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되는 글을 쓰려면

 


  어느 글이든 문학이 된다. 스스로 문학이라 이름표를 붙여도 문학이고, 출판사에서 문학이라 책갈래를 나누어 주어도 문학이다. 평론가가 문학이라고 추천하거나 칭찬해 주어도 문학이 되며, 사람들이 문학으로 받아들여 사랑해 주어도 문학이 된다. 그러면, 참말 문학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문학이라는 이름에 앞서, 문학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을 텐데, 이 낱말을 쓰기 앞서 우리 옛사람은 어떤 이름으로 문학을 누렸을까.


  오늘날에는 종이에 적거나 책으로 묶거나 인터넷에 내놓는 글이 되어야 비로소 문학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옛날에는 두 가지 문학이 있었다. 하나는 여느 시골사람이 누리는 문학인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자와 지식인이 중국글인 한자로 써서 누리는 문학인 ‘한문’이다.


  오늘날에는 이야기와 한문이 섞여 ‘문학’이 되는구나 하고 느끼지만, 이 가운데 이야기는 힘이 옅거나 적다고 본다. 문학을 하려는 분들 흐름과 삶자락과 매무새를 살피면, 지난날 권력자와 지식인이 중국글인 한자로 써서 누리던 문학 모습하고 훨씬 가깝다. 시골사람이 삶과 몸과 마음으로 나누면서 아이들한테 물려주던 이야기와 같은 문학을 하는 이는 몹시 드물다.


  풀을 뽑거나 밥을 지으면서도 노래를 불렀고, 아기를 재우거나 방아를 찧으면서도 노래를 불렀다. 길쌈을 하거나 두레를 하면서도 노래를 불렀으며, 울력을 하거나 고기를 낚으면서도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언제나 이야기였고, 이야기는 늘 노래와 같이 들려주었다. 어떤 틀을 따로 갖추지 않지만, 부러 틀을 맞추어 즐기기도 한다. 예부터 시골사람이 스스로 빚어서 나누던 이야기는 나이나 학력을 따지지 않았다. 어린이도 즐기고 할매와 할배도 즐긴다. 시골사람 가운데 한문을 익히는 사람은 없으니, 골아프게 어려운 말이나 바깥말인 한문을 노래나 이야기에 섞지 않는다. 흙을 만지며 살아가는 사람들 살갑고 사랑스러운 말로만 이야기와 노래를 빚는다.


  무엇보다 시골사람 이야기에는 삶과 사랑과 꿈 세 가지가 밑바탕을 이룬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짚거나 건드리더라도 웃음과 눈물로 슬기롭게 풀어낸다. 살살 어루만지면서 저마다 아름답고 즐겁게 살아가는 길을 찾는다. 씩씩하고 야무지게 살아가자는 마음을 노래와 이야기에 담는다.


  이와 달리 권력자와 지식인이 누리던 문학인 한문은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을 찾지 않는다. 멋을 부리고 맛을 찾는다. 어딘가 남다른 줄거리를 생각하려 들고, 몸소 겪지 않은 일을 머리로 지어낸다. 권력자와 지식인이 누리던 문학인 한문은 삶이나 사랑이나 꿈이 밑바탕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흙을 안 만지고, 스스로 옷이나 밥이나 집을 짓지 않던 권력자와 지식인인 만큼, 살아가는 이야기가 한문에 깃들지 못한다. 사랑하는 이야기도, 꿈꾸는 이야기도 한문에는 담기지 못한다. 권력자 언저리에서 맴도는 정치 문제를 다루는 한문이다. 권력자가 저지르는 몹쓸 짓 때문에 시골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옆에서 멀거니 구경하다가 가끔 이 모습을 한문으로 담곤 하지만, 정작 스스로 삶을 고치거나 움직여 시골사람하고 어깨동무하지는 않는다. 서로 계급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문학을 살피면, 지난날 ‘중국글자인 한자로 한문을 누리던 권력자와 지식인’이 문학을 하던 모습하고 사뭇 닮는다. 어떤 문제를 알아채거나 짚거나 다루거나 건드릴 줄 안다. 그렇지만, 문학하는 사람 스스로 어떤 문제를 삶으로 받아들이거나 껴안지는 않는다. 문제를 비평한다든지 따진다든지 나무란다든지 차근차근 보여준다든지, 이런 일은 잘 한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사랑으로 녹이거나 삶으로 풀거나 꿈으로 어루만지면서, 서로 어깨동무할 수 있는 빛을 들려주지는 못한다.


  문학으로 다루는 글감이 ‘어둡다’고 하기에, 문학이 어둡지 않다. 글감은 무엇으로 삼든 대수롭지 않다. 글감을 마주하는 매무새와 글감을 바라보는 삶자락에 따라 문학이 달라진다.


  시집살이를 하면서 옛날 시골사람이 부른 노래에는 눈물이 가득하지만, 오롯이 이야기가 되어 아름다운 빛을 드리운다. 스스로 살아가고, 힘껏 살아내는 착한 꿈이 감돈다. 모내기를 하면서, 가을걷이를 하면서, 피사리를 하면서, 등짐을 지면서, 짚신을 삼으면서, 섬과 둥구미와 바구니를 짜면서, 절구를 빻고 키룰 까부르면서, 콩과 팥과 깨를 털면서 부르던 노래는 몹시 고단한 삶을 그린다고 할 테지만, 이 노래는 모두 웃고 울면서 부른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삶을 한껏 아름답게 가다듬는다.


  문제를 다루느냐 안 다루느냐에 따라 문학을 바라보면 문학하는 빛을 누리지 못하리라 느낀다. 문제를 짚는 매무새가 어떠한가를 볼 줄 알아야지 싶다. 우리들이 저마다 어떤 보금자리를 이루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사랑하느냐를 그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오롯한 문학이 된다고 느낀다. 지난날 시골사람이 즐기고 누리며 나누던 ‘이야기’는 오롯이 문학이다.


  우리가 스스로 즐겁게 살아갈 길을 밝힐 적에 비로소 문학이다. 우리가 저마다 참답고 착하게 사랑할 길을 환하게 보여줄 적에 바야흐로 문학이다. 문학은 투정이 아니다. 문학은 헐뜯기나 비아냥이 아니다. 문학은 구경꾼이나 나그네 눈길로는 그리지 못한다. 문학은 오직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랑’으로 ‘꿈’을 꾸는 빛으로 엮을 적에 시나브로  태어난다.


  밑바탕을 건드리기에 문학이다. 시골사람 수수한 말로 하자면, 문학이란 모두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언제나 ‘노래’로 부른다. 그러니까, 문학을 쓰는 매무새, 글쓰기란, 노래와 같이 쓸 때에 이야기가 된다는 소리요, 노래가 되도록 써야 비로소 ‘글’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오늘날 이 나라 문학 가운데 이야기가 되거나 노래가 되는 작품은 얼마나 있을까. 어른문학이나 어린이문학 가운데 참말 문학이라 할 만한 작품은, 그러니까 이야기나 노래가 될 만한 작품은 몇 가지나 있을까. 4346.12.3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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