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전라도닷컴> 2014년 11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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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도서관 풀내음

― 집에서 먹는 무화과



  시골과 도시는 어떻게 다를까 하고 가만히 헤아립니다. 나와 곁님은 도시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지냅니다. 첫째 아이는 도시에서 태어나 네 살 적부터 시골에서 살고, 둘째 아이는 시골에서 태어났으며, 셋째 아이는 이듬해에 시골에서 태어납니다. 나와 곁님은 도시에서 살던 지난날을 그릴 수 있을 테지만, 우리 집 아이들은 도시살이를 그리기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첫째 아이만 하더라도 도시에서 태어나 지낸 이야기를 얼마 못 떠올립니다.


  시골에서는 한 해 두 해 흐르는 결을 날마다 새롭게 느낍니다. 마당에서 자라는 나무를 느끼고, 밭자락에서 돋는 풀(나물)을 새롭게 만나며, 해마다 봄에 찾아오는 제비를 새삼스레 마주합니다. 해마다 똑같은 씨앗을 논밭에 심더라도 해마다 다른 기운을 느껴요. 철마다 다른 기운을 느끼고, 달마다 다른 기운을 느껴요.


  도시에서는 한집에서 열 해나 스무 해를 살기에 만만하지 않습니다. 삯을 치르며 지내는 집이라면, 다달이 치를 삯이나 해마다 오르는 전세에 살림이 기우뚱합니다. 도시에서는 한집에서 다섯 해나 열 해나 스무 해를 살더라도 ‘달라지는 결이나 흐름’을 잡아채기 어려워요. 한집에서 서른 해나 마흔 해를 살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지만, 도시에서 이쯤 살면 재개발 소리가 튀어나오면서 집이고 나무이고 몽땅 갈아엎습니다. 이른바 ‘고향’을 누릴 수 없는 도시입니다.


  고향이 없는 도시와 고향이 있는 시골은 무엇이 다를까요. 무엇보다 삶이 다릅니다. 고향이 있는 시골이란, 언제나 아늑한 보금자리입니다. 고향이 없는 도시란, 언제 어디로 떠나거나 옮겨야 할는지 까마득한 나그네입니다. 도시에서는 늘 ‘새로운 집으로 옮긴다’고 말하지만, 새로운 집이란 도시에 없어요. 모두 똑같은 집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건물 모양새로는 새로움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낳지 않거나 이야기를 짓는 터전이 아니라면 하나도 새롭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이곳저곳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기에는 좋겠지요. 그런데, 나그네는 먹고 입고 자는 살림을 스스로 건사할 수 없습니다. 이곳저곳 떠돌기 때문입니다. 한집을 아늑한 보금자리로 삼아서 지내는 시골사람은 어느새 ‘토박이’가 됩니다. 토박이는 먹고 입고 자는 살림을 스스로 건사합니다. 토박이는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제 보금자리를 아름답게 일구기 때문에 굳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새로운 이야기를 제 보금자리에서 길어올리고, 언제나 새로운 노래를 제 삶터에서 부릅니다.


  올가을에 우리 집에서 ‘우리 뒤꼍 무화과나무’ 열매를 기쁘게 얻습니다. 무화과나무 곁에 있는 모과나무도 아이들 머리통만 한 굵고 단단한 알을 베풉니다. 차고 매서운 바람이 불기까지 ‘우리 집 무화과’를 즐깁니다. ‘우리 집 감’도 즐깁니다. 아이들을 불러 무화과알을 받거나 모과알을 받거나 감알을 받도록 합니다. 아이들이 키가 더 자라면 손을 뻗어 무화과를 딸 테고, 팔다리에 힘이 붙으면 나무를 타서 감을 따리라 생각해요.


  구월에서 시월로 넘어선 바람은 꽤 선선하고, 시월에서 십일월로 넘어서는 바람은 퍽 쌀쌀한데, 아침에 해가 떠서 한낮이 되면 볕이 퍽 포근합니다. 설렁설렁 겨울이 다가오는구나 싶은 이즈음, 마당과 뒤꼍과 옆밭에 새로운 싹이 오릅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돋는 봄풀이요 봄나물입니다. 봄풀이니까 가을풀도 될는지 모릅니다. 여름이 저물어 겨울이 다가오는 들과 숲은 우리한테 푸른 숨결을 나누어 주고 싶어 가을나물을 베풀는지 모릅니다. 봄까지꽃을 훑고 갈퀴덩굴을 똑똑 따며 민들레잎을 살짝살짝 끊습니다. 보들보들 보드라운 가을풀을 뜯어 비빔밥을 합니다.


  냠냠 맛있게 밥 한 그릇 비운 뒤, 익산에서 조촐히 살림을 가꾸는 문영이 님이 쓴 《내 뜰 가득 숨탄것들》(지식산업사 펴냄,2014)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시골아이였고, 아이들 어머니였다가, 이제 정갈한 살림과 겨레말을 보듬고 싶은 넋을 가꾸는 작은 할머니 문영이 님은 “온누리는 보이지 않는 제 씨앗 사랑으로 꽉 짜여 있어, 그 힘으로 모든 숨탄것들이 살아가지만, 식물이나 동물에게서 애틋한 그 속내가 보일 때, 마음대로 심고 마음대로 쳐대는 사람이란 교만도 고개 숙는다(41쪽).” 같은 이야기를 적습니다. 살림 꾸리던 이야기, 아이들 돌보던 이야기, 밭 가꾸는 이야기, 나물과 꽃이랑 얽힌 이야기를 알뜰살뜰 여밉니다.


  할머니 한 분이 쓴 책은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학자가 들려주는 전문 지식이 아닙니다. 할머니 한 사람이 쓴 책은 할머니 삶입니다. 작가가 들려주는 문학이나 예술이 아닙니다.


  아이들과 들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시골 아이와 시골 어른 마음자리에 들내음이 고루 스밀 수 있기를. 아이들과 들길을 자전거로 달리면서 생각을 기울입니다. 시골내기와 도시내기 마음밭에 들노래가 찬찬히 퍼질 수 있기를. 가을꽃을 똑똑 끊어서 머리에 꽂기도 하고, 두 손에 꽃을 들며 바람을 가르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거듭합니다. 온누리에 고운 이야기꽃이 가득 필 수 있기를.


  슬기로운 할머니는 언제부터 슬기로울까 궁금합니다. 슬기로운 할머니는 아이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물려줄까 궁금합니다. 나는 머잖아 할아버지가 되어 우리 아이들과 새로운 아이들한테 어떤 슬기나 이야기를 물려줄까 하고 곰곰이 헤아립니다.


  아이와 함께 나무를 심는 사람이 어버이일까요. 아이와 함께 씨앗을 심는 사람이 어버이일까요. 아이와 함께 보금자리를 가꾸는 사람이 어버이일까요. 그러면, 어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아이와 함께 나무를 노래하고, 아이와 함께 씨앗을 사랑하며, 아이와 함께 숲집을 돌볼 줄 알 때에 어른이 되리라 느낍니다. 어디에서나 누구나 ‘우리 집 나무’와 ‘우리 집 열매’를 누린다면 생각을 아름답게 지어서 하루를 알차게 사랑하리라 봅니다. 4347.10.1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도서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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