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스무 해 만에

 


  1995년에 처음 알고 지낸 벗님이 있다. 이 벗님을 언제까지 얼굴을 보았는지 잘 떠오르지 않지만, ㄱ대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는 벗님을 만나려고 이문동에 있는 신문사지국에서 짐자전거를 타고 달리거나 천천히 걸어서 찾아가곤 했다. ㄱ대학교 앞에 있던 헌책방 ㅅ에서 《삶과 믿음의 교실》이라는 책 첫쇄를 보고는 이 책을 벗님한테 건네기도 했다. 나는 이 책을 일찌감치 읽었기에 벗님도 읽으라고 건넸는데, 이날 헌책방 ㅅ에서 만난 《삶과 믿음의 교실》에는 이오덕 님이 누군가한테 선물한 자국이 있었다. 이오덕 님 손글씨를 보고는 내가 이 책을 가졌으면 하고 아주 살짝 생각했으나, 머잖아 다른 데에서 또 보겠지 하고 느꼈다.


  ㄱ대학교 사범대학 다니는 벗은 교사가 되겠다고 했다. 이무렵 나도 대학생이기는 했으나, 내가 다니던 대학교와 학과에서는 학문을 제대로 안 가르쳤다. 베껴쓰기 숙제와 줄서기 학점과 훔쳐보기 시험이 판쳤다. 진절머리나는 모습을 보며 대학교를 더 못 다니겠다고, 아니면 다른 학교나 학과로 옮겨야겠다고 한창 골이 아프던 때에, 아이들한테 빛과 꿈이 되는 길을 걷겠다고 다부지게 말하는 벗님이 참 멋스럽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와 학과와 동아리에서는 ‘함께 책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학교도서관에서든, 학교 앞 인문사회과확책방에서든, 학교 둘레 헌책방에서든, 즐겁게 책을 장만해서 읽고는 서로 마음속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눈빛 밝힐 책벗이 없었다.


  내 대학살이는 2학년 1학기 마치고 군대에 가면서 거의 끝을 맞이한다. 그러나 2학년에 접어든 뒤에는 신문배달을 하며 밥벌이를 하고, 도서관하고 구내서점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느라 후배들 얼굴 볼 겨를을 내지 못했다. 하루가 저물면 다들 술집으로 떠날 뿐, 같이 책방마실을 할 벗은 없었다. 군대에서 스물여섯 달 보내고 대학교로 돌아와서도 달라지는 일은 없다. 내 나이가 늘고, 복학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벗이나 책방마실 다닐 벗은 없다. 후배들은 한 번쯤 나한테 붙들려 책방마실을 억지로 끌려오기는 하지만, 두 번이나 세 번 붙들리지는 않는다. 술집이나 당구장으로 데려가는 선배를 좋아할 뿐이다.


  이런 곳에서는 견딜 수 없어 대자보를 여러 장 써서 게시판에 붙인 뒤 자퇴를 했다. 내가 쓴 대자보는 한나절이 못 되어 누군가 북북 찢어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럴 만도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이야기조차 나눌 수 없네 하고 느끼니 외려 후련하기도 했다. 자퇴를 하겠다는 나를 두고 하나같이 ‘취업’을 걱정해 주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한다. 그래, 우리는 서로 길이 다르고 삶이 다른데, 어쩌다가 한울타리에 있었을 뿐이야.


  내 길을 찾아 신문배달 자전거를 달리다가, 책마을에 깃들었고, 책마을에서도 슬픈 모습을 많이 겪으며, 또 혼자 동떨어져 지낸다. 이동안 가끔 ㄱ대학교 다니던 벗님이 떠올랐지만, 연락처를 알 길이 없었다. 어디에선가 잘 지내며 아이들 예쁘게 가르치는 길을 걷겠지 하고 생각했다. 이러구러 삶이 흐르고 흘러 2013년 12월 1일, ‘그림책 읽는 엄마’ 누리모임에서 오랜 벗님을 다시 만난다. 두 아이 어머니요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일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도 두 아이 아버지요 새로운 한국말사전 엮는 일을 하니까, 이녁이나 나나 이럭저럭 대견한 나날 누리는 셈일까.


  거의 스무 해쯤 다리를 건너며 만난 벗한테 책꾸러미를 보낸다. 스무 해쯤? 글쎄, 스무 해라 해 보았자 스무 해뿐이리라 느낀다. 서른 해 지나서 마주쳤든, 마흔 해 지나서 만났든, 대수롭지 않다고 느낀다.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면서 누린다면, 언제 보아도 푸른 넋과 빛으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고 느낀다.


  누구나 예나 이제나 같다. 겉모습이 바뀌고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기는 하지만, 누구나 예나 이제나 같다. 갓 태어나 앳되며 사랑스러운 하느님 같은 모습인 채 스무 살이 되고 마흔 살이 되며 예순 살 여든 살이 된다. 벗이 ㄱ대학교 언저리, 또는 서울에서 지낸다면 보문동 막걸리를 한잔 얻어마시고 싶지만, 수원에서 지낸다 하니 수원 나들이를 하면서 남문 둘레 책방마실도 할 수 있기를 손꼽아 본다. 4346.12.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헌책방과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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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2-03 10:57   좋아요 0 | URL
참으로 기쁘고 반가우셨겠어요~!^^
스무 해 전에, 반갑고 기쁜 '좋은 씨앗'을 마음에 품으셨던 분들이
다시금 서로서로 대견한 나날을 누리시다 만나셨군요~*^^*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면서 누린다면, 언제 보아도 푸른 넋과 빛으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고 느낀다.'-

마지막글에 '누구나~여든 살이 된다' 귀절이 뭉클합니다.
언제 보문동 막걸리,도 마시고 싶구요~^^;;;

언제나 삶으로 쓰시는 마음의 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숲노래 2013-12-04 07:13   좋아요 0 | URL
이렇게 즐겁게 읽어 주시는 이웃님 있으니
저도 늘 새롭게 기운을 내요~

transient-guest 2013-12-04 03:32   좋아요 0 | URL
젊은 나이에 또래와는 다르게 좀더 깊은 실존적인 고민을 하신 것 같아요. 같은 것을 나누고 즐길 수 있는 벗은 흔하지 않지요. 아주 친한 친구가 몇 있지만, 저도 책사랑은 함께 나누지 못해요.ㅎ

숲노래 2013-12-04 07:13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책사랑 나눌 수 있는 벗이란
아주 대단하며 아름다운 삶지기이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