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4년에 썼습니다. 한창 이오덕 선생님 원고와 유고 갈무리하던 어느 날 살짝 숨을 돌리며 썼어요. 이오덕 선생님 유고와 원고보다 '이면지 정갈하게 그러모아서 만든 큰 뭉치'를 찾아내고는, 또 선생님이 쓰던 뒷간에 남은 '신문종이 오려서 만든 똥종이'를 보면서 글 하나 써 두어야겠다 생각했어요.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신문종이 오려서 만든 똥종이'를 사진으로 찍어 놓지 못했군요. 참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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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한 장도 허투로 버리지 않는 마음

 


  이오덕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원고 뭉치를 풀어서 차곡차곡 갈무리합니다. 지난 2003년 9월 30일부터 2004년 3월 19일 오늘까지 모두 살피지 못했으나, 퍽 많이 살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커다란 원고 뭉치는 선생님 서재 곳곳에 수북합니다.


  오늘도 뭉치 둘을 풀어서 글을 하나하나 더듬습니다. 오늘 푼 뭉치에서는 빈 스케치북 세 권, 이면지로 쓰려고 모은 종이 한 묶음 나옵니다. 이면지 한 묶음에는 서류봉투를 가지런히 뒤집어 자른 것, 편지봉투를 펴서 뜯은 것, 초대장 속종이를 떼고 두꺼운 겉종이를 펴 놓은 것, 광고지, 쓸데없는 공문서, 철 지난 서류, 거절한 원고청탁서 ……,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자투리 종이 하나조차 그냥 버리지 않고 쪽글을 적으신 한편 책갈피로도 쓴 자국을 봅니다.


  이오덕 선생님은 코흘리개 아이들이 삐뚤빼뚤 쓴 글 한 조각을 마치 가장 값진 금은보화인 듯 여겨 아주 알뜰히 모으고 간수했습니다. 아마도 그 마음마음이 종이 한 장 함부로 쓰지 않거나 버리지 않는 몸가짐으로 이어지겠지요. 그래서 책 한 권도 애틋하게 여기셨고, 그렇기에 먹물들이 함부로 펴내는 책이나, 돈과 이름을 좇아 쏟아내는 책을 무척 싫어하고 나무라셨지 싶습니다.


  희고 깨끗한 휴지 하나 만들기까지 베어지고 쓰러진 나무가 얼마나 아팠을까 하고 온삶을 걸쳐 느끼셨기에, 똥종이를 쓰실 때에도 다 본 신문종이를 오려서 쓰셨을 테고요. 돌아가시는 날까지 깨끗한 휴지 아닌 신문종이를 오린 작은 종이로 똥종이를 쓰신 이오덕 선생님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래서 어쩌자고? 우리도 그렇게 살란 말이냐?” 하면서 너무 지나치다고 말씀하실 분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들 모두 이렇게 살기는 힘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살려고 하면 살지 못하리란 법은 없어요. 또한 처음에는 어려울지라도 차근차근 하나씩 몸에 붙이고 버릇 들이노라면 쓰레기 하나 만들지 않는 한편, 지나치거나 헤픈 씀씀이도 사라질 겝니다.


  이오덕 선생님은 지나친 아낌쟁이였다기보다는 헤픈 씀씀이를 안 하신 분이라고 보아요. 있는 만큼 쓰고,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면서 스스로 가장 낮고 얕고 가볍게 살았다고도 보아요. 우리는 바로 이 대목, 가장 낮고 얕고 가볍게 살아가려는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보면 좋겠어요. 그래서 모든 모습을 따르자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가 저마다 다 다르게 살아가는 살림살이에 따라 하나씩 몸소 해 보자는 얘기예요. 하나씩 차근차근 씀씀이를 줄이고 마음가짐을 다소곳이 두노라면 우리 스스로도 좋고, 우리 스스로도 좋으면 우리 식구와 우리 이웃도 좋은 한편, 우리 마을과 우리 사회와 우리 나라와 우리 겨레 모두한테도 좋으리라 믿습니다.


  민주, 평화, 통일, 자유, 즐거움, 기쁨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내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아요. 이처럼 우리가 가장 낮고 얕고 작고 여리고 그늘져 보이는 데에서 조촐히 누리고 즐기는 동안 시나브로 얻을 수 있다고 보아요. 우리들이 가장 먼저 맛보고 즐기면 비로소 퍼질 수 있어요. 나락 한 알이 제 몸을 썩혀 싹 틔우는 아픔을 거쳐야 비로소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잎을 내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알곡을 열듯 말입니다.


  후쿠오카 마사노부라는 일본 흙일꾼은 밀알 하나에 우주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강아지가 길가에 눈 똥 하나에서도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에서 가장 낮고 가난하고 힘없고 짓눌린 채 살아가는 시골사람들한테서 소설로 쓸 글감을 얻었으며, 그들 시골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시인 김수영은 바람에 눕고 다시 일어서기를 되풀이하면서도 튼튼히 땅에 뿌리박은 너른 풀을 보며 가장 아름답고 가장 살가운 모습을 찾았습니다. 들풀 한 포기는 바로 지구별 살리고 지키는 푸른 숨결입니다.


  이런저런 말이 참 맞구나, 옳구나 느낍니다. 그러면서 종이 한 장에도 우주가 있고 생명이 있고 삶과 사랑이 있으며 아름다움과 온갖 민주와 평화와 평등과 통일이 있지 않느냐고, 하느님이 살고 부처가 살지 않으냐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어쩌면 이오덕 선생님은 종이 한 장에서 하느님을 보고, 코흘리개 아이들이 끄적인 종이 쪼가리 하나에서 우주를 느끼셨는지 모를 일입니다. 4337.3.27.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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