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247
박형준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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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장난
[시를 말하는 시 40] 박형준, 《춤》

 


― 춤
 박형준 글
 창비 펴냄, 2005.5.20.

 


  시골길 달리는 군내버스는 거침없습니다. 시골길에서 군내버스 앞을 막는 자동차는 없습니다. 신호등 없고 자동차 없어 군내버스는 쉬잖고 달립니다. 한낮이나 저녁이면 군내버스에 타는 시골사람조차 없어 군내버스는 손님 하나 없이 빈털털이로 싱싱 달리기도 합니다.


  시골마을 벗어나 도시로 달리는 시외버스는 고속도로에서 거침없습니다. 그러나 도시 어귀부터 차츰 느리게 달리고, 도시 한복판으로 접어들면 기어갑니다. 수많은 신호등에 걸립니다. 다른 자동차에 밀립니다. 고속도로에서 펄펄 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 밥 짓는 연기여 / 살 타는 냄새가 난다 ..  (저녁 꽃밭)


  시골에는 신호등이 있을 일이 없습니다. 시골에는 건널목이 있을 일이 없습니다. 시골에도 자동차 흐르지만, 신호등을 놓아 자동차를 세워야 할 일이 없습니다. 시골에도 자동차 오가지만, 자동차가 멈추기를 기다려 길을 가로질러야 하지 않습니다.


  두 줄로 난 찻길로도 넉넉한 시골입니다. 두 줄 아닌 한 줄만 있어도 한갓진 시골입니다. 이와 달리, 도시에서는 넉 줄로도 모자라고 여덟 줄로도 빠듯합니다. 열두 줄이 되거나 열여섯 줄이 되더라도 밀리고 또 밀립니다.


  이 많은 자동차는 모두 어디에서 터져나왔을까요. 이 많은 자동차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자동차는 사람들 삶에 얼마나 이바지를 할까요. 자동차가 없는 삶은 생각해 볼 수조차 없는가요.


  자동차가 달리지 않는 조용한 시골길에서 들내음을 맡습니다. 들풀을 바라봅니다. 들꽃을 쓰다듬습니다. 들바람을 마시고 들빛을 품에 안습니다.


  자동차가 달리는 시끄러운 도시 찻길에서 배기가스를 맡습니다. 부웅부웅 갑자기 내 앞과 뒤를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넋을 잃습니다. 오토바이가 지나가면 자전거가 뒤따릅니다. 이내 뒤에서 다른 자동차가 빵빵거립니다. 사람들은 자동차 얼른 지나가라고 길 한쪽에 붙습니다. 사람들은 자동차 먼저 지나가라며 걸음을 멈춥니다.


  자동차는 사람들 지나가라고 스스로 멈추는 일이 없습니다. 자동차는 사람들이 길 한복판을 걷도록 하지 않습니다. 자동차에 탄 사람들은 앞만 바라봅니다. 자동차에서는 옆도 뒤도 바라볼 수 없으며, 자동차에서는 하늘도 땅도 쳐다보지 못합니다.


.. 창호지에 바른 국화, / 그늘과 빛이 드나드는 종이 속에 / 덧댄 작은 유리, 말없이 바스러지는 生, / 마당의 해당화와 길과 윗집 / 대나무 꼭대기에서 기우는 햇살 ..  (생일)


  어른들은 자동차 모양을 한 장난감을 만듭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장난감 자동차를 선물합니다. 아이들은 장난감 자동차를 갖고 놉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모는 자동차에 타며 신나게 뛰고 까르르 웃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자동차를 보여주고, 자동차를 물려줍니다.


  아이들은 어릴 적에는 자동차에 얻어타면서 웃고 떠들고 놀았지만,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자동차 손잡이를 손에 쥐는 나이에 이르면, 얼굴에 웃음이 가시고 입에서 노래가 사라집니다. 자동차 손잡이를 손에 쥔 어른 가운데 맑게 웃으며 느긋하게 길을 달리는 사람 드뭅니다. 자동차 손잡이를 꽉 움켜쥔 어른 가운데 환하게 노래하며 즐겁게 천천히 길을 달리는 사람 적습니다.


.. 홍은동 295번지와 연희동의 교차로 한 귀퉁이의 연희지하차도 위는 풀밭으로 되어 있다 풀밭 다리를 건너면 아파트가 보이고, 다리 아래 굴로 차들이 빠르게 빠져나가지만, 여기서는 시간이 방아깨비 발처럼 끄덕끄덕 제자리를 맴돌 뿐 흘러가지 않는다 ..  (구관조)


  박형준 님 시집 《춤》(창비,2005)을 읽습니다. 춤을 추는 삶이기에 춤을 노래하는 시를 쓰셨나 하고 고개를 갸웃해 봅니다. 춤을 추고픈 삶이기에 춤을 이야기하려는 시를 썼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춤은 어디에서 출 수 있을까요. 술병이 뒹구는 어두운 무대에서 춤을 추는가요. 커다랗게 지은 공연장이나 경기장 무대에서 춤을 추는가요. 텔레비전에 내보내려고 촬영기 그득 세운 방송국 무대에서 춤을 추는가요.


  춤은 왜 추는가요. 남한테 보여주려고 춤을 추는가요. 돈을 벌려고 춤을 추는가요. 예술이 되거나 문화가 되려고 춤을 추는가요.


  춤이란 무엇인가요. 춤은 누가 만들었는가요. 춤은 언제 추는가요. 춤은 누가 어디에서 누구하고 추는가요.


.. 한밤에 쌀 씻으러 / 포대를 열자 / 나방이 날아오른다 ..  (나방)


  먼먼 옛날부터 밥을 짓던 사람들이 노래하던 사람들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아기한테 젖을 물리던 사람들이 춤추던 사람들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흙을 만지며 씨앗을 심던 사람들이 노래를 짓고 춤을 빚던 사람들입니다.


  흙을 노래하고 춤으로 기쁨을 나타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을 노래하고 춤으로 사랑을 그렸습니다. 비와 바람과 꽃과 나무를 노래하고 춤으로 삶을 기렸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춤은 그저 무대에서만 춤이 됩니다. 아이들한테 춤을 보여주는 어른은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춤을 물려주는 어른은 없습니다. 몇몇 인간문화재가 추는 춤은 있으나, 몇몇 전수자가 배우는 춤은 있으나, 고장마다 다르고 고을마다 다르며 마을마다 다른 춤은 없습니다. 집집마다 다르며, 어른마다 달리 추던 춤은 없습니다.


.. 어머니는 이제 팔순이 되셨다 / 어느날 새벽에 소녀처럼 들떠서 전화를 하셨다 / 사흘이 지나 활짝 핀 해당화 옆에서 / 웃고 있는 어머니 사진이 도착했다 ..  (멍)


  춤이 없는 삶이란 장난스러운 삶입니다. 노래가 없는 삶이란 장난스러운 사랑입니다. 이야기가 없는 삶이란 장난스러운 빛입니다.


  스스로 우러나와 춤을 추고, 스스로 샘솟아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피어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춤꾼한테서 배우는 춤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면서 흐르는 춤입니다. 노래꾼한테서 배우는 노래가 아니라, 스스로 사랑하면서 흐르는 노래입니다. 이야기꾼한테서 배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 꿈꾸면서 흐르는 이야기입니다.


  이 나라에는 어떤 춤이 있을까요. 이 나라에는 어떤 노래가, 어떤 이야기가, 어떤 시가, 어떤 문학이, 어떤 책이 있을까요. 4346.11.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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