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94) 풀솜할매
아궁이 앞에서 불때던 풀솜할매가 / 찬장에 숨겼다 꺼내 마시곤 / 나무광 뒤로 된시름 던지듯
《김수우-붉은 사하라》(애지,2005) 52쪽
우리는 흔히 ‘외할머니·외할아버지’와 ‘친할머니·친할아버지’ 같은 말을 씁니다. 그런데 ‘外’와 ‘親’이라는 앞머리는 한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말을 제법 오래 썼으나, 이 말은 한자가 이 땅에 들어오고 나서 퍼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한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앞서 우리는 어떤 말을 썼을까요? 이 대목을 알기는 쉽지 않지만, 지난날에는 따로 ‘외·친’으로 가르지 않고 그냥 ‘할머니·할아버지’라고만 썼을 수 있습니다. 여느 시골에서는 두고두고 집과 살림을 고스란히 물려받으면서 살았을 테니 굳이 ‘외·친’으로 가를 일이 없었다고도 할 만합니다. 어머니 쪽 할머니와 아버지 쪽 할머니를 따로 갈라야 했다면, 이를 가리키는 오래된 이름도 틀림없이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그런데, ‘외할머니’를 가리키는 이름이 하나 따로 있습니다. 바로 ‘풀솜할머니’입니다. 고장에 따라서 ‘풀솜할매’나 ‘풀솜할미’처럼 쓰기도 합니다. ‘풀솜’은 “실을 켤 수 없는 허드레 고치를 삶아서 늘여 만든 솜”이라고 합니다. “빛깔이 하얗고 반짝거리며 가볍고 따뜻하다”고 해요. 한국말사전을 보면 ‘풀솜할머니’가 올림말로 나옵니다. 뜻풀이는 “‘외할머니’를 살가이 이르는 말. 외손자를 사랑하는 따뜻하고 두터운 마음을 나타내려는 뜻으로 쓴다”로 나옵니다.
‘풀솜할머니(풀솜할매, 풀솜할미)’라는 낱말은 누에고치가 이 땅에 들어오고 나서 생겼으리라 생각합니다. ‘풀솜’을 빗대어서 쓰는 낱말이니까요. 이렇게 따지면 ‘풀솜할머니’라는 낱말이 처음 생겨서 쓰인 지 무척 오래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풀솜할머니
풀솜할아버지
‘풀솜할머니’라는 낱말은 있으되 ‘풀솜할아버지’라는 낱말은 없는 듯합니다.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이 아예 없는지 아니면 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외할머니처럼 따뜻하고 두터운 마음으로 아이를 보살피려는 외할아버지도 틀림없이 있어요. 그러나, ‘풀솜할아버지’라는 낱말은 따로 안 쓴다면, 아무래도 할아버지는 할머니보다 아이를 덜 따뜻하거나 덜 살가이 아낀다고 여길 만하구나 싶어요. 가없는 사랑과 믿음으로 아이를 살가이 아끼는 따뜻한 품이 바로 ‘풀솜’과 같은 숨결이요, 이러한 숨결을 ‘풀솜할머니’라는 낱말에 담았구나 싶어요.
여기에서 한 가지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비록 이제껏 ‘풀솜할아버지’라는 낱말이 거의 안 쓰였다고 할 테지만, ‘어머니를 낳은 할아버지’도 따뜻하고 살가우며 도타운 품이 되어 ‘풀솜할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외할머니 아닌 친할머니도 따뜻하고 살가우며 도타운 품이 되어 새로운 이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4348.3.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