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1653) '-적' 안 쓴 보기 61 : 착하다 ← 양심적

 

양심으로 살아가며 객관적인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참된 사람입니다 … 자신이 착할 수 없다는 불신감 때문에 사람들은 악을 저지르며 일종의 자기만족에 빠져듭니다
《루이제 린저/윤시원 옮김-낮은 목소리》(덕성문화사,1992) 145, 154쪽

 

 ‘양심적(良心的)’은 “양심을 올바로 지닌”을 뜻한다 하고, ‘양심’은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을 뜻한다 합니다. ‘선(善)’은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음”을 뜻한다 해요. 말뜻을 헤아리면 ‘양심을 올바로 지닌’이란 ‘착한 마음을 올바로 지닌’을 가리키는 셈이요, 보기글에 나오는 ‘양심으로 살아가며’란 ‘착한 마음으로 살아가며’나 ‘착하게 살아가며’를 가리킨다고 하겠어요.


  보기글을 보면 앞쪽에는 “양심으로 살아가며”라 나오고, 뒤쪽에는 “착할 수 없다는”이라 나옵니다. 곰곰이 살피면, 보기글 앞쪽처럼 뒤쪽에서도 “자신이 양심적일 수 없다는”이라 적을 만해요.
  앞과 뒤 모두 ‘착한 마음’이나 ‘착하다’와 같은 말마디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한결 나으리라 생각해요. 두 가지 말을 섞어서 쓰더라도, 두 가지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같은 뜻인 말이요, 하나는 한자말이고 하나는 한국말인 줄 깨달아야지 싶어요.

 

 양심으로 살아가며 (x) ― 착하게 살아가며 (o)
 착할 수 없다는 (o) ― 양심적일 수 없다는 (x)

 

  보기글에는 ‘객관적(客觀的)’이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이 낱말은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는”을 가리킵니다. 곧, 다른 사람 눈길로 바라본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 눈길로 바라본다거나 고른 눈길로 바라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관적’은 “자기의 견해나 관점을 기초로 하는”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내 눈길로 바라본다는 소리예요. 오늘날은 으레 ‘객관적-주관적’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한결 또렷하면서 쉽게 쓸 수는 없을까 궁금합니다. 한국사람 나름대로 풀어낼 한국말을 생각하기란 어려울까 궁금해요. 이 글월에서는 참과 거짓을 가리는 이야기를 다루니, ‘객관적’을 ‘올바르게’나 ‘올바로’나 ‘바르게’나 ‘슬기롭게’로 손질할 만하리라 느껴요.


  “진실(眞實)과 거짓”은 “참과 거짓”으로 다듬고, ‘구별(區別)할’은 ‘가릴’이나 ‘살필’로 다듬습니다. “자신(自身)이 착할 수 없다는 불신감(不信感) 때문에”는 “스스로 착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나 “스스로 착할 수 없다며 스스로를 못 믿기 때문에”로 손보고, “악(惡)을 저지르며”는 “나쁜 짓을 저지르며”나 “못된 짓을 저지르며”로 손보며, “일종(一種)의 자기만족(自己滿足)에 빠져듭니다”는 “이른바 자기만족에 빠져듭니다”나 “이를테면 스스로를 괜찮다고 달랩니다”로 손봅니다. (4345.9.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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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살아가며 올바로 참과 거짓을 가릴 줄 아는 사람이 참된 사람입니다 … 스스로 착할 수 없다고 못미더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쁜 짓을 저지르며 스스로를 괜찮다고 달랩니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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