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서 흐르는 물
나는 글을 아무 때나 쓰지 못한다. 나는 글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그러나 글이 나오려고 하면 멈추지 않는다. 옆지기와 아이들한테 미안한 줄 알면서, 마음속에서 글이 솟구칠 때에는 아무 소리도 아무 말도 아무 모습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저 내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아 옮겨적는 데에 모든 것을 바친다.
돌이켜보면, 나는 눈에서 물이 흐를 적에 글을 쓰는구나 싶다. 나는 눈에서 어떤 빛이 환하게 밝을 적에 글을 쓰는구나 싶다. 물이 흐르거나 빛이 나지 않는다면 애써 글을 쓰지 않는다. 아니, 글을 쓸 수 없다. 물과 빛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글도 샘솟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들 앞에서도 “너무 마땅하지만”이라는 말을 읊는다. 너무 마땅한데, 사람들이 모르니까, 으레 이런 말을 톡 내뱉는다. 이를테면, 이렇다. 사람들한테 널리 알려지기 앞서, 강원도 동강은 아주 맑은 냇물이었다. 이 아주 맑은 냇물이란 누구나 손을 내밀어 떠서 마실 만한 물이었다는 소리이다. 그러나, 오늘날 강원도 동강 냇물이 누구나 손을 내밀어 떠서 마실 만할까?
나는 묻고 싶다. 오늘날 한국에서 손을 내밀어 떠서 마실 만한 물이 흐르는 곳이 얼마나 있느냐고. 그리고, 한국에서 사람들은 어떤 밥과 국과 반찬을 먹느냐고. 손을 내밀어 떠서 마실 수 있는 냇물이 아닌, 손을 내밀지도 않고 떠서 마시지도 않는 수도물로 만든 먹을거리를 그냥 배고프니까 먹지 않느냐고.
아무 책이나 읽는다고 다 책이 아니다. 그저 책을 백 권 천 권 만 권 읽었대서 훌륭하지 않다. 우리 옆지기는 일찍부터 알았을 텐데, 내가 책을 많이 읽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책 많이 읽었다’고 하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나 스스로 다섯손가락으로 꼽는 몇 사람 빼고는 나보다 책 많이 읽은 사람을 못 보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이른바 완독이나 정독이나 숙독을 한 책이 마흔을 한 해 앞둔 오늘에 돌아보아도 십오만 권은 훨씬 넘는다. 아마 이십만 권이 넘을 수 있다. 그냥 읽은 책은 백만 권이 훨씬 넘겠지. 그런데 이런 숫자는 아무것 아니다. 무엇이 대수롭느냐 하면, 책을 읽거나 말거나, 스스로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가다듬으면서 일구느냐 하는 한 가지이다.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은 책을 안 읽어도 된다. 사랑을 꽃피우는 사람은 책이 없어도 된다. 아름다운 꿈을 빚는 사람은 도서관조차 안 가도 좋다.
왜냐하면, ‘책’이란 바로 ‘나무’요 ‘사람’이고 ‘꽃’이자 ‘풀’이다. 종이에 글자를 박은 것을 주워섬긴다고 해서 대단한 것 하나 없다. 시골 할배가 하늘 쳐다보며 날씨를 읽는데, 굳이 텔레비전 켜서 날씨 방송 보아야 하나? 나는 어제 면소재지 하늘에서 ‘올해에 갓 깨어나 처음 날갯짓 익히고 비로소 하늘 나는 기쁨 익히’는 어린 제비무리를 보았는데, 이런 제비를 그림책이나 사진책으로 보아야 ‘제비를 안다’고 하겠는가.
논을 마련해서 벼를 심어 키우는 사람은 “벼 도감”이나 “벼 그림책” 따위를 몰라도 삶을 아름답게 일군다. 곧, 사랑이니 사회이니 사람이니 정치이니 문화이니 예술이니 따위를 읊는 책이 천만 권 억만 권 있건 말건, 스스로 삶을 아름답고 착하고 참다우며 슬기롭게 일구는 사람은 종이책이나 전자책을 한 줄조차 안 읽어도 훌륭하게 삶을 짓는다. 너무 마땅하게도, 책이란, 바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저 아름답게 살아가면 그만이다.
나는 눈에서 물이 흐르거나 얼굴에서 웃음으로 꽃이 필 적에 글을 쓴다. 다른 때에는 글이 안 나온다. 오늘도 아이들과 복닥이면서 눈물샘 촉촉히 젖으면서 글을 쓴다. 아이들아, 고맙구나. 그리고 우리 아이들아, 너희는 네 아버지가 고맙지? 4346.7.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과 헌책방과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