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도 익혀야지
(828) 나름 1
여전히 손님은 별로 없지만 ‘아리바이트’까지 하는 할머니 혼자 가게를 보기에는 나름 힘겨웠거든
《박기범-낙타굼》(낮은산,2008) 73쪽
‘여전(如前)히’는 ‘예전처럼’이나 ‘예전과 같이’로 다듬고, ‘별(別)로’는 ‘얼마’나 ‘거의’로 다듬습니다. 흔히 쓴다 싶은 한자말인데, 아마 한자말이라고 못 느끼기도 할 테고, 한자말이라 느끼더라도 이 낱말 쓰는 일이 무어 대수로운가 하고 여기기도 하리라 봅니다.
그런데, ‘여전히’라는 한자말을 쓰면서 ‘언제나’라든지 ‘언제나처럼’이라든지 ‘예전처럼’ 같은 한국말 쓰임새가 줄어듭니다. ‘별로’라는 한자말을 쓰면서 ‘그다지’나 ‘거의’나 ‘얼마’나 ‘몇’ 같은 한국말 씀씀이가 사라집니다.
언제부터인가 어른들이 아이들 앞에서 ‘바이바이’라 말하면서 ‘잘 가’나 ‘잘 있어’ 같은 한국말이 자취를 감춥니다. ‘또 봐’라든지 ‘다음에 봐’ 같은 한국말도 슬그머니 사라집니다.
처음에는 ‘글쓰기’였을 테지만, 언제부터인지 ‘작문(作文)’이 되었고, 이제는 ‘라이팅(writing)’이라는 말이 곧잘 쓰입니다. ‘리라이팅’ 같은 영어도 쓰일 뿐 아니라 숱한 영어가 곳곳에 쓰여요. 이러면서 한국말로 가리키던 모습은 하나둘 사라져요.
국어사전에서 ‘나름’이라는 낱말을 찾아봅니다.
나름 [의존명사]
(1) (명사, 어미 ‘-기’, ‘-을’ 뒤에 ‘이다’와 함께 쓰여) 그 됨됨이나
하기에 달림을 나타내는 말
- 책도 책 나름이지 / 네가 열심히 하기 나름이다 / 제 할 나름이다
(2) 각자가 가지고 있는 방식이나 깜냥을 이르는 말
- 나는 내 나름대로 일을 하겠다 / 자기 나름의 세상을 살기 마련이다 /
나름대로 그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을 터 / 태임이는 태임이 나름으로
제가 ‘나름’이라는 말을 올바르게 쓴 지는 2000년 즈음입니다. 이무렵에야 이 낱말 쓰임새를 비로소 제대로 알았습니다. 제가 쓴 글을 읽어 주는 어느 분이 어느 날, ‘나름’은 그 자리에 그와 같이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넌지시 일러 주었습니다. 저도, 이 보기글에 나오듯이 “나름 힘겨웠거든” 꼴로 ‘나름’을 쓰곤 했어요. 그분은 저한테 ‘나름’은 이처럼 외따로 적을 수 없는 말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혼자 가게를 보기에는 나름 힘겨웠거든
→ 혼자 가게를 보기에는 그 나름대로 힘겨웠거든
→ 혼자 가게를 보기에는 할머니 나름대로 힘겨웠거든
→ 혼자 가게를 보기에는 당신 나름대로 힘겨웠거든
…
이 말씀을 듣고 ‘엇, 그런가?’ 하며 온갖 국어사전을 다 뒤적이고, 국어사전에 실린 보기글을 읽었습니다. 한참 읽으며 헤아려 보니 참말 그렇더군요. 여태껏 제대로 모르고 ‘나름’을 쓴 셈이었습니다. 부끄럽더군요. 우리 말 운동을 한답시고 끄적거리는 주제에 ‘나름’ 한 마디 올바르게 못 쓰고 살았다니.
저한테 ‘나름’ 쓰임새를 알려주신 분은 제가 그 한 마디 똑바로 못 쓴다고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젊은이가 그 말투를 아직 못 배웠겠거니 생각하며 일러 주었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았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어느 때에도 ‘나름’ 쓰임새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때 문법 수업이 있었으나, 이때 ‘나름’을 올곧게 쓰도록 가르치지 않았다고 떠올립니다. 어쩌면 교과서에 실리기는 했는지 모르나, 이러한 말씀씀이는 시험문제에 나오지 않아요. 교사도 모르고 학생도 모릅니다. 여느 어버이도 모르고 여느 아이도 모릅니다. 지식인도 모르고 교수도 모를 뿐 아니라 기자도 모릅니다. 대통령도 모르고 국회의원이나 군수도 모릅니다. 공무원도 모르고 소설쟁이도 모르며 시인도 모릅니다. 참말 아무도 모르는 한국말입니다. 아무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한국말입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한국말입니다. 국어학자 또한 국어사전에 싣기는 하지만 올바르거나 알맞거나 슬기롭게 가다듬지 않는 한국말입니다.
