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좋아진다
이태성 지음 / 낭만북스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좋은 삶에 좋은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108] 이태성, 《사진이 좋아진다》(낭만북스,2009)

 


  스스로 좋다고 느끼는 삶일 때에 스스로 좋다고 느끼는 글을 씁니다. 어버이 스스로 좋다고 느끼는 하루를 누릴 때에 내 아이 또한 아이 스스로 좋다고 느끼는 하루를 누릴 수 있습니다. 좋다고 느끼는 사랑을 나누면서 내 삶을 나 스스로 빛냅니다. 좋다고 느끼는 꿈을 키우면서 내 삶을 나 스스로 보살핍니다.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다 생각하며 아름답게 가다듬는 사랑일 때에는, 내 손에 연필을 쥐면서 아름답구나 싶은 글을 쓰거나 아름답구나 싶은 그림을 그립니다. 어여쁘게 살아가고 싶다 생각하며 어여쁘게 북돋우는 꿈일 때에는, 내 손에 호미를 쥐면서 어여쁘다 싶은 논밭을 일구거나 어여쁘다 싶은 풀과 나무하고 이웃합니다.


  생각이 삶으로 되고, 삶이 고스란히 글이나 그림이나 흙이나 푸나무로 스밉니다. 내가 여느 삶자리에서 누리는 넋이 바로 내 글이요 그림입니다. 내가 여느 삶터에서 가꾸는 얼이 바로 내 밭흙이요 푸나무입니다.


  사진을 찍는 이태성 님이 《사진이 좋아진다》(낭만북스,2009)라는 사진책을 내놓습니다. 이태성 님은 “정신없이 이어진 촬영 끝에 온 깨달음은 아주 분명했다. 감정에서 시작된 열정적인 촬영의 반대편에는 조리개 값과 셔터스피드를 냉정하게 조작해야 하는 것이 사진만의 독특한 매력인 것이다(28쪽).” 하고 말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맞는 말입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든 차분하게 사진을 찍든 조리개와 셔터를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완전자동으로 맞추고는 정신없이 찍을 수 있어요. 완전자동으로 맞추면서도 차분하게 찍을 수 있어요. 사진은 사진기를 움직여 빚는 삶입니다만, 사진기라는 기계를 어떻게 다루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세발이를 받치고는 흔들림 없이 사진을 찍을 텐데, 누군가는 세발이 없이도 흔들림 없이 사진을 찍어요. 누군가는 세발이를 받쳤어도 흔들렸구나 싶은 사진을 찍거나 초점이나 무언가 어긋나게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그저 홀가분하게 사진을 찍어요.

 


  사진을 찍는 까닭은 작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진 가운데에는 작품이라 할 사진이 있을 터이나, 사진찍기는 작품찍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는 빛이나 조리개를 어찌저찌 맞추거나 어느 사진기나 필름을 쓸 때에 한결 돋보인다고 말할 수 없어요. 사람마다 생각과 느낌과 마음이 모두 달라요. 누군가는 놀이사진기(토이카메라)로 이런 느낌을 찾는다면, 누군가는 1회용사진기로 저런 느낌을 찾아요. 어느 한 가지 모습을 담는 사진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계로 똑같이 찍을 까닭이 없어요. 사진은 그저 사진이에요. 내가 살아가는 나날을 담는 사진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삶을 담는 사진이에요. 내가 그리는 꿈을 담는 사진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담는 사진이에요.


  사진이 좋아진다면, 내 삶이 좋아진다는 뜻입니다. 내 삶이 좋아지지 않고서야 내 사진이 좋아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삶을 좋아지도록 이끌지 않으면서 작품만 빚는 이가 꼭 있습니다. 아마, 삶은 안 좋아지고 사진도 안 좋아지지만, 작품 하나만은 돋보이도록 하는 이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삶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눈부신 작품이나 빛나는 예술이나 훌륭한 문화를 빚는다고 하는 사진쟁이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삶은 무너지면서 문학은 세울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삶은 흔들리면서 판화는 우뚝 설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삶은 어두우면서 작품은 환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태성 님은 “강원도에서라면 특별할 것이라 믿었던 영화의 주인공처럼 나에게도 서울을 벗어난다는 것이 특별한 기분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싶었다. 조금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 정작 나의 눈을 사로잡은 건 동그랗고 귀여운 태양이 공산성 너머로 지는 자극적인 풍경이었다(50쪽).” 하고 말합니다. 서울에서도 슬프다면 서울 바깥에서도 슬픕니다. 서울에 있을 때부터 슬픈 빛을 스스로 털며 서울을 벗어난다면, 서울에 있든 서울 바깥에 있든 내 마음은 가장 홀가분하면서 더없이 싱그러울 수 있습니다.

