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도닷컴> 2015년 1월호에 실은 도서관일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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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은 이쁘장한 잡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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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도서관 풀내음

― 시골에서 이웃 되기



  마을에 문을 걸어 잠그는 집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시골에서 훔칠 것이라면 쌀이나 고구마나 배추쯤 될 텐데, 집집마다 이런 풀열매나 푸성귀는 다 있으니 굳이 훔칠 일이 없습니다. 마을사람끼리 오간다면 시골마을에서 ‘다른 사람 것을 바보스레 노리는 짓’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가용이나 짐차를 몰고 마을에 들어오는 낯선 사람이라든지, 사진기를 어깨에 건 사람이라든지, 종교를 퍼뜨리려는 사람이 얼씬거린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마을사람 사이에서만 ‘서리’입니다. 마을사람이 아니면 ‘서리’가 아닙니다. 관광객은 시골마을을 이웃으로 여길까요. 여행객은 시골마을을 동무로 삼을까요. 관광을 앞세워 시골숲을 파헤칩니다. 여행 뒤끝에는 쓰레기가 뒹굽니다. 도시에 생활·문화공간을 늘리면서 위해시설은 줄이려 하니, 커다란 발전소나 폐기물 처리장을 시골에 짓고 송전탑을 박습니다.


  한겨레는 예부터 ‘대문’을 두지 않았습니다. ‘大門’이라는 낱말부터 한국말이 아닙니다. 기와를 얹은 집에다가 담을 빙 두른 양반과 권력자와 부자 몇몇 사람 집에만 한자로 지은 낱말 ‘大門’을 두었습니다. 먼 옛날부터 한겨레 여느 마을 수수한 시골집에는 울타리조차 따로 없고 바깥 큰문이란 처음부터 없습니다. 한겨레 살림집에는 ‘미닫이’와 ‘여닫이’만 있습니다. 바람을 가리려고 돌울을 쌓기는 하되, 큰 숲짐승을 가리려고 탱자나무나 찔레나무로 울타리를 두르기는 하되, 이웃과 동무가 거리끼지 않고 드나드는 집이었어요.


  도시에서 집집마다 자물쇠를 단단히 걸어 잠그는 까닭은 ‘이웃’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집집마다 울타리를 높게 쌓고, 건물마다 문지기를 두는 까닭은 ‘동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이나 동무가 있더라도 이웃이 아니거나 동무가 아닌 훨씬 많은 사람이 무섭거나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겨울에 마을 샘터와 빨래터에 아이들과 함께 가서 물이끼를 막대솔로 걷어냅니다. 두 아이는 빨래터 담벼락에 걸터앉아서 “아버지, 힘내라!” 하고 북돋웁니다. 한겨울이니 옷을 적시면서 물놀이를 하지는 말라 했더니, 큰아이는 연필과 종이를 챙겨 그림놀이를 합니다. 마을 할배가 빨래터 옆을 지나가다가 “이 추운데 뭐 하요?” 하시면서 “이녁 집에 떡 갖다 놨으니 아(아이)들이랑 자쇼.” 하고 덧붙입니다. 한겨울이어도 한낮에는 볕이 포근해서 빨래터에 맨발로 들어가서 물이끼를 걷을 만합니다. 마을 할매는 우리가 빨래터에 있느라 우리 집에서 아뭇소리가 안 나더라도 대청마루에 떡을 놓고 가신 듯합니다. 이웃이니까 스스럼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서로 이웃이면서 마을에서 막내이니, 한겨울 빨래터 치우는 몫을 기쁘게 맡습니다.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면서 고샅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이들은 제삿떡을 먹고, 나는 ‘영국에 있는 이웃’이 선물로 보낸 책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를 읽습니다. 영국 브루더후프 공동체에서 아이와 어른이 함께 삶을 배우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고 합니다. “정부가 요구하는 학업 프로그램 탓에 아이들은 놀며 배울 기회를 점점 더 빼앗기고 교사들은 과도한 서류 작업에 짓눌리고 있다(37쪽).” 같은 글줄을 읽으며 밑줄을 살며시 긋습니다. 참말 아이들은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못 놉니다. 시골에 있는 학교라 하더라도 몇 군데 학교를 빼고는 ‘운동장에서 맨몸으로 뒹굴며 노는 아이’를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나마, 운동장에서 맨몸으로 뒹굴며 노는 아이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합니다. 도시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아이들은 스마트폰에 눈길과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마을 어귀를 지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를 다녀오다가 ‘면소재지 초등학생’이나 ‘읍내 중·고등학생’을 만나면, 열이면 아홉은 두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게임을 하거나 ‘쪽글 수다’를 떠느라 부산합니다.


