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23. 쉽게 쓰는 우리 말글
―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거운 말

 


  이상권 님이 쓴 《이승모 할아버지의 남녘북녘 나비 이야기》(청년사,2003)라는 책을 읽다가 80쪽에서 “북쪽에서는 ‘나비’와 ‘나방’을 ‘낮나비’와 ‘불나비’라고 부른단다. 낮에 날아다니는 나비, 밤에 불을 보고 찾아오는 나비라는 뜻이야.” 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을 봅니다. 조금 더 읽으면 “‘호랑나비’는 북쪽에서는 ‘범나비’라고 불러. 많은 사람들이 ‘범’이 한자고, ‘호랑이’는 한글인 줄 알더구나. 하지만 범이 한글이란다.” 하고 나와요. ‘호랑(虎狼)’은 “범과 늑대”를 뜻해요. 두 가지 숲짐승을 아우르는 한자말이에요. 그러니, ‘호랑이’라는 낱말로 범을 가리키는 일은 그르지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호돌이’를 상징물로 썼는데, 이때에 잘못된 말을 아주 널리 퍼뜨렸어요. ‘호돌이’는 ‘호랑돌이’를 줄인 이름이니까요. 한겨레는 한국말로 ‘범돌이’와 ‘범순이’라 해야 올바릅니다. 나비를 가리키는 이름을 남녘에서는 ‘호랑나비’로 쓴다고 하지만 올바른 이름이 아니니, 하루 빨리 ‘범나비’로 바로잡아야 올발라요.


  그나저나, 북녘에서 ‘낮나비’와 ‘불나비’,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누는 이름이 참으로 알맞아요. 남녘에서 ‘나방’이라 가리키는 벌레는 낮에는 꼼짝않거든요. 밤이 되어 불이 있는 곳에 모여들어요. 아이들한테 벌레를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자리에서도 ‘낮나비·불나비’라 말할 적에 한결 쉽고 알맞게 알아들으리라 느껴요.


  ‘푸르다·파랗다·누렇다·빨갛다’ 같은 빛이름은 모두 시골에서 태어났어요. 우리가 예부터 익히 쓴 한국말 가운데 시골에서 안 태어난 말이란 없지만, 푸르다이건 누렇다이건 시골에서 마주하는 숲과 들에서 얻은 낱말이에요. 풀을 느끼는 빛이라 푸르다요, 하늘과 바다에서 느끼는 빛이라 파랗다이며, 잘 익은 나락에서 느끼는 빛이라 누렇다이면서, 무르익은 열매에서 느끼는 빛이라 빨갛다예요.


  이런 말밑을 살필 줄 안다면, 섣불리 영어로 ‘그린·블루·옐로우·레드’처럼 쓸 때에는 아무런 빛느낌도 삶느낌도 이야기도 담기 어려운 줄 깨달아요. 영어라서 쓰지 말아야 하지 않아요. 우리 삶을 담지 못하니까 우리 말글이 아닙니다. 이런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이들 빛이름에 그 나라 빛과 삶과 이야기를 담겠지만, 우리들 살아가는 한국에서는 영어에 아무런 이야기나 느낌이 없어요.


  어떤 지식인은 ‘똘레랑스’라는 프랑스말을 들여와서 프랑스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마음씨를 말해요. 다른 지식인은 한자말로 ‘관용’을 빌어 이녁 느낌을 말해요. 그러면, 지식인 아닌 여느 한국사람은, 시골사람은, 어린이는, 여느 할매와 할배는, 이 프랑스말과 한자말을 얼마나 잘 헤아릴 만할까요. 왜 지식인들은 ‘너그럽다’나 ‘넉넉하다’라는 한국말을 안 쓸까요.


