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로 (즐겁게) 먹기



  꿈나라로 접어들면 아픈 몸을 잊는다. 꿈속에서 나는 어디도 아픈 데가 없다. 꿈길 어딘가를 걷는데 문득 어떤 목소리가 울리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얘야, 먹을 때에는 두 가지가 있단다.” “두 가지요?” “언제나 두 가지란다. 하나는 웃고 노래하며 먹기이고, 다른 하나는 고요히 꿈꾸며 먹기이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다르게 먹는 사람도 많던데요?” “이를테면?” “성을 내면서 먹거나 마구 먹거나 거칠게 먹거나 바보처럼 먹거나 흘리면서 먹거나 …….” “얘야, 나는 ‘두 가지로만 먹는다’고 말했다. 내가 말한 ‘두 가지’가 아니면, 그때에는 먹는 몸짓이 아니란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퍼뜩 잠에서 깬다. 잠에서 깨고 나서 한참 눈을 감고서 생각에 잠긴다. 꿈에서 들린 목소리가 누구 목소리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은 언제나처럼 하나도 안 들고, 참말 왜 ‘두 가지 먹기’만 있는가 하는 대목이 궁금했다. 얼추 한 시간 즈음 ‘두 가지 먹기’를 생각해 보니, 참말 이 두 가지가 아니면 ‘먹는다’고 할 수 없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래서 “두 가지로 (즐겁게) 먹기”처럼 말해야겠구나 싶다.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로만 먹지만, 이렇게만 말할 적에 못 알아들으면 사이에 ‘즐겁게’라는 꾸밈말을 넣어야지 싶다.


  아이들은 작은 사탕 한 알을 먹어도 환하게 웃으면서 노래한다. 어른들은 콩 한 알을 나누어 먹어도 거룩하게 두 손을 모아서 차분하고 고요하게 가슴으로 꿈을 그린다. ‘두 가지 먹기’란 아이답게 먹는 몸짓하고 어른답게 먹는 몸짓이라고 할 만하다. ‘아이’와 ‘어른’은 나이로 가르는 잣대가 아니니, 나이가 많아도 아이답게 먹을 수 있다. 다만, 아이더러 어른답게 먹으라고 한다면 좀 안 어울린다. 아이는 아이답게 먹을 뿐이지만, 어른은 어른답게 먹을 뿐 아니라 때때로 아이답게 먹으면서 삶을 새로 짓는다.


  무엇보다도 ‘먹을 때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 뜻은, 이 두 가지 몸짓으로 먹지 않으면 어떤 밥을 먹더라도 몸에 이바지를 하지 않기 때문이지 싶다. 아이답지도 어른답지도 않은 몸짓이라면 영양성분을 몸에 집어넣어 목숨을 조금 더 이을는지 모르나, 새로운 삶이 되는 꿈을 짓는 생각이 피어나는 몸짓은 조금도 아니다. 이른바 진수성찬을 차리더라도 웃음이나 노래나 이야기가 없는 밥상이라면 밥맛이 돌 수 없다. 감옥에 갇힌 몸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웃고 노래하며 꿈꾸는 몸짓이라면 콩깻묵을 반 그릇만 받아서 먹어도 언제나 배부를 수 있다.


  사람은 ‘먹으려고 살지’ 않는다. 사람은 ‘살려고 먹는’다. 다만, 살려고 먹되, ‘왜 사는가?’ 하는 대목을 생각해야 한다. 왜 사는가 하면, 목숨을 이으려고 살지 않는다. 꿈을 그려서 이 꿈을 이루려는 뜻으로 산다. 꿈을 그리지 않거나 꿈을 이루려는 뜻이 없는 삶이라면 삶이 아닌 ‘산 주검’일 뿐이다.


  밥 한 그릇이란 ‘몸을 얻어서 삶을 짓는 넋’인 우리들이 하루하루 새롭게 맞이하면서 기쁘게 열도록 도와주는 자그마한 기운이라고 할 만하다. 마음에 담은 생각을 몸이 받아들여서 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조그마한 바람이라고 할까. 4348.9.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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