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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이름 한 글자 ㅣ 창비아동문고 139
김은영 지음 / 창비 / 1994년 12월
평점 :
시를 사랑하는 시 44
똥 누며 보는 나무
― 빼앗긴 이름 한 글자
김은영 글
남궁산 그림
창비 펴냄, 1994.12.15.
시골집에서 똥을 누러 갈 적에는 늘 나무를 봅니다. 뒷간 문을 열면 마당에 선 후박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후박나무 가지 사이로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볼 수 있고,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구름을 볼 수 있습니다.
박새나 참새 같은 작은 새가 찾아와서 노래합니다. 직박구리나 까마귀처럼 커다란 새가 찾아와서 노래합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나비가 팔랑거리면서 춤사위를 보여줍니다. 오늘은 십일월 이십일일인데, 갓 깨어난 나비 한 마리가 예쁘게 춤을 추면서 우리 집 마당에서 날아다닙니다. 어쩜 이 겨울 문턱에 깨어나느냐 싶지만, 이 겨울 문턱에도 들을 가만히 살피면, 봄까지꽃이랑 별꽃이랑 코딱지나물꽃이 핍니다. 때이른 냉이꽃이 피고 갓꽃이나 유채꽃이 핀 곳이 있습니다.
날이 폭하거나 볕이 좋으면 꽃과 나비는 슬그머니 깨어나 눈부신 몸짓으로 고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변소 갈 때마다 / 보는 꽃 // 우물 갈 때마다 / 보는 꽃 .. (호박꽃)
낮에는 볕이 포근하지만 아침저녁에는 바람이 찹니다. 날씨가 크게 바뀌는 흐름입니다. 엊그제까지도 쑥쑥 올라오는가 싶던 모시풀은 이제 크게 꺾입니다. 어제그제 사이에 우리 집 모시풀은 모조리 고개를 폭 꺾습니다. 끝없이 넝쿨을 뻗던 호박도 이제 잎이 모두 시듭니다. 이와 달리 한겨울에도 푸른 잎사귀를 선보이는 유채와 갓은 새 잎이 돋으며 싱그럽습니다. 마을밭에는 배추가 알이 야무지고 넓적한 잎사귀는 소담스럽습니다.
내가 지내는 시골이 전라남도 바닷가 가까운 데가 아닌 충청북도나 강원도 멧골이라면 이 같은 모습을 볼 수 없으리라 느낍니다. 충청북도나 강원도 멧골은 요즈음 얼마나 추울까요. 벌써 꽁꽁 얼어붙을 테지요.
강원도 위쪽 평안도나 함경도도 몹시 추우리라 생각해요. 평안도와 함경도 위쪽은 연길은 더욱 추우리라 생각해요. 시베리아는 어떤 추위일까요. 알래스카는 어떤 겨울바람일까요.
.. 뒤뜰에 감꽃처럼 / 텃밭에 깨끛처럼 / 촘촘히 피어나는 / 개구리 울음 소리꽃 .. (시골 밤에 피는 꽃)
도시에서 건물로 일하러 가는 사람은 건물에 있는 뒷간에서 똥오줌을 눕니다. 도시에 있는 건물은 따로 청소지기를 둡니다. 청소지기가 아침저녁으로 변기를 깨끗이 닦지 않으면, 건물 뒷간은 무척 지저분하리라 느껴요.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린 건물이나 도시이기 때문일까요.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왁자하게 모인 건물이나 도시이기 때문일까요.
도시에 짓는 건물은 좁은 땅에 높다라니 올려야 합니다. 땅은 좁은데 사람은 끔찍하도록 많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좁은 땅에 높다라니 건물을 올리는 도시에서는 뒷간을 넉넉하게 쓰지 못합니다. 뒷간을 제법 크게 짓더라도 문을 꼭 닫아야 합니다. 똥을 누면서 나무를 본다든지, 새를 만난다든지, 나비와 벌을 사귄다든지, 꽃내음이나 풀내음을 맡을 일이 없습니다.
