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웃집에 나들이를 할 적에 여러모로 많이 느낀다. 나는 혼자서 움직이기보다는 으레 어디를 가든 두 아이를 데리고 움직이기 때문에, 게다가 ‘아이 어머니 없이 아이 아버지’인 내가 혼자서 두 아이를 데리고 움직이니까, 언제나 ‘아이를 먼저 챙기’면서 지낸다. 아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터전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고, 아이들이 배고프거나 심심하지 않을 수 있는 자리가 되도록 마음을 쓴다. 아이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데가 아니라, 아이들이 어떤 것이든 홀가분하면서 기쁘게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에 아이들하고 마실을 다닐 수 있다.
나보다 나이가 있는 분이라면 으레 아이를 낳아서 돌보았다고 할 만하다. 그렇지만, 아이를 낳아서 벌써 스무 살이나 서른 살 나이가 되도록 돌보았든, 아니면 아이를 서넛이나 너덧을 낳았다고 하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내내 아이 곁에서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씻기고 함께 놀았던 삶인 분하고, 이러한 삶이 아닌 분하고 그야말로 사뭇 다르다.
이를테면, 어른은 술을 마시면 아이는 뭐를 마셔야 할까? 아이는 아무것도 안 주어도 될까? 어른은 매운 김치와 밥을 먹는다면 아이는 무엇을 먹어야 할까? 어른한테 안 매우니 아이한테도 안 매울까? 어른은 안 추우니까 아이도 안 추울까?
나는 ‘내가 잘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온 여덟 해’라는 나날이 있지 않았으면 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하는데다가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대목이었다. 아이를 낳아 함께 살면서 ‘이제서야 뒤늦게 바라보고 알아채고 느끼고 바라보고 생각하는’ 대목이다.
사람들이 진보나 평화나 평등이나 혁명 같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막상 삶에서 ‘아이와 함께 누리는 길’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언제나 입에서 흐르는 말로만 그칠 뿐, 이러한 말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물거품이 되리라 느낀다.
아이하고 눈높이를 맞출 뿐 아니라, 아이하고 ‘함께 살면서 웃고 노래하는’ 몸짓이 될 때에, 비로소 진보이든 보수이든, 평화이든 평등이든, 혁명이든 통일이든, 게다가 귀촌과 귀농까지도 참답고 착하며 아름답게 이루리라 느낀다. 4348.10.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