ㄷ. 사진으로 걷는 길
 ― 사진을 만든 사람

 


 사진을 만든 사람은 역사에 이름이 남습니다. 이이는 프랑스에서 특허권을 냈고, 이 특허권은 프랑스 정부에서 사들인 다음, 누구나 이 ‘새로운 재주’를 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글은 누가 맨 처음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림은 누가 맨 처음 만들었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글이나 그림도 어떤 특허가 있었을까 모르겠습니다만, 돌로 된 벽이나 나무판이나 종이에 아로새겨 오래도록 남도록 하던 글이나 그림은 누가 맨 처음 만들었을까 궁금합니다.

 

 사진은 사진기라 하는 연장이 있어야 찍습니다. 글은 연필이라 하는 연장이 있어야 씁니다. 그림은 붓이라 하는 연장이 있어야 그립니다. 사진기랑 연필이랑 붓이랑 연장 쓰임새가 다르다 여길 수 있을 테지만, 저마다 연장을 써서 무언가 새로 빚는다는 대목에서는 모두 같습니다. 연장이 없이는 글도 그림도 사진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연필로 빚는 글은 ‘문학’이라는 자리를 마련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붓으로 빚는 그림은 ‘회화’라는 자리를 마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진기로 빚는 사진은 어떤 자리를 마련해 온갖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맨 처음 사진기가 태어났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진을 찍는 연장은 값이 그리 싸지 않습니다. 품이 제법 듭니다. 사진기는 1/100초이든 1/1000초이든 붙잡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붙잡은 모습을 종이에 앉히기까지 훨씬 긴 겨를과 많은 품을 들여야 합니다. 종이에 적바림하면 태어나는 글이나 종이에 그리면 나타나는 그림하고는 적잖이 다릅니다.

 

 한겨레 살아가는 이 나라를 생각해 봅니다. 한반도라 하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나, 한반도를 넘어 만주나 일본이나 러시아나 중앙아시아로 나아가 살아가는 사람한테 사진이란 어떤 삶이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돌이켜 봅니다. 여느 터전에서 여느 살림을 꾸리던 여느 사람들은 사진을 얼마나 즐기거나 누렸을까 곱씹어 봅니다. 여느 터전 여느 살림 여느 사람들은 사진뿐 아니라, 글이나 그림은 얼마나 즐기거나 누렸을까 헤아려 봅니다.

 

 사진은 사진기를 장만해야 즐기거나 누린다 할 텐데, 그림이라 해서 누구나 쉬 즐기거나 누리지 않습니다. 글이라 해서 아무나 쉬 즐기거나 누리지 않아요. 지난날 한겨레 거의 모든 사람은 흙을 일구어 살림을 돌보았는데, 이들 가운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 사람조차 매우 드물거나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는 사람뿐 아니라 역사에 이름을 못 남겼다는 사람까지 샅샅이 훑더라도 ‘한겨레 거의 모두를 이루던 흙일꾼’ 가운데 글 문화나 그림 문화를 즐기거나 누린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1950년대에는 어떻다 할 만할까요. 1970년대와 2000년대는 또 어떻다 할 만할까요. 2010년대에는 시골 여느 흙일꾼이 글 문화를 누린다 할 만할까요. 2020년대나 2050년대에는 도시 공장 일꾼이 그림 문화를 누린다 할 수 있을까요.

 

 글도 그림도 사진도 여느 터전 여느 살림 여느 사람한테는 너무 머나먼 이야기라 할는지 모릅니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여느 터전하고 동떨어지거나 여느 살림하고 등지거나 여느 사람하고는 아득히 먼 이야기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제 사진은 여느 터전 여느 살림 여느 사람까지 그리 어렵지 않게 누리거나 즐깁니다. 아이들하고 복닥이는 나날을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는 사람은 드물어도, 아이들 복닥이는 모습을 사진으로 몇 장 담아 벽에 붙이거나 손전화로 담는 사람은 매우 많습니다. 아이들하고 어우러지는 나날 이야기를 시나 수필로 써서 벽에 붙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사랑스러운 짝꿍을 곱게 그림으로 담아 벽에 붙이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연필만 있으면 글을 쓰고 붓만 있으면 그림을 그린다지만, 막상 글이랑 그림은 여느 자리 여느 삶하고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있는지 모릅니다. 작은 손전화로도 사진을 찍어 언제라도 돌아볼 수 있는 오늘날, 외려 사진이야말로 여느 자리 여느 삶하고 가장 가까이 어깨동무한다 할 만합니다.