  도시에 있는 아이들은 숲이 없어서 숲을 못 봅니다. 시골에 있는 아이들은 숲이 있어도 ‘보기 싫어’서 숲을 안 봅니다. 도시에 있는 아이들은 책으로 숲을 봅니다. 시골에 있는 아이들은 ‘지겨워’서 숲을 눈으로도 책으로도 안 보려 하면서 고개를 돌립니다. 도시에 있는 대학교나 공장이나 기업에 가지 않고, 시골에 뿌리를 내리면서 숲을 가꾸고 들을 돌보겠노라 하고 씩씩하게 말할 줄 아는 시골아이는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이제 시골에서 ‘농고’를 찾기 어려운 만큼, 시골 초·중·고등학교에서조차 시골아이한테 ‘시골일’을 제대로 가르치거나 보여주거나 알리는 일도 못 하겠구나 싶지만, ‘농작물 산업(농업)’이 아닌 ‘시골살이’와 ‘숲살이’를 꿈꿀 줄 아는 어린이와 푸름이는 왜 못 태어날까요.


  “아이들에게 평생 남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부모가 주는 사랑이다(92쪽).” 같은 글줄을 읽다가 밑줄을 천천히 긋고 책을 덮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한테 입시지식이 아닌 춤과 노래를 가르칠 수 있기를 빕니다. 집에서는 아이를 학교나 학원에 보낼 생각은 부디 그치고 웃음과 사랑으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기를 빕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우리가 물려주거나 물려받을 것은 오직 사랑일 테니까요.


  2015년이 되면 우리 집 큰아이는 여덟 살입니다. 여덟 살이 될 큰아이하고 새해에는 ‘우리 집 학교’를 열자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을 학교로 삼고, 우리가 꾸리는 사진책도서관을 ‘도서관 학교’로 삼으려 합니다. 오직 한 아이를 생각하는 학교입니다. 오직 한 아이를 생각해서 가르치면서 어버이가 함께 배우는 곳입니다. 곁님과 나는 어버이요 교사가 되면서, 곁님과 나는 아이한테서 이야기를 새롭게 배우는 동무요 학생이 됩니다.


  ‘우리 집 학교’ 이름을 셋이서 함께 지을 생각입니다. ‘우리 집 학교’ 이름을 지으면 간판도 셋이서 짤 생각입니다. 작은아이는 옆에서 이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볼 테지요. 밥과 옷과 집을 손수 다루고, 불과 나무와 흙과 풀을 몸소 건사하며, 하늘과 해와 별과 바람과 비를 오롯이 마주할 때에, 즐겁게 놀면서 배울 보금자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집 학교’를 씩씩하게 가꾸면, 우리 집 네 사람이 시골마을 ‘젊은 이웃’이 되어 새로운 다른 이웃을 부를 수 있을 테지요. 4347.12.15.달.ㅎㄲㅅㄱ



* 도서관 나들이 오시려면 먼저 전화하고 찾아와 주셔요 *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을 보태 주셔요 *

☞ 어떻게 지킴이가 되는가 : 1평 지킴이나 평생 지킴이 되기

 - 1평 지킴이가 되려면 : 다달이 1만 원씩 돕거나, 해마다 10만 원씩 돕는다

 - 2평 지킴이가 되려면 : 다달이 2만 원씩 돕거나, 해마다 20만 원씩 돕는다

 - 평생 지킴이가 되려면 : 한꺼번에 200만 원을 돕거나, 더 크게 돕는다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도서관 지킴이가 되신 분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0.5341.7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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