.. 내가 웃으면 / 아가도 웃어요 // 내가 울면 / 아가도 따라 울어요 .. (아가)
언제나 풀밭에 둘러싸인 사람은 풀내음을 맡으면서 풀노래를 부릅니다. 언제나 숲에 깃드는 사람은 숲내음을 맡으면서 숲노래를 부릅니다. 자동차물결에 휩쓸리는 사람은 수많은 자동차를 살피면서 다치지 않으려고 걱정해야 합니다. 자동차물결을 살피느라 하늘을 올려다볼 겨를이 없고, 새나 풀벌레나 개구리를 살필 틈이 없습니다. 아니, 이웃이나 동무를 쳐다볼 겨를이 없고, 나 스스로 되돌아볼 틈조차 없습니다.
.. 마루 기둥 빨랫줄에 앉은 / 어미 제비 한 쌍 / 장대비 속을 뚫고 / 쏜살같이 날아갑니다 .. (어미 제비)
김은영 님이 쓴 동시를 엮은 《빼앗긴 이름 한 글자》(창비,1994)를 읽습니다. 조그마한 학교에서 이쁜 아이들과 어우러지는 삶을 누리면서, 김은영 님 어린 나날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담은 동시라고 합니다. 제비를 동무로 삼고, 밭자락을 놀이터로 삼은 이녁 어린 나날을 그린 동시라고 합니다.
.. 말하기 시간에 / 공부 못 하는 우식이가 / 얼굴 붉힌 채 서 있다가 / 선생님이 다그치자 / 겨우 말했다 // 농사 지을래요 .. (우식이)
오늘날 초등학생 가운데 ‘나는 앞으로 농사꾼이 될래요’ 하고 말하는 어린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1%조차 아닌 0.1%조차 아닌 0.01%조차 아닌, 아니 숫자로 따질 수 없을 만하겠지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가운데 ‘내 꿈은 농사꾼이에요’ 하고 말할 푸름이는 아마 없으리라 느껴요. 대학생 가운데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흙을 일구겠습니다’ 하고 다부지게 외치는 젊은이는 있기나 있을까요.
제도권 입시지옥 학교에서도 농사꾼이 되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안학교에서도 농사꾼이 되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스스로 삶을 짓고 생각을 지으며 사랑을 짓는 길을 밝히거나 보여주지 못하기 일쑤예요.
.. 오시려거든 / 네 바퀴로 빵빵거리며 / 논둑 길 내달려 오지 말고 / 맨발 맨손으로 / 살포시 흙을 밟고 오세요 .. (흙을 밟고 오세요)
흙을 만지는 까닭은 삶을 손수 짓고 싶기 때문입니다. 흙을 가꾸는 까닭은 삶을 이루는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짓고 싶기 때문입니다. 흙을 사랑하는 까닭은 내 넋이 깃든 몸뚱이가 튼튼하게 서서 이 땅에서 아름답게 춤추도록 북돋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흙을 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도시와 시골 모두 흙땅이 있고, 이 흙땅에서 풀과 나무가 자라야 하며, 풀과 나무가 자라는 곳에 집을 예쁘게 지어 마을을 알뜰살뜰 이루어야 사랑스럽습니다.
.. 똥 누고 나오면서 / 달을 보아요 .. (어디에서 달을 보나요)
초승달이 이쁘장합니다. 반달이 아름답습니다. 보름달이 넉넉합니다. 달빛은 별빛을 가리지 않습니다. 달빛이 어우러지는 밤하늘이 초롱초롱 눈부십니다. 우리는 온누리 수많은 별 가운데 지구별에서 함께 삽니다. 서로 아끼고 좋아하는 사이입니다. 서로 돌보고 믿는 사이입니다.
마음에서 자라는 꿈으로 씨앗을 심어요. 흙을 포근히 어루만지면서 씨앗을 심어요. 교과서나 문제집이 아니라 ‘참답고 슬기로운 책’을 아이와 함께 읽어요. 그리고, 우리 모두 시를 써요. 문학 전문가만 쓰는 시가 아니라, 우리가 손수 삶을 짓는 나날을 고스란히 담아서 이웃과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써요. 4347.11.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1121/pimg_705175124110280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