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와 책읽기


 나는 사진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나는 사진강좌를 들은 적이 없다. 나는 사진교실에 나간 적이 없다. 나는 오로지 사진기 하나로 사진을 배웠다. 헌책방에서 하나둘 사서 읽은 사진책으로 사진을 익혔다. 나한테는 사진학과 교수나 강사나 전문가나 기자라 하는 스승이 아무도 없다. 나한테는 사진학과 스승이 아무도 없으니, 사진밭하고 이어진 사람줄이 하나도 없다. 나한테는 내 사진길을 스스로 찾도록 일러 준 숱한 사진책만 있는데, 내가 아는 사진쟁이 이름은 따로 없었기 때문에 그저 내 마음으로 파고드는 사진을 찍은 사람이면 좋아하고, 내 마음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사진을 찍은 사람이면 반기지 않았다.

 사진을 볼 때에는 사진쟁이 이름을 보지 않는다. 사진을 볼 뿐이다.

 어쩌면, 나는 문예창작학과라든지 문헌정보학과 같은 데를 다니지 않았을 뿐더러, 대학교가 한 사람한테 얼마나 덧없으며 끔찍한가를 잘 깨달아 대학교를 다섯 학기 다니고 그만둘 수 있었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이든 글을 쓸 때이든 사진을 읽을 때이든 사진을 찍을 때이든 내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느낀다. 고등학교부터 그만둘 수 있었으면 조금 더 일찍 내 책과 내 글과 내 사진을 마주했을 테고.

 사람들은 ‘고졸 출신 대학교수’라든지 ‘초졸 출신 대학교수’가 태어날 때에 몹시 놀라워 하거나 대단하다고 손가락을 추켜세우곤 한다. 그런데 대학교수쯤 되려면 참말로 대학교이든 초·중·고등학교이든 스스로 그만두거나 아예 안 다닌 사람이 맡아야 하지 않을까. 대학교 학문이란 교과서나 교재로 하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들어오겠다는 학생한테 가르치거나 물려주거나 대학생 스스로 찾도록 이끌 학문이란 굳어진 옛 학문이 아니라 새 학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옛 학문은 학생 스스로 지난날 나온 책을 도서관을 다니거나 헌책방을 돌아보면서 하나하나 찾아 읽어 새기면 된다. 교수 자리에 설 사람은 학생이 스스로 찾아 읽으면 되는 책을 굳이 교재로 삼아서 가르칠 까닭이 없다.

 책을 살 때에는 글쓴이 이름을 보지 않는다. 글을 읽을 때에는 글을 볼 뿐, 글쓴이 이름을 살필 까닭이 없다.

 그림을 볼 때에도 그린이 이름을 볼 까닭이 없다. 그저 그림을 보면서 좋다 싶은 그림이면 된다. 노래를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름을 보거나 외우는 까닭이 하나 있다면, 나중에 어떤 노래인가를 알아본다든지 어떤 책이 더 있나를 살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책 한 가지를 훌륭히 잘 썼대서 다른 책 모두를 알뜰히 잘 쓰지는 않는다. 또한, 어느 책 한 가지를 곰곰이 새기며 읽으면, 애써 다른 책 모두를 샅샅이 훑어 읽지 않아도 글쓴이가 바라거나 바라보는 삶이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백만 줄을 읽는대서 글쓴이 마음을 알겠는가. 만 줄쯤 읽으면 글쓴이 넋을 알겠는가. 백 줄을 읽었기에 글쓴이 뜻을 모르는가. 한 줄을 읽는다면 글쓴이 사랑을 못 느낄까.

 글 한 줄에도 사랑이 담긴다. 아니, 글 한 줄이기에 사랑을 담는다.

 사진 한 장에도 믿음을 싣는다. 바로, 사진 한 장이라서 이 한 장에 믿음을 그득그득 싣는다.

 나는 학교를 믿지 않는다. 나는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교과서나 교재를 믿지 않는다. 나는 학교를 다니며 배우려 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나는 학교 졸업장이나 학번 숫자를 들이미는 사람을 사귀지 않는다. 나는 나를 학교로 부르려는 사람을 믿을 수 없다. 나는 스스로 학생이라고 밝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나는 내 길을 갈 뿐이고, 당신은 네 길을 갈 뿐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글줄에 글쓴이 온삶이 스미도록 애써야 할 뿐이다.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사진마다 사진쟁이 온꿈이 깃들도록 힘써야 할 뿐이다. 학교에 다니면 다닐수록 책읽기가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학교를 다니던 발자국을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사진읽기를 엉터리로 하고 만다. 학교하고 등을 지지 않으면 사람읽기를 옳거나 바르거나 참답거나 착하거나 곱게 할 수 없다. (4344.3.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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