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49. ‘자유로운’ 생각과 삶과 말
― 아이한테 들려줄 노래에 담는 말
어른이 지어서 아이와 함께 부르려는 노래를 가리켜 ‘동요(童謠)’라고 하지만, 이 한자말을 한국사람이 쓴 지 얼마 안 됩니다. 서양 현대문학을 받아들인 일본에서 널리 쓰던 말마디를 한국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동시’나 ‘동화’라는 낱말도 이와 같습니다. 일본을 거쳐서 들어왔기에 안 써야 할 낱말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을 거치든 중국을 거치든 미국을 거치든, 한국사람이 한국말로 가장 알맞고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새 낱말’을 지을 수 있는지 없는지 먼저 생각한 뒤 즐겁게 쓰면 됩니다.
한국말사전에는 아직 안 실리지만 ‘어린이노래’라는 낱말을 새롭게 지어서 쓰기도 합니다. 어린이와 함께 부를 노래요, 어린이가 즐기는 노래라는 뜻에서 ‘어린이노래’입니다. 곰곰이 헤아린다면, 한국에서는 지난날에 그냥 ‘노래’라고만 했습니다. 지난날에는 어른과 아이가 따로 없이 모두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를 굳이 가른다면 ‘일노래’와 ‘놀이노래’가 있습니다. 어른은 일을 하니 ‘일노래’이고, 아이는 놀이를 하니 ‘놀이노래’입니다. 지난날에 아이가 부르던 노래는 모두 놀이를 하며 부르던 노래예요. 그러니, ‘어린이노래’란 모두 ‘놀이노래’이면서 그냥 ‘노래’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이들은 노래를 얌전히 앉아서 듣거나 부르지 않아요. 춤을 추거나 웃거나 뛰놀면서 노래를 불러요. 어른들은 무대나 공연장 같은 데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노래를 듣기도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이런 노래가 몹시 힘듭니다. 좀이 쑤시지요. 한편, 노래를 더 살피면 지난날 어른들이 일을 하며 부르던 노래는 ‘들노래’와 ‘마을노래’로 가를 수 있어요. 들에서 일하며 부르는 노래가 있고, 마을에서 일하며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가르면 ‘살림노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바느질을 하거나 베틀을 밟거나 절구질이나 방아질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빨래를 하거나 다듬이질을 하며 부르는 노래는 ‘일노래’이면서 ‘살림노래’로 여길 만해요.
오늘날 널리 퍼진 어린이노래 가운데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으로 첫머리를 여는 노래가 있고,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로 첫머리를 여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 지은 어른이나 오늘날 이 노래를 부르는 아이나 그냥 듣고 부릅니다. 그런데, 두 어린이노래에서 크게 잘못된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산 위에서”와 “산 속 옹달샘”입니다.
바다에서 부는 바람은 바닷바람입니다. “바다 위에서” 부는 바람이 아닙니다. 들에서 부는 바람도 “들에서” 불 뿐, “들 위에서” 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산에서 부는 바람”이나 “멧골에서 부는 바람”으로 바로잡아야 해요. 사람들은 “산에 나들이를 갈” 뿐, “산 속에 나들이를 간다”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잠을 자지 “집 속에서” 잠을 자지 않습니다. “깊은 산에 옹달샘”이나 “깊은 멧골 옹달샘”처럼 어린이노래를 바로잡아야 옳습니다.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잘못 쓰는 말투라 하더라도 이러한 말투를 ‘자유’로 보아야 할까요? 널리 퍼진 노래라 하더라도 잘못 쓰는 말투가 더 퍼지지 않도록 바로잡아야 할까요? 널리 퍼졌으면 잘못된 말투라 하더라도 그대로 써야 할까요? 널리 퍼지기 앞서 바로잡았으면 가장 나았을 테지만, 노래를 선보이거나 문학을 선보이거나 책을 선보이는 어른들은 ‘낱말 하나’와 ‘말투 하나’까지 얼마나 올바르거나 알맞은지 제대로 안 살피기 일쑤입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살피지만, 말다운 말인지 헤아리지는 않습니다.
다른 갈래에서 생각해 봅니다. 이를테면, 가게에 놓인 과자에 ‘독성 물질’이 섞였으면 어른들은 어떻게 할까요? 빵집에 놓인 빵에 곰팡이가 피었으면 어른들은 어떻게 할까요? 광우병이나 조류독감이라고 해서 소와 닭을 수십만 마리나 산 채로 파묻기까지 하는 어른들 모습은 무엇일까요? 입에 들어가는 밥에서 아주 조그마한 잘못이 하나라도 드러나면, 하늘이 무너지듯이 깜짝 놀라면서 아주 발빠르게 바로잡으려고 애씁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들어가는 말은? 생각을 가꾸는 말은? 사랑을 살찌우는 말은? 넋을 북돋우는 말은?
우리가 늘 쓰는 말은 우리 마음을 이끕니다. 아주 자그마한 말 한 마디가 바로 우리 마음과 생각과 사랑과 넋을 움직입니다. 널리 퍼진 노래에서 한두 군데 잘못된 대목이니, 슬쩍 눈을 감고 지나쳐도 될까요?
자유로운 말이란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말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말이란 서로 아끼고 돌보는 마음을 북돋우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내 삶을 곱게 가꾸면서 이웃과 동무가 저마다 이녁 삶을 곱게 가꾸도록 북돋울 때에 참다운 자유가 되리라 느낍니다.
말 한 마디를 찬찬히 살피는 까닭을 돌아봅니다. 마음을 알뜰살뜰 여미어 이웃과 사랑스레 어깨동무하는 꿈을 짓고 싶기에 말 한 마디를 찬찬히 살핍니다. 글 한 줄을 곰곰이 헤아리는 까닭을 짚습니다. 생각을 슬기롭게 가꾸면서 내 보금자리와 우리 마을을 모두 아름답게 일구고 싶기에 글 한 줄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규칙이니까 지켜야 하는 말이 아니라, 서로 즐겁게 마음을 살찌우고 싶기에 말을 곱게 가다듬습니다. 원칙이니까 따라야 하는 글이 아니라, 다 함께 기쁘게 노래하듯이 생각을 키우고 싶기에 글을 정갈히 추스릅니다.
전남 광주에서 다달이 나오는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2015년 1월호를 보면, 전남 곡성 수월리 김봉순 할매가 들려주는 “우덜이 날마다 밭고랑으로 기어댕긴께 도시사람들 묵제. 내 손이 키와서 전국이 다 묵제. 힘들다고 모다 호맹이 자리 땡개불문 모다 못 묵제(27쪽).” 같은 말마디가 고스란히 나옵니다. 전라말이요 곡성말이면서 수월마을 사람들이 쓰는 말입니다. 표준말이나 서울말로 고쳐서는 말맛이 나지 않습니다. 곡성 옆에 있는 구례에서는 구례말을 쓸 테고, 구례 옆에 있는 하동에서는 하동말을 쓸 테지요. 마산은 마산말, 진주는 진주말, 순천은 순천말을 씁니다. 자유롭게 쓰는 말이란 내가 나고 자란 터전에서 싱그러이 살아서 숨쉬는 말이지 싶습니다. 이웃을 아끼고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쓸 때에 참으로 자유로우면서 아름다운 말이지 싶습니다. 4348.1.1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