 

 

 


  스스로 불러들이는 슬픔입니다. 스스로 맞아들이는 기쁨입니다. 스스로 꾀하는 어두움입니다. 스스로 바라는 밝음입니다. 스스로 망가뜨리는 삶입니다. 스스로 아끼는 삶입니다.


  곧, 누군가는 사진을 하고, 누군가는 작품을 합니다. 누군가는 삶을 사랑하고, 누군가는 꿈을 이룹니다.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얻어야 사진을 하는 길이 아닙니다. 사진책을 펴내야 뜻을 이루는 길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은 ‘작품’을 비싼값에 팔아야 꿈이 펼쳐진 셈이 아닙니다.


  사진기야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연필이야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이태성 님도 “어쩌면 우리가 가진 눈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이고, 우리가 가진 마음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필름이 아닐까(102쪽).” 하고 말합니다. 참으로 옳습니다. 사람은 두 눈으로 언제나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언제나 사진을 건사합니다. 그런데, 이태성 님은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정작 “방앗간 주인 할아버지와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은 왜 찍으려고 하는 거냐고 할아버지께서 물었다. 그냥 내 앞에 주어진 풍경들이 사랑스럽고 예쁘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들이 조금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102쪽).” 하고 덧붙입니다.


  이태성 님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용기가 안 나서 말을 못하지는 않습니다. 아직 ‘이태성 님 삶이 아니’기에 말하지 못할 뿐입니다. 아직 이태성 님한테는 ‘이태성 님 앞에 주어진 모습이 사랑스럽거나 예쁘’지 않으니, 이렇게 말하지 못할 뿐이에요. 책에 글 몇 줄 적바림한대서 ‘내 삶’이나 ‘내 넋’이나 ‘내 길’이 되지 않아요. 책에 적바림하는 몇 줄 글은 그저 ‘내 바람’입니다. 내가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몇 줄 적는대서 내 삶으로 드러나지 않아요. 스스로 이와 같이 살며 좋아할 때에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어요. 말이 삶이 되고 삶이 말로 드러날 때에, 바야흐로 내가 바라보는 그대로 내 사진이 될 수 있어요.

 

 


  이태성 님은 “여행이란 이방인이 되어 낯선 도시를 걸을 때 이해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며 나와 남을 구별하는 방식을 배워 나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아무도 없는 대지에서 자연과 마주서는 느낌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164쪽).” 하고 말합니다. 고개를 끄덕입니다. 더도 덜도 아닌 삶이기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태성 님은 “알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참말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참말 이러한 결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른대서 바보가 아니요, 모르기에 아무것도 못하지 않아요. 누구나 스스로 아는 만큼 하면 돼요.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누리면 돼요. 오늘 이곳에서 “여행이란 이방인이 되어 낯선 도시를 걸을” 때에 누리는 빛이라 여기면, 이대로 누리면 됩니다. 굳이 딴 모습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스스로 가장 잘 알고 가장 좋아하는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내 모습이 아닌 탈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내 삶이 아닌 껍데기를 뒤집어쓸 까닭이 없습니다. 그저 한 가지만 잘 아로새기면 돼요. 좋은 삶에 좋은 사진이에요. 예쁜 삶에 예쁜 사진이에요. 웃는 삶에 웃는 사진이에요. 슬픈 삶에 슬픈 사진이에요.


  사랑하는 삶에 사랑하는 사진이기에, 사랑스레 바라보는 눈길과 매무새로 사랑스레 느끼거나 나눌 사진 하나 찍습니다. 길손이 고작 하루 머물다 지나가며 찍는 사진이기 때문에 사랑스레 나눌 사진을 못 찍지 않습니다. 나그네가 아주 살짝 다리쉼만 하고 지나가는 결에 찍는 사진이라서 사랑스레 느낄 사진을 못 찍지 않습니다. 경주 토박이라서 경주 사진을 잘 찍지 않아요. 부산 토박이라서 부산 사진을 잘 찍지 않아요. 그러니까, 서울 토박이라서 서울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스튜디오를 꾸린대서 스튜디오 사진을 잘 찍지 않을 뿐 아니라, 패션사진가라는 이름을 붙였기에 패션사진을 잘 찍지 않아요. 이와 같은 얘기가 될 텐데, 다큐사진가라는 이름을 붙일 때에도 다큐사진을 잘 찍는다 할 수 없어요. 오직 한 가지예요. 좋은 삶에 좋은 사진이고, 궂은 삶에 궂은 사진입니다. 참다이 빛내는 삶에 참다이 빛나는 사진이며, 검은 속셈으로 얼룩진 삶에 검은 속셈이 환히 드러나는 얼룩진 사진입니다. (4345.7.29.해.ㅎㄲㅅㄱ)

 


― 사진이 좋아진다 (이태성 글·사진,낭만북스 펴냄,2009.12.30./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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