이 일은 이 일 나름 뜻이 있다 (x)
이 일은 이 일 나름대로 뜻이 있다 (o)
한 마디로 간추립니다. ‘나름’은 외따로 쓸 수 없는 말입니다. “너 하기 나름이지”처럼 쓰든지 “할머니 나름대로 하셔요”처럼 써야 합니다. 앞에 이름씨를 하나 넣고, 뒤에는 씨끝을 붙입니다.
몰랐다면 배워야 합니다. 나이 예순이든 일흔이든, 그동안 모르고 살았다면 배워야 합니다. 몰랐으니 즐겁게 배웁니다. 원자력발전소가 어떻게 말썽거리인가 이제껏 몰랐으면, 이제부터 배우면 됩니다. 할머니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일마다 시위를 하는 까닭을 그동안 몰랐으니, 나이 예순이 되든 일흔이 되든 이제부터 배우면서 함께 어깨동무를 즐겁게 하면 됩니다.
딱 하루만 알다가 이 땅을 떠나더라도 즐겁게 배우면 됩니다. 고작 한 시간만 알다가 숨을 거둔다 하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무엇이 옳았는지, 무엇이 참되었는지,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이 밝고 깨끗한지를 알 때에 내 아름다운 넋이 참말 아름다이 꽃을 피웁니다.
예수님과 부처님 말씀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아흔아홉 해를 모르고 살았어도, 마지막 한 해를 깨닫고 제대로 헤아리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마음이 평화로우며 사랑을 나누거나 베풀 수 있다고 하지요. 늦는 때란 없어요. 언제부터 마음을 다스리면서 일손을 붙잡느냐가 대수롭습니다. ‘흘러간 낡은 말’을 배우는 우리들이 아닙니다. 두고두고 우리 가슴에 새길 ‘언제나 새로운 말’을 배우며 나누는 한겨레요 이웃이며 동무입니다.
(4341.5.17.흙./4345.4.30.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예전처럼 손님은 얼마 없지만 ‘아리바이트(곁벌이)’까지 하는 할머니 혼자 가게를 보기에는 퍽 힘겨웠거든
..
우리 말도 익혀야지
(933) 나름 2
젊으면 젊음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나이 들어도 젊은이들의 존중을 받으니까 나름대로 행복할 수 있는 거야
《함규진-10대와 통하는 윤리학》(철수와영희,2012) 41쪽
“젊음 자체(自體)만으로”는 “젊음만으로”나 “젊음 하나로”로 다듬습니다. ‘행복(幸福)하고’는 ‘즐겁고’로 손봅니다. “젊은이들의 존중을 받으니까”는 “젊은이들한테서 우러름을 받으니까”나 “젊은이들이 우러르니까”나 “젊은이들이 곱게 섬기니까”로 손질합니다. “행복할 수 있는 거야”는 “즐거울 수 있어”로 가다듬습니다.
한 마디 두 마디 살뜰히 추스릅니다. 한 줄 두 줄 예쁘게 보듬습니다.
나름대로 행복할 수 있는 거야
→ 그 나름대로 즐거울 수 있어
→ 서로 즐거울 수 있어
→ 저마다 즐거울 수 있어
→ 다 함께 즐거울 수 있어
→ 모두 즐거울 수 있어
…
생각을 살뜰히 추스를 때에 내 넋을 어떻게 어떤 낱말에 담아낼 때에 빛나는가를 깨닫습니다. 마음을 예쁘게 보듬을 때에 내 얼을 어떻게 어떤 글줄에 실어낼 때에 환해지는가를 느낍니다.
좋게 헤아릴 때에 좋게 빛나는 말입니다. 곱게 살필 때에 곱게 피어나는 글입니다.
이 보기글처럼 글을 쓰더라도 사람들은 무슨 줄거리인지 읽어냅니다. ‘나름’ 같은 말마디를 잘못 적었지만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가 잘 읽습니다. 아마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틀린 대목이 있어도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가를 옳게 읽겠지요.
그런데, 띄어쓰기 틀리거나 맞춤법에 어긋나면 글쓴이나 읽는이나 알맞게 바로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말투나 어그러진 말법이나 비뚤어진 말결은 글쓴이나 읽는이 모두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살피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합니다.
* 보기글 새로 쓰기
젊으면 젊으니까 즐겁고, 나이 들어도 젊은이들이 좋게 모시니까 서로 즐거울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