 

 사진을 맨 처음 만든 사람은 돈을 벌려고 했습니다. 문화나 예술이나 삶 이런저런 대목을 살피지 않습니다. 새로운 길로 사진을 열면서, 이 사진으로 장사를 했습니다. ‘영업 사진관’이 생겼어요. 글을 쓰며 돈벌이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장사를 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글도 그림도 돈벌이하고 동떨어진 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영업 문학관’이나 ‘영업 미술관’이란 없어요. 오직 ‘사진찍기’만 대놓고 돈을 법니다.

 

 곰곰이 살피면, 글은 책이나 신문으로 묶으며 돈을 법니다. 그림은 작품으로 돈을 법니다. 글과 그림이라 해서 돈벌이를 안 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진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돈을 버는 모습이 다를 뿐입니다. 글을 쓰더라도 돈을 벌지 못하면 먹고살지 못해요. 그림을 그리더라도 돈을 벌지 않으면 그림그리기를 더는 하지 못해요. 돈이 없으면 연필과 종이를 장만하지 못합니다. 돈이 없으면 붓과 물감을 장만하지 못합니다. 돈이 있어야 사진기이든 필름이든 메모리카드이든 장만한다지만, 돈이 있지 않고서야 글도 그림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한겨레 발자취와 삶을 돌아볼 때에, 여느 자리 여느 살림 여느 사람이 글이든 그림이든 즐거이 누리지 못한 까닭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이 있었어도 지배계급은 한문으로 살아가며 권력을 누렸습니다. 여느 자리 여느 살림 여느 사람이 누구나 쉽게 글을 쓰도록 문을 열지 않았어요. 더욱이, 그림그리기는 여느 자리 여느 살림 여느 사람은 아예 건드리지 못하도록 꽁꽁 닫아 걸었습니다.

 

 사진을 처음 만든 사람은 돈을 버는 길을 찾으려 했다지만, 이 돈벌이는 누구한테나 열린 문이었습니다. 많든 적든 돈 얼마를 치르면 누구나 즐기거나 누릴 수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글이랑 그림은 돈을 얼마를 치르더라도 계급과 권력이라는 높직한 울타리를 세우고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꽁꽁 틀어막았습니다.

 

 오늘날 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글은 못 쓰겠더라’ 하고 말하거나 ‘나는 그림은 못 그리는걸’ 하고 말하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꼭 계급과 권력 때문은 아니지만,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는 울타리가 좀 높기는 높습니다. ‘등단’이나 ‘출판’이나 ‘언론’이나 ‘대학교’라는 울타리가 참 많습니다. 사진 갈래라고 이런 울타리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만, 사진학교를 다니지 않거나 사진강의를 듣지 않은 사람 누구라도 1회용 사진기이든 값진 사진기이든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사진을 즐기거나 누리면서 마음껏 나눌 수 있어요.

 

 곧, 사진과 사진기라는 새 길을 처음 만든 사람은 어쨌든 ‘돈’이라는 테두리에서 처음 만들었습니다. 이제, 사진을 누구나 마음껏 즐기는 이 자리에서는 저마다 ‘내 마음’을 어떻게 기울이는가에 따라 새 삶을 이룰 만합니다. 어떠한 장비를 갖추더라도 내가 바라보는 삶을 내 눈길로 곱게 담을 수 있습니다. 애써 작품으로 꾸미거나 잔치마당을 마련해야 하지 않습니다. 따로 사진책을 안 묶어도 됩니다. 즐기는 삶처럼 즐기는 사진이면 넉넉합니다. 누리는 삶만큼 누리는 사진이면 흐뭇합니다.

 

 더 헤아릴 수 있으면, 글이랑 그림도 이와 같아요. 즐기는 삶대로 즐기는 글쓰기이면 돼요. 누리는 삶결을 살려 누리는 그림그리기로 나아가면 돼요.

 

 그리고, 연필이든 붓이든 사진기이든 없어도 홀가분합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내 글을 씁니다. 내 가슴속에 곱게 글을 씁니다. 내 사랑을 실어 내 가슴 깊이 그림을 그립니다. 내 꿈을 담아 내 가슴 한 자리에 사진을 찍어요. 살가운 내 살붙이들 이야기를 마음밭에 아로새깁니다. 고마운 내 이웃과 동무 이야기를 마음밭에 씨앗으로 심습니다. 나는 내 슬기를 빛내어 내 사진을 늘 새로 빚으며 누립니다. (4345.2.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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