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000) 정하다定 10
이를 위해서는 마음을 급하게 먹지 말고, 정해진 순서에 맞춰 차근차근 나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구 원/김태성 옮김-반 처세론》(마티,2005) 178쪽
정해진 순서에 맞춰 차근차근
→ 주어진 때에 맞춰 차근차근
→ 때와 곳에 맞춰 차근차근
→ 자리에 맞춰 차근차근
→ 차근차근
…
한국말사전을 보면 ‘순서(順序)’를 ‘차례’로 풀이하고, ‘차례(次例)’는 다시 ‘순서’로 풀이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두 낱말은 다르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두 낱말은 똑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두 낱말을 쓰는 자리를 살피면, 이러한 한자말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지난날에는 ‘앞뒤·위아래·줄·흐름·하나씩·차근차근’ 같은 낱말을 때와 곳에 따라 알맞게 썼으리라 느낍니다.
이 보기글을 살피면 “정해진 순서에 맞춰”와 “차근차근”을 나란히 적는데, 두 말마디는 뜻이 같습니다. 앞말을 덜든 뒷말을 덜든 글흐름은 같습니다. 4340.11.9.쇠/4348.1.1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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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자면,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爲)해서는”은 “이렇게 하자면”으로 다듬습니다. “마음을 급(急)하게 먹지 말고”는 “서두르다 말고”나 “마음을 바삐 먹지 말고”로 손질하고, “나아가는 태도(態度)가 필요(必要)하다”는 “나아가야 한다”나 “나아가야 좋다”로 손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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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082) 정하다定 11
“이 약초는 아주 깊은 산에서 캔 것이니 딴 데 것보다 갑절은 받아야 하오.” 할머니는 아주 당당하게 값을 정했습니다
《권정생-밥데기 죽데기》(바오로딸,1999) 9쪽
값을 정했습니다
→ 값을 매겼습니다
→ 값을 붙였습니다
→ 값을 불렀습니다
→ 값을 말했습니다
…
예부터 한국사람은 값을 ‘매기’거나 ‘붙이’거나 ‘부르’거나 ‘말하’기만 했습니다. 어느 때부터 이 모든 말을 잊고 ‘定한다’처럼 이야기를 했을까 궁금합니다. 4341.4.9.물/4348.1.1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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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약풀은 아주 깊은 멧골서 캤으니 딴 데 것보다 갑절은 받아야 하오.” 할머니는 아주 다부지게 값을 불렀습니다
‘약초(藥草)’는 그대로 두어도 되고, ‘약풀’이나 ‘풀’로 손볼 수 있습니다. ‘심심(深深)’이라 하지 않고 “아주 깊은”이라 적은 대목이 반갑습니다. 도라지 노래에 “심심 산천에 백도라지”처럼 노랫말을 붙이기도 하는데, 한국말은 ‘심심’이 아닌 ‘깊은’입니다. “캔 것이니”는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캤으니”로 손볼 만합니다. ‘당당(堂堂)하게’는 ‘다부지게’나 ‘야무지게’로 손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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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089) 정하다定 12
이처럼 지켜야 할 몇 가지 약속이 있지만, 그밖에 하고 싶은 것들은 아이들 스스로 정합니다 … 마음에 드는 재료를 모으고 뭘 만들지 정하렴
《이마이즈미 미네코,안네테 마이자/은미경 옮김-숲에서 크는 아이들》(파란자전거,2007) 53, 83쪽
아이들 스스로 정합니다
→ 아이들 스스로 생각합니다
→ 아이들 스스로 다짐합니다
→ 아이들 스스로 세웁니다
→ 아이들 스스로 찾습니다
→ 아이들 스스로 고릅니다
뭘 만들지 정하렴
→ 뭘 만들지 생각하렴
→ 뭘 만들지 헤아리렴
…
아이는 누구나 놀거리를 제 힘과 머리와 손과 몸으로 찾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지 않고 손수 찾습니다. 놀이뿐 아니라 일과 공부도 아이가 얼마든지 스스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른은 곁에서 아이를 따사로이 이끌면 됩니다. 아이가 스스로 힘을 북돋아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듯이, 모든 놀이와 일과 공부를 아이가 스스로 찾도록 이끌어야, 이 아이는 나중에 씩씩하게 설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합니다. 스스로 찾습니다. 스스로 헤아리고, 스스로 고릅니다. 알맞게 쓸 말을 스스로 생각합니다. 아름답게 나눌 말을 스스로 찾습니다. 사랑스레 주고받을 말을 스스로 헤아립니다. 4341.4.17.나무/4348.1.1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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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지켜야 할 몇 가지가 있지만, 그밖에 하고 싶은 것은 아이들 스스로 생각합니다 … 마음에 드는 것을 모으고 뭘 만들지 생각하렴
“몇 가지의 약속”이 아니라 “몇 가지 약속”으로 적으니 반갑습니다.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 주면, ‘약속(約束)’도 ‘다짐’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재료(材料)’는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것’으로 손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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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107) 정하다定 13
부모가 정해 준 여자와 마지못해 사는 처지에서 볼 때,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엔도오 슈우사쿠/윤현 옮김-예수 지하철을 타다》(세광공사,1981) 6쪽
부모가 정해 준 여자
→ 어버이가 고른 여자
→ 어버이가 알아본 여자
→ 어버이가 맞선을 보게 한 여자
→ 어버이가 선을 보인 여자
…
함께 살아갈 짝을 스스로 고를 수 있고, 누군가 골라서 맺어 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만나고 어울리면서 함께 걸어갈 테지요. 첫눈에 반하든, 마음에 깊이 닿든, 제 꿈에 걸맞다 싶은 사람이라고 느끼든, 고이 여기며 살아갈 때에 즐거우리라 봅니다. 4341.5.13.불/4348.1.1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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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가 고른 여자와 마지못해 사는 내 삶을 볼 때,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부모(父母)’라는 낱말은 딱히 한자말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 낱말은 한자로 어떻게 적는지 밝히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밝힐 까닭이 없다고 느낍니다. 다만, 우리가 5월 8일을 ‘부모날’이 아닌 ‘어버이날’이라고 하듯이, ‘어버이’라는 말 쓰임새를 더 넓힐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마지못해 사는 처지(處地)”는 “마지못해 사는 내 삶”이나 “마지못해 사는 내 모습”으로 손봅니다.
(최종규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