  영국에서는 ‘영어 쉽게 쓰기’를 한다고 해요. 우리도 ‘한국말 쉽게 쓰기’를 하자는 움직임이 있어요. 그렇지만, 막상 한국말을 쉽게 쓰려는 사람은 드물어요. 어려운 말과 딱딱한 말을 함부로 써요. 신문도 방송도 교과서도 쉬운 말로 엮지 않아요. 초·중·고등학생이 보는 교과서에도 여느 어른들이 보는 신문에서 쓰는 말이 그대로 나와요. 초·중·고등학생 눈높이를 헤아리지 않아요.


  김남일 님이 쓴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사계절,2002)이라는 책 70쪽을 보면, “다른 많은 학생들과 함께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숭실중학교를 자퇴한 문익환과 윤동주는”이라는 대목이 있어요. 한쪽에서는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라 적지만, 다른 곳에서는 ‘자퇴’라 적어요. 한쪽은 한국말이고 다른 한쪽은 한자말이에요.


  이와 비슷한 얼거리로, ‘쉬다·휴식’을 섞어 쓰는 어른이에요. ‘밥·식사’를 섞어 쓰고, ‘학교 가다·등교하다’를 섞어 쓰며, ‘가르치다·교육하다’를 섞어 써요. ‘어버이’라는 한국말 있지만 으레 ‘부모’라는 한자말을 써 버릇하는 어른이요, ‘생일잔치’ 아닌 ‘생일파티’라는 말을 쉬 쓰는 어른입니다.


  어른들부터 말버릇이 올바르지 않다면 아이들도 말버릇이 올바를 수 없어요.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말을 듣고 배우니까요. 어른들부터 말버릇을 슬기롭게 가다듬어야 비로소 아이들이 슬기로운 말을 들으면서 아름답게 말을 하고 글을 써요.


  우리 말글을 쉽게 쓰는 길은 따로 없어요. 쉽거나 어려운 말이란 따로 없어요. 나라마다 다른 말이 있고, 겨레마다 다른 말이 있어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안 쓰니까 어렵고, 한국사람이 중국 한자말이나 일본 한자말이나 미국 영어를 아무렇게나 아무 곳에 쓰니까 까다롭습니다. 곧, 한국사람이 한국에서 이웃과 동무를 사랑스레 사귀면서 즐겁게 나누는 말이 되어야 비로소 쉬운 말이 되고, 고운 말이 되며, 착하며 참된 말이 돼요.


  눈높이를 살필 노릇입니다. 내 말을 듣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살필 노릇입니다. 일곱 살 어린이 앞에서 어떤 낱말을 고르고 어떤 말투와 말씨로 이야기를 들려줄는지 살필 노릇입니다. 열일곱 살 푸름이 앞에서 어떤 낱말을 가리고 어떤 말투와 말씨로 삶을 노래할 때에 서로 아름답고 즐거운가 하고 생각할 노릇입니다.


  이것저것 많이 배운 내 눈높이가 아니라,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살아가는 할매와 할배 눈높이를 돌아보면서 말을 할 때에 가장 쉬우면서 바르고 예쁜 말이 태어납니다. 책에서 읽어 얻은 글이 아니라,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일하는 이웃들 삶을 헤아리면서 글을 쓸 적에 가장 고우면서 즐겁고 사랑스러운 글이 자랍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거운 말입니다. 서로 마음을 맞추고, 서로 마음을 아끼면서 사랑스러운 말입니다. 서로 보듬는 넋이 될 때에 고운 말입니다.


  해를 바라보기에 ‘해바라기’이듯, 하늘을 바라보기에 ‘하늘바라기’이고, 별을 바라보며 ‘별바라기’, 달을 바라보며 ‘달바라기’ 돼요. 대학교를 바라본다면 ‘대학바라기’ 될 텐데, 예쁘며 맑은 빛 감도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는 푸름이들 누구나 꿈바라기·사랑바라기·빛바라기·꽃바라기·나무바라기·바다바라기 같은 마음 일구기를 빌어요. 서울바라기나 도시바라기 말고 시골바라기와 숲바라기를 할 수 있으면 아주 반갑습니다. 4346.12.1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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