 넓고 살가운 한국 살림을 이루는 길을 찾아보아야지 싶습니다. 위아래를 가르지 않는, 그러니까 신분 사회를 벗어던지는 길을 걸어야지요. 높낮이를 따지지 않는, 그러니까 계급 틀을 내버리는 길을 걸어야지요.


(북녘 조선말대사전,2007)
영부인(令夫人) : x
여사(女史) : x
씨(氏) : 1. 사람의 성이나 이름밑에 붙이여 존칭의 뜻을 나타내는 말 2. (대명사로 쓰이여) ‘그 사람’의 뜻으로 좀 점잖게 이르는 말
 : 1. ‘사랑하여 그리워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2. (뒤붙이로 쓰이여 사람을 이르는 명사말뿌리에 붙어) ‘존경을 받는 분’이나 말하는 사람이 말받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존대하는분’이라는 뜻


  인터넷에 있는 수많은 모임이나 동아리에서는 저마다 ‘-님’을 붙여서 부릅니다. 모임지기도 ‘님’이고, 여느 회원도 누구나 ‘님’입니다. 누리모임에서 쓰는 이름에 ‘님’을 붙여서 불러요. 우체국이나 공공기관에서도 한때 ‘씨’라는 부름말을 흔히 쓰다가 요새는 ‘님’이라는 부름말을 흔히 써요. 때때로 ‘고객님’처럼 틀린 부름말을 쓰기도 합니다만, ‘아무개 님’이라고 하는 부름말은 서로가 서로를 높이면서 헤아리는 말씨로 자리를 잡아요.

  대통령이든 대통령 곁님이든 모두 ‘님’이면 넉넉하리라 생각합니다. 서슬 퍼렇던 독재나 권력이나 신분이나 계급 같은 멍에와 허울을 모두 벗어던지고 사이좋게 ‘님’이 될 수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곁님’이라는 부름말을 지어서 써 보곤 합니다. 남녀나 여남이라는 틀을 넘어설 수 있고, 서로 얼마나 가까이에서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보살피려고 하느냐 하는 마음을 이 부름말로 나타낼 수 있으리라 여기면서 ‘곁님’을 씁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대통령 곁님 아무개” 같은 말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즐거우며 아름답고 넉넉한 평등·민주 ·평화로 나아간다면, 대통령 언저리에서도 이렇게 수수한 부름말을 곱다시 맞아들여 쓰고,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이런 ‘착한’ 부름말을 사이좋게 쓸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2017.5.30.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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